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보낸 길동무
김병우
친구의 영정사진 앞에 섰다. 사진 속 얼굴이 나를 보고 환히 웃는다. 북받치는 감정을 억누르지 못해 꺼이꺼이 목 놓아 울었다.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자란 불알친구이자 절친한 길동무였다.
백내장 수술을 앞두고 있는 그 친구를 위로 차 추석전날 집으로 찾아갔었다. 술잔을 기울이며 요즘 세상에 그 까짓 것 병도 아니니 신경 쓰지 말고 편안한 마음으로 수술 잘 받고 밝은 낯으로 홀가분하게 보자고 했건만 6개월을 못 넘기고 불귀객이 된 영전에 향을 받쳤다.
당뇨합병증으로 인한 부작용이 겹쳐서 수술한 안과병원에서 급히 부산대학병원 응급실로 옮겼다는 연락을 받고는 대전에서 기차를 타고 내려가 면회신청을 했다. 친구의 목에는 호수 줄이 네 개씩이나 꽂혀있고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식물인간이 되어 침대에 누워있었다. 내가 갔을 때 마침 친구가 싸놓은 똥을 그의 아내가 재바른 손놀림으로 치우고 있었는데 민망했던지 한마디 했다. 이 양반이 보고픈 친구가 먼 길 왔다고 반갑다는 인사를 다 하네요. 당황스런 그 순간을 재치 있게 농담으로 얼버무렸다. 그때 나는 보았다. 친구의 양 볼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미동 없이 누워 있어도 우리가 하는 소리를 다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가슴이 미어터졌다. 그게 그 친구와 살아생전 마지막 대면이 되고 말았다.
그 친구를 보낸 지도 강산이 한번 변했다. 유난히 손재주가 많아서 맥가이버라는 별명으로 통했다. 중학교 때 동네에 있는 작은 교회에 같이 다녔는데 고장 난 만년필, 시계 등 이 친구 손만 가면 뭐든지 척척 고쳐졌다. 그래서인지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이 친구 역시 나처럼 밑으로 동생들만 많았지 형이나 누나가 없는 장남의 처지였다.
한번은 교회에서 알게 된 예쁘장한 여고생 누나의 사랑을 서로 독차지 하려고 둘이서 실랑이가 벌어졌었다. 그걸 눈치 챈 누나가 우리 둘을 교회 근처 빵집으로 불렀다. “니그 둘 다 내 동생아이가 싸우지들 말고 잘 지내 거래이” 파독 간호사로 떠나기 전 우리 둘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그 친구 떠나는 날 그 누나가 유독 보고 싶었다. 철없었던 사춘기 소년들의 생떼 같은 어거지 사랑을 다 받아주었던 천사 같은 누나였었는데… 독일의사와 결혼해서 잘 산다는 소문만 들었지 그 뒤로 한 번도 보지를 못 했다. 그 친구와 같이 셋이서 교회 뒷산을 오르내렸던 생각이 난다.
유명을 달리한 친구가 또 하나 있다. 고등학교 때 만난 단짝이다. 집이 시골이라 부산으로 유학 와서 학교근처에서 방을 얻어 자취생활을 했었다. 그 자취방에 친구들이 번질나게 드나들었다. 방안에는 항시 담배연기로 자욱했었고 그 친구가 시골집에서 갖다 나르는 반찬들이 맛이 좋았다. 방학 때는 친구를 따라 시골집에 가서 며칠씩 자고 오기도 했었다.
넓은 마당입구에 주렁주렁 매달린 감을 직접 따볼 수 있어서 즐거웠었고 시골집 특유의 전원풍경이 멋있었다. 소똥냄새 나는 토담방의 은은한 분위기도 싫지 않았으며 아궁이로 타들어가는 불길, 윤기가 반질반질한 가마솥, 쌀가마를 쌓아둔 곳간, 방마다 걸려있는 박제된 꿩이며 짐승들… 어릴 적 도심에서만 자라 이런 시골집 구석구석이 다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통나무로 만든 선반위에 가지런하게 포개어 얹어있던 검정색 광목이불을 덥고 자면서 무겁게 느껴졌지만 참으로 포근하게 잠들었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그 친구 아버지 직업이 포수였는데 농사일은 안중에도 없었고, 마냥 사람 좋은 한량이셨다. 친구랑 몰래 사냥총을 들고 뒷산으로 갔다가 들켜서 혼이 나기도 했었는데 그 주변일대 산이며 밭들이 다 자기네 거랬다. 마을 진입로에는 큰 호수가 하나 있었고 그 산모퉁이를 구불구불 지나면 오솔길 끝닿는 곳에 햇볕이 잘 드는 아늑한 마을이 그 친구가 사는 고향집이었다. 집 뒤편에는 작은 폭포수가 있었는데 그 밑에서 웃통을 벗고 둘이서 찍은 까까머리의 교복사진을 손때 묵은 앨범에서 꺼내어 보면서 학창시절을 떠올려본다.
그 친구가 지난해 동지 무렵에 저 세상으로 떠났다. 췌장암선고를 받고 서울아산병원에서 수술 뒤 결과가 좋다고 했건만 이 친구 역시 6개월을 못 버티고 망인이 되었다. 평소 자존심이 강한 친구라 죽음으로 치닫고 있을 때도 항암치료로 망가진 초췌한 몰골을 보이기 싫다며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말라고 했다는 얘기를 친구아들을 통해서 나중에야 들었다. 마지막 가는 모습이라도 봐야 하는 건데 그러지 못 한 것이 못내 한이 된다.
그 친구 죽기 2년 전인가 예전 그 시골집 부근에서 친구가 운영하는 가든식당을 아내와 같이 찾아간 적이 있었다. 옛날 얘기로 담소를 나누며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잠은 식당에서 좀 떨어진 옛 토담집으로 올라가서 잤다. 고교시절 친구어머니가 깔아주시던 이불을 이번에는 친구아내가 잠자리를 마련해줬다. 이불도 가벼운 천으로 바뀌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곳 없네.… 그 집에서 사시던 친구 아버지와 어머니는 이미 별세했고 집만 옛적 그 모습대로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상전벽해라 마을 입구에는 아파트단지가 들어서서 영 낯설게 느껴졌었고 옛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었지만 그나마 마을 안쪽에 있는 호수는 그대로 남아있어서 다소 위안이 되었다. 그 친구의 시골집, 논밭, 야산을 비롯한 주변 땅들이 모두 부산광역시로 편입이 되는 바람에 졸부가 된 그 친구는 초등학교 선생이 적성에 맞지 않음을 구실 삼아 미련 없이 교직을 그만두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자기네 땅에 손수 설계하여 가든식당을 폼 나게 지었다. 종업원 수십 명을 거느린 사장으로서의 그 친구는 월급쟁이 친구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회자되었다.
말 타면 말고삐를 잡히고 싶다고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는 법, 사업욕심이 과했던 친구는 제 몸뚱이 하나 돌볼 겨를도 없이 바쁘게 살았다. 사업스트레스를 중학교 때부터 즐겼던 담배와 술로써 해결하려고 했던가. 급기야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바쁘다는 핑계로 건강검진을 제대로 받아 본적이 없었다고 했다. 그 친구가 선생으로서 학교에 계속 남았더라면 그런 몹쓸 병에 걸리지 않았을 텐데…… 속절없는 생각을 해본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길동무를 둘이나 저세상으로 먼저 보냈다. 환갑 전에 안타깝게 생을 마감한 두 친구의 몫까지 열심히 살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해보면서 떠나보낸 길동무의 명복을 다시 한 번 빌어본다. (2016.5.6)
첫댓글 이제 모두 가는 길이 그 길인것 같습니다. 하지만 떠나는 것을 보는 마음은 늘 괴롭지요.
좀 더 초연해지면서 자신을 되돌아 보고 남은 일을 재미있게 해 나가는 자신을 꿈꿔 봅니다. 잘 읽었습니다.
친구를 보내고 그리운정을 담았는 글을 읽고 누구나 한번쯤 겪었던 일이라 지난 일들이 아리네요. 이제 나이가 나인지라
안 좋은 소식들이 심심찮게 들려옵니다. 누구나 겪어야할 마지막 이별. 태어날때는 나는 울고 나를 맞는 사람은 기쁘하고
떠날때는 나는 웃으면서 떠나고 남은 사람은 울면서 작별한다는 말이 머리에 벵벵돕니다, 잘 살고 가야할텐대 머잖은 날이 라고 생각이 됩니다. 잘 읽고 갑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상순드림
남의일 같지않습니다. 이제 어딜가나 나이많은층에 속합니다.지난세월 참회하며 살아야 겠습니다.잘 읽었습니다
우리네 인생길에 너무나 소중한 길동무를 먼저보낸 그 마음 알고도 남음이 있을것 같은글 감사합니다.
누구나 언젠가는 한번은 격어야하는 인생길 먼훗날 다시만날 기회가 있겠지요......
친구들을 먼저 떠나 보내고 그리는 마음을 잘 담아낸 글입니다. 그 마음을 공감하며 좋은글 잘 읽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