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 子謂仲弓曰 犁牛之子 騂且角 雖欲勿用 山川 其舍諸 공자께서 중궁에 대해 말씀하시길, “얼룩소의 새끼가 붉으면서도 뿔이 났으면, 비록 제물로 사용하지 않기를 바라더라도, 산천이 그것을 내버려 두겠는가?” 라고 하셨다.
犁 雜文 騂 赤色 周人尙赤 牲用騂 角 角周正 中犧牲也 用 用以祭也 山川 山川之神也 言人雖不用 神必不舍也 仲弓父賤而行惡 故夫子以此譬之 言父之惡不能廢其子之善 如仲弓之賢 自當見用於世也 然此論仲弓云爾 非與仲弓言也 ○范氏曰 以瞽叟爲父而有舜 以鯀爲父而有禹 古之聖賢 不係於世類 尙矣 子能改父之過 變惡以爲美 則可謂孝矣 犁는 섞인 무늬다. 騂(성)은 붉은색이니, 주나라 사람들은 붉은색을 숭상하여 희생제물로 붉은색을 사용하였다. 角은 뿔이 전부 바르게 자라서 희생제물에 적합한 것이다. 用은 그것을 이용하여 제사를 지내는 것이다. 산천은 산천의 신이다. 사람들이 비록 쓰지 않고자 하더라도 신이 반드시 버리지 않을 것임을 말한 것이다. 중궁의 아비가 천하고 악행을 행했는데, 그래서 공자께서는 이로써 그것을 비유하신 것이다. 아비의 악행이 그 자식의 선함을 없애지 못하니, 중궁의 어짊이라면, 스스로 마땅히 세상에 쓰여야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중궁을 논한 것일 따름이고, 중궁과 더불어 말한 것은 아니다. 범씨가 말하길, “고수가 아비이면서도 순임금이 생겨났고, 곤이 아비이면서도 우임금이 생겨났으니, 옛날 성현이 세상의 권세와 가문에 얽매이지 않는 것이 오래되었다. 아들이 아비의 잘못을 능히 고쳐서 악을 훌륭한 것으로 바꿀 수 있다면, 효라고 이를 만한 것이다.
潛室陳氏曰 祭天地之牛 角繭栗 宗廟之牛 角握 社稷之牛 角尺 以其色旣赤 又且角中程度也 잠실진씨가 말하길, “천지에 제사를 지내는 소는 뿔이 누에고치나 밤톨만큼 자란 송아지고, 종묘에 제사 지내는 소는 뿔이 손으로 잡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송아지며, 사직에 제사를 지내는 소는 뿔이 한 자(尺)가 된 소인데, 그 색이 이미 빨갛고 또한 뿔이 그 程度에 알맞은 것으로써 한다.”고 하였다. |
2 | 問子謂仲弓曰 犂牛之子 騂且角 伊川謂多一曰字 意以仲弓爲犁牛子也 考之家語 仲弓生於不肖之父 其說可信否 朱子曰 聖人心不肯對人子說人父不善 누군가 묻기를, “子謂仲弓曰 犁牛之子騂且角에 대하여, 정이천 선생은 曰자 하나가 많다고 말하였으니, 생각하건데, 중궁을 얼룩무늬 소의 새끼로 여긴 것입니다. 공자가어에 상고해보면, 중궁은 불초한 아비에게서 태어났다고 하니, 그 말을 믿을만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주자가 말하길, “성인의 마음은 아들을 대하면서 그 아비의 不善을 말하고자 하지 않으실 것이다.”라고 하였다.
問此章前後 作用人不以世類 南軒以仲弓言焉知賢才之故 故孔子敎之用人 此說牽合然亦似有理脈 曰 橫渠言 大者苟立 雖小未純 人所不棄也 今敬夫此說無他 只是要回互 不欲說仲弓之父不肖爾 何不虛心平氣與他看 古人賢底自賢 不肖底自不肖 稱其賢 可以爲法 語其不肖可以爲戒 或曰 恐是因仲弓之父不肖 而微其辭 曰 聖人已是說了 此亦何害 大抵人被人說惡不妨 但要能改過 過而能改 則前愆頓釋 昔日是不好底人 今日自好 事自不相干 何必要回互然 又要除却曰字 此曰字留亦何害 如子謂顔淵曰 吾見其進也 不成是與顔淵說 況此一篇 大率是論他人 不必是與仲弓說也 只蘇氏却說 此乃是論仲弓之德 非是與仲弓言也 누군가 묻기를, “이 장의 전후에 사람을 씀에 있어 세상의 부류로써 하지 않는다는 것을 기재하였고, 중궁이 ‘어떻게 현명한 인재인 줄 압니까?’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공자께서 그에게 사람을 쓰는 법을 가르쳐주었다는 남헌장씨의 이 말씀을 끌어다 합해보면, 역시 이치의 맥락이 있는 듯 보입니다.”라고 하였다. 말하길, “장횡거가 말하길, 큰 것이 진실로 확립되어 있다면, 비록 작은 것이 아직 순수하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버리지 않는 바라고 하였다. 지금 장경부의 이 말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완곡하고자 하는 것으로서, 중궁의 아비가 불초한 것을 말하고 싶지 않을 뿐인 것이다. 어찌하여 마음을 비우고 기운을 평안하게 하여 그와 더불어 살펴보지 않는가? 옛사람 중에 현명한 사람은 현명함으로 자처하고 불초한 사람은 불초함으로 자처하였으니, 그 현명함을 칭찬하면 법으로 삼을 수 있고, 그 불초함을 말하면 경계함으로 삼을 수 있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혹자가 말하길, “이는 중궁의 아비가 불초하기 때문에, 그 말을 은미하게 한 것이 아닐까요?”라고 하였다. 말하길, “성인께서 이미 말씀하셨다고 해도, 이 또한 무슨 해가 되겠는가? 대저 사람은 남에게 악하다는 말을 들어도 무방하다. 다만 능히 잘못을 고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니, 잘못을 했어도 능히 고칠 수 있다면, 이전의 허물은 그 즉시 풀어져 버리는 것이다. 옛날에 좋지 않았던 사람이 지금은 저절로 좋아졌다면, 일과는 저절로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니, 어찌하여 반드시 완곡하게 해야만 하고, 또한 왈자를 반드시 제거해야만 하는 것인가? 이 曰자를 남겨놓는다고 하더라도, 또 무슨 해로움이 되겠는가? 예컨대 공자님께서 안연에게 말씀하시길, ‘나는 그가 나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하셨는데, 이것도 안연과 더불어 말씀하신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물며 이 한 편은 대체로 다른 사람을 논한 것이기에, 반드시 중궁과 더불어 말해야만 하는 것도 아니었다. 오직 소씨만 오히려 이것이 곧 중궁의 덕을 논한 것이지, 중궁과 더불어 말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慶源輔氏曰 犁牛雜文 雖不堪作犧牲 然其所生之子 其色則騂 其角則正 則必將取以爲犧牲用矣 故不可以其母之犁而廢其子之騂也 雖欲勿用 人之私意也 山川其舍諸 理之所不容廢也 경원보씨가 말하길, “얼룩소는 무늬가 섞여있기 때문에, 비록 희생제물이 될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그것이 낳은 새끼가 색이 붉고 뿔도 바르다면, 반드시 장차 취하여 희생제물로 삼아 제사에 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어미의 얼룩무늬 때문에, 그 새끼의 붉은색을 버릴 수는 없는 것이다. ‘비록 제사에 쓰지 않고자 할지라도’라는 것은 사람의 사사로운 뜻이고, ‘산천이 어찌 그것을 버려둘 것인가?’라는 말은 이치가 버려두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한다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