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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립의 에디오피아 내시의 전도
사도행전 8:26~40
오늘 본문의 말씀은 사마리아 성읍에 와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웠던 빌립 집사가 주님의 인도를 받아 아프리카 서부 이집트 남부에 있는 에디오피아 왕국의 여왕 간다게의 재무를 담당하던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여 세례를 받게 한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기록을 통하여 다음 몇 가지 영적 교훈들을 배울 수 있습니다.
먼저, 오늘 본문 말씀에서 주님께서 세계 선교의 계획을 주도하시는 것을 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그의 몸된 교회의 대표인 제자들에게 명하기를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태복음 28:19,20)
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르시기를,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8)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온 세상 만민에게 주 예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인하여 활짝 열려진 구원의 복된 소식을 증거하라는 복된 사명에 주님의 교회와 모든 성도들이 헌신하도록 명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제자들은 번듯하게 세워져 있는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여 신약 성도들이 모여서 예배 공동체를 형성하고 흩어져 복음 전하는 일은 별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몰려드는 성도들을 관리하는 것만으로도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다 보니 주님의 명령은 시행되지 못한 채 광대한 세상 모든 지역에 살고 있는 이방 민족들은 이 복음을 전혀 듣지도 못한 채 죽어가는 처지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스데반 집사의 죽음으로 촉발된 핍박자 사울의 거센 박해를 분깃점으로 삼아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을 각처로 흩어 보내어 가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게 하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빌립 집사를 통하여 사마리아 성읍에 복음을 증거하게 하시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을 그곳에 보내어 사마리아 교회가 성령 충만함으로 체계적이고 질서있게 지역 사 회 복음화를 감당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렇게 일하신 우리 주님은 이제 또 다시 이스라엘 남방의 이방 지역에 복음의 물꼬를 트게 하시려고 빌립 집사를 다시 부르셨습니다. 2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주의 사자가 빌립에게 말하여 이르되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주의 사자는 주님이 보내신 천사를 가리킵니다. 이 주의 사자는 사도행전 5장에서 사도들이 예루살렘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나타나 그들을 옥에서 풀어내어 예루사렘 성전에 들어가 아침부터 복음을 전하라고 명하였던 그 천사인 것 같습니다. 주의 사자는 일어나서 남쪽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으로부터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명하였습니다. 이 길은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입니다. 그 길은 광야 길이어서 지나는 행인들도 별로 없고 주변에 나무도 없고 흐르는 시내도 별로 없는 황량한 길입니다.
빌립은 이 지시가 뜻밖의 명령으로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사마리아 성읍에 주의 사역이 많고 사도 베드로와 요한까지 와서 부흥의 불이 붙어서 날마다 모이고 새 신자들이 많이 그를 찾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광야 길로 가라는 주님의 명령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빌립이 순종함으로 그 길로 갔을 때에 거기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국고 대신을 만나 전도함으로 에디오피아 왕실과 그 나라 백성의 복음화의 물꼬를 여는 계기로 삼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들도 하나님의 뜻을 다 알 수 없어도 성령의 인도하심이 분명할진대 인간의 판단을 내려놓고 기꺼이 순종하는 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은 주권적으로 세계 복음화의 원대한 계획을 수행하기 위하여 그의 일들을 주권적으로 시작하시곤 하십니다. 빌립을 통하여 사마리아 성을 돌아오게 하시고, 빌립을 통하여 남방 지역 아프리카의 복음화의 문을 열어놓으시고, 이차 선교 여행 중인 사도 바울에게 환상을 보여주어 바다 건너 마게도냐 사람의 손짓을 보게 하시어 유럽 선교의 문을 열어놓으시곤 하셨습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복음의 일꾼을 보내시곤 하셨습니다. 조선 말에 미국 선교사로서 이 땅에 첫 발을 내디딘 얻더우드 선교사님은 본래 인도 선교를 꿈꾸고 준비했던 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인도 선교를 위하여 준비하는 중에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소식을 처음 듣고 마음에 거룩한 부담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의해보면 모든 선교부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아직 잘 모르는 곳이고 한 사람도 파송 간 분도 없다면서 후원할 수도 없다고 해서 마음을 접으려고 했습니다. 인도나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는 늘 열려 있었기에 조선에 대한 마음을 접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언더우드 선교사님의 마음속에 “조선에는 갈 사람이 아무도 없구나”라는 주님의 탄식이 섞인 음성을 들려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끝끝내 찾고 두드리다 보니, 마침 가려 했던 자원자가 갈 수 없게 된 선교부가 있어서 대신 조선에 갈 수 있는 길이 열려서 미국 장로교 선교부의 첫 번째 조선 선교 파송을 받아서 1885년에 인천 제물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말 이 땅에 신분제의 폐습과 질병과 가난과 전쟁의 상처로 속절없이 무너져가는 중에 언더우드는 이 나라 백성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치료하고 고아들을 돕고 교육 기관을 세우고 복음 전파하여 영혼을 구원하는 큰 일을 계속하였습니다. 그는 언더우드는 조선에 온 지 4년만에 의료선교사였던 호톤이라는 자매와 결혼을 했는데 그 신혼 여행마저 이북 지역에 가서 복음 전파하는 전도 여행으로 삼을 만큼 주의 일에 열정을 다쏟았습니다. 그가 미국에 잠시 돌아갈 기회가 있을 때에도 조선에 선교사님을 보내달라고 각처에 호소하여서 이 나라 복음화의 큰 일을 이루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우리나라를 복음화하여 영혼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주도적인 부르심으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우리 주님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하여 택한 백성을 구원하려는 그의 원대한 구원 계획을 성취하시려고 지금도 주권적으로 복음의 일꾼들을 부르시고 보내십니다. 우리 함께가는교회와 성도들도 우리 주님의 영혼 구원의 위대한 경륜을 위하여 작지만 기꺼이 쓰임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되기를 소원합시다. 마지막 때에 우리 함께가는교회와 우리 성도님들 각 사람이 부름받은 이 천안과 아산에서 주님의 영혼 구원을 위한 일꾼으로, 땅끝까지 전도하라는 세계 복음화를 위한 도구로써 충성스럽게 쓰임받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그러면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무관리자 내시가 왜 예루살렘에 왔다 갔는가를 잠시 살펴보도록 합시다.
27절로부터 29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관리인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는데 수레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여기서 에디오피아는 지금의 에디오피아보다는 좀 더 이집트에 가까운 곳이라고 학자들은 이야기합니다. 그 에디오피아 지역은 성경에서 구스라고 부르는 지역인데 나일강 상류에 있던 장신족들로 구성된 사람들입니다. 지금의 수단과 에디오피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으로서 누비아 지역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누비아 지역은 애굽과 경쟁하던 강력한 장신족들로서 나일강을 배를 타고 내려와 애굽을 공격하곤 하여 때로는 애굽에 이 에디오피아 사람들이 왕족이 되어 지배하기도 했습니다. 성경에 구스라고 불리우기도 했던 이곳은 여왕이 왕이 되는 경우도 흔했고 그 여왕의 호칭이 간다게라고 불리웁니다. 그리하여 간다게 여왕을 섬기는 재무대신 격인 내시가 이렇게 예루살렘에 올라온 이유는 하나님께 경배하고자 함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는 종교적 배경을 살펴보자면, 주님 오시기 전에 천년 전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 왕에게 찾아온 스바 여왕과 관련이 있다 할 것입니다. 스바 지역은 바로 에디오피아와 아라비아 남쪽 해안 지역을 아울러 일컫곤 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솔로몬 왕의 지혜로운 말을 들으려고 멀리서 찾아온 남쪽 스바 여왕이 에디오피아의 간다게의 혈통적 조상으로 이해하곤 합니다. 에디오피아에는 지금도 자신을 솔로몬과 스바 여왕의 후손들이라고 자처하면서 자기를 아프리카계 유대인들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 영적 분위기였기 때문에 에디오피아의 여왕 간다게의 재무관리자인 내시가 이렇게 예배드리려고 그 먼 곳에서 예루살렘 성전을 찾아온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스바 여왕의 방문 이후로 에디오피아 지역은 여호와 신앙의 영향이라 강력했고 특별히 왕궁 내부에는 그러한 신앙적 영향이 컸던 것이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빌립 집사를 보내 전도하려는 사람이 아프리카계 사람이요 더욱이 그가 내시이기도 하다는 점에서 한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배울 있다 할 것입니다. 분명히 신명기 23장 1절에 보면 이러한 구절이 나옵니다.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이 구절을 보면 율법은 내시가 하나님 백성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율법을 점점 어기고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나라가 멸망당하기 시작하는 왕정 후기 시대부터 하나님은 점점 선지자들을 통하여 선포하면서 이방인도 얼마든지 하나님 백성이 되고 심지어 내시까지도 하나님 백성이 되어 성전에 얼마든지 와서 예배 드릴 수 있는 주의 백성이 될 수 있다고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이사야 56장 3절 이하에 이르기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하지 말며 고자도 말하기를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며”(이사야 56:3~5)
라고 약속하셨습니다. 실제로 예레미야 선지자 시대 나라가 망하는 중인데도 왕의 종 내시 에벳멜렉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내시를 구원할 것이며 칼에 죽지 아니하겠고 그 목숨을 노략물 얻듯이 얻게 하실 것이라고 친히 약속해주셨습니다. 유다 왕국은 무너뜨리시면서도 그 때 신실한 한 내시에 대하여 개인적인 구원의 약속의 메시지를 주실 만큼 하나님께서는 이제 고자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면 사랑하여 자기 백성으로 삼아주심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입니다.
구원의 주님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역하실 때에 그 시대의 종교적 교사들이었던 유다의 바리새인들은 세리와 창기들을 향하여 지옥에 떨어질 자라고 정죄하면서 멸시하였으나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그러한 정죄하는 자세를 책망하면서 그 세리와 창기들이 자기 곁에 가까이 오게 부르시어 그들로 하여금 구원의 진리를 듣고 회개하고 하나님의 아들 딸답게 살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지 않습니까? 그래서 주류 유대인들로부터 예수님은 세리와 창녀들의 친구라는 비아냥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오늘 본문 말씀에서 나오는바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빌립 집사를 보내어 전도하게 하신 주님의 뜻을 받들어서, 우리도 이 사회의 비주류의 사람들, 뒤떨어진 사람들, 세상이 경멸하는 사람들까지도 구원의 복음 진리 가운데로 이끌어오고자 넓은 아량과 따뜻한 마음으로 품는 성도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외국 근로자들이나 난민들이나 탈북자들이나 성소수자들까지라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특별히 성소수자들이 지향하는 성적인 타락과 방종을 눈감아주고자 하는 뜻은 아니지만, 그들도 주님을 알고 돌아올 수 있도록 불쌍히 여김을 가지고 기도해주는 자가 됩시다. 이단과 사이비에 속한 이들까지도 불쌍히 생각하고 그들이 다른 복음에서 벗어나고 바른 진리로 돌아오도록 위하여 기도하며 기다립시다.
유다서 22,23 말씀에 이르기를
“또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또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불 구덩이에 빠져 있는 어떤 자를 구원하라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불 구덩이는 죄악의 불구덩이요 악령의 집단이나 이단과 사이비와 같은 잘못된 가르침의 불 구덩이를 가리킵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냥 두면 그 사람의 영혼과 몸과 삶은 다 불에 타서 망하고 맙니다. 삶이 망가지고 결국은 지옥에 떨어지고 맙니다. 그 사람을 그냥 놔두지 말고 건져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한 죄악과 이단 사이비와 같은 불 구덩이에서 건져낼 때에 자칫하면 건져내는 사람도 영적 시험과 유혹을 받아서 좋지 않은 영적 영향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마치 소방관들이 불에 빠진 사람을 건져내려고 몰두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불에 데고 다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구원 행위를 힘쓰되 죄의 불티 냄새도 내가 묻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여 피하고 나도 넘어질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진 깨어 있는 마음을 가지고 그 죄악에 빠진 사람과 이단과 사이비에 빠진 사람을 긍휼히 여기며 건져내라고 권면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당시 죄인들과 세리들을 가까이 하면서 그들을 성결하게 하고 변화시켜서 새 사람이 되도록 성령의 성결케 하시는 은혜와 능력으로 그들을 변화시켰듯이, 우리도 성령과 말씀과 사랑과 거룩함으로 무장하고 그들을 살려내고 돕는 자가 됩시다. 성령께서 그 내시를 더럽다 내치지 않고 기쁘게 빌립 집사를 보내어 그 내시를 하나님 백성으로 삼아 에디오피아 선교의 귀한 일꾼으로 삼았던 것처럼 우리도 성결함을 지키는 중에 따뜻함과 긍휼의 마음을 가지고 세상 모든 뒤처진 자들을 품고 사랑하여 주님께로 인도하는 데 귀하게 쓰임받는 일꾼들이 됩시다.
그리고 오늘 본문 말씀에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구원하고자 하실 때에 사람을 통하여 구원의 진리를 가르쳐주신다는 것입니다.
29절로부터 31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수레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냐 대답하되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하고 빌립을 청하여 수레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빌립 집사가 명하신 대로 가사로 내려가는 광야 길에 도착했을 때에 눈에 에디오피아 내시가 탄 수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의 심령에 ‘이 수레에 가까이 나아가라’는 성령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빌립 집사는 즉시 순종하여 달려가서 보니 그 수레 안에는 이디오피아 관리가 탔는데 성경을 읽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의 성경은 히브리어 성경이 아니라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하여 당시 어느 정도 퍼져 있던 70인역 헬라어 번역 성경이었습니다. 당시는 성경을 흔히 소리내어 읽곤 했는데, 이 내시도 그렇게 소리내어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빌립이 그 수레에 탄 사람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냐고 물었더니, 그 내시가 이 유명한 말로써 대답했습니다.
“지도해주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냐”
그렇습니다. 지도해주는 이가 없으면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 내시는 빌립을 자기 수레에 올라타라고 해서 자기 곁에 두고 질문을 던져 그 성경의 구절의 의미를 깨닫는 기회를 얻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남방 지역인 에디오피아에 선교의 문을 열고자 할 때에 친히 천사를 보내어서 그 사람에게 깨달음을 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거나 영으로 그 내시의 마음에 다 알려주는 직통 계시의 방식으로 복음을 깨닫게 해주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사도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듣게 하고 배우고 훈련받고 성령께서 복음 전도자의 직분을 주시어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신 빌립 집사라는 사람을 통하여 성경을 밝히 깨닫고 그 내시에게 복음을 온전히 알게 해주는 방법을 취하셨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세상에서 구원해내는 것과 복음의 진리를 하나 하나 깨닫게 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불러주시어 그 일을 하도록 주의 성도들을 불러서 일하십니다. 이 영광스러운 일은 천사도 할 수 없습니다. 이에 대하여 베드로전서 1:10~12 말씀에 이렇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받으실 영광을 미리 증언하여 누구를 또는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느니라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알린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사도 베드로의 이 진술을 보면 성령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 세상에 오셔서 고난받으실 것과 고난 후에 영광을 받으실 것을 예고하였는데, 그분이 어떤 분이고 어떤 때에 오시어 그러한 일을 이루실 것에 대하여 다 예언해놓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성령으로부터 부름받아 복음 전하는 자들이 이것을 알리는 영광과 특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지극히 영광스러운 구원의 계시에 대하여 천사들마저 살펴보기를 간절히 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영광은 무엇이냐면 하나님의 영께서 교회를 통하여 이러한 구원의 계시를 밝히 계시해주신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만민의 구원의 주가 누구시며 어떤 때에 그가 죽고 어떻게 죽은 뒤에 영광을 얻는 것인지 교회와 주의 성도들에게 이 일을 알려주신다는 것입니다. 천사는 그렇게 주의 백성 공동체인 교회에 계시된 후에야 그 비밀을 밝히 알기 때문에 이것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3:10 말씀에서도 이르기를
“이는 이제 교회로 말미암아 하늘에 있는 통치자들과 권세들에게 하나님의 각종 지혜를 알게 하려 하심이니”
라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원대한 구원 작정의 비밀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작정하신 놀라운 일인데, 이것을 하나님의 영께서 선지자들을 통하여 교회에 기록된 말씀을 통하여 받게 하시고 성령께서 그 비밀을 교회에 먼저 알게 하시어서 그 후에야 하늘의 천사들로 하여금 그 지혜를 뒤늦게 알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위대한 복음의 진리의 계시를 천사에게 맡긴 것도 아니요 하나님의 아들의 피로 값주고 사신 교회에게 맡겨주셨으며, 그 복음을 전파하는 일도 천사가 아니라 하나님의 몸된 교회의 일원인 주의 성도들에게 맡겨주셨음을 우리는 명심합시다. 이것이 주의 백성들의 위대한 특권이요 영광입니다. 천사가 이 복음 전도의 영광스런 특권을 가진 것이 아니요 우리가 이 특권을 받았으니, 우리는 이 영광을 지극히 소중히 여기고 이 복된 일에 우리 자신을 기쁨으로 내어드립시다. 그리하여 천사가 부러워하는 이 복음 전도의 사명에 헌신함으로써 성령께서 부족한 우리를 통하여 이 생명의 도를 증거함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가 세워가도록 합시다. 하나님의 나라는 복음을 증거함을 통하여 세워져갑니다. 하나님은 이 일에 천사를 쓰지 않으시고 세상의 위대한 정치가나 권력자나 부요한 자나 세상의 어떤 대단한 문명 국가를 들어 쓰는 것도 아니요 어떤 큰 위상을 NGO단체(non-governmental organization) 국제 비정부 단체를 쓰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천사들도 부러워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 복음 전도의 지극히 영광스러운 사역에 지극히 보잘것없는 작은 지역교회들을 사용하십니다. 지극히 평범한 주님의 성도들을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이여 우리가 받은 이 놀라운 존귀한 직분을 기억하고 이 복된 사명에 최선을 다하여 헌신합시다. 그리하여 천사도 못하고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는 영혼 구원의 복음의 비밀을 맡은 자들로서 이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헌신합시다.
그리고 난 후에 복음 증거의 방식에 대하여 오늘 본문 말씀은 좋은 본보기를 보여줍니다.
32절로부터 35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그가 도살자에게로 가는 양과 같이 끌려갔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이 조용함과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그가 굴욕을 당했을 때 공정한 재판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그의 세대를 말하리요 그의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그 내시가 빌립에게 말하되 청컨대 내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냐 자기를 가리킴이냐 타인을 가리킴이냐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마침 70인역 헬라어 구약 성경을 펴서 읽고 있던 이 에디오피아 내시는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고난받은 장면에 대한 예언 부분을 읽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예언은 한 고난받는 종이 대속의 고난을 통하여 죄인들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사람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성취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내시는 그 고난당하는 종이 선지자 이사야 자신을 가리키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지가 매우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 질문을 받고 빌립 집사는 우리 구주 예수님이 바로 그 예언되었던 고난받는 종이라는 점과 그가 십자가에 대속의 죽음을 얼마 전에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부활하시고 승천하셨고 교회에 성령을 보내주심으로써 예루살렘의 교회에 수만 명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이 되었노라고 증거했습니다. 그의 가르침은 구약 성경 전체를 하나씩 아우르면서 예수님께서 예언된 그 그리스도임을 확실히 증거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을 풀어서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방식이 빌립 집사의 전도 방식이었는데, 이는 부활하신 우리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제자에게 행했던 가르침의 방식이며 부활 후에 여러 차례 나타나셔서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실 때에도 행하신 방식입니다. 스데반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산헤드린 공회에서 증거했고 후에 사도 바울 역시 그의 이방 선교 여행 중에 전도 설교를 할 때에도 같은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우리도 이것을 기억하고 우리 예수님이 하나님께서 일찍이 약속하신 그리스도로서 예언된 그대로 대속의 고난을 받고 예언된 그대로 죽은 지 사흘만에 부활하셨고 승천하사 때가 되면 구약 성경 다니엘서에 약속된 대로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임금으로 만민을 다스리실 자로 오실 것을 가르쳐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이렇게 분명한 성경의 근거를 가지고 복음을 차분히 증거할 때 성령께서도 우리를 도와주시고 그 듣는 자의 마음을 열게 하시고 뜨겁게 하시어 구원얻는 믿음을 듣는 자에게 선물로 주실 줄 믿습니다.
이제 빌립 집사의 전도의 결과가 맺어졌습니다. 36절로부터 40절까지 함께 읽겠습니다.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그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냐 이에 명하여 수레를 멈추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베풀고 둘이 물에서 올라올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간지라 내시는 기쁘게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느니라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빌립의 전도는 효과적인 구원의 열매를 맺었습니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는 마음에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자기의 신앙의 진실함을 확증하고자 물세례받기를 청하였습니다. 그 때에 난하주에 보면 빌립이 그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난하주 37절에 보면,
“빌립이 이르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고 하였다고 여러 사본에는 첨가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빌립은 이렇게 물었을 것이요 그 내시는 당시의 세례받을 때에 진심으로 고백하는 신앙 내용을 빌립 앞에서 고했을 것입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할렐루야. 마침 그 광야 길 곁에 흐르는 시냇물이 있음을 보고 두 사람은 물에 내려가 빌립이 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세례를 받고 올라왔는데 그 직후에 주의 영 성령께서 빌립을 이끌어갔습니다.
여기서 ‘이끌어간지라’는 말의 헬라어 원어는 ‘하르파조’인데, 그 뜻은 ‘움켜쥐다, 잡아 채다, 빼앗다, 억지로 잡다’ 등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것의 수동태 동사인데, 성령께서 낚아채듯이 빌립을 붙잡아 올려서 어디론가 순식간에 데려가 버린 것을 뜻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사도행전 20:10 말씀에, 사도 바울이 산헤드린 공회에 심문당할 때에 유대인들에게 잡혀 찢겨질 위기를 만나자 예루살렘의 로마 군병들이 천부장의 명령을 받아 순식간에 군중들의 손에서 바울을 낚아 채듯이 빼앗아 로마인의 성채로 데려갔을 때에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또 고린도후서 12:4 말씀에 보면, 하나님께서 바울의 영혼을 낙원으로 이끌어간 일에 대하여 말할 때, 그 때 그 영혼이 ‘이끌어갔다’는 단어로 이 단어가 쓰였습니다. 멀쩡히 기도하는 중에 갑자기 그 영혼이 몸을 떠나 순식간에 사차원의 세계, 영계로 끌어올려가서 천국에 들어가 하나님 앞에서 말씀을 듣고 영안으로 천국을 보았던 경험을 했을 때 ‘끌려올라갔다’는 말로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내시에게 세례를 주고 물에서 올라온 직후 갑자기 성령이 빌립의 몸까지 사로잡아 낚아채듯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이한 일이지만 우리는 성경 그대로를 믿읍시다.
그 에디오피아 내시도 하나님의 역사가 그럴 수 있다고 믿었는지, 놀라지도 않고 기쁨으로 자기의 길을 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지금 구원받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함을 입었기에 어서 고국에 돌아가서 이 복된 소식을 전해야 하겠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합니다. 그리하여 그가 돌아간 후 에디오피아는 그 후에 지금까지 기독교 국가로 남아 있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스바 여왕과 솔로몬 사이에 태어난 메넬레크 1세 이후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다수 가졌고 그 후 복음이 증거된 후에도 지금까지 에디오피아 정교회라는 기독교적 교파가 주류를 이루는 기독교 국가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 기독교 신앙의 첫 번째 세례 신자가 바로 이 빌립 집사가 전도한 그 간다게의 재무관리인인 그 내시였음은 분명합니다. 그가 가서 궁중의 왕실에게 이 복음을 전파하였고 그 후에 이 복음의 물결이 수많은 정치적 수난을 겪는 중에도 지금까지 이어져오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천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그 당시 빌립이 성령에 순종하여 광야 길을 가는 그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복음을 전하였던 결과가 얼마나 오랫동안 크나큰 파장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따라 순종한 한 작은 사람의 복음 전도가 이렇게 많은 영혼을 수많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건져내면서 이방인들의 구원받는 자의 수를 채워온 것을 보게 됩니다.
지금도 세상 역사는 우리가 예상할 수 없이 이리 저리 흘러갈 것입니다. 나라 간의 전쟁도 일어나고 그 영토가 갈리고 합치고 사라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변천하는 세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지만 더 영광스럽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영토도 계속 세워져가고 무너져가기도 합니다. 빌립과 초대 교회 성도들이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헌신함으로 그 시대 로마 제국의 영토를 넘어서서 복음이 유럽과 서부 아시아와 아프리카 북부까지 퍼져나갔던 것처럼, 그 후에 수많은 선교사님들과 주의 교회들을 통하여 복음이 한 바퀴를 돌면서 지금은 저 중국을 비롯한 수많은 곳에 퍼져서 믿는 자들의 수를 통하여 천국이 침노를 당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임금이신 우리 주님께서도 이 시대에도 자기의 백성들을 모으고 계십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들은 이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는 신분도 가지고 있지만 더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는 신분을 가진 자로서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일을 위하여 부름받았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빌립이 그 시대에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광야로 내려갔다가 거기서 한 사람을 전도했던 결과가 그 후 에디오피아와 아프르카 영혼들의 운명을 바꾼 일대 사건이 되었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남방 지역에 퍼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우리도 작은 자들이지만 이 시대에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우리 몸과 시간을 드려 쓰임받기를 소원합시다. 주님께서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우리를 쓰시고자 할 때에 만사를 내려놓고 기꺼이 우리를 드립시다. 그리할 때 주님께서 우리의 혀를 통하여 복음 진리를 능력있게 증거할 것이요 우리를 통하여 그 영혼이 진실한 주님의 백성으로 세워진다면, 그 사람이 놀라운 전도자가 되어 어떠한 놀라운 영적인 열매를 맺을지 아무도 모릅니다.
다시 한번 하나님의 거대한 영혼 구원의 계획 속에 우리가 부름받아 구원받았으며, 그 계획의 완전한 성취를 위하여 우리가 이 마지막 때에 부름받아 일꾼으로 여기 있음을 기억합시다. 그리하여 언제든지 천사도 부러워하는 복음의 전달자, 곧 주님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위대한 생명의 복음을 담대하고 끈질기게 전하여 그들을 살려내고 하나님 나라를 세워나가는 귀한 일꾼들이 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