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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불교사 산책 (3)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리수 나무
인도불교 복원운동 이해
수백만 년 인류역사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필요하면 존재하고 유효성을 상실하면 사라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이다. Buddha가 우리에게 강조한 것은 바로 이러한 자연의 질서이다.
인도대륙에서 민중의 필요에 의해서 불교와 수행이 창안되고 대중성을 획득하고 세계상품으로 발전하지만 오늘날 불교와 수행을 만든 인도대륙에는 불교와 수행이 대중성을 상실하고 역사무대에서 퇴장하여 찾아볼 수 없다.
인도불교 복원불사를 진행하면서 늘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도불교 흥망성쇠를 살펴보는 것이다. 어떤 이유로 인도대륙에서 불교와 수행이 민중으로부터 열렬히 환영받고 어떤 조건에서 외면받고 소멸했는지 알아야 그것을 토대로 인도불교 복원의 새로운 동력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BCE 531년 음력 4월 보름 새벽 보리수 아래서 Buddha에 의해서 창안된 수행과 불교는 200여년이 지나 BCE 220년 무렵 중국과 지중해로 전해지고 다시 200여년이 지나 CE 48년 무렵 한국에 전해진다. 1203년 인도대륙에서 이슬람에 의해 인도불교가 역사무대에서 사라지고, 다시 100여년이 지나면 중국불교가 시들해지고, 다시 100년이 지나 조선(1392~1897)이 등장하며 500여 년 동안 불교는 가혹한 탄압을 받으며 힘든 시기를 거친다.
인도에서 불교와 수행이 창안되고 그 역동적 에너지가 중국으로 전해지고. 중국에서 새로운 에너지를 흡수한 불교와 수행은 다시 한국과 일본으로 전해진다. 중국불교는 불교와 수행에 관한한 인도불교의 주변부에 불과하다. 중국불교에 에너지가 고갈되고 새로운 에너지가 필요할 때면 수많은 구법승이 인도로 가서 새로운 자양분을 받아 중국불교에 공급한다. 한국불교도 마찬가지이다. 한국불교도 불교와 수행에 관한한 중국불교의 주변부이다. 한국불교에 에너지가 고갈하면 많은 스님이 중국으로 구법여행을 가서 신선한 에너지를 공급받아 한국불교에 공급한다. 1203년 인도불교가 멸망하고 더 이상 새로운 에너지를 생산하지 못하자, 중국불교도 시들해지고, 한국불교 역시 참여유교(性理學)에 자리를 내어주고 역사무대에서 퇴장한다.
이런 이유로 인도에서 Buddha가 창안한 오리지널 불교와 수행을 복원하는 일은 수행자라면 한번 쯤 고민하는 일이다. 나는 한국불교를 새롭게 하는 일도 세계불교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서도, 인도의 불교와 수행을 복원하는 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 순서라고 본다.
인도는 종교의 나라이다. 모든 민중의 숫자보다 종교인구가 더 많은 나라이다. 오늘날 인도에는 본토에 힌두교도 75%와 이슬람교도 15% 정도이고, 동쪽의 방글라데시와 서쪽의 파키스탄은 이슬람 국가이고, 남쪽의 스리랑카는 불교국가이고, 동북쪽의 네팔은 불교와 힌두교가 섞여있다.
인도의 종교는 나름대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부침을 계속 하지만 대부분은 온전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힌두교 계통은 창안된 이래 3천여 년 동안 면면히 주류종교로 자리잡고 있고, 11세기경에 인도에 자리잡은 이슬람도 8백여 년 동안 인도대륙에서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고, 자생종교인 자이나교도 소수이지만 나름대로 탄탄히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불교는 인도대륙에서 사라진지 천년이 지났지만 왜 아직까지 되살아나지 못할까?
인도에서 불교와 수행의 소멸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이 있다. 외부요인으로는 이슬람의 침입설, 내부요인으로는 Saṅgha(僧伽, 敎團)의 타락과 사회적 기능약화, 학문불교에의 매몰, 수행을 등한시 한 점, Buddha 가르침의 정체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교의 힌두화를 진행한 점, 불교자체의 생명력이 다함 등등 다양한 관점 등을 제시한다. 분명한 사실은 Saṅgha가 주도하던 인도불교는 1500년을 지속하다 역사 속으로 소멸하고 아직까지 되살아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1차 인도불교 복원불사
이 주제는 첫 연재분과 다소 겹치는 부분이 있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다시 한 번 설명한다.
우리는 인도불교를 복원하기 위해 노력한 시기를 크게 2차로 구분한다. 1차 인도불교 복원운동은 1773년부터 시작해서 일부는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2차 인도불교 복원불사는 2000년부터 수행지도자를 양성하고 인도출신 스님을 양성하는 작업으로 한국스님이 중심이 되어 장차 300년동안 진행될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수행을 복원하고 인도스님을 양성하는 일은 이전의 불교복원 운동과는 전혀 결이 다른 인도불교 복원불사이다.
1차 인도불교 복원사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범주를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인도를 지배하던 유렵의 제국주의 학자와 군인이 그들의 필요성에 의해 인도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불교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인도인이 자신의 신분적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불교의 평등사상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나머지 하나는 세계 각국의 불교도가 4대성지를 되찾자는 운동이다.
알렉산더 커닝햄
프리드리히 오르텔
암베드카르
고고학 발굴사업
이 시기 가장 주목되는 사람은 영국의 식민지 지배 군인으로 인도에 온 알렉산더 커닝엄Alexander Cunningham(1814~1893)이다.
그는 스코틀랜드 출신으로 영국 공병장교로 인도에서 근무하다 준장으로 퇴역한다. 인도에 근무하며 틈나는 대로 고고학 조사에 관심을 가졌고, 퇴역 후 고고학을 공부하여 1861년 인도정부 최초의 고고학 조사관이 된다. 1870년에는 신설 인도 고고국 장관으로 취임한 후 15년간 재직하며 북인도 각지를 답사, 건축유구와 유적실측, 발굴조사를 한다. 인도 고고학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고, Buddha 성도지 보드가야, 최초 설법지 미가다야(鹿野苑, 사르나트) 등의 불교유적을 발굴하여 현대 인도불교 부활의 서막을 연다.
독일출신의 프리드리치 오르텔Friedrich Oertel(1862~1942)은 1904~5년 흔히 사르나트라고 알려진 초전법륜지 미가다야를 발굴하여 근본향실 뒤편에서 인도 최고보물인 Ashoka 왕의 석주와 그 위에 얹힌 4마리 사자상, 그리고 설법상등 500여점의 귀중한 문화재를 발굴한다. 이들에 의해 비로소 긴 어둠 속에 갇혀있던 불교 4대 성지가 밝은 햇살을 비추며 세상에 다시 등장한다.
문헌을 통해서도 Buddha 가르침이 세상에 들어난다. 그 중심에 영국의 식민지 관리였던 변호사 출신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1843~1922)가 있다.
영국 식민지였던 스리랑카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던 리즈 데이비스Rhys Davids는 Pāli 삼장(三藏)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귀국 후, 1881년 옥스퍼드대학에 팔리삼장협회The Pali Text Society(약칭 PTS)를 창립하고 Pāli 삼장 보급과 영어번역 활동을 한다. 특히 팔리성전협회The Pali Text Society에서 출간한 로마자로 표기된 Pāli 삼장은 Pāli 삼장 연구의 기준이 되고, 오늘날 세계 각국의 대학에서 불교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원전을 제공한다. 그는 1882년부터 1912년까지 런던대학에서 Pāli어 및 불교학 교수로 재직하면서 많은 Pāli 원전을 번역한다. 인도에서 살았거나 인도를 알고 체험한 영국인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이 학회는 수행보다는 학문중심의 불교를 연구한다.
1879년 에드윈 아널드Edwin Arnold(1832~1904)는 『아시아의 빛Light of Asia』를 출간한다. 이 책은 많은 유럽인이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되는 귀중한 책이 된다.
이러한 학문중심의 불교에서 수행중심의 불교로 전기를 마련한 사람은 러시아 출신 신지학자인 헬레나 페트로바 블라바츠키Helena Blavatsky(1831~1891)여사와 미국출신 헨리 스틸 올콧Henry Steel Olcott(1832~1906) 대령이다. 이 두 사람은 1880년 5월 25일 스링랑카에서 서양인으로서는 최초로 공개적으로 불교에 귀의한 사람이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스리랑카 출신 담마팔라Dhammapāla이다.
인도불교 복원불사를 논하며 가장 주목되는 분이 Olcott 대령이다. 올코트Olcott는 미국 남북전쟁에 참전한 예비역 육군대령이자 변호사이고 신지학회 창립회원이다. 군에서 전역한 뒤 변호사로 활동하다 스리랑카 구나난다Gunananda 장로의 파나두라Panadura 논쟁에 관한 책을 읽고 자신이 찾던 진리가 거기에 있다고 믿고 스리랑카로 온다. 그는 항상 “최상의 종교는 진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란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리랑카에 아난다 대학과 나란다 대학 등을 설립하고 Buddha 탄생일인 웨삭 데이를 공휴일로 지정하게 한다. 그가 스리랑카에 올 당시 스리랑카 불교현실은 16세기 이후 차례로 『포르투갈-네덜란드-영국』의 식민지배를 거치면서 다수의 민중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불교를 믿는 다는 것은 무지한 백성이거나 산간오지의 사람들이 믿는 미신으로 취급받고 있었다. 그런 스리랑카 불교가 오늘날 같이 다시 되살아나게 하는데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분 가운데 한 분이며, 아나가리카 담마팔라Anagarika Dhammapāla가 인도 4대성지 회복운동을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운 분이다. 그는 1893년 시카고에서 거행된 세계종교대회에 참여하기 위해 가는 담마팔라Dhammapāla를 위해 불교기를 만들었다고 한다.
민중해방운동
인도인으로서 영국의 지배와 수탈에 강력하게 저항하며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세상을 꿈꾼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암베드카르Ambedkar(1891~1956)이다.
암베드카르Ambedkar는 인도의 독립운동이가이자 정치인, 교육자, 인권 운동가이다. 그는 최하층 달리트(Dalit,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건국헌법기초위원회 위원장을 지내며 인도헌법의 초안을 주관하고 민중해방운동을 주도한다. 그는 달리트의 신분해방 운동을 이끌며 그 이론적 근거와 수단으로 불교를 선택한다.
그는 1956년 10월 14일 중인도 나그푸르에서 수십만 명의 달리트와 함께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로 개종하며 “나는 힌두교로 태어났지만 불교도로 죽을 것이다. 그 중요한 이유는 불교가 가장 평등한 가르침이었기 때문이다.”라고 선언한다.
인도의 또 다른 독립운동가인 간디Gandhi(1869~1948)와는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 주된 이유는 간디Gandhi는 인도 계급제도의 최상층부인 브라만 출신으로 불평등한 사회구조인 계급제 유지를 주장하고 암베드카르Ambedkar는 가장 하층민 출신으로 계급해방과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평등한 세상을 추구하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 간디Gandhi는 상류층과 힌두교를 대표했던 반면, 암베드카르Ambedkar는 하층민과 불교를 대변했다.
암베드카르Ambedkar로 인해 인도 민중은 불교에 주목하기 시작한다. 하층민 계급해방 운동으로부터 출발한 신불교 운동은 아직도 계급제도가 강하게 남아있는 인도에서 불교를 확산시키는데 가장 크게 기여하고 불교의 원래 사용가치를 구현하는데 가장 적극적이다. 동시에 이런 조건이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실질적인 사회주도세력(중산층 이상의 주류계층)이 불교와 수행에 관심을 보이지만 하층민 권리찾기 운동으로 시작한 불교도와 함께 섞이기 싫어하는 현실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오늘날 달리트는 인도 인구의 16% 정도로 약 2억 5천만 명 정도 된다. 그들은 암베드카르Ambedkar를 현대의 Buddha로 추앙하며 활동하지만, Buddha나 수행보다는 암베드카르Ambedkar에게 초점맞추고 계급평등과 신분해방에 관심을 기울이다보니 자연스럽게 정치활동에 주목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양태는 전통적인 불교도와 약간의 거리감이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이것은 앞으로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4대성지 회복운동
외국에서 온 한 불교도가 힌두교도가 점유하고 있는 불교의 4대성지를 다시 불교도에게 돌려주고 4대성지에 사찰을 건립하고 순례객에게 편의를 제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의 맨 처음 시작한 사람은 스리랑카 출신 아나가리카 담마팔라Anagarika Dhammapāla(1864~1933 )이다.
그는 스리랑카에서 태어나고 크리스천 학교에서 공부하고 Gunananda 장로에게서 불교를 배운다. 1880년 5월 신지학회 창립자인 러시아인 블라바츠키Blavatsky와 미국인 변호사 올코트Olcott 대령이 스리랑카로 와서 불교로 개종하자 그들과 인연을 맺는다. 특히 올코트Olcott는 담마팔라Dhammapāla가 앞으로 활동할 방향을 알려주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는 1884년부터는 집을 떠나 불교 수행자가 된다. 그러나 머리를 깎고 계를 받아 출가수행자가 되는 것보다 8계만 받고 머리를 기르고 재가거사로 활동하는 것이 불교활동에 도움되리라는 판단에 일생을 거사 신분으로 4대성지 회복운동에 매진한다. 아나가리카Anagarika란 재가에서 수행하는 거사居士를 의미한다. 그는 1932년 1월 입멸하기 직전 구족계를 받고 정식으로 스님이 된다.
1891년 일본스님 코젠 구나라트나와 함께 인도 성지순례를 떠난다. 초전법륜지 바라나시 미가다야(녹야원)에 도착한다. 파괴된 성지를 참배하고, 성도지 보드가야 보리수 아래서 “인도에서 불법의 횃불을 다시 점화시켜 성지를 회복하리라.”고 다짐하고 서원을 세운다. 그리고 그는 자신이 세운 서원에 따라 일생을 4대성지 회복운동에 매진한다.
1891년 1월 보드가야 성지순례를 한 후, 그 강렬한 인상을 가슴에 품고 다시 스리랑카로 가서 3월 31일 콜롬보에서 4대성지 회복운동을 후원해줄 단체인 Buddhagaya Maha Bodhi Society(大覺會)를 창립한다. 그리고 다시 보드가야로 와서 10월 31일 국제불교협회 International Buddhist Conference를 창립한다. 이 협회에는 스리랑카, 일본, 중국, 방글라데시 등에서 온 대표가 참여한다.
이때부터 보드가야 대탑을 되찾기 위한 대장정을 시작한다. 국제불교협회가 창립한 다음 날 당시 보드가야를 포함한 벵골지역을 통치하던 부총통이 담마팔라Dhammapāla가 추진하던 4대성지 회복운동에 관심을 갖고 보드가야 보리수를 방문한다. 그 때 그 운동을 주도하던 담마팔라Dhammapāla는 치명적인 두 가지 실수를 한다. 하나는 보리수 아래에 불교기와 일장기를 함께 걸어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대탑 2층에 일본불상을 안치한 일이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부총통은 보다가야 대탑의 소유권을 가진 힌두교 사제 Mahant와의 협상을 도와줄 수 없다고 선언하고 그 자리를 떠단다.
이슬람에 의해 불교가 멸망하고 보드가야 대탑과 보리수가 파괴되자 언제부터인지 그 자리를 차지한 힌두교 사제 Mahant가 대탑의 소유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비하르 주에서 가장 부유하고 토지를 많이 소유한 거부였다. 1891년부터 시작한 오랜 협상은 끝내 1906년 인도 대법원에서 패소한다.
그 후 인도가 불교의 표식인 법륜을 독립국가의 상징으로 삼지만 Buddha가 성도하고 불교와 수행을 창안한 보드가야 대탑은 완전히 불교도의 손에 넘어오지 못한 채 힌두교도와 불교도가 공동관리하는 기형적인 형태로 남는다. 4명의 불교도와 4명의 힌두교도 그리고 가야 시장이 당연직 의장으로 구성된 Bodhgaya Mahabodhi Temple Management(대각사관리위원회)를 구성하고 운영되고 있다. 주지스님은 어떤 실권도 없이 아침저녁 예불하고 Buddha께 공양올리는 소임만 한다.
담마팔라 Dhammapāla는 1893년 시카고에서 개최된 세계종교대회에 참석하고 많은 사람을 만난다. 그 가운데서 주목할 만 한 분은 유태인이면서 미국 최초의 불교도로 알려진 뉴욕의 찰스 슈트라우스Charles Strass와 하와이 카메하메하 대왕의 직계후손인 엘리자베스 메리 포스터Elizabeth Mary Foster이다. 특히 메어리 포스트 여사는 담마팔라Dhammapāla로부터 수행을 배우고 수행의 맛을 본 후 그를 양아들로 생각하고 자신이 가진 재산을 물려준다. 그는 이 자금을 바탕으로 사르나트의 스리랑카 사원을 건립하고 많은 학교와 병원을 세운다. 그가 활동할 수 있도록 물질적인 후원을 해준 후견인이었다.
1913년 8월 20일 49세의 담마팔라Dhammapāla가 미국을 방문하고 인도로 돌아오는 길에 한국을 방문하여 당시 유점사 주지이자 불교청년회장인 금담錦潭스님에게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공양 올린다. 이 때 한국승단에 공양올린 사리는 태국왕실이 모시던 것을 담마팔라Dhammapāla에게 공양올린 것을 다시 한국승단에 공양올린 것이다. 이 사리는 현재 조계사 대웅전 앞 탑에 모셔져 있다.
담마팔라
담마팔라Dhammapāla는 1925년 런던을 방문하고 영국의 재가불자에게 수행을 지도하며 영국인이 수행을 알게 된 획기적인 사건이다. 담마팔라Dhammapāla는 British Mahabodhi Society를 설립한다. 재가불자에게 퍼져나간 불교명상으로 인해 1925년부터 1943년까지 영국의 주요 도시에 불교명상 센터와 불교도서관이 들어섰다. 1928년에는 햄스테드에 그리고 1938년에는 런던에 불교사원이 세워졌다.
그가 세운 Maha Bodhi Society가 주로 하는 일은 명상센터 운영, 학교 건립, 출판, 도서관 운영, 병원·수도원 운영 등 다양한 사회사업을 통한 불교운동이다. 아쉬운 점은 담마팔라Dhammapāla가 마지막으로 하고 싶었던 국제불교대학을 설립하고 스님을 양성하려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그가 입멸하게 됨으로써 더 이상 추진되지 못하고 다음의 눈 밝은 원력가를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