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목일 날 세 여자를 만났다. 태어나서 하루에 여자를 세 명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다방 안은 ABBA의 ‘워터루’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따라 불렀던 것도 같다.
세 여자 중에서 아내를 골랐다. 두 명의 여자는 얼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한 명은 간호사 였던 것도 같고, 한 명은 뭐 하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머니가 아홉수를 넘기면 안된다고 해서, 일본에 있다가 봄 방학 때 강릉으로 와서, 식목일날 세 여자와 맞선을 본 것이다.
아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얌전하다는 생각 뿐, 그리고 가냘펐다는 생각 뿐, 일본 여자를 닮았다는 생각 뿐.
그것이 아내를 처음 본 느낌이었다.
그렇게 아내와 시작을 했다.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 두 번인가 만났다.
두 번다 포장 마차에 데리고 가서 술만 먹었다. 아내는 다소곳이 내 옆에 앉아만 있었다.
기억 나는 것은 카바이트 불 빛 아래 메추리가 벌거벗은 채로 줄지어 누워있었다는 것 뿐.
여름 방학 때 나와서, 아내와 소금강에 갔다.
폭포까지 올라가지도 않고 입구 근처 식당에서 도토리묵을 안주로 해서 소주를 마셨다.
산 속이라 그런지 어둠이 빨리 찾아왔다.
어둑한 식당에 앉아서 울려 퍼지는 부엉이 소리를 들었다.
시내 버스가 끊겼다. 다음 날 출근해야 할 아내가 걱정이었다. 택시도 잡을 수 없었고, 도저히 방법이 없었다.
민박집에서 아내는 나에게서 멀리 떨어져 문 앞에 앉아 있었다.
방안은 여전히 부엉이 소리였다.
그렇게 아내와의 첫날 밤이 지나갔다.
그래서 아내와 결혼 할 수 밖에 없었다.
결혼식 날 비가 내렸다. 결혼식이 무척이나 거추장 스러웠다. 빨리 끝나기를 기다렸다.
경포대 횟집에서 친구들과 피로연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갔다.
나는 술이 취해 아내를 내버려둔채 잠이 들었고, 아내는 아침까지 곱게 신부 화장을 한 채 앉아 있었다.
다음 날 아내와 일본으로 왔다.
아내와의 시작은 학교 앞 4조 반 다다미방이었다.
학교에 갔다 오면 아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다.
아마, 나는 달래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내가 겨우 안정을 찾은 것은 일본어 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아침에 자전거 뒤에 아내를 태우고, 야스다 강당 앞의 외국인 유학생 가족을 위한 일본어 교실에 아내를 내려주고 연구실로 갔다.
휴일이면, 우에노 신주꾸 아끼하바라 하라쥬꾸 이케부쿠로 오차노미즈 등지로 놀러 다녔다.
멀리 후지산 밑의 온천으로 간 적도 있었다.
아내와 일본식 잠옷을 입고 사진도 찍었다.
그 시절이 아내와의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임신을 하고 입덧이 심해 한국에 갔다가 4개월 만에 아내가 돌아오고, 학교 앞 홍고 산쪼매를 떠나 아야세로 이사를 하고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생기면 방이 두 개가 필요할 것 같아 방값이 싼 교외로 간 것이다.
아야세에서는 집이 전철 역과 멀리 떨어져 있어 자전거를 타야만 했다.
중고 자전거를 사서 아내를 잡아주었다. 내 한번인가 가르쳐 주었는데 아내 스스로 배워서 타게 되었다.
휴일이면, 동경 시내에 놀러 나갔다가 아야세 역에 내려서 아내와 둘이서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오곤했다.
가끔 집 주변에 있는 아라가와 강 뚝을 자전거를 달리기도 했다.
그 시절도 아내는 행복해 했다.
아마 그것들이 내가 아내에게 주었던 최고의 선물이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