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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공기가 다르기는 합니다. 말복을 지나고 나니 역시, 이런 걸 선진들의 지혜라고 하나요? 아무튼 그래도 여전히 덥기는 합니다. 하지만 점점 수그러들지 않겠습니까? 시간이 뒤로 가지는 않을 테니 말입니다. 금년에는 추석도 빨라서 더위도 조금은 빠르게 꺾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 놓을 때는 아닙니다. 9월까지는 태풍도 가능하니까요. 조금씩 길어지는 해 그림자를 보며 날짜가 가고 있음을 느낍니다. 거실 안으로는 햇빛이 점점 파고듭니다. 여기저기 시간의 흐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사실 그런 거 느끼지 않고 살아야 살맛나는 삶일 텐데 말입니다.
다음 주에는 초등학교도 개학을 하겠지요. 주변 중 고등학교는 이미 개학을 한 모양입니다. 아침 산행에서 등교하는 학생들을 봅니다. 조용했던 길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니 한결 사람 사는 기분입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개학하며 그 소리가 더 커질 것입니다. 조잘조잘 왁자지껄, 사람 사는 정도가 아니라 활기찬 삶이 그려집니다. 저런 때를 지나왔다는 것이 너무나 흐릿해지고 있습니다. 이제는 커다란 덩치가 그들만도 못해지는 것 같아 마음이 짠해집니다. 어쩌면 지나온 시간만큼의 반도 남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잘 버티기 위해 오늘도 아침 산행을 다녀옵니다.
다음 주에는 ‘처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가을을 준비해야 할 텐데, 열흘 지나면 9월입니다. 풍성한 들과 산이 풍성한 마음으로 들어오기를 소망합니다. 건강하세요. *)*
2022년 8월 20일 김종우 목사 드림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 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 (잠언 21 : 3)
<헌트>
우리는 역사상 매우 짧은 시간 내에 민주주의를 실현해서 누리는 나라 중 하나입니다. 서구에서는 긴 역사의 과정을 거치며 이루어낸 체제를 단시간 내에 적용하다보니 그 짧은 시간 겪어야 할 시련이 많았음을 압니다. 그리고 아직도 발전해 나가고 있는 상황이지요. 해방 후 80년 가까운 시간 속에 약 1/3은 군사독재 그늘 아래서 지냈습니다. 민주공화국이라는 이름 하에서 무력을 앞세운 일인 독재를 행했습니다. 옛날 왕권시대에나 누릴 법한 절대 권력을 행함으로 많은 사람이 신음하였고 희생도 당했습니다. 독재는 비슷한데 우리와 다르게 북한은 공산주의 체제의 독재이고 우리는 민주주의 체제 하에서 독재를 행하였습니다. 어느 쪽이 나을까요?
물론 그 어느 쪽도 원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민의에 의한 참 민주주의 체제를 원합니다. 그것을 위해 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여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선택해야 한다면 어느 쪽이 나을까 생각해봅니다. 북에는 공산주의 독재, 우리는 민주공화정의 군사독재였습니다. 그리고 군사독재가 알차게 이용한 것이 바로 반공정책입니다.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 툭하면 ‘빨갱이’로 몰아붙여 제거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공산주의보다는 그래도 민주주의 하에서 독재가 낫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대부분의 국민이 그러려니 하고 따랐으니 말입니다. 물론 그 속내를 알아챈 국민의 저항이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 이념적 분열은 여태 지속되고 있습니다.
사람은 왜 권력을 쥐고 행사하려 할까요? 권력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잘 압니다. 자신의 욕망이나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그리고 도구로서 권력은 참으로 막강하고 유용합니다. 자신이 원하는 대상을 취하고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는 도구입니다. 아마도 그것을 위해 권력을 차지하려고 애쓰는 모양입니다. 권력을 쟁취하려 돈을, 힘을, 개인적인 능력과 재주를, 주변 사람들의 도움 등등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아무튼 궁극적으로 권력을 얻어야 합니다. 그 힘의 남용과 악용을 방지하려고 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삼권분립이라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서로 견제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독재자가 등장하여 모두 거머쥐면 무용지물입니다.
그 뒤에는 그 권력자에 빌붙어 그 권력을 차용하여 사욕을 채우고자 하는 자들이 나타납니다. 그렇게 한 독재자 주변은 범접할 수 없는 철옹성을 만들어줍니다. 지금도 그 실제를 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의 독재자들이 좋은 본보기입니다. 나라와 백성을 철저히 통제합니다. 그 모두가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만듭니다. 행여 반대세력이라도 생기면 사전 파악해서 제거할 수 있도록 조직화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권력을 이용하는 소수의 사람들 외에는 대부분의 국민은 지시를 따라 움직여야 하는 로봇이나 다름없습니다. 견딜 수 없다면 그 사회를 탈출해야 합니다. 어떻게 변화를 꾀할 수 있을지 아직도 숙제입니다.
1980년대 2차 군사독재 시대입니다. 위기의 때를 일사분란하게(?) 처리하며 단 시간 내에 권력을 취합니다. 그리고 반항하는 세력도 무력으로 진압해버립니다. 그러니 이제는 반항심이 안으로 쌓여갑니다. 단독으로 순교자 역을 감행하려는 사람도 생깁니다. 그런가 하면 외부의 힘을 이용하여 일단 머리를 제거하려 하는 사람도 생깁니다. 독재자와 주변 핵심인물들에게는 위험요소입니다. 이용할 수 있을 만큼 써먹고 딴 마음먹으면 제거합니다. 다른 한편 일인 독재자의 마음을 사려고 너도나도 충성스런 작업도 시행합니다. 그러니 서로가 견제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최고 권력자는 밑에서 움직이는 이 세력들을 서로 견제시키며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이용할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왕과 대신들 간의 권력투쟁 하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합니다. 왕은 왕대로 왕권강화를 위해 애쓰고 대신들은 또 자기들의 권한을 최대한 확보하고자 애씁니다. 그 극렬한 대치를 보여주는 예가 ‘장희빈’ 사건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싸움 이야기는 사실 당시 남인과 서인 간의 세력다툼 속에서 벌어지는 사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숙종은 그들 간의 다툼을 자신의 왕권유지에 기막히게 이용합니다. 한 때는 남인 편을 얼마 후에는 서인 편을 들면서 균형을 이루게 하고 자신의 입지, 왕권을 확고하게 다지는 것이지요. 해외팀 ‘박평호’와 국내팀 ‘김정도’의 알력과 견제는 어찌 보면 일인자의 자기보존 방법이면서 오히려 양쪽의 표적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1983년 아웅산 테러사건을 잘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사건을 동기로 해서 만든 작품입니다. 기막히게 조합을 시켰구나, 감탄을 자아냅니다. 마무리 단계에 가서야 깨달았습니다. 실제라고 믿지는 않지만 이야기 구성은 참으로 잘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당시 북한의 계획된 테러라고 보도되었습니다. 그럴 만한 근거들도 분명 있었겠지요. 사실이야 어떠하든 두 사람의 극한 대결 속에서 당시 상황을 구현해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너무나 그럴 듯합니다. 영화 ‘헌트’(Hunt)를 보았습니다.
<시대별 하나님의 백성>
늦은 시간 전철 막차 안에서 술이 거나하게 취하고 행색이 좀 허름한 사람이 조는 듯 깨어나 옆에 앉은 아가씨에게 묻습니다. ‘저 이 차 기름으로 가는 거 맞나요?’ 그랬더니 이 아가씨가 눈을 치켜뜨고는 대뜸 대답합니다. ‘아저씨 미쳤어요? 이 전철이 어떻게 기름으로 가요? 기가 막혀서.’ 이 아저씨가 정신이 화들짝 나는 듯하더니 전철이 서기가 무섭게 후다닥 내리는 겁니다. 그리고는 두리번두리번 거리는 거예요. 그 사이 전철 문이 닫혔습니다. 그런데 밖에서 이 아저씨가 펄쩍펄쩍 뛰면서 전철 안의 그 아가씨를 손가락질 하면서 뭐라고 막 욕하는 듯 야단입니다. 아가씨는 별 미친 사람 다보겠다는 식으로 가만있었지요. 전철은 아랑곳없이 출발을 했습니다. 몇 정거장 가더니 안내 방송이 들립니다. ‘다음 역은 길음, 길음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왼쪽입니다.’ 그 제서야 이 아가씨 아차 싶었지요. 그렇구나! 그런데 이미 지난 일이지요. 그 아저씨 어떻게 집에 갈까?
우스갯소리에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우리와 하나님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될까요? 종종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의 의사소통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경험합니다. 심한 경우를 예로 하여 우스갯소리를 시리즈로 만든 것이 ‘사오정 이야기’입니다. 저도 나이가 드는 탓인지 가는귀가 먹었습니다. 아내의 말을 잘 못 알아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그럽니다. ‘당신 사오정이야?’ 자기가 질문하는 것과 영 딴판으로 대답을 하니까 그런 말을 듣는 겁니다. 아무튼 서로 이야기하는데 한쪽에서는 사과 이야기하는데 상대방이 복숭아 이야기로 듣는다면 웃기는 것은 고사하고 자칫 오해와 다툼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바르게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바르게 듣는 것이 그래서 중요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주제를 벗어나고 엉뚱한 오해를 만들게 됩니다.
우리들 사이의 이야기는 그렇다 해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인생을 거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습니다. 생명과 사망, 천국과 지옥의 갈림길에서 오락가락할 수 있다는 말이지요.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일이 아닙니까? 물론 하나님이 잘못하실 리는 없습니다. 그러면 누가 잘못하는 걸까요? 하나님 말씀에 오류가 없다면 그건 보나마나 바로 우리 잘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을 엉뚱하게 듣는 겁니다. 중요한 것은 듣는 것뿐만 아니라 엉뚱하게 전하는 것이지요. 말씀 전하는 목자가 하나님 말씀을 잘못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자기 하나 잘못하고 끝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것을 하나님이 맡겨주신 양떼에게 전하니까 문제가 심각해지는 것입니다. 소위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격이 되는 겁니다. 함께 구덩이에 빠집니다.
이제 성경을 오해하는 경우를 보도록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 말씀임을 굳게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오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시는 대로 아멘! 하고 받으면 됩니다. 하나님에게는 잘못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면 어디서 잘못이 생깁니까? 전하는 자로부터 생기는 것입니다. 왜요?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못 이해했기 때문이지요. 잘못 해석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경고하신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 뜻과는 전혀 다르게 자기 뜻대로 전한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경고하셨습니다. 사 29 : 13 “주께서 가라사대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나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이 백성’이 누구입니까? 바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하나님 섬기는 방법이 어떻다고요? 예,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치고 배운다는 겁니다. 하나님 뜻과는 상관없다는 뜻이지요.
이제 그 예를 보겠습니다. 예수님 초림 때 그랬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말씀하십니다. 마 15 : 3 - 6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어찌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범하느뇨 하나님이 이르셨으되 네 부모를 공경하라 하시고 또 아비나 어미를 훼방하는 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거늘 너희는 가로되 누구든지 아비에게나 어미에게 말하기를 내가 드려 유익하게 할 것이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 부모를 공경할 것이 없다 하여 너희 유전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 ‘너희 유전으로’ 즉 사람의 계명으로 하나님을 섬기도록 가르치니 오히려 하나님 말씀을 거스른다 그 뜻입니다. 우리가 이런 잘못을 범한다면 어쩌겠습니까? 두렵지요. 그런데 알게 모르게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내가 언제? 하고 반대하겠지만 한번 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 왜곡 첫 번째 경우가 바로 역사 왜곡입니다. 아주 기본적인 사항부터 점검해보겠습니다. 잘 아는 대로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들어야 하는 상대방이 있겠지요. 하나님이 당신 혼자서 독백을 하지는 않으셨을 것입니다. 누가 들어야 하겠습니까? 아버지가 말씀하십니다. 누가 듣습니까? 자식들, 아니면 가족이 듣겠지요. 지나가는 아이들이 다 듣는 게 아닙니다. 또 그러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에 많은 아이들이 있지만 아버지가 말씀하시는 상대는 바로 당신의 자식들입니다. 또 설령 지나가는 아이들에게 그 소리가 들린다 해도 그 아이들이 그 말씀에 주목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말씀하신 상대는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바로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출 19 : 3절을 보겠습니다. “모세가 하나님 앞에 올라가니 여호와께서 산에서 그를 불러 가라사대 너는 이같이 야곱 족속에게 이르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라” 하나님이 모세에게 지시하십니다. 누구에게 말하라고요? ‘이스라엘 자손에게’입니다. 세상에 많은 나라 많은 족속이 있지만 하나님은 유독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이어서 5 - 6절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할찌니라” 그렇습니다. 온 세계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모든 나라 모든 족속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입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그렇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가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잘 듣고 행해서 온 세상 모든 나라들 가운데 제사장 나라로 만드시고자 하는 것입니다. 제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 열두 지파 가운데 오직 레위 지파가 하나님 성전을 봉사하도록 선택되었고 또 그 레위 지파 가운데서도 아론의 자손만이 제사장이 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선택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세상 만민 가운데서 이스라엘을 하나님 당신의 백성으로 택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들을 세상 만민 가운데서 제사장 나라로 사용하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도 먼저 그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세상 만민에게 모두 한꺼번에 주신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뜻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엉뚱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가령 영자에게 쓴 편지를 순자가 자기에게 쓴 것으로 알고 읽는다면 그 뜻이 온전히 전해지겠습니까? 웃기는 일이지요. 하나님 말씀 성경은 세상 사람들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에게 하신 하나님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면 성경은 엉뚱한 데로 흘러가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의 말씀을 확인합니다. 신 10 : 14 - 15 “하늘과 모든 하늘의 하늘과 땅과 그 위의 만물은 본래 네 하나님 여호와께 속한 것이로되 여호와께서 오직 네 열조를 기뻐하시고 그들을 사랑하사 그 후손 너희를 만민 중에서 택하셨음이 오늘날과 같으니라” 아멘!
그렇다면 이 성경 속에 누구의 이야기가 들어있겠습니까? 당연히 당신 백성의 이야기가 들어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넣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영자에게 사랑의 고백을 하는데 순자의 이야기를 한다면 말이 되겠습니까? 거기에 순자는 어디가 예쁘다는 둥 무엇이 마음에 든다는 둥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영자가 그 편지를 읽겠습니까? 말이 안 되지요. 물론 지나가는 이야기로 곁들여 나올 수는 있겠지요. 그러나 오로지 주제는 영자이고 목표도 영자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말씀하시는데 그 관심은 오로지 당신의 백성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의 백성에게 이 성경을 주신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왜 성경을 주셨다고요? 당신의 백성 이스라엘에게 영생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앞에서 보았듯이 세계가 다 하나님께 속하였어도 하나님이 영생을 주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입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신 4 : 39 - 40 “그런즉 너는 오늘날 상천하지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요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규례와 명령을 지키라 너와 네 후손이 복을 받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서 한없이 오래 살리라” 여기 말씀하시는 ‘너’가 누구입니까? 세상 만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오는 역사는 누구의 역사이겠습니까? 하나님 백성의 역사입니다. 세상의 역사가 아닙니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렇게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전에 우리가 알았듯이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의 조상입니다. 그래야 세상 과학과 충돌할 필요도 없습니다. 아담으로부터 예수님까지 아무리 계산해 봐도 4천 년 그 이상 나오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아담을 인류의 조상이라고 극구 우긴다면 세상에서 과학자들이 증거하는 인류의 역사와 충돌합니다. 그러니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눈에는 과학을 무시하는 비이성적인 존재들로 보이게 됩니다. 그런 무지를 나타낼 필요가 없습니다. 아담은 인류의 조상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조상일 뿐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고 하지요. 이스라엘의 역사도 6천 년이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간단합니까? 얼마나 합리적입니까? 이것 가지고 다툴 이유도 없습니다. 창 4 : 14 “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이 동생을 살해하고 도망갑니다. 그런데 살인자라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죽일까봐 두려워합니다. 도대체 성경에 아직 아담과 하와 그리고 자기가 죽인 아벨 외에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구를 두려워하는 겁니까? 상상으로 만들어낼 것이 없습니다. 이미 이스라엘 백성 외에 사람들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세상 만민 가운데 아담을 택하셨습니다. 그리고 언약을 하셨지요. 창 2 : 16 - 17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하시니라” 사실 영생의 기회는 이미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 말씀을 거역하였습니다. 영생의 기회가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자손들을 이어가며 당신의 백성을 일으키십니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이어서 그 열두 아들들 그리고 그 후손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을 만드십니다. 약속하신 메시야,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실 때까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계속 말씀하십니다. 모세를 통하여 십계명과 이어 율법을 주셨고 그 후에도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계속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계속 하나님의 도(말씀)를 떠나 하나님이 주시고자 하던 영생과는 딴판으로 나갑니다. 하나님의 요구하신 바를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신 30 : 19 - 20 “내가 오늘날 천지를 불러서 너희에게 증거를 삼노라 내가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또 그에게 부종하라 그는 네 생명이시요 네 장수시니 여호와께서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리라고 맹세하신 땅에 네가 거하리라”
그러나 땅의 이스라엘 백성은 끝까지 하나님을 배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약속하신 메시야 당신의 아들까지 보내주셨지만 그마저 거부하였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들을 심판하셨습니다. 이것이 율법 안에 있던 구약 이스라엘의 역사입니다. 즉 혈통으로 이어온 하나님 백성, 쉽게 말해서 육적인 이스라엘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눅 16 : 16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육적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역하고 영생의 길을 포기하였으므로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영적 이스라엘을 창조하셨습니다. 이 일련의 사건을 요약해서 요 1 : 11 - 13절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아멘!
주님이 자기 땅에 오셨습니다. 즉 당신의 백성에게로 오셨다는 말이지요. 그러나 그 백성은 영접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냥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는 자에게 하나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구약 시대의 혈통 중심에서 벗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지요.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제 혈통은 문제가 아닙니다. 오로지 말씀과 성령으로 거듭나야 합니다. 예수님이 밤에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요 3 : 5 “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오늘날 우리가 하나님 백성이 된 것이 바로 그 덕인 줄 압니다. 이전에는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 백성 곧 이스라엘이라 칭함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스라엘은 기나긴 세월을 내려오는 동안 하나님을 거역하고 그 말씀 곧 언약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참고 참으며 기다리셨지만 아담의 피로 이어온 하나님 백성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등졌습니다. 그래서 아담의 세계를 홍수로 심판하셨듯이 혈통으로 이어온 이스라엘을 심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를 끝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시작으로 영적 이스라엘을 시작하셨습니다. 육적 이스라엘의 역사는 아담으로 시작하여 세례 요한까지 대충 4천 년입니다. 그 후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심으로 시작된 영적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금까지 약 2천 년이 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 영적 이스라엘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구원이 다 이루어졌는가?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는가?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가 없겠지요. 육적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구원을 받고도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기까지의 구원의 여정을 밟았던 것처럼 우리 또한 영적 이스라엘로 세상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영적 가나안 땅인 천국으로의 구원의 여정을 밟고 있는 것입니다. 빌 2 :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문제는 영적 이스라엘인 우리도 육적 이스라엘 백성이 밟았던 전철을 그대로 따라가기 쉽다는 것이지요. 그들이 잘못했던 그 길을 우리가 따라가고 있을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고전 10 : 1 - 6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내가 원치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다 같은 신령한 식물을 먹으며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그러나 저희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신 고로 저희가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느니라 그런 일은 우리의 거울이 되어 우리로 하여금 저희가 악을 즐겨한 것같이 즐겨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 함이니” 그렇습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때마다 신령한 식물, 신령한 음료를 먹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지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육적 이스라엘은 애굽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가는 도중 광야에서 멸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거울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왜요? 우리에게도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저희가 악을 즐겨했다고 하는데 ‘저희’가 누구입니까? 바로 구약시대 육적 이스라엘 백성입니다. 그러면 오늘 신약시대에는 누가 이스라엘이겠습니까? 영적 이스라엘 백성 바로 우리 아닌가요? 우리도 하나님 앞에 악을 행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그 악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호 6 : 7 “저희는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서 내게 패역을 행하였느니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어기는 일입니다. 저들은 구약의 하나님 언약을 가지고 신앙했지만 오늘 우리는 신약의 언약을 가지고 신앙하고 있습니다. 그 언약을 지키고 있나요? 지킬 수 있나요?
전체적인 역사를 보더라도 크게 BC와 AD로 나뉩니다. 성경으로 말한다면 구약시대와 신약시대입니다. 그리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그 언약(약속)이 이루어지는 때입니다. 새로운 시대가 열리는 것입니다. 일례로 구약이 이루어진 때가 곧 신약시대입니다. 그렇다면 예측할 수 있는 것이 신약이 이루어진 시대가 다가올 것이라는 말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때마다 그 시대를 누리는 하나님 백성이 달라지더라는 것이지요. 간단히 도표를 그려봅니다.
구약시대(육적 이스라엘 백성) ---> 신약시대(영적 이스라엘 백성) ---> 새 시대(새 이스라엘)
구약을 가지고 신앙 구약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신약이 이루어진 것을 믿고 신앙
신약을 가지고 신앙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당신 백성과 언약을 맺으십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언약을 지키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심판하고 새로 당신 백성을 창조하십니다. 그리고 다시 언약을 하십니다. 성경 역사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언약을 지킨 당신 백성과 영원히 함께 사는 것입니다. 바로 그곳이 천국입니다.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가 천국은 오로지 하늘 곧 영계에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이루고자 하는 천국은 바로 여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입니다. 지금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기에 생명이 아니라 죽음으로 끝납니다. 처음 하나님이 그러자고 창조하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사람을 죽으라고 창조하신 것이 말이 안 됩니다. 그래서 아담에게 영생을 약속하셨고 그 길도 마련해두셨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고 죽게 되었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세계를 심판하고 새로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여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를 통하여 죄 곧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이제 세상을 주관하는 마귀의 세력을 쫓아내는 일만 남았습니다. 이에 관한 언약이 새 언약이고 마지막 때 이룰 역사입니다. 잘 아는 요한계시록에 정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언약이니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 때 새 언약이 이루어진 사건들을 믿고 신앙하는 자들로 하나님이 당신 백성을 삼아 하나님 나라 곧 천국을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영계가 아니라 바로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사실 하늘의 영계가 이 땅으로 내려와서 하나가 된다고 합니다. 계 21 :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새 이스라엘의 소망입니다. 믿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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