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딱한 이야기 잠시 접고, 쉬어가자는 뜻으로 <동방에 이름도 거룩한, 중앙일보의 배달소년> 시절 이야기 하나 올립니다.
최근 조.중.동 최후의 발악이 눈에 보이죠?
권력과 금력에 빌 붙어 호가호위하는 조.중.동도 보급소장, 신문배달하는 하위직원들에 대한 철저한 갈굼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압니다.
우리나라 부(富)의 서열 1,2위를 다투는 삼성의 중앙일보가 30여년전 1970년대에도 꼭 이와 같은 짓을 세상물정 모르던
국민학생인 저에게 했길래 熱이 뻗혔어 한 마디 씁니다.
1970년대 초반 제가 국민학교 5학년 때, 지방 중소도시의 변두리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 8년전에 아버지를 여의고 전세, 월세로 전전하던 우리 어머니께서 4남2녀의 형제들을 데리고
엄청난 절약과 근면으로 시내 변두리에 조그만 집을 하나 장만해서 이사를 간 것이지요.
당시 아무리 어렸지만, 어머니의 그런 모습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고,
그 때 읽던 책들의 위인전에 보면 거의 모든 위인들이 고학을 했다!라고 적혀있는고로
위인이 되기위해서는 학비는 스스로 벌어 써야 한다는 것이 당시 의식있는 꼬맹이들의
생각이었습니다.
당시 의식있는 꼬맹이였던 저는(자전거 한대 갖고 싶은 것이 더 큰 소망이었지만..)
동네 형들이 다하는 겨울 아르바이트 찹쌀떡 장사는 아는 사람 만날까 부끄러워 어두컴컴한 골목에서
"찹쌀~~떠~억~~!" 열 몇번 하다가 꽁꽁 얼은 찹쌀떡을 우리 어머니께서 하시는
구멍가게에 재고 땡처리하는 걸로 접었습니다.
찹쌀떡 장사하면서 지방사람의 숙명인 <아는 사람 한 사람> 만났는데 주일학교 유년부 친구의 형을 만났습니다.
그 형이 저를 애처롭게 쳐다보던 그 얼굴과 표정이 지금도 선명히 기억납니다.
시내에서 살다가 시내 변두리에 이사 나온 저에게는 동네 형들이 보여주는 생활력이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게도 보였습니다.
여름에는 <아이스케끼장사>, 겨울에는 <찹~싸아~~ㄹ~ 떠~~억!> 하는 형들이 꿈이 있는 청소년들의 로망!
신문배달이라는 그 호기를 놓치겠습니까? 당연히 거의 모든 형들이 신문배달을하고 있었고
저 역시 신문배달 할 수 있는 구역 하나 만들어 달라고 동네 형들에게 부탁 많이 했습니다.
그렇게 하나 얻어 걸친게 지금도 선명히 기억나는 동아일보의 12區 !
즉, 시내 변두리 민가에 배달 구역을 하나 얻은 거지요.
국민학교 5학년인 저에게 동네형들이 그나마 선선히 찾아 준, 신문배달 구역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멀었고, 따닥따닥 붙은 골목길을 오르락내리락하여야 하는
길이 많고 사나운 개들도 많은 제일 험난한 구역이었습니다. 그나마 하나 얻어 준 신문배달 구역이라
감지덕지하고 배달을 다녔습니다. 국민학교 5학년생이 말입니다.
지금은 중학생들에게도 신문배달을 시킬 수 없다고 합니다.
신문배달을 위해 골목길을 아침마다 뛰어 다니며 골목길 어귀에 앉아 신문의 1면부터 사회면까지 주~욱 읽어보면서
좀 쉬었다가 다시 신문배달을 하기도 했습니다.
생활력과 체력단련, 논술준비를 위해서라도 요즘 중,고등학생들에게 신문배달 시켜야 됩니다.
그 때 동아일보에서는 한달에 3,600원을 주었는데 동네 형들이 말하기를 중앙일보에서는 500원을 더 준다는 겁니다.
경제논리 따질 것도 없이 이익이 있는 곳에 우수한 인재가 따를 것은 불문가지이므로,
한달 500원이라는 이익을 위해 우수한(우습지나 않으면 다행이지만) 인재이던 제가
또 그 것도 동네 형들의 소개로 중앙일보로 전직을 했습니다.
그 동네는 아침 출근하자 마자 살벌하더만요.
동아일보에서는 지국장 부인 뚱뚱한 아줌마가 " 니 왔나? 춥제? " 이러면서
배달할 신문을 나누어 주었는데,
중앙일보에 첫날 출근하니까 전 배달소년들이 좁은 지국 사무실에 군인들 과업정렬하듯이 각과 줄이 딱 맞게 반듯이 서서,
다리를 절룩이고 머리가 약간 벗어진 지국장의 훈시를 듣고 있는 겁니다.
우와~ 살벌 그 자체인 겁니다.
그러면서 "누구 누구 앞으로 나와봐라" 이러니까
중학교 3학년 쯤 되는 이름도 거룩하다 중앙 배달소년 형이 앞으로 나갔습니다.
지난달 신문부수 확장에 최고 많은 실적을 쌓은 이 달(今月)의 중앙배달소년이 되어
일금 500원인지, 1000원인지를 흰 봉투에 담아 주는 겁니다.
그러면서
"너희들도 이 누구누구의 뽄을 받아 신문부수 확장에 총력을 기울일 것이며
신문부수 확장만이 우리 지국의 목표이며 여러 분의 지상과제이다" 쪼로 훈시를 했습니다.
아울러 신문부수확장을 위한 실천과제이자 행동요령을 알려주는데,
뭔고하니
"..학교갔다와서 오후에 시간이 남으면 매일 편지를 쓰는거다.
편지 내용은 아저씨, 아줌마 저는 어릴 때 어머니와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어렵게 신문배달을 하여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아저씨, 아줌마께서 신문을 한부라도 더 봐주시면 제가 학교를 졸업하고..."
정말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써서 중앙일보를 보지 않는 가정에 편지를 던져두라는겁니다.
도저히, 어린 마음에 '저것 거짓말이다' 라는 생각이 들어 아니, 숫기가 없어 저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매일 아침마다 편지 몇장 써 왔는지 확인! 확인!!하는데 당할 재간이 있습니까?
몇 통을 써 가서 검사를 받고 며칠을 버텼습니다.
편지 써 간게 아까워(아니, 다른 형들이 타는 상금이 부러워)
또, 혹시 눈먼 아저씨, 아줌마들께서 편지를 읽고 신문이나 봐 주실지.
중앙일보를 보지 않는 가정에 편지를 큰 용기를 내어 집어 던져 넣고는
"어이 봐라.. 니 와 이리 씰데없는 편지보내노?" 라고 아저씨, 아줌마가 잡으러 올까.
십리나 도망을 치기도 했습니다
한 달 후!
다리를 절고, 머리가 벗겨진 지국장이
"누구 누구 앞으로 나와봐라"
이러면서 지난 달에 상금을 탄 중학생 형에게 또 상금을 주었고, 예의 "이 학생의 뽄을 보아.. " 라면서
일장을 훈시를 했으며 "또 누구누구 앞으로 나와봐라" 하면서 국민학교 5학년이던 저를 불러 내었습니다.
"니는 내일부터 나오지마라!" 라고 일방적인 해고통고를 했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습니까?
저가 말입니다!
국민학교 5학년때 중앙일에서 권고사직을 당한 사람이란 말입니다!
또 저가 말입니다!
제가 국민학교 5학년때 중앙일보 언론계 근무했기 때문에,
1980년대 해직언론인들은 다 저의 언론계 후배들이란 말입니다.
에이 쓰벌넘들..
국민학교 그 어린 놈에게 거짓말 시켜서라도 영업을 할려던 그 넘들이..
30년이 지난 지금 이 시기에도 그 따위 짓을 시키고 있어?
에이~~
동방에 이름도 거룩하다 중앙일보!
/*왜 오늘 아침 갑자기 그 때 기억이 나는지.. 씁쓸한 기억입니다.
뒷날 아침에 신문사 출근을 하지 않으니까,
우리 어무이께서 "니는 우찌 한가지 일을 질게 제대로 못 하노?" 하시면서
저를 끈기없는 놈으로 인식하신게 제일 섧었습니다. */
첫댓글 좃선을 아작내며 곧바로 중앙 패대기로 들어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