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르네 마그리트를 보고 있다. 정확히는 그의 그림을 보고 있다. 아니지, 애초 정확이라고 하였으니 정확이라는 말에 갇혀 좀 더 정확한 상황을 얘기해보자. 르네 마그리트가 그린 그림을 사진으로 찍어 책으로 낸 마그리트의 그림집을 보고 있다. 단순하던 머릿속이 그의 그림을 접하면서 더욱 단순해지는 것 같았다가 곧 복잡해졌는데 그것은 바로 이 그림에 와서야 절정에 달했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닙니다
파이프 하나를 그려놓고 알 수 없는 흘림을 그려 넣은 그림이다. 새삼 이 흘림이 글자임을 인식한 순간 프랑스어를 배웠던 한때의 추억이 기억났다.
알퐁스 도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고 우아하다고 하는 프랑스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했고…하긴 프랑스어 아니면 일본어였다. 그러나, 기억나는 것은 봉쥬르(Bonjour), 마드모아젤(mademoiselle), 며-얼-치-볶-음(Merci beaucoup : 불어 선생님과 시험지가 아닌 일상생활에선 이렇게 적용하고 다녔더랬다), 자동으로 나오는 께스크 세(Qu'est-ce que c'est)와 싸 바?( Ça va)라고 하며 끝을 올리는 억양뿐이다. 또한 콧구멍이 간질거리는 듯한 그 비음.
“아- 베- 쎄- 데- 으- 에프- 제…….”
프랑스어 수업 첫 시간엔 철자를 읽으며 ‘영어랑 헷갈리게 만들었네’ 생각했다. 그럼에도 프랑스어 기본 알파벳을 익힐 때까지는 오히려 영어를 프랑스어 식으로 읽었다. 내게 프랑스어가 길게 자리한 때는 영어 알파벳 발음을 잊을 정도였던 고등학교 1학년 잠시의 봄, 뿐이다. 이후로 프랑스어는 떠나버린 불어 선생님처럼 존재 자체가 파악되지 않은 언어였다. 프랑스어는 영어라는 필수품목에 가려진 경쟁력 없는 선택품목에 지나지 않았다. 영어가 우선이어야 하는 삶, 그조차도 의사소통과는 별개로 문제풀이식 학습에 시간을 뺏겨야 했기에 프랑스어는 영원히 소통되지 못한 버려진 세계가 되었다.
그렇게 프랑스어는 두 가지 기억으로 온다. 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에서부터 각인된 탓인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언어가 ‘푸왕, 스왕’ 콧구멍을 벌렁벌렁하며 개그 프로에서 웃음의 소재로 사용되는 것을 볼 때 느껴지는 아련함. 그리고 더불어 ‘전복’의 쾌감!
다시 프랑스를 생각하게 된 건 가방 때문이었다. 왜인지 할머니들이 좋아할 법하게 느껴지는 그 진한 밤색의 줄무늬 가방 말이다.
“할머니 가방 가지고 나온 거 아니야?”
내 말에 기겁하며 뭐 이런 무식한 년도 다 있냐는 듯 쳐다보던 그 친구는 아직도 그 가방을 들고 다닐까? 아니 정확히는 기겁하며 가방을 쓸어내리며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라고 했었나. 비싼 것이 가방 이름인 양. 그렇든 어떻든 내 눈엔 그 색깔과 무늬가 노티나 보였는데 그건 처음 봤을 때나 점점 같은 가방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이 늘어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번 인식을 하게 돼서인지 거리마다 그 가방을 멘 사람들을 자주 보게 되었는데… 여기저기서 사은품으로 증정하는 여러 종류의 가방이며 파우치가 그 문양과 색상이었다. 깨지는 물건인 듯했던 것이 목욕탕 전용 가방으로 쓰임을 하고 있을 때 느껴지는 별 생각없음과 전복의 쾌감!
물론 거리에서 넘쳐나는 똑같은 옷과 가방이라도 어떤 이들은 무늬의 섬세함을 이야기하며 진품과 가품을 이야기한다. 거리에는 개성은 보이지 않는다. 없다. 대신 남들과 다름에서 오는 열등감은 강하게 흐른다. 루이 뷔통이 넘쳐날 때도 그러했지만 조금은 다르지만 등골 브레이커라는 단어가 생겼다. 한때는 노스페이스였고 요즘은 또다른 무엇이었다. 학생들 사이에서 매번 반복되는 등골 브레이커 기사를 보다 보면 의문이 든다. 그럴 수밖에 없는 분위기는 누가 이끌어 간 것일까. 남들과 같지 못함에서 오는 불안함을 계속 생산해 내는 것은 무엇일까. 가방의 순수한 목적을 ‘명품’이라는 수식어에 짓눌러두고 끊임없이 등골 브레이커를 생산해내고 몰개성으로 몰고 가는 것은.
다시, 생각을 그림으로 돌리며 멀쩡한 파이프를 그려놓고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는 마그리트의 생각을 읽어 내느라 머리에 쥐가 내린다. 르네 마그리트에게서는 몰개성을 찾을 수 없다.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그렇지. 그건! 비단 머리에 쥐 내리는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던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항의가 많이 들어와 벽에서도 천장 쪽 가까운 아주 높은 곳에 작품을 매달아 놨다고 한다. 사람들이 우산으로 그의 그림을 찢으려 했기 때문이라나.
모빌처럼 대롱대롱 거리고 있는 그의 그림들을 상상해 본다. 자신의 취향에 맞지 않으면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될 걸 꼭 유난스럽게 구는 족속들이 있다. 제 딴에야 자신과 다름은 옳지 않음이라 생각한다거나, 자신이 수용 못하는 것은 다른 사람도 당연히 수용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존재하는 것 자체를 참지 못하는 그런 부류들 말이다. 그러한 인식과 행동 속에 상식과 공정과 예의 없음이 동반됨은 당연하다. 덕지덕지 붙은 욕심과 똘똘 뭉친 ‘나’ 중심주의에 무지한 상상력과 빈곤한 언어를 가진 이들이 세상을 빈곤하게 만들고 있는데, 왜 이런 현재는 계속 반복되고 있는 걸까.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을 보면서 천장 한쪽 귀퉁이에 매달려 있는 나를 본다. 잘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데도 한 떼의 무리들이 우산으로 콕콕 쑤셔대는 모습이 선하다. 조금 더 긴 우산이 내 발끝을 건드리면 나는 매달린 채로 발버둥을 친다. 혹여 떨어질까 가는 줄을 죽어라고 붙들고 있는 그러한 그림을 떠올린다. 가는 줄이 헤지고 끊어질 듯하면 우산으로 발등을 찧어대는 사람들을 향한 대거리를 나는 할 수 있을까. 줄을 죽어라고 붙들고 매달린 채라도 쭈욱 발을 내줬다가 내뺐다가 여유와 야유를 동시에 보내면서 “헤이, 건드려봐. 건드려봐”
앞뒤 자르고 무턱대고 제 하고픈 이야기만 나열하면 또한 그렇게 이야기 듣는 것이 습관처럼 된 지난 세월이었다. 한국말처럼 사설이 기인 언어 습성을 바꾸기도 쉽지 않을텐데 나를 비롯한 내 주위 사람들 모두가 댕강댕강 앞뒤 뚝 자른 채 대화를 하고 그로 인해 몇 번이나 대화의 내용을 다시 반복해야 하는 일들이 자주 일어났다. 인식하는 세계관이 다름을 반복적으로 확인하며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내가 계속 우산에 찔리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루이 뷔통과 샤넬을 이야기하면 웃으며 대화의 장을 펼치지만 디올을 이야기하면 화내며 대화의 장을 닫는다. 다같은 프랑스 패션인데, 그렇다. 디올을 입에 올리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는 생각한다. 이것은 디올이 아니다. 이것은 디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그랬단다.
“우리는 사고의 효과를 통해 기묘한 것을 친근한 것으로 만들곤 한다. 그러나 나는 오히려 친근한 것을 기묘한 것으로 복귀시키고자 노력한다.”
머리를 쥐나게 하지만 그럼에도 기대감에 휩싸이게 되는 사고를 통한 전복! 패배주의자처럼 익숙하게 길들여진 이 친근한 세상을 기묘한 것으로 복귀시키려면 어떠한 사고를 해야 할지 모르는 나는 덧없이 흘러가는 단어들을 떠올리며 오늘도 전복을 꿈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