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하교 (登 下校)의 추억
부잣집 막내 딸이었던 우리 어머니,
겨우 17세에 동갑내기인 가난한 우리 아버지에게 시집 오셔
고향에서 사납기로 알아주시는 우리 할머니 밑에서
큰 댁 식구들과 함께 사시면서
시집 오시기 전 해보지도 안 한 온갖 농사일 다 하시며
큰 댁 눈치 보며 살았으니 그 어려움 어떠하셨겠나 싶다.
그런 어머니가 19세에 시작하여 2 년 터울로 6 남매 3 남 3 녀를 낳으셨으나.
그때 거의 그랬지만 6 남매가 다 살지 못하고
누나하고 나하고 만 살고 네 형제 자매는 두 살도 못되어 세상을 떠났다.
그러다 보니 어머니는 하루하루 조바심으로 우리 남매를 키우셨다.
그 당시 또래 들은 서당에 다녔지만 걱정이 큰 부모님은
나를 눈에서 벗어나지 않게 키우셨다.
그래서 내가 9살이 되어서 초등학교를 들어가게 되었다.
그것도 해방 이듬해, 학교 들어갈 나이가 지났는데도
학교에 가지 않은 전국 어린이들을 독려하여 학교에 넣을 때다.
내가 9살인데도 어머니는 애기로만 보였기에
학교에 보낼 생각조차 못 하고 계실 때
동네 누나가 어머니를 설득하고 또 설득해서 겨우 입학을 하게 되었다.
4 남매를 저 세상에 보냈으니 행여 나마저 어떻게 되는가 싶어
마음을 놓지 못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워낙 가난하여 초등학교도 겨우 마치는 정도였다.
그래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중학교를 가지 못했다.
1952년 여름 나는 중학교를 가지 못하고 집에 있게 되었다.
그렇게 집에서 아픈 마음 달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보충대 주보(PX)에 근무하시던 사촌 형님이
굶주리는 동생에게 입에 풀칠이라도 해야 한다며 부모님을 설득하셔
15세의 어린 몸이 당시 군산 시에 있는 보충 대에서
김 달수 중대장 님의 전령으로 있으면서 먹는 것을 해결하는 정도였으니
그 삶이 어떠했겠는가.
그런데 그것도 복이라고 얼마 후 부대가 이동하는 바람에 거기서 나와
다시 집으로 왔다.
1952년 6.25 전쟁의 소용돌이 때이다.
그러나 나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년에는 중학교에 가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어머니와 눈만 뜨면 산에 올라 솔방울을 따서 파는 일을 했다.
솔방울 한 가마니 따서 집에서 20 리가 넘는 대야(지경) 장에 가서 팔곤 했다.
그럭저럭 중학교 입시를 위한 시험을 치뤘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
하지만 어느 중학교로 가느냐를 두고 부모님과 의견이 맞지 않았다.
부모님은 나를 하숙을 시킬 형편이 되지 않으셨기 때문에
집에서 10 리 정도 떨어진 임피중학교에 가라 하셨고,
나는 좋은 학교로 가기 위해 군산중학교를 가겠다 하였다.
아버지 어머니로서는 얼마나 힘든 결정인지 모른다.
왜냐 하면 군산중학교는 집에서 40 리나 되니 만일 내 뜻대로 하면
15세의 어린 아들이 매일 80 리를 걸어야 하니
그게 쉬운 결정이었겠는가.
더구나 학교를 가자면 집에서 시작하는 창감재라는 산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자갈과 여기저기 빗물에 파 헤쳐진 고개를 넘어서 1 시간을 가야
겨우 큰길이 나오는 험한 산길이었다.
그래서 나는 부모님과 약속을 했다.
군산중학교에 보내주시면 걸어 다니겠다고.
그 후 나는 그 약속을 지켜 3 년 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지각, 조퇴, 결석 한 번 안하고 개근상을 받았다.
그러나 그게 어디 쉬운 일이겠나?
지금 생각하면 내 스스로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15세의 어린 몸이 하루에 80 리를 다녔다니...
그러니 그 사이 부모님과 내가 겪은 고통이 오죽했겠는가?
어머님은 새벽 4시 반이면 일어나셔야 했다.
나는 5시 반이면 학교로 출발해야 했고
학교 수업이 끝나면 빨라야 오후 5 시 늦는 날은 6 시 집으로 출발하니
어두워서 산을 넘고 또 넘어오고 해야 했다.
흔한 말로 별을 보고 산을 넘고 달을 보고 그 산을 넘는 삶이었다.
집에서 논길을 지나 창감 재 고개를 넘어야 행길(신작로)에 닿는데
그 걸리는 시간이 1 시간 정도 걸렸다.
그러니 학교 가고 오는 시간이 3 시간 정도 걸리니
언제나 어둠을 뚫고 산을 넘어야 했다.
등교할 때는 점점 밝아지니 별문제가 아니었지 만.
하교 할 때는 밤 8 시 전후 해서 넘어야 하니 어린 내가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때부터 아버지 어머니는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시고
내가 오는 것을 조바심 하며 기다리셨으니 나보다 아버지 어머니가 더 힘드셨으리라.
그런데 하교 할 때가 문제였다.
나 혼자 그 무서운 산길을 걸어야 했고 하교 하는 시간과 길이 일정할 수가 없었다.
어느 날은 워낙 무서움을 느끼면 산을 넘지 않고 도로로 돌아오는 때가 있었다.
그렇게 오면 30 분 정도 시간은 더 걸리지만 무서움은 덜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해서 아버지 어머님은 해가 넘어가기 시작하면 내 마중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다.
언제 오는지 어디로 오는지 모르시니 무작정 기다리셔야 하셨기에
"여보, 태영이 얘가 오늘은 어디로 올려나?
"글쎄요. 어디로 올지 참 걱정이네요."
아버지 어머니가 나누는 대화였다.
"어쨌거나 준비하고 기다려야지" 하시며
아버지는 호롱 불에 불을 붙여 들고 내가 오는 길을 점치며 기다리셨다.
30여 리 자갈 길을 지나 산을 넘는다.
이미 가슴은 콩닥콩닥 뛰기 시작하였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혼자 고개를 넘는다.
다리는 후들 거리며 금시라도 주저앉을 것 같다.
그저 마음 단단히 먹고 앞만 보고 걷는다.
갑자기 산에 잠자던 날 짐승이 푸드득 난다.
산에 쉬던 들짐승이 잽싸게 뛰어 달아난다.
깜짝 놀라 등 허리에서는 땀이 흥건하게 맺혀 흘러내렸다.
그 무서움 매일 겪는 일이다.
그렇게 해서 고개를 넘으면 동네가 보인다.
나는 내가 오는 신호를 보내기 위해 휘파람을 분다.
시골 길이라 밤은 쥐죽은 듯이 고요하니 내 휘파람 소리에
어머니 아버지가 반응하신다.
"여보, 태영이 저리 오는구만"
"그러게요, 오늘은 덜 무서웠을까요?
하시며 호롱 불을 흔들며 우리 여기 나와 있다는 신호를 보내신다.
산을 내려가는 사이 아버지 어머님은 호롱 불을 들고
논길을 지나 나를 마중 하신다.
산을 넘지 않고 먼 길을 돌아오는 날은 집에서 500 미터쯤 떨어진
살구쟁이라는 데서 신호를 보낸다.
그렇게 산을 넘고 자갈 길인 길을 걸어 3 년을 다니면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집에 돌아와 지친 몸으로 엎드려 공부하다가 졸음에 져 자다가 깜짝 놀라기 일쑤였다.
그렇게 힘든 삶을 바라보시는 부모님 심정은 오죽 하셨으랴.
내가 장성 하여 직장을 다니면서도
어쩌다 고향에 가는 일이 있어도
그때 걸어 다닌 그때 마음을 잊지 못해
나는 택시 타고 가는 것을 삼가하였다.
지금은 그 길이 사람이 다니지 않아 없어진 도로가 되었다.
언제인가 는 다시 그 길을 걸어 산을 넘고 싶다.
그렇게 기다림으로 사시며
자식에게 미안해 하시던 나의 부모님들.
세상을 떠나셔 천국에서 내려다 보고 계실 나의 아버지 어머니.
보고 싶다.
그때의 추억이 아련하다.
별을 보고 달을 보고 넘어 다니던 그 길
그 산 가까이 오면서 오늘은 어디로 가야 하나 고뇌 하던 마음
갑자기 놀라 달아나던 날 짐승 들짐승에 놀라
산을 넘으면 땀으로 범벅이 된 내 몸
멀리서 아버지 어머님이 비춰주시던 호롱 불
하나 하나 생각이 떠오르며
먼 추억 속으로 마음이 흘러간다.
<끝>
첫댓글 제가 보아도 꿈 많은 중학교 등하교 길인 것 같습니다.
죽 읽어 보면 용천산 부근 숯골(상작?) 마을에서 창안마을거쳐 참암재가
가까운 길인지? 비 포장도로 덜걱다리 거쳐 창오국민학교 앞쪽으로 가는
먼길인지 구분이 안됩니다.
여하튼 대단한 큰꿈을 가지시고 무사히 끔을 이루 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택도 없는 일이라고 생각들 하겠지요
군중 대선배님의 열정에 감탄! 인사 드립니다.
뚝배기 님! 지난 다른 글에" 나의 이야기"는 72년을 함께 해온 어느 동창도 모르는 일이라 했습니다.
삶이 자랑할 만한 삶이 아니고 어쩌면 부끄러운 삶인데 이야기 남기기가 쉽겠습니까?
저의 집은 용천산 밑에 있는 "진장" 이라는 곳입니다.
하교 시에 창감재로 넘지 않고 올 때는 서포리 옆에 있는 대성리 쪽으로 왔습니다.
창오리 쪽으로 오려면 산을 넘어야 했으니까요.
올라오신 글을 보면 어머님에 대한 애뜻한 글
한평생 고생하신 글 등 잊지 않고 마음속에 간직하고
글로 표현하신 저도 좀 본받아야 하지만 미천한 저는
그러하지 못하고 늦게나마 이 글 들을 보면 한없이
느끼는 마음 뿐입니다. 감사합니다.
어머님! 이름만 불러도 가슴 저미는 이름 이지요
저의 어머님 삶은 앞으로 "나의 이야기" 보시면 어떤 분이신가 느끼실 겁니다.
평생 그 어려움 다 겪으시며 사시고도 '입, 귀,. 눈 다 감으시고 사신 분이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