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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손교회 중고청년대학부 원문보기 글쓴이: 모황민
[구약연구13]
주님이 주신 땅으로(여호수아서)
* 제 목: 여호수아(‘여호와는 구원이시다’/‘여호수아’는 포로시대 후기에 ‘예수아’로, 신약 시대에 다시 헬라식 이름인 ‘예수’로 불렸음)
* 저 자: 여호수아
* 기록연대: B.C. 1406~1300년
* 기록목적: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사 및 정착사를 보여 주는 한편, 하나님께서 일찍이 이스라엘 족장들과 언약하신 바를 충실히 지키셨음을 보여주고, 약속하신 바를 반드시 이루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 함으로써, 이후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굳게 믿고 그분만을 섬기도록 교훈하고자 하기 위함입니다.
* 여호수아와 그리스도
여호수아는 그 이름으로부터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있는 인물로 가나안을 정복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승리와 안식을 가져다주었다는 점에서 장차 사단의 권세를 깨뜨리고 당신 백성들에게 구원과 하나님나라의 축복을 가져다 줄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예표 하고 있습니다.
* 핵심단어: 정복
가나안 정복에 대한 약속으로부터 시작해 정복의 완수에 관한 진술로 끝맺고 있는데 이는 이스라엘을 거룩한 제사장 나라를 삼으시고자 한 하나님의 약속과 계획이 가나안 정복을 통해 마침내 실현된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한편, 가나안 정복은 성도들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악들을 물리치고 천국에 이르게 될 것의 예표이기도 합니다.
* 핵심구절: 1장 8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 여호수아 이해:
열두 권의 역사서(여호수아-에스더) 중 첫 번째 책인 여호수아는 모세오경과 이스라엘의 남은 역사를 연결하는 고리로 (우리는) 30여 개 이상의 도시 국가에 거주하는 적들을 정복하는 세 번의 정벌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은 능력 있는 여호수아의 지도력 아래 ‘승리는 군사적인 힘이나 수적 우세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그의 말씀에 대한 순종을 통해 온다’는 너무나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주 제: 순종하는 믿음을 통해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차지하는 것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입니다.
* 개 요:
제1부 가나안 정복(1:1~12:24)
1. 이스라엘의 정복 준비(1:1~5:15)
모세를 계승한 여호수아(1장)
가나안 정탐(2장) 및 요단강 도하(3장)
할례 및 유월절 의식 준행, 칼을 든 여호와의 군대장관을 만남, 만나의 중단(5장)
2. 이스라엘의 가나안 정복(6:1~13:7)
1)중부 가나안의 정복(6:1~8:35)
여리고성 정복 및 라합과 그녀의 가족 구출(6장)
아간의 범죄 및 아골 골짜기에서의 징벌(7장), 아이성 점령 및 율법서 낭독(8장)
2)남부 가나안의 정복(9:1~10:43)
기브온 족속의 속임수(9장), 아모리 연합군 격파(10장)
3)북부 가나안의 정복 및 정복사업 요약(11:1~12:24)
제2부 가나안 정착(13:1~24:33)
1. 요단 동편지경의 정착(13:1~33)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두 지파 반)
2. 요단 서편지경의 정착(14:1~19:51) -9지파 반
갈렙의 헤브론 정복(14장), 유다와 요셉 두 지파의 기업분배(14~17장)
나머지 지파 및 여호수아의 기업분배(18~19장)
3. 종교적 공동체의 정착(20:1~21:45)
여섯 도피성(20장), 레위사람들의 성읍(21장)
4. 영구한 정착을 위한 조건(22:1~24:33)
증거의 제단 ‘엣'(22장)
여호수아의 고별설교 및 언약의 갱신(23:1~24:28)
여호수아와 엘르아살의 죽음(24:29~30)
성경여행
각각 질문을 읽고 그 물음에 간단하게 답하시오.
1.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죽은 후 누구를 불러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하셨습니까?(수1:1~2)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
: 하나님은 모세의 사후 여호수아로 하여금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것을 명령하심.
‘여호와의 종’ 모세는 죽었지만 ‘가나안 땅의 정복’이라는 과업은 여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일군은 죽어도 하나님의 일은 계속 되어야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미완의 과업을 이루기 위해 무엇부터 하셨습니까? 일꾼을 세우는 것입니다. 누구를 세우셨습니까? ‘모세의 수종자’ 눈의 아들 여호수아입니다.
이와 같은 여호수아의 소명 장면은 어떤 면에서 선지자 이사야의 경우와 유사한 점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이사야 역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선지자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내가 본즉 주께서 높이 들린 보좌에 앉으셨는데 그의 옷자락은 성전에 가득하였고....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라.”(사6:1,8) 웃시야(아사랴) 왕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그는 (집권 말기 교만해져서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직접 향단에 분향하려다가 나병에 걸려 홀로 별궁에서 지내야 했지만) 무려 52년 동안 남유다 왕국을 다방면에서 부국강병의 반석 위에 올려놓았던 인물로 그처럼 많은 축복을 받은 왕도 흔치 않을 것입니다.
이처럼 두 사람은 한 결 같이 모세나 웃시야(아사랴)와 같은 큰 인물들의 사후에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눈앞이 캄캄했을 것입니다. 또한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수1:9상). 무슨 이유에서입니까? 큰 인물들의 빈자리 즉, 부재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누군가의 부재로 인해 불안해하고 초조해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들도 우리도 모두 한 분 하나님의 종들이요 사역자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5~7)
*너는 이제 일어나 이 모든 백성과 함께 약속의 땅으로 나아가라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수1:2하)
여기서 ‘일어나’(히, 쿰)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다’, ‘공고히 하다’, ‘착수하다’는 뜻으로 어떤 목표의 성취를 위해 결연히 나섬을 의미합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를 향해 ‘이제 일어나라’고 하십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가나안 땅의 정복’을 위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착수하며, 결연히 나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맡겨주신 과업을 성취하기 위해 결연히 나서고 있습니까? 각자의 비전을 이루어 나가고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있습니까? 일어나 빛을 발하십시오.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사60:1)
*네가 밟는 모든 땅을 네게 주리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곧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수1:3,4)
하나님께서 원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신 약속의 땅은 남으로는 아라비아 사막과 경계하고, 북으로는 레바논 산맥에 이르며, 동서로는 유프라테스 강에서 지중해 연안에까지 이르는 지역이었습니다.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과 더불어 언약을 세워 이르시되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데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창15:18)
그러나 다윗 왕 때에 이와 거의 근사한 지경까지 이스라엘의 영토가 확장된 적은 있었지만, 이스라엘 백성이 그 모든 지경을 확보해 본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따라서 본 절에 제시된 지경은 하나님으로부터 하락된 ‘이상적 범위’이며, 이스라엘의 순종 여부와 정도에 따라 얼마든지 그 지경이 축소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모세를 향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내가 너희에게 주었노니.”(수1:2,3)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그 땅을 다 주시겠다는 말입니다. 아무런 조건이나 단서 조항이 없이 말입니까? 아닙니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는 단서와 함께 다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미 주시기로 작정하신 것이라 할지라도, 우리가 '밟는 수고'를 하지 않는다면 결코 그것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하는 만큼 주시겠다는 말인 것입니다.
또한 이 말을 뒤집어보면 ‘너희 발바닥이 닿지 않는 곳들은 결코 주시지 않겠다’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얻기까지 수고와 노력을 아끼지 말되, 우리에게 주신 그 비전이 축소되지 않도록 우리 자신을 부단히 쳐서 복종시켜나가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하락된 이상적 범위대로 이 땅에 실현되도록 말입니다. 우리의 경우는 어떠합니까?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창13:14,15,17)
*모세와 함께 하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
여전히 떨며 두려워하고 있는 여호수아에게 하나님은 ‘모세와 함께 하던 같이 너와 함께 있으리라’고 말씀하시며 안심시키십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이라는 약속처럼 (가나안 정복이라는 대업을 앞둔) 여호수아에게 큰 용기를 주는 것도 또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무려 40여 년 동안 모세 곁에서 모세의 수종자로 있으면서 하나님의 능력을 뚜렷이 목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한 말씀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내가 여호수아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내가 바울과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언제까지 말입니까? 지금부터 시작해서 영원토록입니다. “네 평생에 너를 능히 대적할 자가 없으리니....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수1:5하)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히13:5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정도로 나아가라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수1:8)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처음엔 잘 나가다가도 중도에 좌로나 우로 치우쳐 그 인생을 그르치곤 합니다. 과연 좌로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면서 정도로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이란 없는 것일까요?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냐 구요? 여호수아 1장 7,8절을 다시 한 번 곰곰이 들여다보십시오.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고 다 지켜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말씀 중심으로 살아가고 있습니까? 말씀을 얼마나 가까이 하고 있습니까?
2. 여호수아는 싯딤에서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어 여리고 성을 정탐하게 했습니다. 그들은 누구의 도움으로 무사히 임무를 마치고 귀환할 수 있었습니까?(수2:1,15,1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 두 명의 정탐꾼들은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의 도움으로 그 임무를 무사히 마치고 귀환할 수 있었음.
여리고 성은 요단 서편 중앙에 위치한 유서 깊은 고대 도시로서 종려나무가 많고 그 풍경에 수려해 예로부터 도시문명을 이룬 곳 중 하나였습니다. 라합이 어떤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는지 알 순 없지만, 그녀가 ‘기생’으로 불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리 넉넉지 못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기생의 집’이 구체적으로 어떤 형태였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관으로도 사용된 점으로 보아 아마도 우리나라의 '주막' 정도에 해당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곳을 단순한 윤락시설로 보기에는 여러 가지로 그 정황이 잘 들어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 그녀의 집은 성벽 위에 건설되었습니다.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수2:15) 당시의 여리고 성은 4.5m 간격을 사이에 둔 두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이러한 이중 성벽으로 인해 성내의 면적이 대폭 축소되었으므로 두 성벽 사이에 큰 대들보를 올려놓고 그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고 합니다. 라합의 집도 이런 집들 중 하나에 해당했으며 그 집 들창이 외곽 성벽 쪽으로 나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객점이나 여관이 아닌 단순한 윤락시설이 성벽 위에 있었다는 건 조금 어색해 보이지 않습니까?(물론 반박의 여지가 있을 순 있습니다) 객점이나 여관은 비교적 사람들의 출입이 빈번한 성문이나 그 성곽 주변에 위치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둘째, 두 정탐꾼의 잠입이 비교적 수월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여리고 성은 가나안 북쪽과 남쪽을 이어주는 곳이자 요단을 경계로 한 요단 서편과 요단 동편을 이어주는 가교의 역할을 했던 가나안의 관문과도 같은 곳으로서 수많은 무역상들이나 나그네 들이 거쳐 가는 그런 곳이었음이 틀림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두 정탐꾼이 잠입하기에 비교적 수월한 곳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집은 '여인숙'이나 '주막'으로 비견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한편, (아무리 여리고 성에 잠입이 그 목적이라 해도) 두 정탐꾼이 단순한 윤락시설에 발을 들여 놓았다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객점’이나 ‘여관’이라면 몰라도 말입니다. ‘객점’은 대체로 지리적으로 중요한 곳들에 위치하고 있어, 전국을 돌아다니며 장사하는 상인들이나 나그네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으로서 이곳만큼 국내의 사정과 가나안 근동의 정세를 훤히 알 수 있는 곳도 흔치 않았을 것입니다.
셋째, 믿음의 여인으로 평가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11:31) (물론 그녀가 문자 그대로 실제로 기생이었을 수도 있지만) 히브리서 기자의 평가로 비춰봐서 오늘날의 윤락촌을 운영하고 있었다기보다는, 일종의 객점이나 여관 등을 운영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타당하지 않는가 생각해봅니다. 실제로 그녀는 두 정탐꾼과 대면했을 때 상천하지의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을 분명히 했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하) 어찌 이런 신앙고백과 ‘음행’과 함께 할 수 있었겠습니까? (혹 회심 전까지는 음탕한 삶을 살아왔다손 치더라도, 회심 이후에는)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훗날 살몬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그녀의 아들 보아스만 봐도 그녀의 신앙인격이 얼마나 훌륭했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룻2:11,12)
* 라합에게 한 줄기 빛이 비추이다.
'기생의 집'은 그 특성상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모여 사담을 나누는 곳으로서 여리고 성 내의 군사적인 동태나 민심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곳이었습니다. 그녀는, 비록 천대받는 기생으로 불렸지만, 자신의 집을 거쳐 가는 사람들을 통하여 여리고 성 내외의 소식들을 속속들이 알게 되었습니다(만일 그녀가 ‘기생의 집’을 운영하지 않았다면, 평생 우물안 개구리 신세로 살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특히 최근에 들려오는 몇몇 소식들은 아주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근동의 패권을 쥐고 있는 애굽에서 40여 년 전에 나온 이스라엘 민족과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내용이었는데 특히 그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분은 자신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되, 여러 가지 기상천외한 기적들을 행하시고 홍해 바다 역시 마르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은 요단 동편에 있는 아모리 두 왕국을 전멸시키는 등 사실상 무적이었습니다. 도대체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기에.... 또한 그 민족은 어떤 종족이기에... 그와 같은 일들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 그녀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습니다. 더군다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곳 가나안 땅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셨고, 그러면서 가나안 민족들을 모두 전멸시키라고 명하셨다는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에게 주신 줄을 내가 아노라 우리가 너희를 심히 두려워하고 이 땅 주민들이 다 너희 앞에서 간담이 녹나니 이는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에 여호와께서 너희 앞에서 홍해 물을 마르게 하신 일과 너희가 요단 저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에게 행한 일 곧 그들을 전멸시킨 일을 우리가 들었음이니라 우리가 듣자 곧 마음이 녹았고 너희로 말미암아 사람이 정신을 잃었나니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0)
그녀에게 서서히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자라기 시작했습니다. 그녀는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입성하기도 전에 이미 첫 번째로 개종자로 준비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남들보다 훨씬 바깥 사정을 훤히 알고 있었으며, 성내에 돌아가는 소식 역시 비교적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벌써부터 여리고 성 내에서는 낙담하는 분위기가 팽배 했습니다. 여리고 성 지도부가 애써 이러한 분위기를 덮어보려고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소식은 소리 소문 없이 전달되고 또 전달되었던 것입니다.
라합은 가족을 구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가득 찼습니다. 결국 그녀는 상천하지의 여호와 하나님께 부르짖기 시작한 것입니다. 위기 속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해 주시도록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그녀의 유일한 희망이었습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약속 아래로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이 편입되기를 주야로 부르짖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의 가족들이 모두 구원받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알게 해달라고 말입니다.
한편, 그 당시 가나안 사람들의 신관이 다신론이었는데 반해,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광대무변하시며 가장 높으신 분으로 고백하기에 이릅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녀가 믿음의 여인으로 거듭 태어나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는 증거가 아닐까요? 훗날 이스라엘 정탐꾼들 앞에서 고백한 그녀의 신앙을 들어 보십시오. 놀랍지 않습니까? "...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위로는 하늘에서도 아래로는 땅에서도 하나님이시니라."(수2:11하)
* 하나님께서 라합의 기도에 응답하시다
하나님께서는 라합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극적인 구원 작전을 펼치시기 시작했습니다. 불연듯 여호수아에게 정탐꾼 파견을 결단케 하신 것입니다. 사실 여호수아에게는 정탐에 대한 좋지 못한 과거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건 말입니까? 40여 년 전 가네스 바네아에서 있었던 12명 정탐꾼 사건 말입니다. 물론 그때 여호수아와 갈렙 역시 나머지 10명의 정탐꾼들과 함께 가나안 정탐을 다녀온 바 있습니다. 문제는 40일간의 정탐을 마치고 돌아와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한 10인이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이스라엘에게 주시겠다고 하신 그 땅에 대해 악평을 했고, 이스라엘 백성들 역시 하나님에 대해 불평과 원망을 마주 쏟아놓았던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갈렙의 보고는 처음부터 들으려고도 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이로 인해 이스라엘은 무려 40년이라는 세월을 광야에서 방황해야만 했고, 출애굽 1세대 역시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는 모두 광야에서 그 생을 마쳐야만 했습니다. 이런 뼈아픈 과거가 있기에, 다시 한 번 정탐꾼을 보낸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또 다시 정탐꾼을 여리고로 보냈습니다. 과거의 기억을 애써 지우고자 했는지 이번엔 믿음의 용사들 중 엄중하게 선별된 두 사람만 보냈습니다(그 두 사람이 누구인지 제대로 알 수 없으나, 마치 40년 전의 여호수아와 갈렙을 연상케 하기에 충분합니다). 사실 정탐꾼의 파견은 별 의미가 없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돌아와서 보고 한 것이라고는 고작 성내의 분위기만 전하는 것일 뿐 군사적인 정보라 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수2:24)
그렇다면, 다른 이유라도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물론 여러 가지가 있을 순 있지만, 구속사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믿음의 여인 라합과 그들의 가족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을까요? 사실 여호수아가 여리고로 두 정탐꾼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두 정탐꾼들이 기생 라합의 집으로 가지 않았다면, 라합이 그들의 탈출을 제대로 돕지 못했다면....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의 운명은 불 보듯 뻔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정탐꾼과 라합의 만남은 하나님의 의도된 것이었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꾼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수2:1)
* 살몬과 라합의 만남
두 정탐꾼들은 라합의 집에 머물면서 여리고 성 내의 사정들을 소상히 묻고 돌아다녔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낯선 사내 두 사람이 성 내의 사정에 굉장한 관심을 보이는 것을 보면서 뭔가 수상쩍어 보였습니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이 두 사람이 여리고의 정보망에 발각되면서부터, 라합은 그들이 이스라엘에서 온 사람들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여리고 왕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이 밤에 이스라엘 자손 중의 몇 사람이 이 땅을 정탐하러 이리로 들어왔나이다 여리고 왕이 라합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네게로 와서 네 집에 들어간 그 사람들을 이끌어내라 그들은 이 온 땅을 정탐하러 왔느니라.”(수2:2~3)
그녀는 그 두 사람이 자신의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그들의 도주를 적극적으로 도왔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고백과 함께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을 구원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도록 여호와로 내게 맹세하고 내게 증표를 내라 그리고 나의 부모와 나의 남녀 형제와 그들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주어 우리 목숨을 죽음에서 건져내라.”(수2:12~13)
추측컨대, 그 두 정탐꾼 중 한 사람은 유다 지파 나손의 아들 '살몬'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나손은 출애굽 1세대로서 유다 지파를 영솔하였던 인물이었으며, 살몬 역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유다 지파의 유력한 인물로 부상해 있었을 것이라 판단되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는 두 번 다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분명 정탐꾼의 선발 과정부터 신중하게 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선발 기준들에는 어떤 것들이 포함되어 있었을까요? 필시 믿음과 용기, 지파 내에서의 유력함 정도 등이었을 것입니다. 유다지파의 살몬과 같은 사람들 말입니다.
라합은 훗날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게 되는데, 어떻게 라합과 살몬이 만났는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마도 두 정탐꾼 중 하나가 ‘살몬’이지 않았을까요? 이렇게 가정해본다면, 여리고 정탐은 하나님께서 믿음의 여인 라합과 믿음의 청년 살몬을 직접 만나게 해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사건 중 하나가 아닐까요? “람은 아미나답을 낳고 아미나답은 나손을 낳고 나손은 살몬을 낳고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마1:4~6)
여리고 성은 멸망했지만,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은 무사히 구원 받았습니다. 정탐이 인연이 되어 라합은 ‘믿음의 청년’ 살몬과 결혼하게 된 것입니다. 이로서 완전히 하나님의 구속사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게 된 것입니다. 라합은 살몬에게 보아스를 낳았습니다. 이 보아스가 훗날 모압 여인 룻과 결혼 그 사람입니다. 이방여인이었던 라합을 어머니로 모신 적이 있었기에 훗날 보아스는 또 다른 이방 여인 룻을 기꺼이 아내로 맞아들일 수 있었지 않나 생각해봅니다. 라합은 다윗 왕의 직계 조상이 되었고, 훗날 예수님이 자신의 후손으로 태어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라합의 신앙인격은 정탐꾼들 앞에서 고백한 신앙고백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그녀의 아들 보아스가 훌륭한 믿음의 사람으로 된 것을 통해서도 충분히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보아스의 신앙인격에 대하여 자세한 알고 싶으면 구약 성경 '룻기'를 읽어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방 여인이자 기생이었던 한 여인의 믿음을 귀하게 보시고, 그녀를 멸망 가운데서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의 한 축을 감당케 하셨습니다. 그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다윗왕의 직계 조상이 되는 영광도 더불어 얻었습니다. 그녀가 여생을 어떻게 보내었는지 알 수가 없지만, 믿음의 청년 살몬과의 결혼, 믿음의 아들 보아스 등과 함께 믿음과 사랑이 행복한 가정을 꾸려나갔을 것이 분명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 강물을 마른 땅처럼 건넜습니다. 이때는 무엇을 앞세우고 건넜으며, 어떤 시기였습니까?(수3:3,4,15)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 너희가 이전에 이 길을 지나보지 못하였음이니라 하니라...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언약궤, 곡식 거두는 시기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에 이르렀을 때 곧바로 건너지 않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렸는데, 이는 요단강을 건너는 것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되는 일임을 깨닫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조치 때문입니다. ‘요단’이란 말은 원래 ‘영원한 강’ 또는 ‘빨리 흘러내리는 시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하는데, 이는 큰 낙차로 인해 빨리 흘러내리는 부분이 많은 요단강의 특성을 그대로 반영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건넜던 여리고 부근은 아열대 기후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수기인 4,5월경 이 때에는 북쪽 레바논 산의 눈이 녹고 봄비가 내리기 때문에 요단강이 늘 범람하곤 했습니다. “요단이 곡식(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수3:15)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지도자 여호수아가 삼일 후에는 이 요단강을 건너겠다고 말하지만, 아직까지 요단강의 수위는 좀처럼 줄어들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뭐든지 삼켜버릴 것 같은 기세로 북에서 남으로 내지르고 있습니다. 이대로 요단강에 들어섰다간 가나안 땅은커녕 모두가 전멸할 것처럼 보입니다. 도무지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암담합니다. 지도자 여호수아와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어찌하면 좋을까요?
* 앞서가는 언약궤를 따라가라고 하십니다.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너희는 레위 사람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보거든 너희가 있는 곳을 떠나 그 뒤를 따르라 그러나 너희와 그 사이 거리가 이천 규빗쯤 되게 하고 그것에 가까이 하지는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행할 길을 알리니.......”(수3:4,5상)
넘실대는 요단강물을 보느라 실족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언약궤만을 보고 그 뒤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앞서가는 언약궤를 따라 주저하지 말고 따라나서라는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 역시 예수님만을 바라보았을 때 물 위를 걸어 그분께로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언제부터 물속에 빠져들어 갔습니까? 예수님이 아닌 성난 바람을 보았을 때부터입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만일 주님이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이르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마14: 28~30)
하나님의 언약궤만을 보고 그 뒤를 따르십시오. 하나님만 믿고 좇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의 길을 먼저 가시며 머물 곳을 찾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밤낮 우리가 갈 길을 지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너희보다 먼저 그 길을 가시며 장막 칠 곳을 찾으시고 밤에는 불로, 낮에는 구름으로 너희가 길 길을 지시하신 자이시니라.”(신1:33)
* 성결할 것을 명하십니다.
“여호수아가 또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자신을 성결하게 하라 여호와께서 내일 너희 가운데에 기이한 일들을 행하시리라.”(5절)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동참하는 또 다른 방법은 ‘우리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입니다. 물론 이러한 성결에 대한 명령이 하나님의 이적에 대한 조건부로 제시된 것은 아닐 수도 있지만, 성경 곳곳에는 ‘하나님의 기이한 일’과 ‘그분의 임재’가, ‘하나님의 임재’와 ‘성결’ 사이에는 어떤 모양이로든지 늘 상관관계가 존재해왔습니다.
우리가 왜 자신을 성결케 해야 합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으로 하여금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를 온전히 주장하사 뜻하신 바대로 행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자신을 성결케 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께 쓰임 받는 자가 갖추어야 할 가장 첫 번째 태도이기 때문이므로, 우리는 늘 자신을 깨끗하게 할뿐만 아니라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이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모든 선한 일에 준비함이 되리라 또한 너는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따르라.”(딤후2:20~22)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자 한다면, 지금 내가 누구와 함께 교제하고 있는지 먼저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청년의 정욕에 빠져 있는 사람,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좋아해 늘 다툼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함께 있지는 않습니까?(딤후2:22,23) 이런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면서 자신을 성결케 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되십니까? 결코 그럴 순 없습니다.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과 늘 가까이하려고 힘쓰시기 바랍니다. 이것이야말로 젊은 우리가 청년의 정욕을 피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방법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곳으로 하지 말고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딤전2:8~10)
조만간 우리는 이전에는 지나보지 못했던 길을 지나가야 합니다.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그 길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서 놀랍고도 새로운 운 일들을 행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찌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언약궤만을 보고 그 뒤를 따르십시오. 하나님만 믿고 좇으십시오. 그분은 우리보다 우리의 길을 먼저 가시며 머물 곳을 찾으시고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밤낮 우리가 갈 길을 지시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또 우리는 늘 자신을 깨끗하게 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이들과 함께 교제하기를 힘쓰십시오.
4.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손에 칼을 빼어 들고 있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누구였으며 무엇을 명했습니까?(수5:13~15)
“여호수아가 여리고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에 눈을 들어 본즉 한 사람이 칼을 빼어 손에 들고 마주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나아가서 그에게 묻되 너는 우리를 위하느냐 우리의 적들을 위하느냐 하니 그가 아니라 나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으로 지금 왔느니라 하는지라 여호수아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절하고 그에게 이르되 내 주여 종에게 무슨 말씀을 하려 하시나이까 여호와의 군대 대장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 하니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하니라.”
: 여호와의 군대대장,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가나안으로 들어가는 관문 여리고성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군대 대장’을 만났습니다. 그분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하니라”(수5:15) 이 구절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습니까? 네, 많습니다. 모세의 소명기사에 등장합니다. 그때도 역시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3:5)라고 명령하신 바 있기 때문입니다. 출3장에선 ‘여호와의 사자’와 ‘여호와’, ‘하나님’이 교호적으로 사용되어 있는데 이때 ‘여호와의 사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여호와의 군대 대장’ 역시 ‘여호와의 사자’(출3:2)와 마찬가지로 성육신 이전의 그리스도, 제2위의 하나님을 의미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나타나신 것일까요? 여리고 성 정복을 눈앞에 둔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주고, 여호와 하나님이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강한 확신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어찌 여리고 성 뿐이겠습니까? (이 시점에 나타나신 것으로 보아) 단언컨대 여리고 성을 필두로 가나안 모든 성읍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 복속되기까지 결코 그를 떠나지도 버리지도 아니하신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주셨던 말씀(출3:5)을 그대로 반복하여 말씀하심으로써 모세의 뒤를 잇는 여호수아에게 더 큰 확신과 소망을 주고자 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다 보면 그런 경우들을 종종 발견하곤 합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경우가 없습니까?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빌3:1)
5. 하나님은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며칠 동안 총 몇 번을 돌게 하셨습니까?(수6:2~6)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너희 모든 군사는 그 성을 둘러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돌되 엿새 동안을 그리하라 제사장 일곱은 일곱 양각 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나아갈 것이요 일곱 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은 나팔을 불 것이며 제사장들이 양각 나팔을 길게 불어 그 나팔 소리가 너희에게 들릴 때에는 백성은 다 큰 소리로 외쳐 부를 것이라 그리하면 그 성벽이 무너져 내리리니 백성은 각기 앞으로 올라갈지니라 하시매.”
: 6일 동안 매일 한 번씩, 제7일째에는 일곱 번 돌도록 하심. 총 13번.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6일 동안 매일 한 번씩 돌고 마지막 제7일째에는 총 일곱 번 돌게 한 후 일제히 큰 소리로 외치게 하셨는데 이는 이 전쟁이 철저히 하나님께 속한 전쟁이며,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승리케 됨을 가르치고자 함이었을 것입니다. “...이 전쟁은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이 전쟁에는 너희가 싸울 것이 없나니 대열을 이루고 서서 너희와 함께 한 여호와가 구원하는 것을 보라 유다와 예루살렘아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고 내일 그들을 맞서 나가라 여호와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매.”(대하20:15,17)
또한 이는 (여호수아 개인에게 있어서) 아말렉(출17:8~16), 가나안 아랏 왕(민21:1~3), 아모리 왕 시혼(민21:21~32), 바산 왕 옥(민21:33~35) 등과의 전쟁을 통해 전장에서 잔뼈가 굵었던 그로 하여금 더 이상 자신의 경험이나 전술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 의지케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오직 하나님만 의지해가면서 하나님의 방법대로 믿음의 싸움을 싸워가고 있습니까?
* 바쳐진 성읍 여리고
“이 성과 그 가운데에 있는 모든 것은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되...너희는 온전히 바치고 그 바친 것 중에서 어떤 것이든지 취하여 너희가 이스라엘 진영으로 바치는 것이 되게 하여 고통을 당하게 되지 아니하도록 오직 너희는 그 바친 물건에 손대지 말라.”(수6:17,18)
하나님께서 일찍부터 가나안의 모든 족속을 진멸하라고 했었지만(신7:1~4,20:16,17), 여리고 성의 경우처럼 성의 거민들뿐만 아니라 그곳의 모든 가축들을 전부 죽이는 등 여호와께 온전히 바치라고 한 적은 많지 않습니다(여기서 ‘바치다’의 히브리어 하람은 ‘저주하다’, ‘멸절시키다’, ‘바치다’의 뜻을 지니고 있음). 무슨 이유에서일까요? (물론 그만큼 여리고 성의 죄악이 극렬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여리고성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으로 함락시킨 가나안 족속의 성이므로, 그 모든 생명을 진멸함으로써 그 성 전체를 하나님께 ‘첫 열매’로 드리게 하고자 함일 것입니다(이스라엘 백성들은 추수한 것의 첫 곡식 단이나 열매를 하나님께 바친 후 곡물을 수확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바쳐진 곡식 단은 본격적인 추수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본격적인 시작입니다. 어떤 시작 말입니까? 가나안 정복입니다.
한편, 여리고성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읍 중 하나로 B.C.7000년경에 이미 수십 미터의 높은 돌탑을 쌓을 정도로 건축술이 뛰어나 가나안 정복 당시에는 그 성벽이 워낙 크고 견고해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요새 중의 요새였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정복 당시 첫 번째로 무녀진 채 B.C.5세기경부터 B.C.9세기까지 폐허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B.C.875년경 이스라엘의 아합 왕의 즉위, 유다 왕 아사 38년 벧엘 사람 히엘이 이 성을 다시 건축했는데 ‘여호와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말씀하신 대로’ 터를 쌓았을 때 맏아들 아비람을, 문을 세울 때 말째 아들 스굽을 잃게 되었습니다(왕상16:34장).
“여호수아가 그때에 맹세하게 하여 이르되 누구든지 일어나서 이 여리고 성을 건축하는 자는 여호와 앞에서 저주를 받을 것이라 그 기초를 쌓을 때에 그의 맏아들을 잃을 것이요 그 문을 세울 때에 그의 막내아들을 잃으리라 하였더라.”(수6:26) /“그 시대에 벧엘 사람 히엘이 여리고를 건축하였는데 그가 그 터를 쌓을 때에 맏아들 아비람을 잃었고 그 성문을 세울 때에 막내아들 스굽을 잃었으니 여호와께서 눈의 아들 여호수아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더라.”(왕상16:34)
6. 사신단의 행색을 꾸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여 그들과 화친을 맺은 주민들은 누구며, 결국 그들은 이스라엘 내에서 어떤 일들을 하며 살아가게 됩니까?(수9:3~6,27)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그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여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 기브온 주민들, 여호와의 성막에서 일평생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살게 됨(르비딤).
'느디님'이란 제사장과 레위인의 수하에서 성소의 잡일을 하던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주어진 자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들은 주로 기브온 사람이거나 다른 가나안 부족 사람들이었는데, 포로로 잡혀오거나 투항해서 성전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여기서는 주로 기브온 주민들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합니다.
* 기브온 지도자들의 결단
기브온은 '언덕', '높은 곳'이라는 뜻으로, 예루살렘 서북쪽 약 9,6Km 지점에 위치한 성읍으로 당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머물고 있던 길갈에서부터 사흘 길이 채 안 되는 가까운 곳에 위치했습니다(수9:16). 특히 기브온은 해발 약 792m의 구릉 위에 세워진 도시로서 주변의 그비라, 브에롯, 기럇여아림 등의 소성읍을 장악하고 있을 정도로(수9:17) 당시 꽤 큰 세력을 가지고 있던 왕성이었습니다. 주변 왕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그때에 여호수아가 아이를 빼앗아 진멸하되 여리고와 그 왕에게 행한 것 같이 아이와 그 왕에게 행한 것과 또 기브온 주민이 이스라엘과 화친하여 그 중에 있다 함을 예루살렘 왕 아도니세덱이 듣고 크게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기브온은 왕도와 같은 큰 성임이요 아이보다 크고 그 사람들은 다 강함이라.”(수10:1,2)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온이) 굳이 이스라엘과 화친하기를 원했던 이유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이스라엘의 군사력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다음의 구절들을 통해 그 실마리를 찾아보기로 합시다.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들의 종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 이같이 하였나이다...”(수9:24-25)
기브온 지도자들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사신들을 위장하여 보내면서까지) 그들이 왜 그토록 이스라엘 백성들과 화친하고자 했는지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하게 합니다. 무엇 때문입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군사력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이제까지 이스라엘과 함께 하셨던 여호와 하나님 때문입니다. (마치 여리고 성의 기생 라합이 두 정탐꾼을 만나기 전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알고 두려워했듯) 그들은 일찍부터 여호와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이스라엘을 주목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가나안 족속 진멸에 관한 명령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수9:24). 그러므로 그들은 선택을 해야만 했습니다. 다른 가나안 족속들처럼 여호와 하나님과 이스라엘에 대항하다가 최후를 맞든지, 아니면 어떻게 해서라도 여호와 하나님의 아래로 들어갈 방법을 찾는지 말입니다. 기브온 지도자들의 어깨는 참으로 무거웠습니다. 자신들의 선택에 따라서 국가의 존망이, 후손들의 미래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 느디님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기브온 지도자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이는 마치 기브온 족속의 마음을 대변이라도 하듯 시편 84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화친한다는 것, 그것도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지도자들을 속여 가면서까지 그리한다는 것은 장차 이로 인해 파생될 어떤 불이익을 기꺼이 감수해야 함을 의미했습니다. 이 점을 결코 모르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브온 지도자들은 기브온의 모든 거민들을 위해서 어렵고 힘든 결단을 단행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브온의 행동이 모두 옳았다고 말씀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찾고자 한다면) 여호수아와 족장들을 속이는 것 말고도 다른 정당한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리고에서 구원받은 기생 라합과 그의 가족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 하나님은 자신의 날개 아래로 들어와 도움을 구하는 백성들을 결코 외면치 않으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수 9:22-23)
결국 모든 게 다 들통 났고 (기브온 거민들은) 그 벌로 하나님의 집에서 대를 이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일들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진멸해야 할 대상이 아닌 ‘하나님의 집에서 대를 이어 봉사하는 자들로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게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기브온 족속은 하나님의 성막과 성전에서 하나님을 위해 온갖 허드렛일을 맡는 것을 자신들의 소명으로 알고 묵묵히 감당해온 것입니다. 느디님으로서의 삶 말입니다.
* 하나님을 택한 사람들
느디님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의 수하에 속하여 성소의 잡일을 하며 산다는 것 자체가 곧 날마다 ‘자기를 부인 하며 살아가는 험난한 길의 연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나무를 패고 물을 긷는 것. 어찌 그 두 가지 일만 했겠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들 곁에 서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늘 여러 가지 잡다한 일들을 수종 들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훗날 기브온은 레위인의 성읍으로 지정되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이스라엘 자손이 제비 뽑아 레위 사람에게 준 성읍들과 그 목초지들이 이러하니라....또 베냐민 지파 중에서는 기브온과 그 목초지와....”(수21:8,17) 특히 솔로몬 통치 초기까지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하나님의 회막이 기브온에 있었을 정도로 유명한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에 왕이 제사하러 기브온으로 가니 거기는 산당이 큼이라 솔로몬이 그 제단에 일천번제를 드렸더니 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 3:4,5) /"솔로몬이 온 회중과 함께 기브온 산당으로 갔으니 하나님의 회막 곧 여호와의 종 모세가 광야에서 지은 것이 거기에 있음이라... 옛적에 홀의 손자 우리의 아들 브살렐이 지은 놋 제단은 여호와의 장막 앞에 있더라 솔로몬이 회중과 더불어 나아가서."(대하 1:3-5)
이처럼 기브온은 이스라엘의 종교적인 중심지로서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입니다. 이는 필시 하나님께서 기브온 족속의 결단을 높게 평가하시고 그에 대해 상응한 선물을 주신 것이라 여겨집니다. 한편, '느디님'이란 외국인이었다가 이스라엘에 종 되었던 자들로 성전 수종자로 번역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말이 성전 수종자이지 그들은 성전의 노예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비천한 대우에도 불구하고 한 번 알게 된 하나님을 끝까지 배반하지 않았던 기브온 거민들이 참으로 귀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에스라 2:43-54). 그들의 섬김은 다윗 시대에서도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윗과 방백들이 레위 사람들을 섬기라고 준 느디님 사람 중 성전 일꾼은 이백이십 명이었는데 그들은 모두 지명 받은 이들이었더라."(에스라 8:20)
* 숱한 시련 속에서도 결코 자신들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다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그들은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라 이스라엘 족속들이 전에 그들에게 맹세하였거늘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히 있으므로 그들을 죽이고자 하였더라..."(삼하 21:2)
그들은 이스라엘과 함께 그 역사를 같이 했으나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숱한 시련과 박해를 당해야만 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건이 바로 ‘사울 왕의 기브온 족속 학살 사건’입니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겠지만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은 기브온 족속을 계획적으로 말살하고자 했고, 그 결과 수많은 기브온 거민들이 비참하게 죽어갔습니다. 마치 독일이 유대인들을 집단적으로 학살했듯 말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에 대해서 무심(無心)했던 사울이 무슨 이유에서 기브온 거민들을 이 땅에서 축출하고자 했을까요? “사울이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위하여 열심히 있으므로”(삼하21:2)라는 구절로 보아 (히틀러의 경우처럼) ‘인종청소’를 감행하려 했던 것 같은데 이는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를 연상케 합니다.
아무튼 이 사건은 기브온 족속으로 하여금 ‘느디님으로서의 삶’에 대한 회의를 품게 하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사울의 잔혹한 박해 속에서 그들을 보호해주셨고, 다윗 시대에 이르러 그 억울한 사정을 신원하여 주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나라를 잃고 낯선 바벨론에 끌려갔을 때 기브온 거민들도 함께 갔으며, 70여년 후 바사가 제국이 들어서면서 이스라엘의 고토로의 본격적인 귀환 행렬이 시작될 때에 수많은 그들의 후손들 역시 이스라엘과 함께 고토로 귀환했던 것입니다. '느디님으로서의 삶'이 소위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인 줄 뻔히 알면서도 말입니다.
에스라 2: 43-54에 보면 느디님 35가문이 귀환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느디님과 비슷한 처지에 있던 다른 족속들도 있었습니다(‘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에스라 2:55-57). 솔로몬은 가나안 땅에 남아 있던 원주민을 종으로 삼아 역군으로 부린바 있는데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란’ 이들의 후손을 의미할 것입니다. 그들은 갈대아인(바벨론)에 의해 포로로 잡혀갔고, 계속해서 거기서도 역군으로 종사한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느디님 사람들과 함께 자신의 낮은 지위를 원망하지 않고 어떻게든 주를 위해 일하기 위해 돌아온 점이 참으로 가상하다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에스라의 귀환 시, 이 같은 느디님 사람과 솔로몬의 신복의 자손이 392명이었는데 이들은 레위 자손, 노래하는 자 및 문지기들을 모두 합한 숫자보다 훨씬 많았습니다). 느디님으로서의 삶....기브온 족속이 선택한 그 길....여러분은 어떤 결단 앞에 서 있습니까?
참고) 태양이 정지된 사건은 사실이었다.
수년 전 미국인디애나 주에서 발행되는 이브닝 월드지에는 ‘태양이 멈춘 이야기’란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성경의 진리가 컴퓨터에 의하여 입증된 놀라운 사실이 있다. ‘메릴랜드 주 볼티모어’ 시에 있는 커티스 기계회사 사장이며, 우주계획 고문인 ‘헬롤드 힐’ 씨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말했다. 우주관계 과학자들은 날마다 전자계산기 앞에서 지금으로부터 10만 년 전까지 소급하여 올라가면서 그 사이의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폈다. 인공위성이 가는 궤도상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므로 태양과 달의 궤도 진행을 살폈다. 태양과 달의 궤도를 자세히 알지 못하면 인공위성을 발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조사를 하던 중에 갑자가 기계가 정지해 버렸다. 전자계산기의 동작이 정지되고 적신호가 켜졌다. 그런데 조사결과 기계에는 이상이 없었다.
우주과학자들은 전자계산기를 면밀히 조사한 결과 궤도 진행상에 “꼭 하루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제는 “하루”, 즉 “24시간”이 어디로 가버렸느냐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성경에 여호수아 때에 태양이 하루 동안 정지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생각해 내고 전자계산기 그 당시로 돌려서 여호수아시대의 궤도를 조사한 결과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다는 답을 얻게 되었다. 성경에 “거의 종일토록”이라고 했으니 23시간 20분 동안 궤도가 정지했다는 답을 얻게 되었다. 23시간 20분이라는 계산은 정확한 것이기는 했으나 아직도 40분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태양이 뒤로 물러갔다는 말씀을 기억했다. 열왕기하 20장 8~10절에는 태양의 그림자가 10도 뒤로 물러갔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10도를 시간으로 계산하면 40분에 해당한다. 그리하여 잃어버린 24시간의 행방을 찾아낼 수 있게 되었다.
그야 물론 인간이 자기가 만든 시계 바늘을 뒤로 돌리거나 정지하게 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천지 만물을 서거나 뒤로 돌리실 수 있음을 당연한 사실이다. “내(하나님)가 부르면 천지가 일제히 서느니라.”(사48:13) 해가 멈춘 것은 물론 지구가 자전을 정지한 것인데 그 지식이 없던 여호수아는 그냥 해가 멈추라고 명하였고 그 말을 들으신 하나님께서는 지구의 자전을 정지시키신 것인데, 당시 중동 지방에서 해가 종일토록 중천에 머물렀다면 지구 전체가 다 그랬을 터이니, 그러면 중동도 아세아이니 그 당시 지구상의 다른 아세아 지방에도 그런 기록이 있어야 할 것이다. 과연 여호수아와 동시대요, 같은 동양권인 중국의 “야오” 왕 치세에 어느 날 태양이 하늘에 너무 오래 머물러 있어서 천하가 탈 듯 하였다고 하며 애굽, 멕시코, 인도 등에도 그런 이야기가 전해온다.
7. 85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헤브론을 기업으로 받아 그 산지를 정복한 사람은 누구입니까?(수14:12~14)
“그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당신도 그 날에 들으셨거니와 그곳에는 아낙 사람이 있고 그 성읍들은 크고 견고할지라도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시면 내가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그들을 쫓아내리이다 하니 여호수아가 여분네의 아들 갈렙을 위하여 축복하고 헤브론을 그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매 헤브론이 그니스 사람 여분네의 아들 갈렙의 기업이 되어 오늘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온전히 좇았음이라.”
: 여분네의 아들 갈렙
8. 여호수아는 자신의 생을 마칠 즈음 이스라엘 백성을 불러 모아 놓고 오직 누구만을 것을 섬길 것을 간곡히 당부했습니까?(수24:14,15)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너희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 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하니.”
: 여호와 하나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각 지파의 기업 분배를 마친 후 에브라임 산지에 있는 딤낫 세라로 물러가 조용히 인생의 말년을 보내다가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직감하고 백성의 대표자들을 모아 유언에 가까운 고별사를 전했는데(수23,24장) 이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20:24)는 사도 바울의 고백을 연상케 하는 대목입니다.
여호수아는 고별사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위대한 사역들을 되새기게 하는 것은 물론,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과 권능을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땅히 지켜야 할 사실들을 주지시키면서 결국 이방의 모든 신들을 치워버리고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영원토록 섬길 것을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그들의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모두 치워버릴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수24:14) 우리는 어떠합니까? 치워버려야 할 것들 속에 여전히 파묻혀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끔히 다 치워버립시다. 무엇을 치워버려야 하냐구요?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 즉, 하나님보다 더 위하고 섬기는 유·무형의 것들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까? 우리 자신을 곰곰이 되돌아보십시오. 찾아내서 반드시 말끔히 다 치워버려야 합니다.
그러기 전까지 우리는 결코 하나님 한 분만을 섬길 수 없습니다. 왜냐 구요?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16:13)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님과 인터넷 게임을 동시에 섬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하나님과 도박, 하나님과 알코올을, 하나님과 음란을, 하나님과 이성 친구를 겸하여 섬길 수 있다고 보십니까? 단언컨대, 우리는 결코 둘 다를 만족시킬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선택해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악하게 보이거든, 마음에 들지 않거든, 섬기고 싶지 않거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저와 제 집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겠습니다. 어정정한 태도를 보이지 마십시오. 뜨겁든지 차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하십시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3:15,16)
신앙생활에 있어서 ‘중립 지대’란 있을 수 없으며, 둘 다 모두 선택하는 것 역시 결코 있을 수 없습니다. 여호와를 섬긴다는 것은 곧 그 외의 신들을 모두 부정한다는 말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여호와 하나님만이 참 신이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의 유일한 구원자임을 고백하고 있습니까? 지금 선택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