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편지 92신]‘들멍’을 아시나요?
나의 일상인 ‘들멍’을 부러워하던 소형에게.
진작에 인생 제2막의 생업生業을 농촌에서 소 키우는 것으로 정하고 일로매진一路邁進하는 형을 사귀게 된 것은
최근 나의 또다른 기쁨입니다.
엊그제 ‘진공재’라는 대한민국 둘째가라면 서운할 전각서예인 친구와 우리집 툇마루에서 커피를 한잔 했지요.
그때 내가 꺼낸 말뜸(화두話頭)이 ‘들멍’이었습니다.
내가 만든 생소한 신조어新造語 ‘들멍(들판을 바라보며 멍때리기)’을 설명하자,
소형은 고개를 연신 끄덕이며 부러워했지요.
처음으로 보내는 편지인데, 들멍에 관한 얘기를 조금 더 진전시키고 싶어 자판을 두들깁니다.
요즘은 농번기農繁期인지라 마음의 여유가 좀 없는 편이어서
툇마루에 앉아 집앞 들판field을 바라보며 ‘암(아무) 생각없이’ 멍때리고 있기가 쉽지 않습니다.
허나, 하루에도 여러 번 들멍을 하려고 노력합니다.
이 말은 내가 만든 말이나, 요즘 방송에서 ‘불멍’ ‘물멍’이라는 신조어가 자주 나오던데,
무슨 뜻인지 몰라 검색을 해본 후 ‘아하’ 했습니다.
‘불(모닥불이든 캠프파이어든)을 바라보며 멍때리기’ ‘물(집안의 수족관이든 호수가 강이든)을 바라보며 멍때리기’의 준말이더군요. 들멍은 당연히 들판을 바라보며 멍때리는 것을 말하겠지요.
우리집 앞에는 세 개의 큰 길이 지나갑니다.
1km쯤 되는 앞산 허리에는 완주-순천 고속도로가, 그 밑으로는 전라선 철로가, 또 바로 앞에는 17번 일반국도가 펼쳐지는데,
하루종일 고속버스와 열차 그리고 일반 승용차들이 수도 없이 지나갑니다.
툭 트인 들판을 바라보는 것도 좋은데, 무수히 지나가는 차들을 바라보는 것만도, 아시겠지만 심심치 않습니다.
나락들이 누렇게 익은 황금벌판, 가을을 생각해 보세요.
왜 오늘을 사는 우리는 멍때리는 시간을 갖고 싶어할까요?
생활에 지쳐서? 외로워서? 그건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멍때리는 것은 명상瞑想과 어떻게 다를까요?
언젠가 신문에서 본 토픽에 의하면 ‘세계 멍때리기대회’도 있다더군요.
누가누가 가장 오랜 시간 동안 멍을 때리는지 기록경쟁을 하더군요. 재밌는 일입니다.
이 때의 ‘멍’은 무엇일까요? 내가 임의대로 정한 정의는 이렇습니다.
명상은 ‘집중集中’이고 멍은 ‘비집중非集中’이다.
어떤 화두를 내세우고(이를테면, 나는 어디에서 왔는가?) 집중하여 생각하는 것이 명상일 듯하고,
이런저런 생각도 없이 ‘그냥’ ‘맥없이(매급시)’ ‘가만히’ 앉아 ‘세월아 네월아’하는 것이 멍때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언젠가 TV 휴먼다큐 프로에서 봤는데, 댐을 만드는 바람에 고향을 잃고 수몰민이 된 사람이
댐 주변에서 매운탕집을 하며 살아가는데, 식당 앞 평상 위에 수시로 벌러덩 눕더군요.
PD가 고향이 댐에 잠기고 팔자에 없는 식당을 하는데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그 사람이 대번에 “암 생각 없습니다”라고 답변하던데, ‘암 생각없다’는 말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지금껏 기억합니다.
그 ‘암 생각없는’ 게 멍때리기의 기본1조가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이 사는 데 누군든 골치 아픈 일이 왜 없겠습니까?
그냥 그 시간만이라도 그 생각을 접어두는 것이죠.
지지난해 고향집을 수리하면서 툭 트인 들판을 바라보며
이런 멍때리는 시간을 가능하면 많이 가지려고 야심차게 만든 게 툇마루입니다.
소형도 잠시잠깐 앉아보았으니까 나의 취지를 충분히 이해하겠지요? 흐흐.
나는 종교宗敎를 가지고 있지 않지만, 심정적으로는 잘 알지는 못하지만 불교도佛敎徒일 것입니다.
소형의 절친이 주고간 도록 중 내가 오래 전부터 아주 좋아하던 글귀 두 개를 발견했지요.
‘방하착放下着’과 ‘수처작주隨處作主’가 그것인데, 불교 용어이겠지요.
“(마음을) 내려놓아라” “그 어느 곳에서든 (네 자신이) 주인主人이 되어라”라는 뜻이지요.
멍때리는 시간을 자주 갖고 싶은 까닭은 바로 ‘방하착’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잠깐 소풍 나온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내가 곧 (마음의) 주인’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칫 주인이 아니면 자신도 모르게 ‘(삶의) 노예奴隸’가 되어버리기 일쑤이지요.
그래서 나는 비록 만2년 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골생활이 좋습니다.
시골생활은 방하착과 수처작주의 마음가짐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 안빈낙도安貧樂道하기에 “완전 딱”이거든요.
소형은 이미 10년이 넘었을 터이니까, 나보다 훨씬 먼저 더 높은 경지에 도달했겠지요.
60여마리의 소 밥(여물, 죽)을 하루 두 번 고정적으로 주기만 하면 어지간하면 ‘자유自由’일 테니까요?
그렇지 않나요?
마루에서 화제가 됐던 들멍과 소형의 절친이 주고간 도록의 작품으로 한 통의 편지를 쓰게 되었군요.
물론 소형의 집에서도 들멍이 어느 정도 가능하겠지만,
우리집만큼 툭 트여 들멍하기에 좋은 곳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전망좋은 유명 호텔에서는 ‘마운틴 뷰mountain view’ ‘오션 뷰ocean view’하며 숙박료를 더 받기도 하더군요.
돈은 받지 않을 터이니, 종종 놀러 와 같이 말없음 속에서 같이 들멍합니다. 흐흐.
2021년도 어느새 하반기가 시작되는 7월 1일이군요.
건강과 건승을 빌며 줄입니다.
이웃마을 우거에서 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