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용두열 회원 여러분들께!
이번 20편을 끝으로 금번 시리즈의 대미를 장식하려고 합니다. 애초에는 40편까지 기획했는데, 나머지 내용이 궁금하시면 얼마전 소개한 같은 제목의 <명작영화로 명배우·명감독·역사를 읽다> 책자를 참고 바랍니다. 그동안 열독해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Ⅰ. 영화 <분노의 포도>
살인죄로 4년간 복역 후 가석방된 톰(헨리 폰다 분)은 고향인 오클라호마로 돌아온다. 하지만 소작농을 몰아내는 무자비한 철거로 인해 일자리를 찾아 가족들과 함께 캘리포니아로 향한다. 일가족의 꿈을 이뤄줄 것만 같았던 캘리포니아에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하는 것은 새로운 고난의 시작이었다.
이는 존 스타인벡의 소설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 〈분노의 포도〉의 간략한 줄거리다. 과연 이것이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인 20세기 폭스사에서 제작하고 존 포드가 연출한 영화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투철한 계급의식으로 시종일관하는 영화가 바로 이 영화다. 마지막 장면, 가족을 떠나 혁명가로 변신하는 톰의 여정을 원거리에서 잡은 롱 테이크는 정의의 총잡이가 추격을 피해 먼 길을 떠나는 서부극의 엔딩을 떠올리게 한다.
사진, 톰과 어머니
당시 20세기 폭스의 사장이었던 대릴 자눅은 원작의 가치를 일찌감치 알아보고 판권을 사서 서부극의 거장 존 포드에게 연출을 의뢰했다. 자눅은 스튜디오를 좌지우지하던 보수적인 투자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이 책의 영화화를 고집했다. 그리고 존 포드 감독을 적임자로 꼽았다.
미국의 민중과 그 역사에 대한 포드의 이해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포드는 톰 조드 가족이 겪는 고난에서 가장 가슴 아픈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고 있다. 존 포드와 존 스타인벡, 그리고 헨리 폰다까지 미국 영화와 문학계의 세 거물들 모두에게 대표작이 된 영화다.
사진, 톰의 가족들
명작 소설을 각색한다고 해서 영화도 명화가 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분노의 포도〉는 영화도 걸작으로 남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문학의 명성에 걸맞은 체면을 세워준 작품이다. 주인공 톰 역할을 했던 헨리 폰다의 역할도 크다. 폰다는 고독하고 우수에 젖은 떠돌이나 천대받는 하층 젊은이의 모습을 훌륭하게 연기했다. 포드는 톰과 어머니 주인공 톰 조드 역에 그의 영화〈젊은 링컨> <모호크족의 북소리〉에 출연한 바 있는 헨리 폰다를 다시 기용했다.
헨리 폰다 외에 어머니 역의 제인 다웰도 좋은 연기를 보여주었는데 주연상 후보로 올라도 할 말 없는 비중이었지만 아카데미 조연상을 수상했다. 농장을 떠나기 전날 밤 어머니(제인 다웰 분)가 모든 세간을 불태우는 장면은 특히 잊혀지지 않는다.
한편 영화 〈시민 케인〉의 촬영감독으로 유명한 그레그 톨런드가 촬영을 맡았다. 톨런드의 촬영은 전반적으로 짙은 어둠을 의도적으로 사용했다. 예컨대 톰이 가석방 직후 마을을 찾았을 때 마을에서 숨어 살던 한 남자가 톰에게 어둠속에서 지난 일들을 이야기해 주는 장면은 흔들리는 촛불로 인상적으로 묘사했다. 이 영화는 아카데미 감독상을 받았는데, 당시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걸작 〈레베카〉와 경쟁을 했다.
사진, 짐으로 짜브러진 차를 타고 캘리포니아로 가는 가족들
〈레베카〉는 작품상을, 〈분노의 포도〉는 감독상을 나누어 가졌다. 존 포드도 아일랜드계이긴 하지만 당시 그는 이미 미국의 상징적인 감독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영국에서 막 건너온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일종의 텃세가 작용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남우주연상은 <분노의 포도〉의 헨리 폰다, 〈레베카〉의 로렌스 올리비에가 각축전을 벌였다. 하지만 이 賞은 의외로 〈필라델피아 이야기〉의 제임스 스튜어트에게 돌아갔다.
II. 진보의 아이콘, 헨리 폰다
헨리 폰다는 할리우드 역사에서 내로라하는 명배우들 중 한 명으로 손꼽힌다. 호리호리한 체격과 부드러운 목소리, 선량하고 정직해 보이는 이미지는 그로 하여금 이상주의적인 미국인으로 제격이었다. 그는 진보적 분위기의 할리우드에서도 더욱 진보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성향의 인물인지라 딸인 제인 폰다가 어렸을 때 자신의 앞에서 ‘니거(nigger:깜둥이)’라는 말을 입에 올리자 따귀를 올려 부쳤다는 일화도 있다. 당시 미국의 분위기가 흑인 인종차별이 극에 달했던 1950~60년대임을 감안하면 폰다의 행동은 상당히 진보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1905년 5월 16일 네브래스카주 그랜드 아일랜드에서 태어난 폰다는 이듬해 네브래스카 주오마하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인쇄업자였으며 평탄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미네소타대학교에서 언론학을 전공했으나 20세 때, 폰다는 어머니의 친구이자 말론 브랜도의 어머니 도디 브랜도의 권유로 대학을 중퇴하고 오마하 연극무대를 통해 연기에 입문했다. 이후 1929년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무대배우로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이후 할리우드로 둥지를 옮긴 폰다는 1939년 존 포드 감독이 연출한 영화 <젊은 링컨>에 첫 출연했고 계속해서 포드의 <모호크족의 북소리>, 그를 아카데미상 후보에 올려놓은 <분노의 포도> <황야의 결투> 등에 출연하면서 존 웨인 다음으로 포드 작품에 많이 출연했다. 폰다는 잠시 할리우드를 떠나 브로드웨이 연극무대로 돌아갔고 2차 세계대전 당시 미 해군함정을 배경으로 한 연극 <미스터 로버츠>에 출연,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
1955년, 이 연극의 영화화를 맡은 포드는 폰다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했다. 이미 오랫동안 같은 역을 해서 이 작품에 대해 빠삭한 폰다는 주인공 캐릭터에 대해 포드와 의견충돌이 번번이 있었다. 결국 어느 날 폰다가 포드에게 ‘웃음과 타이밍을 모르는 연출’이라고 툴툴거리자 포드가 그 자리에서 폰다의 턱을 후려갈기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두 사람 모두 한가락 하는 성격들이라 그냥 넘어가질 않았다. 이후 포드가 사과했지만 감독은 머빈 르로이로 바뀌었고, 포드와 폰다는 영원히 갈라섰다.
사진, <12명의 성난 사람들>에서
1957년에는 폰다는 직접 제작자로 나서면서 시드니 루멧의 <12명의 성난 사람들>에 출연했다. 친부 살인 혐의로 기소된 한 젊은이의 운명을 결정하는 12명의 배심원들에 대해 강렬한 이야기를 담은 이 영화는 비평가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다.
이어서 같은 감독의 <핵전략 사령부>에서도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그의 영화인생의 말년이기도 한 1979년, 뜬금없이 세르지오 레오네의 마카로니 웨스턴 <옛날 옛적 서부에서>에 출연했다. 평소의 선량하고 정직한 이미지와 정반대로 냉혹한 악당을 연기하면서 미국인들을 경악시키기도 했다. 그는 비록 악역이었지만 일품 연기를 보여줬다.
진보적인 분위기의 할리우드에서도 폰다는 폴 뉴먼과 함께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진보주의자로 평가받는 인물이었다. 보수주의자로 소문난 존 웨인과 흔히 비견되기도 한다. 존 웨인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지 않아 겁쟁이 이미지로 낙인 찍혔지만 폰다는 죽마고우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함께 참전하면서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을 때에는 이미 나이 40줄에 접어들었지만, 스튜디오에서 가짜 전쟁을 하고 싶지 않다며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사진, <황금 연못>에서 캐서린 헵번과
폰다는 처음에는 구축함에서 3년간 복무하다가 중태평양 전선에서 항공전투정보과 장교로 근무하면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까칠한 성격의 폰다는 살갑지도 않은 편이어서 자식들인 딸 제인 폰다와 아들 피터 폰다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특히 제인 폰다와 사이가 좋지 않기로 소문났다.
결국 헨리가 제인과 피터를 낳아준 두 번째 아내인 프란시스 포드 를 제쳐두고 수잔 블랜차드와 바람을 피우면서 사달이 났다. 프란시스가 헨리와 이혼 후 우울증으로 자살을 하는 통에 부녀관계는 극도로 악화되었다. 이 때문인지 헨리와 아들 피터, 딸 제인 셋이서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서로 어색한 모습을 연출하곤 했다.
부녀 관계가 완전히 회복된 것은 폰다가 생애 마지막으로 출연했던 1981년도의 영화 <황금 연못> 덕분이었다. 그 영화에서 헨리와 제인이 공교롭게도 티격태격하는 부녀지간으로 출연하는데 영화에서는 부녀가 화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헨리와 제인도 영화 촬영 동안 서로간의 앙금을 풀고 화해하기에 이른다. 폰다는 이 영화로 죽기 전 몇 달을 남겨두고 남우주연상을 받았다. 더불어 상대역인 캐서린 헵번도 네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전대미문의 대기록을 수립했다.
사진, 딸 제인과 함께
실제로 부녀는 이 영화 이전에 화해의 조짐이 있긴 했다. 1978년 헨리가 AFI (미국영화연구소)로부터 인생 공로상을 받을 때 마지막 연설에서 자신의 딸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향해 "닥쳐, 제인은 완벽하니까."라고 한방 날리기도 했다. 아버지의 말에 감동한 제인의 눈가엔 눈물이 맺혔고, 이러한 모습은 많은 이들을 감동케 했다.
81년도에 생애 최초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폰다는 이듬해 77세에 심장병으로 이승을 하직했다. 배우 출신인 레이건 대통령은 폰다를 "뛰어난 연기로 영화계에 헌신했던 진정한 배우였으며 진솔함으로 스크린을 빛낸 전설이었다.“며 고인을 회고했다.
III. 1930년대 미국 중서부를 휩쓸었던 먼지 폭풍
사진, 30년대 미국 중서부의 먼지 폭풍
미극 중서부 농지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초까지 걸쳐 밀려들어온 이민자들이 개간한 것이었다. 미국 중서부 지역의 대평원은 넓은 초지와 풍부한 수자원으로 세계적인 목축지대로 여겨져 왔다. 미국 중서부에서 공짜 목축업이 시작된 곳도 바로 이 대평원이었다.
스페인인들이 기르다 그냥 놔둔 소들과 미국 들소(버펄로)들까지 이곳에서 푸짐하게 자라는 풀을 뜯어 먹으면서 어마어마한 숫자로 번식했다. 농사도 기가 막히게 잘됐다. 그러나 1930년대 초반부터 이 축복받은 대평원에 재앙이 찾아들었다. 기름진 풀밭이 사막으로 변하고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거대한 먼지 폭풍이 일어났다. 마치 ‘먼지 사발(Dust Bow)’속에 폭 빠진 것 같았다.
여름 기온이 5도에서 43도를 오가는 이상 기후에 비도 내리지 않으면서 대지는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1934년과 1939년에는 최악의 가뭄이 발생했고 1935년에는 최악의 먼지 폭풍이 일어났다. 이 먼지 폭풍은 한때 기름졌던 땅을 몽땅 황무지로 바꾸어놓았다. 거대한 먼지 폭풍이 미국 중서부의 광활한 땅인 오클라호마·텍사스·캔자스·콜로라도·뉴멕시코를 휩쓸고 지나갔다.
한낮에도 강력한 모래바람이 불면서 밤처럼 캄캄해졌다. 이 모래 폭풍은 멀리 동부의 뉴욕과 워싱턴까지 날아갔다. 가옥이 모래에 잠기고 겨울이면 먼지가 섞인 붉은 눈까지 내렸다. 축복의 땅으로 불리던 대평원이 죽음의 땅으로 변한 것은 오로지 인간들의 탐욕과 무지에서 기인했다. 이들은 거의 화전에 가까운 마구잡이식 경작을 했던 것이다.
때마침 대거 출현한 트랙터들이 오랜 세월을 이어온 야생풀을 뿌리째 뒤집어엎었다. 사람들은 이 야생 초지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전혀 몰랐다. 방목된 소떼가 뜯어먹고 빗물에 의한 토양 침식을 막아주며 지하수를 가두는 소중한 역할을 했던 이 야생 초지를 송두리째 없앤 것이다. 그러고도 미국인들은 ‘농업기계화 찬가’를 연신 불러댔다. 이제 이 황폐화된 땅에서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사람들은 하는 수 없이 뿔뿔이 살길을 찾아 나섰다. 이때 중부에서 서부로 떠난 인구가 250만 명이었다. 어마어마한 이주 대행진이 이어졌다. 은행 빚을 갚지 못해 쫓겨나듯 캘리포니아 등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새로 이주한 곳이라고 사정은 별반 다르지 않았다.
때는 마침 대공황이라는 엄혹한 시절이었다. 어디에 가도 온통 실업자들 투성이었고 일자리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간혹 일거리를 주는 회사나 농장주들은 터무니없는 품삯을 주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이후 농사법의 개량과 함께 1937년부터 비가 내리면서 가뭄이 해소되었고 모래 폭풍도 다소 멎었다. 고향을 떠나지 않고 버틴 사람들은 연방정부의 지속적 지원을 통해 토양의 풍화를 점차 줄여나갔고, 방풍림을 심었다. 밭고랑을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과 직각으로 파서 바람에 의하여 기름진 흙이 날아가는 것을 상당 부분 막을 수 있었다.
모래 폭풍이 한창일 때 중부 출신 이주 농민들에 대한 일부 농장주들의 착취와 비인간적인 행태를 취재하던 《샌프란시스코 뉴스》지의 기자 존 스타인벡이 취재 수첩을 바탕으로 소설을 써 당시 참상을 생생하게 전했다. 미국의 사실주의 소설가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1939)』는 이렇게 나왔다.
“사람들의 눈에는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매달린 분노가 더욱 알알이 무겁게 영글어 간다.” -『분노의 포도』의 한 구절
IV. 1929년 대공황
검은 목요일
31대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된 허버트 후버는 1929년 취임사에서 빈곤에 대한 최후의 승리가 눈앞에 닥아 왔노라고 국민들한테 천명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도 이에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1920년대 말까지 미국은 끝없는 산업 확장에 따른 크고 작은 투자로 경제성장은 나날이 고공행진을 하고 있었다. 금융가들과 실업가들은 대중들의 우상이 되었고, 많은 미국인들이 주식 광신도들이 되어 있었다.
당시 미국이 낳은 최고의 경제학자로 알려진 어빙 피셔교수는 “주가는 저 영원히 높은 고원처럼 보이는 곳으로 기관차처럼 쉬지 않고 씩씩하게 달려갈 것이다.”라고 말하며 미국 경제의 핑크빛 미래에 대해서 나발을 불어댔다. 주가는 날마다 올랐고 누구나 손쉽게 부자가 될 수 있었다. 평범한 점원이나 간호사가 주식을 사서 돈벼락을 맞았다는 이야기들이 시중에 떠돌아 다녔다.
사진, 대공황 속의 월가
처음에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의사나 변호사들이 주식을 샀다. 그 다음에는 사무원들이나 장사꾼들이 사기 시작했고 그 다음으로는 공장 근로자들이나 트럭 운전사들이 사기 시작했다. 전업주부들도 팔을 걷어붙였고 구두닦이들까지 나섰다.
너도나도 땅과 집을 잡아 은행돈을 빌려 주식사기에 나섰다. 주식 값은 고무풍선처럼 마냥 부풀어 올라 빵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치솟았다. 전 미국이 주식 광풍 속에 휘말려들어 갔다. 그러나 미국 경제는 1929년 9월부터 사실상 어두운 먹구름 속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호경기가 끝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슬슬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와중에 사태가 터져버렸다.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 증권거래소가 문을 열기 전까지는 평상시와 같았다. 그런데 11시가 되자 낌새가 이상했다. 처음에는 거래가 정상적으로 진행되더니 갑자기 매도 주문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는 곧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너나 할 것 없이 “팔아, 빨리 팔아. 얼마라도 좋다. 팔기만 하면 된다고!”라고 난리북새통을 쳤다. 그러자 주식 값이 곤두박질치기 시작했다. 전신과 전화는 매도신청으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불안에 떠는 수많은 사람들이 거래소 앞에 모여 갈피를 못 잡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무슨 뚜렷한 이유도 없었다.
굳이 원인을 규명하자면 사람들이 너나할 것 없이 주식 값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주식을 팔려고 한꺼번에 거래소로 몰려나왔기 때문이었다. 이날 하루 동안 주식 값이 떨어져 알거지가 된 주식투자가 가운데 무려 11명이 고층빌딩에서 몸을 던지는 등 이런저런 방법으로 목숨을 끊었다. 단 몇 시간 만에 파산해 버린 투자가들이 부지기수로 쏟아져 나오면서, 그날 이후 월가에는 뛰어내리려고 고층 빌딩의 창문 앞에 긴 줄이 생겼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심지어 당시 뉴욕의 호텔에서는 문 앞에서 벨 보이가 투숙객에게 “주무실 겁니까? 아니면 뛰어 내리시겠습니까?”하고 물어보는 진풍경이 일어나기도 했다. 주식 값은 잠시 주춤하다가 닷새 지난 화요일에 또다시 곤두박질치는 바람에 무려 반 토막이 됐다.
사진, 무료 급식소 앞의 실업자들
다른 도시의 증권시장들도 아등바등 시세하락을 막다가 포기하고 아예 폐장하고 말았다. 피셔의 공언은 헛소리가 되어버렸다. 피셔는 명예만 잃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전 재산을 주식에 투자하고 있었다. 그는 모든 주식을 탈탈 털리고 완전히 거지가 되어버렸다. 그가 잃은 재산은 무려 1,000만 달러에 이르렀다.
잠시 잠잠하던 주식시세가 10월 29일 화요일, 다시 한 번 꼬나 박았다. 이 하락세가 11월까지 이어지자 소액투자가뿐만 아니라 거액투자가들도 모두 파산하고 말았다. 대부분의 주식은 휴지 조각으로 변해버렸다. 이듬해 여름이 되자 지난해에 비해 8분의 1수준까지 급전직하했다.
5천개 이상의 은행이 부도를 냈고 그 바람에 9백만 개의 저금통장이 깡통이 됐다. 절단 난 기업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경제 전문가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번영은 이제 물거품처럼 사라져 버렸고 마침내 암울하고 고달프기 짝이 없는 고난의 ‘대공황’이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피땀 흘려 모은 재산이 눈앞에서 허망하게 사라져 가는 것을 멍하니 지켜봐야만 했다. 주식을 사려고 은행돈을 꾼 사람들은 땅과 집을 빼앗겼다. 빌려 준 돈을 제대로 돌려받지 못하자 은행들이 부도를 내기 시작했다.
도저히 은행을 믿지 못하겠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은행 창구로 몰려와 돈을 내놓으라고 아우성을 쳤다. 은행들은 겉잡을 수없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 갔다. 오늘날에는 정부나 중앙은행이 팔을 걷고 나서서 부도를 막아 주겠지만 당시에는 정부가 경제에 개입하는 것을 죄악시했고 중앙은행제도란 것도 아예 없었다. 그냥 자유방임경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던 시대였다. 시민들은 깡통으로 변해 버린 예금통장을 보며 한숨을 내쉬기만 할뿐이었다.
시민들은 어쩔 수 없이 지출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 이런 판국이 되니까 물건은 안 팔리게 되고 기업가들은 생산을 줄이면서 애꿎은 근로자들만 잘라 버렸다. 자금이 거덜 난 기업들이 줄줄이 파산하자 실업자는 더 늘어났다. 국가가 개입하지 못하고 오로지 개인의 판단과 의사결정에 맡긴다는 자유방임 경제는 이렇게 절단이 나게 된 것이다. 1932년에는 노동 인구의 4분의 1인 1,300만 명의 실업자가 발생했고 100만 명 이상의 무주택자가 생겨났다.
사진, 실업자들의 행렬
가난한 사람들은 겨울 내내 떨며 살았다. 거지꼴을 한 아이들은 철조망을 뚫고 여기저기 석탄을 훔치러 다녔다. 빈민가 어린이들은 영양실조로 픽픽 죽어갔다. 대도시 빈민 구호소 앞에 긴 줄을 이룬 실업자들은 몸과 마음이 모두 부서져 갔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사라졌다. 이제 후버라는 이름은 가난의 대명사가 되었다.
노숙자들이 추위를 막기 위해 뒤집어썼던 신문지를 ‘후버 담요’, 텅 빈 호주머니를 ‘후버 주머니’, 빵꾸난 신발은 ‘후버 신발’, 문을 닫은 공장은 ‘후버 공장’, 기름이 없어 말이 끌고 다니는 자동차를 ‘후버 마차’라고 불렀다. 미국에서 시작된 이 경제적 재앙은 전 세계로 일파만파 퍼지면서 역사상 가장 최악의, 그리고 최장기 불황으로 기록되었다.
원인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1920년대의 미국의 경제는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했다. 미국 경제의 호황을 선도한 산업은 자동차와 석유·가전·건축업이었다. 19세기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각종 가전제품들이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일반 가정으로 보급되기 시작했다. 또한 일관작업으로 표현되는 디트로이트의 포드 자동차 회사는 17초마다 1대씩 승용차를 토해내면서 미국인들에게 마이카 시대를 선도했다. 자동차 산업은 석유, 강철, 고무 등의 소비량을 왕창 급증케 했고, 또한 기동성이 담보되자 교외 거주자들이 늘기 시작했다.
도시의 팽창에 따라 성장을 거듭하던 건설업도 교외의 주택건설 수요가 증가하자 더욱 호황을 누리게 되었다. 1920년대는 그야말로 ‘흥청망청 시대’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10여 년간 지속된 표면적인 대호황 뒤에는 다가올 대붕괴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정부는 대통령부터 나서서 미국은 ‘기업인들의 나라’라고 홍보하고 다녔다. 따라서 기업인들을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면서 부유한 사람들의 세금을 크게 줄여주었다. 독점금지법도 완화되었다.
주식시세는 아무리 치솟아도 규제를 할 생각은 꿈도 안 꾸었다. 이런 정부의 시책은 기업인들을 대만족시켰고 기업인들의 이윤도 함께 치솟았다. 기업가들은 신바람이 났다. 뭐든지 만들기만 하면 팔 수 있다는 생각들로 꽉 차 있었다. 공장은 쉴 새 없이 확장되었고 생산은 급증했다. 반면에 노동자들의 실질소득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또한 새로운 비료 및 농기구의 도입으로 농부들의 수확량은 대폭 늘었지만 만성적인 과잉공급으로 농산물 가격은 계속 떨어졌다.
이와 같이 노동자들과 농민들의 구매력 저하는 생산력과 구매력 간의 큰 괴리를 낳았고 이는 곧 대공황을 초래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1929년에는 전체 인구의 5%밖에 안 되는 부유층이 전 국민 소득의 1/3을 차지하고 있었다.
바로 이 고소득층이 주식에 대한 비정상적인 투기 열풍을 주도하면서 주식시장의 거품이 거침없이 부풀어 올랐다. 주가는 기업의 자산가치나 수익성에 대한 전망과는 상관없이 가파르게 올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촉발된 주식 광풍은 하층민에게도 불어 닥쳐 동네 가게의 주인아저씨·운전사·이발사·구두닦이·가정주부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들의 화제는 온통 주식 얘기뿐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동안 곳곳에서 누적되어 오던 불안 요인들이 한순간 폭발한 것이 바로 1929년 10월 24일 목요일이었다. 이 ‘검은 목요일’ 이후, 미국의 수많은 은행과 공장들이 줄줄이 문을 닫고 사람들은 일자리를 잃었으며, 미국과 전 세계 경제는 끝도 모를 침체의 늪으로 빠져 들어갔다.
뉴딜 정책
대공황이 클라이맥스를 향해 치닫던 1933년, 제32대 대통령으로 민주당의 프랭클린 루스벨트가 당선되었다. 새로운 대통령 루스벨트에게는 모든 게 남북 전쟁 이래 최악의 상황이었다. 그는 취임 연설에서 그는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그 자체이며 무엇보다도 지금 당장 시급한 것은 무엇인가를 시도해야한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상대편 공화당으로부터 빨갱이 소리를 무수히 들으면서 정부가 경제에 깊숙이 간여하는 이른바 뉴딜정책을 긴급히 펴나가기 시작했다.
사진, 뉴딜 정책으로 세워진 테네시 댐
먼저 금융제도의 안정화 시책을 펼쳐나가면서 실업자들에 대한 지원, 농민들에 대한 보조금 지원, 주 44시간에 준수, 최저 임금제 실시, 노령보험, 실업보험, 건강보험제도 도입 등 사회안전망을 구축하기 시작했고 넘치는 실업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대규모 토목사업을 추진했다.
이렇게 급한 불은 꺼나갔지만 대공황의 그림자는 여전히 기승을 부렸다.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는 경제는 1932년이 되자 경제는 점차 살아나는 기미를 보였다. 이른바 전시경제가 경제를 회복하는 데 견인차 역할을 시작한 것이다.
역설적으로 인류를 최악의 참화에 몰아넣는 전쟁이 경제를 회복시키는데 마중물 역할을 했다는 것이 아이러니이기도 하다. 하여튼 이듬해부터 전쟁이 본격화되자 공장들의 가동률은 빠른 속도로 회복하기 시작했고 실업률은 급속도로 떨어졌다. 1945년 전쟁이 끝나자 미국은 완전히 경제가 회복되었고 세계 최고의 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때부터 미국은 역사상 가장 양극화가 감소되었고 중산층이 가장 두터워지던 시절로 기억되고 있다.
말의 달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
1882년 뉴욕주 업스테이트의 허드슨강변 동쪽 언덕에 위치한 하이드 파크에서 출생했다. 루스벨트는 부유한 가정 형편 덕분에 개인 교습을 받고 사립학교에 다녔다. 어려서부터 유럽 여행을 다니는 등 풍족하고 귀족적인 분위기에서 성장했다. 그의 교양은 귀족적이었으나 신념은 서민주의적이었다. 특히 그의 성장기에 대통령으로 명성을 날리던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먼 친척 형뻘로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그의 부인이 된 사촌 누이 엘리너 루스벨트는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조카로 부친을 일찍 여의었기 때문에 1905년 그들의 결혼식에는 현직 대통령이 신부를 데리고 입장해 화제가 되었다. 엘리너 루스벨트는 훌륭한 성품과 높은 지성으로 대중의 인기를 모으고 있었기 때문에 루스벨트의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그러나 루스벨트는 뒷날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노골적으로 따로 애인을 두었고, 서른 해를 같이 산 아내 엘리너를 마치 왕조시대 정략결혼의 존중받는 배우자 취급을 했다.
그는 하버드대학교와 컬럼비아 로스쿨을 나와 변호사로 활동하다가 1910년 뉴욕주 상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처음에 동료의원들은 그를 단지 잘생긴 경량급 정치인 정도로만 생각했다. 한편 제28대 우드로 윌슨대통령이 그를 해군성 차관보로 임명해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중요한 해군 전략 수립에 간여했으며 탁월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연방 상원 의원 선거에서 패배했으며 38세의 젊은 나이로 제임스 콕스 대통령 후보의 러닝메이트로 출마해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잠시 금융회사의 임원으로 있을 때, 척수성 소아마비에 걸려 양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당시 주변 사람들은 그의 정치적 생명이 끝난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끝내 의지를 잃지 않았다. 3년 동안 투병 생활을 한 뒤 기적적으로 휠체어를 타고 움직일 정도로 회복했다. 1924년 그가 휠체어를 타고 민주당 전당대회장에 나타났을 때 모든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목발에 의지해 단상에 기대서 연설할 때에는 그의 인간 승리의 모습에 감동적인 환호를 보냈다. 그 후 1928년 뉴욕 주지사로 화려하게 정계에 컴백했고 결국엔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사진, 대통령 부부
대통령에 취임한 후 인간적이고 뛰어난 매력과 친근감, 청산유수 같은 말솜씨, 인재를 보는 능력, 탁월한 정치 감각을 발휘했다. 루스벨트는 제2차 세계대전 막바지인 1945년 4월 12일, 조지아주 윔스프링스에 있는 자신의 별장에서 오랜 연인인 루시 머서와 함께 있다가 뇌일혈로 숨을 거두었다. 아내인 앨리너가 워싱턴을 떴다 하면 백악관으로 바로 불러들이곤 했던 애인 루시 머서와는 최후의 순간에도 같이했다.
루스벨트는 엄청나게 말을 잘했다. 말의 달인이었다. 그가 하는 말에 최면이 걸린 상대방에게 아양을 떨고 웃기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결국엔 두 손을 들게 만들었다. 그는 자기를 찾아온 사람들을 솔직함과 상냥함, 활달함으로 완전히 사로잡았다. 루스벨트의 이런 현란한 말빨에 홀려 얼떨떨해져 대통령 집무실 문턱을 나갈 때까지 상대방은 그가 들고 온 요구사항이나 질문내용은 아예 까맣게 잊어버리곤 했다.
사진, 노변 담화 중인 루스벨트
자기가 고안한 노변담화도 국민을 상대로 한 최고의 통신 매체였다. 라디오로 가족이나 개인에게 다가가는 소통의 달인 역할을 충분히 발휘했고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기자회견도 솔직함을 앞세운 최고의 정견발표장이었다.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할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