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성숙하다’는 의미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나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성숙한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삶의 우선순위를 두고 생활합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예배를 소중하게 여길 뿐만 아니라 중요한 순간마다 성경 말씀대로 선택하고 결정합니다.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데 필요한 요소가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보암에게 좋은 왕이 될 수 있는 기회와 약속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여로보암은 스스로 그 기회를 차 버렸습니다. 하나님과 백성을 신뢰하지 못하게 된 여로보암은 두려움 속에서 자구책을 강구합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이 아닌 자신을 위해 금송아지를 만들었습니다. 자신의 정치적 위기를 타개하려고 종교를 이용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죄가 되었습니다.
종교를 정치에 이용한 여로보암(25-33)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종교를 아용하곤 합니다. 교회는 정치와 무관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정치가 무엇인지 늘 생각하고 공부해야 합니다. 준비된 지도자가 누구인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가 누구인지를 살피고 적합한 사람을 세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울타리 되어주시도록 신앙을 챙겨야 했지만, 주변 나라들과 백성의 심기를 살피는 일부터 했습니다.
25여로보암이 에브라임 산지에 세겜을 건축하고 거기서 살며 또 거기서 나가서 부느엘을 건축하고 26그의 마음에 스스로 이르기를 나라가 이제 다윗의 집으로 돌아가리로다 27만일 이 백성이 예루살렘에 있는 여호와의 성전에 제사를 드리고자 하여 올라가면 이 백성의 마음이 유다 왕 된 그들의 주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서 나를 죽이고 유다의 왕 르호보암에게로 돌아가리로다 하고 28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는 백성들이 단까지 가서 그 하나에게 경배함이더라 31그가 또 산당들을 짓고 레위 자손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고 32여덟째 달 곧 그 달 열다섯째 날로 절기를 정하여 유다의 절기와 비슷하게 하고 제단에 올라가되 벧엘에서 그와 같이 행하여 그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를 드렸으며 그가 지은 산당의 제사장을 벧엘에서 세웠더라 33그가 자기 마음대로 정한 달 곧 여덟째 달 열다섯째 날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절기로 정하고 벧엘에 쌓은 제단에 올라가서 분향하였더라(25-33)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주전 930-909년)의 통치는 하나님에 대한 불순종과 배역으로 점철됩니다. 통치 기록은 르호보암(12:1-24; 14:21-31)을 앞뒤에 두고 약 3장(12:25-14:20)에 걸쳐 전개되지만, 이는 후대 왕들에게 악한 왕의 표본으로 예시될 악행의 발자취입니다. 열왕기는 남북 이스라엘의 멸망 원인이 하나님에 대한 왕과 백성)의 불순종임을 증명하고 있으므로, 각 왕의 정치, 군사적 공적보다는 신앙적 업적 또는 악행을 묘사하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1) 여로보암의 방비(25)
여로보암은 수도를 세겜으로 정하고 방비에 힘씁니다. 세겜은 예루살렘 북쪽 약 65킬로미터에 있는 에브라임의 성읍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여호와께 제단을 쌓았고(창 12:7) 내내 이스라엘의 신앙, 정치의 중심지였습니다. 이곳에서 이미 르호보암과 북이스라엘의 두 차례 만남이 있었습니다(12:1-16). 그리심 산과 에발 산 사이에 위치한 세겜은 상업적, 군사적 교통의 요지였고, 같은 이유로 남북으로부터의 침입에 취약했습니다. 여로보암은 요단 동편 얍복 강 부근에도 부느엘(브니엘)을 건축하고 요새화했습니다. 다윗의 든든한 지지 세력이었던 길르앗(삼하 17:27-29; 19:31-39)을 통제하고, 요단 서쪽의 세겜을 보호하려는 목적일 것입니다.
(2) 여로보암의 두려움(26-27)
여로보암은 하나님의 선택과 열 지파의 지지 속에 왕이 됐으나, 백성의 마음을 잃을까 봐 두려움에 사로 잡힙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여로보암에게 다윗의 행위를 따라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을 지키라고 명하셨습니다(11:38). 여로보암은 이 점을 상기하며 어떻게 순종할 수 있을지를 궁구하고, 마음이 순종에서 멀어질 때마다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지어준 견고한 왕조를 자기에게도 약속하셨음(11:38)을 굳게 붙잡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신뢰와 순종에 집중하는 대신 백성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 전전긍긍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마음에는 백성이 다윗의 집인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불안이 일기 시작했습니다. 북이스라엘 백성 중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제사하는 자들이 있었습니다(대하 11:16). 여로보암은 이처럼 백성이 계속 예루살렘에 가다 보면 그들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갈 것이며, 언젠가 자기를 죽이고 그에게 완전히 돌아갈 것이라는 결론에 다다랐습니다. 여로보암은 르호보암을 “유다의 왕”이자 북부 백성의 “주(인)”로 여겼고, 백성이 그에게 돌아갈 것이라는 자신의 추측을 기정사실인 양 스스로에게 주입시켰습니다(26-27). 이로써 하나님께서 자신을 열 지파의 왕으로 세우셨다는 점과 그 선택의 위중함과 감사함을 망각했습니다. 어떻게 보면 여로보암의 사고는 현실을 직시한 이성적인 추론과 판단으로 들립니다. 실제로 르호보암에게 돌아간 자들이 있었을 테고, 이미 르호보암을 죽이려 들었던 백성이었으므로(12:18) 그도 암살당할 가능성이 없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눈앞의 현상과 인간적인 한계로 괴로운 이때가 하나님께 돌아가야 하는 때임을 그는 결코 깨닫지 못했습니다.
(3) 여로보암의 배역(28-33)
여로보암은 백성의 마음이 르호보암에게 돌아가지 못하도록 두 금송아지를 만드는 방안을 채택함으로써 이스라엘의 신앙 전통을 깨뜨립니다. 28절의 “이에 계획하고(야아쯔)”는 스스로 계획한 것이 아닌 ‘누군가와 의논했다’는 뜻입니다. 이 동사는 이미 6, 8절에서 르호보암이 원로들 및 친구들과 ‘의논했다’에서 똑같은 형태로 나왔습니다. 여로보암도 자문을 거쳤으나 르호보암처럼 지혜롭지 못한 조언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백성에게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않아도 된다고 선포합니다(28). 이 선언은 송아지 형상을 만든 근본목적이 경배에 있지 않고 백성의 예루살렘 방문을 차단하는 데 있음을 알려줍니다. 여로보암은 두 금송아지를 북이스라엘 백성의 신들로 소개하며, 이 신들이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올라오게 했다고 설명합니다. 이런 발언은 과거 이스라엘이 시내 산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자기들의 신으로 숭배한 사건을 떠오르게 합니다(출 32장).
이처럼 여로보암은 여호와가 이룬 출애굽의 구원 사건을 자신이 만든 금송아지에 결부시켜, 백성들의 신앙을 미혹에 빠지게 합니다. 그가 송아지를 어떻게 여기든, 하나님께서는 그가 만든 송아지가 “다른 신”이며 “우상”임을 분명히 지적하십니다(14:9). 그가 금송아지를 두 개나 만든 것은 북이스라엘의 남쪽 벧엘과 북쪽의 경계인 단에 하나씩 두기 위함입니다. 특히 예루살렘 북쪽 17킬로미터에 있는 벧엘은 아브라함과 야곱이 하나님께 제단을 쌓은 유서 깊은 장소였으므로(창 12:8; 28:18-19; 35:17), 백성의 판단을 흐리게 했습니다.
이에 북부 지파 백성은 차차 예루살렘에 갈 필요를 느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며 잘못된 대상과 잘못된 장소에서 예배 함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착각했습니다. 여로보암의 정책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이스라엘의 정체성의 근간을 흔들었습니다. 또한 북부의 열 지파를 이스라엘의 나머지 형제 지파와의 연합에서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여로보암의 배역과 불신앙은 자신과 백성을 영적, 도덕적 타락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숭배에 이어, 부차적인 죄를 계속 지었습니다.
29-33절에 기록된 그의 죄악은 히브리어로 ‘만들다’, ‘하다’의 뜻인 ‘아싸’로 대부분(9번) 설명되었습니다. 본문에서는 ‘짓다, 삼다, 정하다, 행하다, 만들다, 쌓다’로 번역되었습니다, 이 동사는 앞서 히람과 솔로몬의 성전 기구 제작에 대한 설명에 사용되어 그들의 순종을 부각했는데(7:40, 45, 48, 51), 여기서는 대조적으로 여로보암의 불순종과 악행을 부각합니다. 그의 악행은 첫째, 산당을 만들었습니다.
산당은 높은 곳에 지은 제사처로, 성전 완공 전에 백성들이 제사하던 곳입니다(3:2). 이곳에는 가나안의 우상 신들을 위한 제단들도 함께 있어, 이스라엘을 우상숭배로, 여호와의 신앙과 혼합된 종교로 이끄는 지름길이 되었습니다. 여로보암은 그런 신앙의 유혹 장소를 도처에 만들고 백성을 그곳으로 유인했습니다. 이는 산당과 다른 예배처를 없애고 오직 하나님께서 지정한 곳, 예루살렘 성전에서 예배하라는 명령(신 12:2-5)을 거역한 행위입니다.
둘째, 그는 “보통 백성” 중에서 산당 제사장을 만들었습니다(31). 이는 ‘백성의 말단’이란 의미로 제사장이 되기에 가당치도 않은 자들임을 나타냅니다. 제사장직은 레위 자손 중 아론의 자손에게 주어진 직임입니다(출 28:1; 민 18:6-7). 여로보암이 이런 규례를 무시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와 반대로 그는 성전에서 일하던 제사장들과 레위인의 직분을 박탈했습니다(대하 11:13-16).
그러나 이들은 참된 신앙을 위해 북부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감으로써 하나님께 헌신했습니다. 셋째, 여로보암은 자기 마음대로 제8월 15일을 절기로 만들었습니다. 유다에서 제7월 15일부터 지키는 장막절을 북부의 추수 때에 맞췄거나 다른 달력을 사용하여 정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한 절기를 만들었다고 생각했으나(33), 절기가 여호와께 속했으며 여호와를 위해 지켜야 함(레 23:34)을 망각했습니다. 넷째, 여로보암은 죄악을 행하는 데 솔선수범했습니다. 그는 벧엘에서 자기가 만든 송아지에게 제사하고, 자기가 만든 산당의 제사장을 그곳에서 일하게 두었습니다. 또한 자기가 만든 절기에 자기가 만든 제단 위에 희생제물을 바치고 분향했습니다. 지도자가 영적으로 타락했으므로 백성의 타락은 불 보듯 뻔했습니다. 그렇기에 여로보암의 악행은 이스라엘 역사 내내 불순종과 죄의 표본이 되었습니다(16:2,19,26).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복된 삶이라는 것을 꼭 기억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는 우리들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말씀만 주신 것이 아니라, 성령님도 주셨습니다. 우리 마음에 계신 성령님께서 우리를 항상 하나님의 말씀과 뜻대로 인도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항상 성령님을 의지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안에 충만하셔서 우리를 온전히 다스려 주시기를 소원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들의 생각, 말, 행동을 통해 죄의 열매가 아닌 하나님이 받으시는 성령의 열매를 아름답게 맺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