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12월 18일 대림 제3주간 목요일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 마태오 1,18-24)
“Joseph, son of David, do not be afraid to take Mary your wife into your home. For it is through the Holy Spirit that this child has been conceived in her. She will bear a son and you are to name him Jesus, because he will save his people from their sins.”
말씀의 초대
예 레미야 예언자는 미래의 임금 메시아의 도래를 예언한다.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태어날 그는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펼 것이다.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졌다(제1독서).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경위를 전해 준다. 여기에는 하느님의 섭리에 대한 인간의 협조가 있었다. 곧, 마리아가 성령의 힘으로 예수님을 잉태하셨지만, 이를 받아들인 요셉의 순명도 뒤따랐던 것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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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오 늘 복음은 요셉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았음을 들려줍니다. 요셉은 약혼자의 임신에서 세상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불명예가 아니라, 메시아 약속의 성취를 보았습니다. 그는 믿음의 눈으로 그 신비를 보았습니다. 이처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을 익히는 때가 대림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미 국 현대 문학의 대표 작가로 꼽히는 소설가 레이먼드 카버의 걸작인 『대성당』이라는 작품집이 있습니다. 그의 단편 소설 열두 편을 모은 것인데, 마지막 단편에는 뜻하지 않게 ‘시각 장애인’에게서 ‘보는 법’을 배우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는 삶에 지친 나머지 활기를 잃어버린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집에 아내의 손님인 한 시각 장애인이 방문합니다. 이 손님맞이는 그에게 귀찮은 일이었습니다. 그는 텔레비전의 장면을 하나하나 얘기해 주어야 했습니다. 시각 장애인은 대성당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해 달라고 합니다. 그는 성당의 외형을 열심히 설명하다가 포기하며 말합니다. “어마어마해요. 돌로 만들었죠. 때로는 대리석으로도요. 사람들이 하느님께 더 가까이 가고 싶었던 거죠. 그 옛날에는 모든 삶에서 하느님이 중요한 부분이었지요.” 시 각 장애인이 갑자기 ‘그게 어떤 형태로든’ 신앙심을 불러일으키는지 묻자 그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오랫동안의 고민을 털어놓습니다. “뭘 믿는 건 없다고 봐야겠죠. 아무것도 안 믿어요. 그래서 가끔은 힘듭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대성당이라고 해서 나한테는 뭐 특별한 게 아니거든요. 아무 의미도 없어요.” 그러자 시각 장애인은 그가 지금 본 대성당을 ‘눈을 감고’ 함께 그려 보자고 합니다. 그의 손 위에 시각 장애인의 손이 얹히고 둘은 함께 대성당을 그립니다. “ ‘그럼 계속 눈은 감고.’ 시각 장애인이 말했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했다. 내 손이 종이 위를 움직이는 동안 그의 손가락들이 내 손가락들을 타고 있었다. (중략) 그때 그가 말했다. ‘이제 된 것 같은데, 해낸 것 같아. 한번 보게나. 어떻게 생각하나?’ 하지만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조금만 더 그렇게 눈은 감은 채로 있자고 나는 생각했다. (중략) ‘어때? 보고 있나?’ 나는 여전히 눈을 감고 있었다. 나는 우리 집 안에 있었다. 그건 분명했다. 하지만 내가 어디에 있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다. 나는 말했다. ‘이거 진짜 대단하군요.’”
오늘의 묵상
2014-12-18 대림 제3주간 목요일 심종미 수녀 당신은 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요셉은 마리아와 다르게 꿈에서 천사의 방문을 받는다. 자신과 약혼한 마리아의 임신 소식을 듣고 요셉은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었다. 율법에 따르면 처녀가 아이를 가지면 돌에 맞아 죽어야 하기에 요셉은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배신감 사이에서 갈등하며 ‘하느님, 제가 어떻게 해야 하나요?’ 하며 기도했을 것이다. 고민 끝에 요셉은 이 사실을 세상에 알리지 않고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한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이 결정을 보시고 그의 무의식인 ‘꿈의 자리’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말씀하신다. 프로이트는 인간은 꿈을 통해 무의식을 잘 알 수 있다고 말한다. 인간의 무의식 안에는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두려움과 참된 갈망이 있다. 요셉은 꿈에서 세상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하느님의 뜻대로 살고 싶은 참된 갈망을 천사의 말을 통해 깨닫게 된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카를 융C.Jung에 따르면 꿈이란 참된 자기self 가 갈등하고 있는 자아ego에게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곧 꿈은 요셉에게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성경 말씀이 요셉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꿈에서 깨어난 요셉은 자신의 두려움과 배신감이 희망과 사랑으로 변화되는 것을 체험하며 하느님의 뜻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다. 이제는 그 누구의 몰이해와 반대가 있더라도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일 용기와 힘과 확신을 갖게 된다. 하느님께서는 꿈을 통해서도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신다. 우리는 이 꿈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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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믿음, 주님의 믿음>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마태 1,18)." 하느님께서는 '처녀 마리아'가 아니라 '요셉과 정혼한(법적으로 부부가 된) 유부녀 마리아'를 선택하셨습니다. 이것은 마리아의 남편인 요셉도 하느님의 선택을 받았음을 나타냅니다. 당시에는 약혼(정혼)을 한 다음에 일 년쯤 뒤에 동거를 시작하는 것이 관습이었습니다. 요셉과 마리아는 법적으로는 부부였지만 아직 같이 살기 전이었고, 그래서 마리아는 유부녀이면서도 동정녀였습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라고 되어 있는데, 아마도 마리아가 요셉에게만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뒤의 19절에 요셉이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했다고 되어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가족들도) 아직 아무도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모르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말을 안 믿은 것은 아닐 것입니다.) 또 요셉은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잘 몰랐을 것입니다.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마태 1,19)." 여기서 '의로운 사람'이라는 말은 '법을 지키는 것보다 자비를 베푸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 이라는 뜻입니다.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낸다는 것은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사법 당국에 고발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그랬다면 마리아는 공개 처형되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자기의 자존심이나 명예를 지키려고 마리아의 임신 사실을 감추었다고 생각할 수는 없습니다. 요셉은 법의 가혹함을 알고 있었고, 마리아가 어떤 일을 당하게 될 것인지도 알고 있었고, 그래서 마리아를 가엾게 여겨서 '남모르게' 파혼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만일에 요셉이 실제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했다면 마리아는 어떻게 되었을까? 요셉과 마리아가 정혼한 사실은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요셉이 남모르게 파혼했다면(파혼한 사실을 감추었다면) 사람들은 파혼한 사실을 모르는 채로 계속해서 두 사람을 부부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의 임신과 출산은 아무런 문제가 없게 됩니다.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마태 1,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라는 말은, 생각은 했지만 실제로 그 생각을 실행할 것인지는 망설이고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는 것은 하느님의 계시가 내리는 여러 가지 방식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이 표현은 "천사가 나타나는 꿈을 꾸었다."가 아니라, "천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계시가 내렸다."입니다. 꿈이었든지 생시였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천사는 마리아의 임신이 성령 잉태라는 것을 다시 확인해 주면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고 말하고, 아기의 이름이 '예수' 라는 것을 알려주고, 그 아기는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는 분', 즉 메시아라는 것도 알려줍니다(마태 1,20-21). 그런데 천사의 말을 보면, 요셉의 의견을 묻지도 않고 일방적으로 명령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뒤의 24절에는,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라고 되어 있기도 합니다. 또 요셉 자신의 말은 한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요셉은 자유의지도 없이(선택의 자유도 없이) 명령이니까 복종한 것일까? 만일에 그랬다면 요셉은 아무것도 아닌(무생물 같은) 존재가 되어버립니다. 그러나 그는 복종할 의무에 얽매여 있는 '자유 없는 노예'가 아니라 복종하지 않을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던 한 사람의 자유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고 의무를 선택했는데, 이것은 단순한 복종이 아니라 주님의 뜻에 믿음으로 응답한 것입니다. (요셉이 주님의 천사를 천사로 알아보고, 천사가 전하는 말을 주님의 말씀으로 알아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가 올바르게 신앙생활을 하면서 늘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물론 하느님께서 요셉을 선택하신 것은 그가 기꺼이 응답할 사람이라는 것을 잘 알고 계셨기 때문(믿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바로 그 점, 하느님께서 요셉을 믿으셨다는 점이 중요합니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나를 믿으실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는가?" (우리가 하느님을 믿는다는 것만 내세울 것이 아니라, 하느님 쪽에서 우리를 믿으실 수 있도록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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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복음에서는 요셉을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의로운 사람일까요? 요셉의 경우를 보면, 아마도 하느님을 먼저 바라보고 나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첫 번째로, 그는 마리아가 잉태하였다는 사실을 들었습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이라면 마리아를 길거리로 내몰고서 “이 약혼녀가 나와 같이 살기도 전에 아기를 가졌소.” 하고 고발하며 돌에 맞아 죽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면서 세상일을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생명을 존중하였습니다. 그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두 번째로, 그는 꿈에서 천사를 만났을 때에 그 꿈을 믿었습니다. 꿈에서 천사는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에게 이러한 꿈은 개꿈입니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하느님 안에서는 불가능이란 없으며, 그래서 자신과 약혼한 여인이 성령으로 잉태할 수도,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그 아기가 구세주가 될 것도 믿을 수 있었습니다. 세 번째로, 그는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고 구세주의 양부가 되었습니다. 자신이 본디 꿈꾸던 미래는 사라지고 새로운 앞날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일만을 바라보는 사람은 바로 이러할 때에 주님의 천사가 한 말을 무시한 채 자기의 본디 생각대로 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구세주의 양부로서의 부르심을 받아들였고, 그로 말미암아 겪게 될 미래의 몫도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세상일을 닥치는 대로 그냥 처리하고 맙니까, 아니면 잠시라도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 먼저 헤아려 봅니까?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복음서 안에서 조용히 등장했다가 어느 사이엔가 조용히 사라진 인물입니다. 요셉은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데리고 성전에 올라갈 때나 피난을 다닐 때에도 말 한마디 하지 않습니다. 그저 아기와 아기의 어머니를 철저하게 보호하고 묵묵히 자신의 할 일을 할 뿐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도 우리는 요셉의 인품을 어느 정도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기 때문에,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한 사실을 조용히 남모르게 해결하려 합니다. 이러한 요셉의 태도에, 주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에 대하여 특별한 설명을 해 주십니다. 이로써 요셉은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구세주와 그 어머니의 든든한 보호자, 울타리가 된 것입니다. 요셉의 자기 비움이 메시아를 세상에 오시게 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이미 요셉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오실 주님을 따라나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듯이 십자가를 통하여 더 큰 축복을 내려 주십니다. 요셉이 지고 간 십자가의 길은 모든 이를 위한 은총의 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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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를 전혀 모르고 있습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그는 고뇌에 빠집니다.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스스로 물러날 것을 결심합니다. 마음을 비운 것이지요. 그때 천사가 나타나, 주님께서 하시는 일임을 알려 줍니다. 이렇게 해서 요셉은 성가정의 보호자가 됩니다. 고뇌의 시간은 ‘준비 기간’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람으로 바뀌기 위한 ‘단련의 시간’이었습니다. 미국 애리조나 주에는 ‘선밸리’(Sun Valley)라는 도시가 있습니다. 백만장자들이 은퇴한 뒤 모여 사는 곳입니다. 웬만한 부자는 입촌 자체가 안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치매에 잘 걸린다는 보고서가 나왔습니다. 일반 도시인보다 발병률이 높다는 연구 결과였습니다. 사람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지상 낙원으로 만든 도시에서 치매 발병률이 더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조사에 착수했습니다. 원인은 간단했습니다. 아무런 ‘스트레스’도 없고, ‘변화’도 없으며, 전혀 ‘걱정’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너무나 편안한 삶이 그곳 사람들을 치매로 몰았던 것입니다. 아픔 없이는 성장도 없습니다. 육적이든, 영적이든 마찬가지입니다. 십자가 없는 곳에 어떻게 축복이 있을는지요? 요셉의 고뇌는 은총이었습니다.
지금 제가 있는 교구청에는 주교님 두 분과 많은 신부님들이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분위기가 너무 좋아서 자주 모임을 갖곤 하지요. 식사 후에는 커피를 함께 마시면서 이야기를 하고, 또 때로는 밤에 술 한 잔을 함께 기울이기도 합니다. 사실 제 방에서 이런 모임이 자주 이루어집니다. 식구가 많은 집에서 자라서 그런지 손님들이 찾아와 북적북적 되는 것을 좋아하거든요. 그러다보니 갖추어야 할 것이 많습니다. 술잔도 있어야 하고, 찻잔도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밤에 술 한 잔 하려면 안주를 담을 그릇도 있어야 합니다.
며칠 전이었습니다. 제 방에 평소보다 많은 신부님들이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그릇이 부족합니다. 그러다보니 국을 끓이는 냄비가 그릇으로 쓰이고, 찻잔 받침도 접시로 쓰여 음식이 담겨졌습니다. 소주잔이 부족해서 커피 잔이 대신하기도 했습니다. 원래의 용도와 다르게 사용되었던 것이지요.
처음에 냄비를 구입할 때, 그리고 찻잔 받침과 커피 잔을 구입할 때에는 어떤 용도로 쓰려고 했을까요? 라면을 끓이기 위한 용도로 그리고 차를 마시는 용도로 구입한 것이지요. 하지만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용도로도 쓰이더라는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실 우리들은 스스로를 한정지을 때가 너무나도 많습니다. 나는 이 정도만 할 수 있다면서, 새로운 일이 주어질 때에는 절대로 할 수 없다고 쉽게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냄비나 커피 잔과 찻잔이 전혀 다른 용도로도 쓰이는 것처럼, 내 자신은 내가 생각하지 못했던 또 다른 모습으로 이 세상에서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나옵니다. 이 두 분이 처음부터 주님의 아버지, 어머니가 될 것이라고 확신했을까요? 아닙니다. 특히 요셉 성인은 어떠셨습니까? 같이 살기 전에 잉태를 한 성모님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남모르게 파혼할 생각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꿈에 계시를 받게 되지요. 그리고 꿈에서 나타난 천사의 말을 수용해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실 꿈만으로 성모님을 아내로 맞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우리가 꿈 꾼 것을 그대로 믿지 않는 것처럼, 요셉 성인도 개꿈 꾼 것처럼 취급해도 그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요셉 성인 하느님의 힘을 믿었습니다. 바로 자기 자신을 통해서 이 땅에 역사 하시는 하느님의 큰 뜻을 굳게 믿었기에 꿈을 통해서도 성모님을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믿음을 통해 성모님과 요셉 성인은 주님의 부모님으로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습니다.
성모님과 요셉 성인의 모습을 닮아야 합니다. 내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서 쉽게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라면 어떻게든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나의 부족한 모습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완성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성탄도 딱 일주일 남았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대림시기. 더욱 더 주님의 뜻이 나를 통해서 완성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은총의 시간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어리석은 자의 특징은 타인의 결점은 들어내고 자신의 약점은 잊어버리는 것이다.(키케로)
믿음과 신뢰의 삶
-권태문 신부-
요셉 성인을 가리켜 ‘법대로 사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주위에 착하고 어진 이들을 보면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법대로’의 법과 후자의 ‘법 없이도’의 법은 어떤 의미일까요? 요셉 성인은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이미 아이를 잉태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법대로 살았던 요셉 성인은 마리아가 돌에 맞아 죽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용히 그녀와 파혼하기로 결심합니다. 이를 통해 드러난 사실은 율법의 법, 즉‘법 없이도’의 법이 아니라 사랑과 관용의 법에 우선한 요셉 성인을 볼 수 있습니다. 또한 천사의 명령을 따라, 자신의 핏줄도 아닌 아이를 잉태한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맞이한 요셉 성인은 분명 하느님의 법에 따라 산 이였음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두 가지의 사건을 통해서 요셉 성인이 어떤 분이신지, 어떤 신앙의 삶을 살아 오셨는지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종종 순간의 유혹과 방황, 질병과 고통에 눈이 멀어 우리의 삶에서 체험될 수 있는 그분의 은총을 깨닫지 못합니다. 요셉 성인이 마리아를 자신의 아내로 맞아들여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듯이, 우리도 또한 매일의 삶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깨닫도록 항상 깨어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
- 김종오 신부-
언젠가 필리핀에서 실시한 내적 치유여정 프로그램에 참가한 수련 동기생 가운에 필리핀인8명, 인도인 1명, 한국인 2명이 함께 모여 공동체에서 그룹원 상호 인간관계를 하면서 불편한 것이 있었다면 솔직하게 나누고 화해하며 자신에 대한 이해를 깊이는 시간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맨 먼저 한국인 동료가 인도인 동료에게 그동안 공동체에 살면서 쌓인 불만에 대해 비난의 화살을 쏟아내자 인도인 동료도 질세라 강하게 되받아쳤습니다. 다른 그룹원들은 면밀하게 두 사람을 지켜보았고 두 사람은 한동안 비난을 계속했습니다. 급기야 그룹을 지도하던 필리핀 수녀님이 끼어들었습니다. “두 분 수사님이 서로에게 얼마나 화가 났는지 저는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그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 순간 두 사람의 고함소리는 조용해졌고 그룹원들은 숙연하게 하느님 현존에 대한 묵상 분위기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는 자주 많은 것을 잊어버리면서 살아가지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가 겪은 충격적인 사건은 잘 잊지 못합니다. 특히 일상을 통해 인간관계를 겪으면서 쌓은 부정적인 감정이나 상처는, 그 통로를 찾아 적절하게 치유나 해소가 되지 못하면 아픔이나 적개심으로 더 깊게 마음에 남아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합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사건을 통해 나약하고 불완전한 인간성을 통해 당신을 드러내시는 임마누엘 하느님을 믿습니다. 우리는 삶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관계 안에 깊이 현존하시는 그분을 믿습니다. 가끔 일상사에서 옳고 그름을 따지고 시시비비를 가리는 데 마음을 빼앗기는 요즘의 제 자신을 성찰하면서, 그때 수녀님이 던진 도전적인 물음을 한번 상기해 봅니다. “그때 하느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
비움과 채움
-강희재 신부-
오늘 복음에서 복음 삼덕인 ‘가난?·?정결?·?순명’?을 통해 비움과 채움이라는 하느님께 나아가는 영적 여정을 걷는 이들을 본다. 세 가지 모두가 자신을 비우는 일이지만, 그때 비로소 사람은 하느님의 뜻과 능력을 자신 안에 온전히 채울 수 있음을 배운다. ‘가난’?은 내일을 기약하지 않고 오늘을 오로지 하느님께 의탁하는 간절함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잠시 후와 내일 있을 일 때문에 이 순간을 온전히 살지 못한다. ‘정결’?은 어린이의 마음, 하나의 지향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자주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과 그 밖의 여러 가지 욕심으로 인해 삶이 분주해지고 마음이 갈라져 선물로 주어진 오늘 나의 좋은 몫을 잊고 산다. ‘순명’?은 나의 것에만 얽매이거나 잠겨 있지 않고 더 큰 삶으로 나아가 더 높은 것을 품고 살 수 있게 하는 결단이다.
오늘 복음의 요셉과 마리아의 삶을 묵상하면 그들도 우리와 똑같이 세상의 날카로운 시선과 힘겨운 현실을 마주하며 두려움과 불안을 날마다 체험하는 사람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날카로운 시선과 받아들이기 힘든 현실로 두려움과 불안에 잠겨 있거나 떨고만 있지 않았다. 당당히 그것들 앞에 서서 나약한 자신을 비우고, 하느님의 크신 뜻과 능력(성령)으로 채우고 있음을 본다. 그 비움과 채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마침내 그들은 예수님을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하여 낳게 되었다.
하느님께서 지금 내 현실에 태어나실 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불가능과 나약함이 많은 ‘나’?의 존재지만, 하느님의 크신 뜻과 능력 앞에서 가난과 정결과 순명의 모습으로 비워질 때 비로소 하느님과 그분의 전능함이 내 안에서 태어날 수 있다.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 면접시험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면접관이 얼굴 긴 응시자를 바라보며 이러한 질문을 던졌답니다.
“거기 얼굴이 필요 이상으로 긴 친구, 자네는 머저리와 바보가 어떻게 다른지 아는가?”
면접관은 이 청년이 화를 내리라고 생각했지요. 그러나 그 청년은 태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하더랍니다.
“그럼요. 결례되는 질문을 하는 쪽이 머저리고, 그런 말에 얼굴 붉히며 대답하는 쪽이 바보입니다.”
이 청년의 지혜로움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렇게 결례되는 질문을 하는 면접관에게 곤란함을 주는 것은 물론, 자신이 그러한 질문에 얼굴 붉히며 대답하는 바보는 되지 않겠다는 뜻이 담겨 있으니까요.
사실 예의 없는 어떤 사람의 행동에 대한 불쾌감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나의 모습은 어떠했나요? 얼굴을 붉히는 것은 물론 마음으로도 그 사람에 대한 미움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가득하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잘못을 했고 문제가 있는 사람은 그 예의 없는 사람인데, 부정적인 생각들로 힘들어 하는 것은 바로 내가 된다는 것. 이런 상태가 결국 바보가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어떠한 상태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즉, 부정적인 마음으로 힘들어지는 바보가 되는 것이 아니라, 늘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하면서 흔들리지 않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상황에서도 함께 하시는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으로 긍정적인 마음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 성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성인은 함께 살지도 않았는데 약혼녀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물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했다고는 하지만, 이제까지 그런 사람이 단 한 번도 없었던 상황에서 그 말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먹지요.
내가 요셉 성인의 입장이라면 어떠했을까요? 마리아에 대한 불신과 함께 이런 상황이 자신에게 닥친 것에 대한 불평불만이 가득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역시 예수님의 아버지십니다. 이렇게 흔들릴 수 있는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십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은 꿈에서 꾼 것을 다 믿습니까? 꿈은 꿈일 뿐이라고 하면서, 그냥 무시할 때가 더 많습니다. 그러나 요셉 성인은 이 상황에서 하느님께 대한 굳은 믿음이 있었기에 꿈의 지시대로 마리아와 예수님을 받아들이십니다.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서만이 바보가 아닌 지혜로운 사람, 하느님의 뜻에 맞게 행동하는 참된 신앙인이 될 수 있습니다.
행복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너무 큰 행복을 기대하는 마음이다.(폰트넬르)
든든한 성채, 요셉 성인
-양승국 신부-
요셉 성인의 모습을 상상해볼 때마다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착한 남자, 과묵한 사람, 그래서 든든한 사람, 아무것도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지 않는 사람, 신의나 의리를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사람…. 약혼녀 마리아를 포기하지 말라는 하느님의 요청은 요셉에게 있어 청천벽력 같은 요구였습니다. 더구나 당시 ‘구세주 탄생 사건’의 전모는 모든 것이 다 베일에 가려져 있었지요. 명확하게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다,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이다’라는 설명도 없었습니다. “무조건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것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요셉은 구세주 탄생으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미래의 삶 역시 생각만 하면 답답한 것이었습니다.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마리아!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지만 태어나게 될 아기, 고스란히 떠안아야 할 부양의 의무, 한평생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자식과 마리아를 위해서 뼈 빠지게 일만 하는 자신의 괴로운 미래가 예측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불평불만하지 않고 묵묵히 천사가 알려준 그 길, 한평생 이해 못할 신앙여정을 출발합니다. 길고 짧음과 이해득실을 세밀하게 따져보지 않고 그냥 길을 떠납니다. 하느님의 계획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순명, 여기에 요셉 성인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한평생 하느님께서 제시해주신 그 길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라감으로써 요셉은 구세사에 큰 몫을 한 것입니다.
고자인 나에게도 성령은 예수님을
-김찬선신부-
어제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 얘기를 들었습니다. 그 족보의 맨 끝에 예수님이 있고, 그리고 바로 그 앞에 요셉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은 어제 족보를 얘기함으로써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뚝 떨어진 존재가 아니라 선대로부터 이어진 존재인 양 얘기하더니 오늘은 요셉 얘기를 하면서 예수님이 요셉에게서 나온 분이 아니라 성령으로 태어난 분이라고 얘기합니다.
그런데 마태오 복음사가가 지금 앞에 있다면 따지게 될 것입니다. 마태오 복음사가, 도대체 뭐하자는 것입니까?! 오늘 예수께서 성령으로 태어났다고 얘기할 거면서 왜 어제는 그렇게 길게 족보를 들먹였습니까? 요셉의 아들이라는 얘깁니까, 아니라는 얘깁니까?
말하자면 길지만 쉽게 얘기하면 예수님은 요셉의 아들이면서 동시에 아들이 아니라는 얘기지요. 요셉의 아들인 것 같지만 사실은 아니라는 얘기지요.
요셉을 중심으로 보면 아버지 역할은 하되 아버지의 소유권은 주장하지 말라는 얘기지요. 대단히 억울할 수도 있습니다. 힘든 아버지의 역할과 책임은 다 하되 아들에 대한 소유권은 행사하지 말라니 말입니다. 마치 맛있는 음식을 잘 관리하고 간수하되 먹지는 말라는 것과 비슷하지 않습니까? 얼마나 가혹합니까?
그러나 반대로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 관계가 아닐 수도 있는 요셉이 그분의 아버지가 되는 영광을 받게 된 것으로 말입니다.
요즘 아이를 낳지 못하는 부부들이 많습니다. 입양을 하는 수도 늘어나고 있습니다. 제가 아는 젊은 부부도 오래 노력했지만 아이를 가질 수 없자 아이를 입양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떤 아이가 자기들의 아이가 될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좋은 아이를 입양하려고 매우 신중할 수밖에 없었고 입양을 알선하는 여러 곳을 방문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자기들이 원하는 아이를 입양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그것을 대단한 행운으로 생각했고 행복해했습니다.
저도 아이를 낳을 수 없는 고자입니다. 수도자가 되었으니 생물학적인 고자는 아니지만 영적인 고자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분은 절대로 낳을 수 없는 고자입니다. 이런 고자가 예수님의 아비가 된다면 그것만도 대단한데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된다면 얼마나 영광이겠습니까? 그런데 저는 본래 영적인 고자였지만 성령에 의해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가 될 수 있습니다.
요셉을 보면 그것이 불가능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찌 보면 아무 노력도 하지 않고 아무 공로도 없는 요셉에게 성령께서 주님을 선사하셨으니 말입니다.
자유와 부르심
-전삼용신부-
가끔은 성소에 대한 올바르지 않은 생각을 지니신 분들을 만납니다. 예를 들면 지금 각자가 살고 있는 길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 분들은 성소를 끊임없이 찾아가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성소는 주님께서 우리가 태어나기 전부터 불러주신 것이고 우리가 그것을 따르고 있을 수도 또 따르지 않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자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서 자유를 빼면, 모든 것이 예정되어있는 대로 되어가고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혹은 하느님을 나쁜 분으로 만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구원을 못 받는데 그것도 주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은 것은 주님께서 그렇게 섭리하셨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자유를 버리면 책임도 없기 때문에 편하겠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동시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정 적인 생각을 지니신 분들이 자주 하시는 말들이 있습니다. 어떤 좋은 일을 해 놓고도, “제가 했나요, 뭐. 하느님이 하셨지!” 라고 말합니다.
겸손한 말처럼 들리지만 사실 자신과 하느님을 혼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고 섭리로 도와주셨을 수는 있어도 결국 자신이 한 일입니다. 하느님은 원하시기만 하실 뿐 선택은 자신이 하는 것입니다.
악수는 두 사람이 손을 내밀어야 가능합니다. 모든 것은 주님 섭리에 따라야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손을 내미느냐 안 내미느냐에 따라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느냐 마느냐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내가 아무런 결정도 하지 않는다면 천당에 가거나 지옥에 갈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유가 있기 때문에 책임도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큰 고민에 빠집니다. 그렇게 순결하고 예쁘기만 했던 약혼녀 마리아가 몇 달 친척집에 다녀오더니 배가 불러서 온 것입니다. 깊은 배신감을 느꼈지만 그는 그녀를 조용히 놓아주기로 합니다. 이 사실이 밖에 알려지면 마리아도 뱃속의 아기도 죽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해줍니다. 그는 잠에서 깨어나 깊은 생각에 잠깁니다. 첫 번째는 자신이 꾼 꿈이 정말 사실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그러나 사실이 아닐 수 없을 만큼 주님의 계시는 확실합니다. 어떤 계시든 조그마한 의심이 든다면 그것은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고 보아야 속는 일이 없습니다. 하느님은 꿈에서 계시를 주어도 그 사람이 그것을 믿고 그것에 자신의 온 삶을 바칠 수 있을 만큼 확실하게 주십니다.
그리고는 다른 것보다도 약혼녀를 온전히 믿지 못한 것에 대해 큰 후회를 합니다. 그러나 누가 처녀가 성령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잉태했다고 하는데 믿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리아와 결혼을 하기로 결심하는 선택은 요셉에게 달려있습니다. 요셉은 기계가 아닙니다. 하느님은 초대하실 뿐 응답은 각자에게 달려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그 초대에 다 온전히 응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다. 즈카리야도 그래서 벙어리가 되지 않습니까?
우리 각자도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소명이 있습니다. 소명이 없이 태어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부르심대로 살고 있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는 것은 각자가 다르게 응답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성모님도, 예수님의 제자들도, 바오로도, 또 오늘의 요셉도 자신들의 소명을 이렇게 확실히 받았는데 사실 주님께서 나에게 진정 어떤 삶을 요구하시는지 고민스러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이 그런 확실한 부르심이 있어서 그 뜻을 따른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분들은‘그 분을 따를 자세가 되어 있어서 그런 확실한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나이가 서른이 되어가면서도 주님께서 성직자 혹은 수도성소로 불러주셨는지 아니면 결혼성소로 불러주셨는지 고민하는 청년들을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나 결국 성소의 ‘열쇠’는 내가 지니고 있음을 묵상해 보아야겠습니다.
세상에는 인간을 가늠하는 네 가지 척도가 있다고 합니다. 돈, 술, 여자(남자), 시간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리고 이것들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누구나 쉽게 빠져들 만큼 매력적인 유혹의 대상이지만 도가 지나치면 자기 자신을 망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이것들을 조심하라는 충고를 듣기 때문에, 처음의 세 가지는 매우 경계를 하곤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지막 요소인 시간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많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그로 인해 큰 코를 다치지요. 왜냐하면 시간은 한 번 지나치면 다시 돌아올 수 없는 소중한 보물과도 같기 때문입니다.
사실 시간은 돈으로 값을 치를 수 없을 만큼 귀중한 것입니다. 돈은 모았다가도 잃고 잃었다가도 다시 모을 수 있는 것이지만, 한 번 지나간 시간은 다시 되돌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즉, 한 번 놓아 버린 시간은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시간은 남에게 빌리거나 저축을 해둘 수도 없습니다.
결국 시간의 소중함을 알고 매 순간 소중하게 여기면서 충실히 살아갈 때에야 후회하는 시간을 줄이고 대신 하루하루를 아름다움의 시간으로 만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복음을 통해서 후회하는 시간을 줄이고, 지금 이 시간에 해야 할 일에 누구보다도 충실했던 한 분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바로 성모님의 남편인 요셉 성인이십니다. 그는 의로운 사람으로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같이 살기 전에 아기를 가진 마리아를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행동이었을 것입니다.
이런 다짐 뒤에 요셉 성인께서는 꿈을 꾸십니다. 그 꿈에는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요셉 성인은 천사의 명령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그런데 조금 이상하지 않습니까? 율법에 맞게 파혼까지 작정한 현실적인 사람이 어떻게 꿈 한 번 꾼 것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요? 그것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곧바로 행동할 수 있을까요?
바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통해서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사랑을 통해서 얻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비이성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꿈을 통해서도 조금의 망설임 없이 변화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보세요. 그러나 이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주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반드시 간직해야 함을 기억하셨으면 합니다.
인생이란 소유하거나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이다. 더 좋은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다.(아놀드 토인비)
두려움을 너머 신앙으로
-방교원 신부-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계시니 아쉬움 없네. 두려워 말라, 걱정을 말라, 주님 안에서.” 떼제 성가 “Nada te turbe”를 번역한 것인데, 대 데레사 성녀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성녀께서는 동료들과 함께 가르멜 수도원을 쇄신하고 개혁하면서 아주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었습니다. 이때 성녀는 동료 수도자들을 향해서 “두려워 말라”고 하시면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변화와 쇄신의 길을 걸었던 것입니다. 약혼녀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을 알고 고민하고 있는 요셉에게 하느님께서는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며 그의 신앙을 촉구하십니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었고, 성실한 사람이었으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인간적으로 좋은 사람이었던 것은 틀림없으나 아직까지 믿음의 사람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요셉은 자신이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느끼며 스스로 얼마나 인간적이었는지를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두려워 말라”는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인간적인 것에서 신앙의 세계로 뛰어오릅니다.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오는 두려움은 신앙으로만 극복됩니다. 대림절은 우리에게 뛰어내리시는 자비로운 주님을 기다리는 시기이며 그분을 향해 우리가 뛰어올라야 하는 신앙의 시기이기도 합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령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
-양승국신부-
<내가 말하기보다는>
또 다시 성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본당이나 수도회는 지금쯤 다들 성탄분위기 조성으로 바쁩니다. 성탄구유를 꾸미기 위해 작년에 사용했던 물품들도 점검해봐야지요.
여러분들, 아기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베들레헴의 마구간 광경 기억나시나요?
보관 상자에서 진흙으로 만든 형상들을 하나하나 꺼내면서 다들 하느님의 구원사업에 나름대로 일조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누구에 앞서 우리 성모님, 예수님의 탄생과 인류 구속 사업에 가장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구세주의 별빛을 따라 오랜 여행을 마다하지 않았던 동방박사들, 이젠 아기 예수님 앞에 엎드려 가져온 선물을 봉헌하고 있습니다. 강생하신 만왕의 왕 앞에 합당한 예물을 드리니 하느님께서 크게 기뻐하실 일입니다.
목동들도 몇 명 서있습니다. 순박한 시골 목동들도 구세주의 탄생을 크게 기뻐합니다. 그러나 너무나 가난한 그들이었기에 드릴 것이라곤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나 기쁨과 감사로 가득 찬 찬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둘러서있는 양들과 나귀들, 소들,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나 봤더니, 그들 역시 나름대로의 기여를 하고 있었습니다. 한 겨울 마구간입니다. 추위에 떨고 있는 아기 예수님을 위해 그들의 체온으로 콧김으로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공간을 덥히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빼놓을 수 없는 분이 한 분 있습니다. 바로 요셉이었습니다. 구세주 탄생 앞에 그가 보여준 태도는 이 대림 시기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재수 옴 붙은 사람’이었습니다. 재수 더럽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아주 나이 지긋한 농촌 노총각이었습니다. 사람은 좋은데 워낙 시골에 살고, 또 없이 살다보니 시집올 사람이 없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요셉만 보면 마음이 안타까워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명절 때 마다 친척들은 요셉을 보고 꼭 한 가지 속 쓰린 질문을 던졌습니다.
“너, 아직도 그러고 있냐? 너 도대체 언제 국수 먹여줄거냐?”
이런 요셉이 천신만고 끝에 마리아란 소녀와 결혼하게 되었지요. 얼마나 마음이 설렜을까요? 약혼식까지 치렀고,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결혼입니다. 드디어 오랜 노총각 딱지를 떼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약혼녀를 만났는데, 전혀 얼토당토않은 말 한마디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게 웬 날벼락입니까?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약혼녀가 애를 밴 것입니다.
마리아는 뭐라고 뭐라고 하는데, 요셉은 도무지 납득할 길이 없었습니다. 우선 화부터 났습니다. 정말 이럴 수는 없다며 분통을 참지 못하고 있는 요셉에게 천사의 메시지가 전달됩니다.
그걸로 요셉의 꿈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습니다. 그가 오랜 세월 꿈꾸어오던 단란한 가정, 깨가 쏟아지는 알콩달콩한 신혼살림은 끝이 났습니다. 한마디로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겪이 된 것입니다.
이런 과정 안에서 우리가 눈여겨 볼 요셉의 태도가 있습니다. 그의 침묵입니다.
복음사가들은 한결같이 요셉과 관련된 기사를 거의 적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요셉은 마리아와 더불어 예수님의 구세 사업에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복음사가들은 요셉에 대해서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이것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요셉은 그만큼 과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선천적으로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충직했고, 단순했으며, 아무 말 없이 자기 길을 충실히 걸어가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의 한 평생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철저한 복종,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라니 맞아들였습니다. 이집트로 피신하라니 피신하였습니다. 나자렛으로 돌아오라니 돌아왔습니다. 그저 묵묵히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그대로 실천에 옮겼습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말씀에 대한 침묵과 경청으로 성인이 되신 분입니다. 이 대림시기는 어쩌면 내가 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도록 내 귀를 여는 시기입니다. 이 대림시기는 어쩌면 내가 말하기보다는 이웃들이 말하도록 내 마음을 여는 시기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을 위해 내 아들을
-김찬선신부-
어제 복음이 주님의 오심을 오래 전부터 준비해온 사람들을 보았다면 오늘부터 앞으로 성탄 때까지의 복음은 주님의 오심을 가까이서 준비하는 사람들의 얘기가 나옵니다. 오늘은 요셉의 얘기입니다. 족보로 치면 맨 마지막에 나올 조상, 즉 오실 주님의 아버지입니다. 그런데 친 아버지가 아닙니다. 요셉으로 보면 친 아들이 아니고 남의 아들입니다.
우리 주변에서도 자기 아들이 아닌데도 친 아들처럼 사랑하는 아버지들이 있고 자기 아들이 생기면 이 아들을 자기 아들보다 덜 사랑할까봐 아예 자기 아들을 낳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높이 사지요. 그런 사랑이야말로 소유적 사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소유적 사랑은 참으로 지독하고 끈끈하기는 하지만 사실은 사랑하는 사람이나 사랑받는 사람이나 불행하게 합니다. 왜냐하면 소유적 사랑은 소유하고 싶은 그것을 소유하는 순간 그것 외에 다른 것을 다 잃게 되기 때문이고 사랑 받는 사람도 소유물로 전락하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어느 하나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되고 그때 모든 것이신 하느님을 소유하게 됩니다. 요셉이 자기 아들을 고집하지 않았기에 구세주 하느님의 아버지가 된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제가 가끔 농담 반 진담 반으로 하는 얘기가 있지요. ‘나는 지금껏 한 번도 한 여자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모든 여자를 사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여자들에 대해 이럴 수 있는 저도 한 때 내 아들이 있어봤으면 하는 생각이 든 적이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나온 내 사랑. 나를 이어가는 나의 영원(永遠). 이것이 다른 어느 나라 사람들보다 우리 한국 사람에게 강한 의식입니다. 대(Generation)를 잇는 것. 그것은 내가 영원히 사는 영생의식(永生意識)의 한 표현입니다. 나는 죽어도 나에게서 나온 내 사랑하는 아들이 나를 이어갈 것이라고, 내가 못한 것을 내 아들이 할 것이고 나보다 더 번성하고 성공할 것이라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바라며 그런 믿음과 바람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유다 민족도 한국사람 이상으로 대의식이 강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식이 없는 것을 가장 큰 불행으로 여겼고 반대로 자손이 번성하는 것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겼으며 하느님도 조상들로부터 대를 이어주시는 하느님으로 만났습니다. 요셉도 그러한 유다인이었지만 자기 아들을 포기함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을 아들 삼았고 우리에게도 그 아드님을 선사한 것입니다.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김영수-
요셉 성인에 대한 이야기는 이 대목 외에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요셉은 성가정의 수호자이며 노동자들의 수호자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이 시대에는 누가 의로운 사람인가? 하느님은 어떤 사람을 의롭게 보시는가?’`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나는 의로운 사람인가, 아닌가?’`하는 질문도 해본다. 세속적으로 의로운 사람과 영적으로 의로운 사람을 나누어 볼 수 있으나 구약에서 하느님께서 의롭다고 보시는 사람은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지금은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르신 새로운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이 현대의 의로운 사람일 것이다. 그러나 나를 조용히 되돌아보면 나는 의로운 사람은 못된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잊고 세상살이에 허덕이니 어찌 의로운 사람이라고 하겠는가! 그러나 노력하면 조금은 의로운 사람이 되지 않을까 싶다.
요셉 성인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2006년 12월에 국내에 소개된 영화 <네티비티 스토리>의 한 장면을 나는 잊을 수 없다. 예수님을 잉태한 성모님과 요셉 성인이 호적 정리를 위해 베들레험으로 가는 장면이다. 기획자의 말을 따르면 영화는 철저히 고증을 거쳐 최대한 2000년 전 생활 모습을 재현했다고 한다. 영화에서 요셉 성인은 나귀에 성모님을 태우고 황량한 황무지 길을 재촉하여 느릿느릿 가는 중이었다. 그들은 집이 있으면 그곳에서, 집이 없으면 노숙을 했다. 냇가에서 노숙할 때 성인은 성모님과 식사하면서 말씀하셨다. “마리아! 당신에게서 태어날 분이 하느님의 아들이시라는데…. 내가 그분에게 무엇을 가르치고 키울 수 있을까 걱정이 됩니다.” 그 한마디는 성인이 참으로 겸손하고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이 가득함을 엿보게 해주었다. 그리고 태어나지 않은 자식에 대한 깊은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 순간 나는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지금은 두 아들이 모두 장성했으나 아내가 첫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아들이 태어나면 어떻게 무엇을 가르치고, 어떤 아버지가 되어야 할 것인지 걱정하지 못했던 같다. 성경 말씀이 나의 생활에 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닫게 되었다. 이제라도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새기고 내 생활 속에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야 하겠다. 요셉 성인과 같이 말없이 성가정을 지키고 성모님과 예수님을 키우신 분이시니 가히 우리가 본받아야 할 것이다.
남모르게
-장재봉신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두 번 태어납니다.
그리고 한 번 죽습니다.
이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한 번 태어나서
두 번 죽게 된다는 사실을 성경은 전합니다(묵시 21,8 참조).
이미
하느님이 성령으로 거듭 태어난 그리스도인은
이미 세상의 것에 예수님과 함께 죽은 사람입니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살아간다는 뜻입니다.
주님 안에서 죽음을 당한 우리가 교회입니다.
교회는 건물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성령이 채워지는 곳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해서 바오로사도는
“성령을 따르는 이들은 성령에 속한 것을 생각합니다”(로마 8,5)라 하고
예수를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인들은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로마 6,11)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밝힙니다.
삶 안에 놓인 허다한 난관,
그 깊고 험한 구비마다
하느님께서 약속해 주신 구원의 은총을 기억하고
무서워하지도 두려워 할 까닭도 없는 것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선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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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그날,
약혼녀의 임신을 알게 된 요셉이 겪었을
무지막지한 고뇌의 무게를 짐작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음을 돌려
하느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힘이 들었을지 헤아릴 수 있습니다.
그날
요셉의 머리는 터질 것같이 복잡하고
요셉의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경우에 따라서는
참 어렵고 힘들고 괴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이르심으로 새깁니다.
오늘 성경은 요셉의 의로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 인정된 요셉의 의로움은
세상에 정의를 외치고
세상에 자신의 옳음을 드러내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자신이 아는 만큼만
자신에게 이해되는 만큼만
행하되
상대를 궁지로 몰아가는 경우가 없도록
살피고
상대가 힘들어지지 않을 방법 때문에
고민한 결과입니다.
상대의 처지를 헤아리되
남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행할 때
의롭게 기억하신다는 주님의 고백이라 짚어봅니다.
날마다
부딪히는 상황이
낯설고 고통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시나 싶은 지경을 당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입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일입니다.
그분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일이
얼마쯤 힘들고 어려운 것을 아시는 그분께서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시며
“몸소 말로 다할 수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로마 8,26-27)
해 주고 계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고통 눈물까지도
함께 하시는 그분께서
남모르게 살피고,
아무도 모르게 도우십니다.
세상이 이해하지 못했던 요셉의 숨겨진 의로움이
하느님의 아들을 살렸습니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이
남모르게 행하는 의로움이
세상을 살리기를 소원합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프랑스에서 어떤 여자가 살충제를 먹고 생을 마감한다는 유서를 써놓고 자살을 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위액을 조사한 결과 사람들은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왜냐하면 그녀의 위액 속에는 살충제의 흔적은 전혀 없고 대신 독성이 전혀 없는 음료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그녀는 실제로 무독성 음료를 마신 것인데 살충제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에 죽었다는 것입니다.
하긴 어느 책에선가 어떤 사람이 절벽에서 추락해서 고통 속에 있을 때, 친구가 아스피린을 진통제라면서 자기에게 주었는데 이를 먹은 뒤에 고통이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이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플라시보우(Placebo) 효과라고 하네요. 진통제를 요구하는 환자에게 진통제를 주면 치명적이어서 그 처방이 불가능할 때 그와 비슷한 모양의 약을 환자에게 줘서 정신적 효과를 얻게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자신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주변의 상황이 어떻게 되든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지요. 겸호라는 스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해요.
“길일이라도 그날 악한 일을 행하면 반드시 흉일이 되는 것이요, 흉일이라도 선을 행하면 반드시 길하게 된다. 길흉은 사람에게 달린 것이지 날에 달린 것이 아니다.”
똑같은 환경에서 자란 형제도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지금의 위치가 달라집니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환경, 똑같은 부모에게서 태어나도 각자의 길은 각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런 것을 볼 때 운명은 이미 정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우연을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라는 의구심이 듭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모든 일상은 우연으로 다가오지요. 그 우연을 좋은 운명으로 만들어가는 이는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이고, 그 우연을 나쁜 운명으로 만드는 이는 실패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 약혼녀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합니다. 그 이유는 결혼도 하기 전에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었지요. 의로운 사람이라고 복음서에 적혀 있듯이, 요셉은 율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따라서 마리아를 간음한 여인이라고 신고해서 공개적으로 돌에 맞아 죽도록 해야 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정해진 운명 같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운명을 거슬러서 자신의 의지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하지요. 이에 하느님께서 개입하십니다. 스스로 만들어내는 운명을 거슬러 자신의 의지대로 행동한 뒤에야 요셉에게 천사가 나타나 예수님 잉태에 대한 말씀을 전해 주십니다.
만약 정해진 운명이라고 하면서, 율법대로 마리아를 신고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우리의 구세주 예수님의 강생이 있을 수 없었겠지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것을 운명 탓으로 외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주님의 뜻을 실천하지 않는 것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우리 스스로 운명을 개척할 수 있도록 하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빠다킹신부
사랑해요
-조명연 신부-
결혼한 지 13년이 되도록 단 한 번도 “사랑해”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는 한 남자가 있었습니다. 그가 어떤 세미나에 참가한 뒤, 아내에게 ‘사랑해’라는 말을 하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리고 휴대폰으로 목소리를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말했지요. “사랑해.” 아내는 깜짝 놀라서 다시 묻습니다. “예?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요? 뭐 잘못 먹었어요?” 이 남자는 너무 창피했지요. 하지만 저녁에 남자가 집에 들어왔을 때, 아내의 얼굴에는 웃음꽃이 만발했다고 합니다. 만약 남편이 용기를 내지 않았다면, 아마도 똑같은 일상의 삶 안에서 서로 힘들게 살 뿐이었겠지요. 바로 이렇게 용기 있는 남자의 말 한마디가 가정의 평화를 가져온 것입니다. ‘사랑’은 용기를 함께 동반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그러나 그 용기 있는 행동으로 나아가는 데는 많은 장애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시선, 일반적인 우리들의 관습들, 별 것도 아닌 나의 체면 등등…. 오늘 복음의 요셉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는 율법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이었지요. 하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용기를 내 율법을 어기면서까지 아내 마리아를 받아들입니다.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오늘 밤 뉴스에서는
-김명희-
종종 신문·방송의 뉴스를 보다 보면 좋은 일도 있지만 나쁜 일이 더 많습니다. 누가 누구를 고소하고 고발하고 누구는 이렇게 누구는 저렇게 잘못했고, 내 탓은 없고 네 탓만 있는, 서로 믿지 못하겠다는 이야기뿐입니다. 요셉은 예수님의 어머니가 될 마리아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잉태한 것을 알게 됩니다. 의로운 사람 요셉에게도 정혼녀가 임신한 사실은 작은 일이 아니었나 봅니다. 오늘 복음인 마태오복음 1장 18-19절에서 요셉은 비록 드러내려 하지는 않았으나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20절 이후를 보면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꿈에 나타나 말씀하신 내용을 받아들입니다. 요셉은 마리아의 잉태가 성령으로 인한 것임을 의심하지 않고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합니다. 이는 마리아에 대한 믿음과 주님의 천사에 대한, 하느님에 대한 신뢰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이 가졌던 마리아에 대한 신뢰와 하느님에 대한 믿음이 지금 우리의 마음에 겨자씨만큼이라도 있다면 오늘 밤 뉴스에서는 좋은 일만 보도될 것 같습니다. 성탄절을 기다리며 요셉의 믿음과 신뢰를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약속하시는 하느님 - 경규봉 신부-
성령께서는 예언자들에게 임하셔서 그들을 사로잡으시고 황홀경 속에서 당신의 메시지를 접하게 하셨다.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도 성령의 감동을 받아 환상 중에 하느님을 뵙고 예언한다. 민수기(24,2-7.15-17)에서 소개되는 발락 예언자도 자신의 의지와는 정반대로 하느님의 도구가 되어 어쩔 수 없이 이스라엘을 축복하고 그들의 장래와 그 주변국들의 운명까지 예언할 수밖에 없게 됨을 볼 수 있다.
거칠고 메마른 광야 같은 이스라엘 백성은 미래에 축복과 영광을 누리리라. 이스라엘은 급류가 좌우로 힘차게 뻗쳐 흐르는 골짜기처럼 그 위용이 대단하며, 마실 물이 풍부하여 생명력이 넘쳐흐르고 수확이 풍부하여 부족함이 없으리라. 가나안에 정착할 그들은 물가에 자라는 느티나무와 송백처럼 위엄 있고 찬란하여 축복과 영광을 누리며 그 후손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며 번성하리라(신명 8,7). 이스라엘의 왕은 아각(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을 최초로 공격한 강력한 족속인 아말렉 왕의 왕호)을 누르고 국위를 널리 떨치리라.
이어서 발락은 먼 훗날에 일어날 일을 예언한다. 야곱에게서 한 별(왕의 위엄과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 :마태 2,2; 묵시 22,16)이 솟아 만백성의 왕이 나타날 것을 예언한다. 그 메시아는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모든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의인에게는 구원을, 악인에게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이사 42,1-9; 묵시 22,16). 그리하여 메시아가 통치하는 나라는 흔들리지 않는 영원한 나라가 될 것을 예언한다.
오늘 예레미아 예언자도 같은 내용의 예언을 하고 있다. 보라,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내가 다윗을 위하여 의로운 싹을 돋아나게 하리라. 그 싹은 임금이 되어 다스리고 슬기롭게 일을 처리하며, 세상에 공정과 정의를 이루리라. 그의 시대에 유다가 구원을 받고, 이스라엘이 안전하게 살리라.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주님은 우리의 정의’라고 부르리라. 그러므로 이제 그날이 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그때에는 사람들이 더 이상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하지 않고, 그 대신 “이스라엘 집안의 후손들을 북쪽 땅에서, 그리고 당신께서 쫓아 보내셨던 모든 나라에서 데리고 올라오신, 살아 계신 주님을 두고 맹세한다.” 할 것이다. 그때에 그들은 자기 고향 땅에서 살게 될 것이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자녀에게 좋은 것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자녀들이 당신을 거스르고 배반할지라도 언제나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 예언자를 통해 미래에 대해 들려주시는 까닭은 자녀들이 복을 누리도록 하기 위함이다.
자녀들이 우상숭배를 하고 죄를 지음으로써 그 대가로 혹독한 고통과 시련을 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죄의 결과에 대해서 예언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죄를 짓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스른다.
그 결과 사람들은 고통과 시련을 당하게 되고, 고통과 시련 속에서 하느님께 울부짖으면 그에 대해 마음 아파하시며, 구원을 약속하신다. 자녀들이 시련과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주시고자 미래에 누릴 영광과 축복을 예언해 주신다. 하느님은 그처럼 사람을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이집트를 탈출시키시어 곧바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정착하도록 하시지 않으셨다. 오히려 그들로 하여금 광야에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시련과 고통을 당하도록 하심으로써 이집트에서 물들었던 죄와 우상숭배의 흔적들을 깨끗이 씻도록 하셨다. 마치 용광로에서 불로 단련하여 순수한 쇠를 얻어내듯이 당신 백성을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순수하게 단련시키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축복과 영광을 누릴 것임을 예언해주심으로써 그들에게 힘과 용기를 주셨다.
예레미아 예언자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이스라엘 백성이 영광과 축복을 받을 것이며, 먼 훗날 메시아의 나라가 세워질 것임을 예언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예언자를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악 속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는 하느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 우리의 아버지이신 하느님, 악을 통해서도 선을 이끌어 내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축복과 영광을 주실 것임을 굳게 믿고 살아가자.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희망으로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나가자.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힘과 용기를 받고 모든 고통을 극복하자..............◆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인내하자. -이창신 신부-
제가 강원도에서 군생활을 할 때의 일입니다. 군생활의 어려움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제가 힘들어했던 것 중에 하나가 태권도였습니다. 군복무기간 중에 태권도 유단자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있어 저는 자대배치를 받고 다른 동료들과 함께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평소 훈련이나 작업이 없으면 짬짬이 시간을 내어 선임자들로부터 태권도를 배웠습니다. 그러다 승단시험이 있다고 하면 중대에서는 한 명이라도 승단시험에 합격시키려고 강도 높은 연습을 시킵니다.
몸에 좋은 운동이기는 하지만 많이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몸이 유연하지 못해 연습이 너무 힘들었고, 매번 아침이 되면 태권도에 대한 두려움으로 괴로워했었습니다. 두 번이나 시험에 떨어져 남 모르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연습한 덕에 다른 사람보다 늦기는 했지만 태권도 유단자가 되었습니다. 승단시험에 합격한 그날의 감격과 기쁨은 아마 평생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누구나 살아가면서 행복과 기쁨을 꿈꾸지만 고통의 시간도 외면할 수 없는 우리 생의 여정입니다. 빛이 있으면 그림자도 함께 있듯이 기쁨을 원하는 만큼 고통의 시간에 대한 준비도 필요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고통의 시간을 어떻게 보냈느냐가 그 사람이 어떤 생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되기도 합니다. 생에 겪게 되는 어려움, 고통을 제 나름대로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봤습니다.
우선 누구나 살아가면서 당연히 겪어야 할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해서 겪게 되는 고통이요, 이 사회 일원으로서 감당해야 할 어려움들입니다. 제가 군에서 태권도 유단자가 되기 위해서 힘들었던 연습을 했던 것도 군인이기에 당연히 감수해야 할 어려움이었습니다. 학생이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공부라는 어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산고를 견딜 수 있어야 합니다. 사회 공공 질서를 위해서 우리는 정해진 법규들을 준수할 불편을 감수해야 합니다. 이러한 어려움들은 사회적, 가정적, 그 외 나의 위치에 따라 주어진 당연한 고통입니다. 이 어려움의 극복은 다른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 나 자신을 위한 것이고, 이러한 고통의 극복은 나로 하여금 현실을 살아가는데 도움을 줍니다.
그런데 세상엔 회피해도 되는 어려움과 고통이 있습니다. 선택적인 것입니다. 나의 개인적인 사정 등으로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어려움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고통은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이 아니기에 피할 수도 있지만 그러한 고통을 견딤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한 고통이 있습니다.
나의 재물을 나보다 어려운 사람들과 나눈다거나, 사회정의를 위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과 능력으로 헌신하는 일 등입니다. 이러한 고통은 사람으로서 당연히 감수해야할 고통보다 더욱 고통스럽고 벅찬 것들이지만 이 고통의 감내로 세상은 놀라운 사랑을 체험하게 됩니다.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고통과 성모님과 함께 자신의 삶을 하느님을 위해서 바친 요셉의 생을 보면서 그들이 선택한 삶은 피할 수 있었던 고통의 삶이었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리아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가지게 됨으로 겪게 될 사회적 비난을 하느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지하며 받아들였습니다.
법대로 살아가는 요셉 역시 잉태한 마리아를 받아들임이 하느님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되어 더 큰 뜻을 위해 마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입니다. 마리아와 요셉이 선택한 고통으로 세상은 하느님의 외아들 예수님을 맞아들일 수 있게 되었고, 온 인류가 죄로부터 해방되어 하느님과 화해하고, 하느님을 위해서 살아갈 수 있는 영광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앞에도 지금 고통의 언덕이 어떤 형태 이로든 놓여있을 것입니다. 그 고통이 나 자신을 위한 것이든, 세상을 위한 것이든 힘껏 참아내십시오. 우리 앞에 놓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그 고통을 인내하게 되면 우리는 조금씩 더 큰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갈 것입니다. 물론 회피라는 방법도 있겠지만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서, 또 하느님을 위해서 기쁜 마음으로 고통을 안고 나갈 수 있는 용기를 가져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손길이 내 인생에 닿는 순간
-양승국신부-
오늘 복음에서 요셉은 자신의 인생 안에서 가장 결정적인 전환점을 맞이하는데, 그 전환점은 다름 아닌 "강렬한 하느님의 손길의 체험"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손길이 요셉에게 닿는 순간 요셉은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합니다.
돌아보니 제 인생 안에서도 가장 은혜로웠던 순간은 하느님 그분께서 제 인생에 개입하시던 그 순간이었습니다.
그분의 실재를 생생히 느끼던 바로 그 순간의 기쁨과 환희는 너무나 큰 것이어서, 그렇게 좋아 보이던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시시하게 생각될 정도였습니다. 더 이상 재물도, 명예도, 사람조차도 부차적인 것이 되고 말더군요.
진정한 내적 변화, 회개다운 회개, 새 삶, 이런 단어들은 결국 하느님과의 절실한 만남 그 이후에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요셉에게 있어서도 하느님 체험의 순간은 얼마나 은혜로운 순간이었던지, 그 짧은 순간, 과거의 요셉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새로운 요셉이 탄생합니다.
요셉을 보십시오. 하느님 체험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마리아로 인해 요셉은 배신감과 분노로 치를 떨어야만 했습니다.
약혼녀 마리아의 혼전 잉태 사건을 알게된 요셉의 하루 하루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하루 하루였습니다.
"마리아, 정말 해도 해도 너무하다 네가 어떻게 이렇게 배신을 때릴 수 있나?"
그러나 요셉의 인생에 하느님의 손길이 닿으면서 요셉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는 복음에 잘 소개되고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의 천사가 일러준 대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요셉은 즉시 태도를 바꿉니다. 억울함, 분함, 불평불만, 아쉬움 등 인간적인 감정은 어느새 사라지고, 침묵 중에 기도하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그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우리는 언제 하느님의 손길을 체험했습니까? 언제 우리 삶 안에서 그분의 생생한 자취를 느껴본 적이 있습니까? 그분의 감미로운 현존에 취해 지나가는 이 세상 모든 것을 잊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번 성탄, 어떻게 해서라도 다시 한번 하느님의 은혜로운 손길을 체험하는 기쁨의 시기가 되길 기원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하느님 그분으로 인해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그분이 우리 삶을 스치는 순간 우리 인생은 점화된 촛불처럼 의미와 활기를 지니기 시작합니다.
그분의 자취가 우리 삶에 각인되는 그 순간이야말로 우리가 다시 한번 영적 여정을 힘차게 걸어갈 수 있는 순간입니다.
벙어리 수사님
-양승국신부-
침묵과 은둔의 생활을 무척이나 사랑하시는 수사님 한 분을 오래 전부터 알고 지냅니다. 몇 년에 한번이나 만날까 말까 하지만 수사님은 언제나 그 모습 그대로입니다. 조용히 그리고 주의 깊게 제 말을 들어주시고 고개를 끄덕여주시고는 그만입니다.
수사님이 몸담고 계시는 수도회의 다른 수사님들 사이에서도 그 수사님의 침묵은 유명합니다. 특히 누군가가 다른 사람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거나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수사님은 그 순간부터는 즉시 벙어리가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전혀 동조하지 않으십니다.
수도 공동체 생활을 하면 할수록 더욱 필요한 노력이 언어구사에 있어서의 신중함, 과묵함, 진지한 침묵, 결점을 덮어주기와도 같은 노력임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제 하루의 삶을 분석해보면서 남 이야기하는데 너무도 많은 시간을 허비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특히 우리가 이웃들의 긍정적인 측면이나 장점을 인정해주기 보다는 이웃을 "까는"데 습관화되어있다는 것에 깜짝 놀랐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요셉이 보여준 삶의 스타일은 얼마나 듬직하고 믿음직스러운 것인지요. 자신에게 들이닥친 엄청난 손해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침묵합니다. 침묵 중에 자신에게 다가온 사건을 나름대로 분석하고 그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찾아갑니다. 우리처럼 절대로 떠벌리는 일이 없습니다.
요셉이 얼마나 침묵을 사랑했던지 복음서 안에서 요셉은 거의 입을 다물고 있습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는 대로 한치의 오차도 없이 묵묵히 따를 뿐입니다. 여기에 요셉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요셉은 침묵으로 인해 위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성서 전반을 통해 유추해볼 수 있는 요셉의 이미지는 고지식하지만 조용히 하느님의 말씀을 명상하면서 침묵의 길을 걷던 사람입니다.
또한 요셉은 언제나 듣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향해 명령하실 때마다 그는 언제나 즉각적으로 실행에 옮겼습니다.
하느님 말씀에 대한 전폭적이고 일관된 수용 그것이 바로 요셉의 삶이었습니다. 요셉의 일생은 뚜렷한 이정표나 계획이 없었던 여행이었기에 고달팠고 피곤했었습니다.
하느님 언약이 빨리 이루어지지 않은데 대한 실망으로 요셉의 삶은 무척 힘겨웠을 것입니다. 마치 우리의 성소여정처럼 말입니다. 하느님의 언약이 보다 가시적이지 않고 구체적이지 않음으로 인해 답답해했고 지루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셉은 하느님 말씀에 대한 끊임없는 기대와 그분께 의탁하는 삶으로 일관했습니다. 걷기 성가신 캄캄한 밤길을 오직 하느님만 바라보며 길 떠났던 여행길이 바로 요셉의 길이었습니다.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침묵
진짜 바보
-민경철 신부-
참 바보처럼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산 적이 있었습니다. 남이 날 등쳐먹으려 하면 속아줄 수 있고, 욕을 해도 웃을 수 있고, 억울한 일이 생기면 인생이 다 그러려니 하며 그냥 일상을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사람. 하지만 내 것을 잃고 싶지 않은 욕구와 내 것이 아닌 것을 찾아 나서려는 욕구 때문에 언제나 바보가 되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진짜 바보를 한 사람 만납니다. 예수님 아버지 요셉. 꿈속에서 나오는 천사의 말 한마디에 사생아를 잉태했다고 생각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이지요. 글쎄 성령으로 말미암은 아기라고 들었습니다. 이름도 주어져버렸습니다. 그때 당시 이름 짓는 권한은 아버지에게 있었는데 아버지 역할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지요. 요셉은 너무도 단순하게 그리고 주저 없이 들은 대로 행합니다. 내가 요셉이었다면 얼토당토않은 이 얘기를 순순히 따를 수 있었을까? 이 사실을 누가 알기라도 하면 ‘등신’이라고 욕할 것 아닙니까요? 요셉 참 대단하지요. 하지만 바보가 될 수 있었기에 하느님의 아들이 오실 수 있었던 것이 아닙니까?
내 삶의 모든 순간에
-오영숙 수녀-
하느님은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당신의 아드님을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온 세계를 뒤흔드는 로마 제국의 귀족 처녀도, 세력가 유다 집안도 아닌, 식민지 유다 산골지방의 처녀에게 당신 아드님을 맡기십니다. 인간의 힘으로가 아니라 성령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이를 받아줄 사람 또한 권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 학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자도 아닌 의로운 사람 요셉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방법은 우리의 방법과는 다르다는 것을 다시 한번 보여주셨습니다. 그 아기는 이미 오래전부터 기다려 온 메시아로서, 임마누엘 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마치 물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듯이 그분은 우리를 떠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신앙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 대한 자각, 그 현존에 대한 끊임없는 의식입니다. 성인들은 끊임없이 기도하며 하느님의 현존 안에 머물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우리의 의식은 노력을 하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그 사람에게 향하게 됩니다. 무언가 갖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도 그 목적이 달성될 때까지 끊임없이 그것에 대해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게 된다면 우리의 생각은 온통 그분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고 그분이 원하시는 길을 찾게 될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아무리 힘든 길이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신앙의 길은 언제 어디서든, 무엇을 하든 함께하시는 하느님의 현존 안에 살아가려 노력하며 나의 모든 순간에 그분을 초대하며 그분과 함께 걸어가는 삶입니다.
주님의 탄생은,
-홍성만 신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경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은 했지만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혼자 속으로 조용히 결심합니다. 파혼하기로 말입니다. 법대로 사는 의로운 그였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낼 생각도 없었으므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굳히기까지 요셉 성인의 마음은 어떠하셨을까? 요셉은 처음에 자신의 귀와 눈을 의심했을 것입니다. 잉태했다는 것이 사실로 드러나자 배신과 분노의 감정이 그를 휘몰아쳤을 것입니다. 며칠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며,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죽이는 그 시대에, 복수의 방법은 간단하다는 생각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의로운 요셉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리는 데까지 이릅니다. '평소에 그토록 소중히 여겼던 마리아, 하느님 안에서 마리아를 사랑하기에 해치지는 말자. 이에 가장 좋은 방법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파혼하는 것이다. 그러면 아기를 잉태시킨 남자와 잘 살수 있지 않겠나?' 생각은 여기에까지 이르렀지만, 실망과 외로움은 요셉을 괴롭혔을 것입니다. 할 일을 다한 요셉은 더 이상 견딜힘이 없었습니다. 이제는 십자가를 껴안는 일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꿈을 꿉니다. 천사가 나타나서 알려줍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아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배신감과 분노로 며칠 밤낮을 고통스럽게 지내고 겨우 마음을 가라앉혀 마리아를 풀어주고자 하였지만, 실망과 허전함, 그리고 외로움으로 시달려야 했던 요셉의 아픈 마음, 이 아픈 마음이 따뜻한 햇살에 얼음이 녹듯 녹아 내립니다. 요셉은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아기 예수의 탄생에는 인간을 향한 요셉의 끝없는 배려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배려할 힘조차 없어 십자가를 부둥켜안고 견디어야만 했던 순간이 있었습니다.
~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좇아 들어가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바로 그곳에서 하느님의 힘을 서서히 활동하십니다.
하느님의 뜻을 이행하기 위해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 마음속에서 성령은 활동을 시작하십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힘을 다한 그곳에 주님의 탄생은 예비되어 있습니다.
나의 구체적인 삶 속에서, 주님께서 탄생하셔야 할 곳은 어디이겠습니까?
천사와 요셉의 거래
-박상대신부-
마태오복음 1-2장은 예수님의 공생활(가르침과 행적)을 소개하기에 앞서 비교적 먼 과거의 이야기를 엮어만든 전사(前史)에 속한다. 이러한 전사는 루가복음(1-2장)에도 있다. 둘 다 원전(原典)이 될 마르코복음과 예수어록에 없는 전승들과 각자 고유의 자료들을 토대로 전사를 엮었을 것이다. 루가복음의 전사(前史)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잉태와 탄생, 그리고 성장과정을 상세히 기술하면서 세례자 요한을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선구자로 암시한다. 아울러 루가는 세례자 요한과 예수의 탄생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즈가리야, 엘리사벳, 마리아, 요셉, 목동들, 그리고 예언자 시므온과 안나 등의 주변인물들에 대한 자세한 서술도 포함시켰다. 이와는 달리 마태오는 예수님 단 한 분에게만 초점을 맞추어, 예수의 족보, 예수그리스도의 탄생경위, 동방박사들의 방문, 헤로데 대왕의 베들레헴 아기학살, 이집트 피난, 그리고 성가정의 나자렛 정착에 관한 이야기를 위주로 전사(前史)를 엮었다. 미리 알아두어야 할 점은 이러한 전사(前史)들이 예수의 생애 시초와 어린 시절에 대한 확실한 사실을 근거로 엮어진 기록들이 아니라 예수의 정체성과 그 의미를 밝히려는 신학적인 서술이라는 것이다. 즉, 인류구원을 위하여 죽음을 불사하고 부활하신 그리스도께 대한 교회의 신뢰와 신앙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전사가 마구 지어낸 이야기라는 말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전사가 사실과 달라야 하는 법도 없다.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경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물론 있었던 그대로의 사실을 설명하자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 마태오가 그 다음으로 해야 할 일은 무엇이겠는가? 마태오가 저술한 복음서의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전자(前者)는 인간의 이름이요, 후자(後者)는 하느님의 이름이다. 즉, 예수는 인간의 아들이요,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이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아이기 위해서는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다윗의 자손"이어야 하며, 동시에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이어야 한다. 마태오는 다윗의 후손인 요셉을 예수의 합법적인 아버지로 서술함으로써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이 되게 하였다. 마태오는 예수의 공생활 중에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예수께 8번이나 더 부여한다.(마태 9,27; 12,23; 15,22; 21,9.15 등) 그러나 "다윗의 자손"이라는 칭호만으로 예수님의 정체성을 다 밝혔다고 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임을 밝히는 일이 남았다는 것이다. 이 일은 하느님께서 스스로 추진하신다. 그것이 바로 "동정녀의 잉태"(이사 7,14), 즉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이다.(18절)
루가복음은 예수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를 하느님의 계획과 이 계획에 대한 동정녀 마리아의 적극적인 협조로 이루어짐을 시사하고 있다.(루가 1,26-38) 또한 루가는 마리아의 합법적인 남편 요셉을 두세 번 언급할 뿐 전적으로 배경에 머물게 한다.(1,27; 3,23) 그러나 마태오는 요셉과 약혼한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으로 말미암은 잉태에 관한 사실은 간단하게만 밝히고, 오히려 요셉을 부각시킨다. 마리아의 잉태가 자신과 무관한 사실을 알았을 때 요셉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이 점은 상상에 맡기겠다. 복음은 요셉이 법대로 사는 사람이었으나, 마리아를 법대로(신명 22,20-21) 다루지 않고 자비로이 선처(善處)하려 하였음을 시사한다. 이 때 하느님이 직접 개입하여 다윗의 후손인 요셉에게 사건의 정황을 설득시키고, 요셉은 이에 순명하여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 요셉은 마리아가 낳은 아들에게 천사의 명대로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할 "예수"라는 이름을 붙여주게 된다.(21절, 25절)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요셉의 합법적인 아들로서 다윗이 자손이 되었고, 동정녀를 통한 성령의 잉태로 하느님의 아들이 된 셈이다.
오늘 복음에서 인간의 아들이요, 하느님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한꺼번에 충족시킬 수 있는 더 나은 이름이 있다. 바로 "임마누엘"이다.(23절)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임마누엘"이라고 불린 적은 없다. "임마누엘"은 실상의 이름이라기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를 밝히는 의미상의 이름이다. "임마누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과 하느님의 참다운 만남이 이루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탄은 예수께서 저 바깥 마구간 구유에 오심을 기다리고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하느님이 오심을 기다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마음 안에 구유를 만들어야 한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마태1,18-24)
-유광수 신부-
오늘 복음을 보면 "요셉"이라는 이름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 요셉이란 이름은 무슨 뜻인가? 요셉이라는 이름은 "하느님께서 보태 주시다. 하느님께서 얹어주시다. 하느님께서 덧붙이시다."라는 뜻이다. 요셉이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은 요셉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은총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느님이 그런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이다. 요셉은 마리아와 같이 살기 전에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서 남모르게 파혼하기로 작정한 사람이었다. 그것이 요셉의 마음이었다.
오늘 복음은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라고 말하였다. 만일 요셉이 자기의 생각대로 마리아와 파혼하였다면 예수님의 양 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런데 꿈에 천사가 나타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라고 말해주는 것을 듣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예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만일 요셉이 자기 생각대로 파혼을 하였다면 그는 절대로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없었다.
그가 예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천사를 통해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셨고 또 마리아가 성령으로 예수를 잉태할 수 있도록 역사하셨고 그러한 당신의 계획을 요셉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천사를 통해 요셉에게 알려주어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던 그의 마음을 바꾸도록 은총을 덧붙여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요셉이 위대한 점은 바로 하느님이 그에게 내려주시는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절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만일 하느님이 요셉에게 베풀어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요셉은 절대로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되실 수 없었다.
요셉을 통하여 이루신 모든 일은 요셉이 이룬 일이 아니라 하느님이 이루신 일이다. 즉 하느님이 요셉에게 덧붙여주신 것이다. 하느님이 요셉에게 얹어주신 것이다. 요셉은 다만 하느님이 덧붙여주시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것뿐이다.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거부하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인 결과가 결국은 예수님의 양아버지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오늘 복음을 보면 천사가 요셉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고 하였고 "잠에서 깨어난 요셉은 주님의 천사가 명한 대로 아내를 맞아들였다."라고 하였다. 요셉은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한 대로 "맞아들였다." 즉 요셉은 하느님이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은혜를 은혜로 맞아들인 것이요, 천사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맞아들인 것이요, 파혼하기로 자기 생각을 굳혔었지만 천사가 "맞아들여라"고 말했기 때문에 자기의 생각을 버리고 천사의 말을 맞아들인 사람이다.
인간은 로봇이 아니고 붕어 빵이 아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밖에 없는 세계 유일한 존재로서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된 존재이다. 따라서 인간은 하느님을 닮도록 끊임없이 노력해서하느님의 모습을 닮아가야 한다. 그러나 하루 아침에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 가는 것은 아니다. 하루 하루 살아가면서 가꾸어야 하고 만들어 가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힘으로만 또는 나의 능력으로만 되는 것은 아니고 하느님의 은총이 덧붙여질 때 가능한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느냐에 따라서 그렇게 형성되고 그렇게 되어간다. 나쁜 생각을 하게 되면 나쁜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고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사람이 되어갈 것이다. 만들어다.
예수님은 "사람은 빵으로만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라고 말씀하셨다. 즉 내가 하느님의 사람이 되려면 그리고 하느님을 닮아 가는 사람으로 되려면 빵으로만 불가능하다. 빵과 더불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받아들일 때 가능한 것이다. 나의 생각이 이미 굳혀졌다 하더라도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을 때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말씀은 진리이고 그것이 나를 행복하게 해주고 나를 하느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생각한 것이 하느님의 말씀과 맞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각을 고집한다면 나는 나의 생각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생각하는 것으로만 머물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으로 바꾸어 하느님의 말씀을 맞아드린다면 내가 생각하는 그 이상의 것으로 넘어가고 하느님이 원하시는 대로 만들어질 것이다. 요셉이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을 받아들였기 때문이고 은총대로 살았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요셉에게 은총을 덧붙여 주셨듯이 오늘 우리에게도 새로운 은총을 덧붙여 주신다. 매 순간은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 시간이다. 우리가 얼마나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느냐에 따라서 매일 나의 모습은 하느님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이는 그릇이다. 요한 세례자가 말씀하신 대로 매일 하느님의 은총을 받아들임으로서 나는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은 내 안에서 더 커지셔야 한다. 나의 생각은 점점 더 작아지고 하느님의 생각은 더 커져야 한다. "너희가 나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새로워지고 날로 더 큰 사람으로 자라려면 하느님의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 은총은 선물이기 때문에 나는 그 선물을 받아들여야 한다. 내가 하느님께서 매 수간 덧붙여 주시는 은총을 받아들인 만큼 나는 성숙할 것이고 하느님의 사람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지도를 따라 사는 사람이다."(갈라 6, 1)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자기가 심은 것을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자기 육체에 심는 사람은 육체에게서 멸망을 거두겠지만 성령에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원한 생명을 거둡니다."(갈라 6, 8)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속에 이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이것은 그 엄청난 능력이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고린 후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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