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094
4월13일 [성주간 수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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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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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fJ5o48GJg8c (한상인 요셉 신부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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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극도로 고통스런 수난의 여정 가운데서도 그저 우리 걱정으로 노심초사하시던 예수님!>
예수님에게 다가올 참혹하고도 슬픈 운명을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묘사한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참으로 놀랍습니다. 그가 참으로 예언자 중의 대 예언자였음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나는 매질하는 자들에게 내 등을, 수염을 잡아 뜯는 자들에게 내 뺨을 내맡겼고, 모욕과 수모를 받지 않으려고, 내 얼굴을 가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야서 50장 5~7절)
역동적이면서도 능동적이던 공생활 기간이 저물고 수난의 시기가 다가오자 예수님은 갑자기 당신의 태도를 바꾸십니다. 더 이상 적극적이지도 않고, 자기 주도적이지 않습니다. 철저하게도 수동적이면서도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십니다.
당신에게 덮쳐온 피해 가고 싶은 끔찍한 사건들을 거역하지 않으셨습니다. 그토록 애지중지하셨던 수제자 베드로와 유다의 배신 앞에서도 억지로 막지 않으십니다. 당신을 체포하러 온 군사들 앞에서 유유히 빠져나가지 않으시고, 순순히 체포당하셨습니다.
세상 무죄한 당신에게 가해진 끔찍한 채찍질, 열 번 스무 번이 아닌, 수천 번에 달한 채찍질, 과다출혈로 생명조차 위태로울 정도의 채찍질 앞에서도, 등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군사들의 노리갯감으로 전락해 수시로 뺨을 맞으시면서도 얼굴을 돌리지 않으셨습니다. 세상의 창조주,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께서 수많은 군중 앞에서 갖은 모욕과 수모를 있는 그대로 당하셨습니다.
그토록 혹독한 고통의 순간에도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향한 신뢰와 믿음을 잃지 않으셨습니다. 고통이 크면 클수록 스스로를 다그치며 외치셨습니다.
“그러나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이사야서 50장 7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결코 녹록치 않습니다. 그리 길지도 않은 이 세상, 살아남고 견뎌내기가 얼마나 혹독한지 모르겠습니다. 남의 돈 벌기 결코 쉽지 않습니다. 얼마나 많은 좌절과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은 절망과 슬픔을 맞닥뜨려야 하는지 모릅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수난 당하시는 우리 주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가장 사랑했던 제자들로부터 배신당하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그 몰지각하고 미성숙한 제자들을 끝까지 존중해주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토록 큰 고통과 수모를 당하시면서도 죄인인 우리를 걱정하시던 예수님이셨습니다.
수난당하시던 예수님, 몸과 마음, 영혼과 정신 모두 극도로 힘겨운 수난의 여정에서도 그저 우리의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위해 노심초사하시던 예수님의 슬픈 눈동자를 유심히 바라보는 우리의 성주간이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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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RvTH5LwiM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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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은전 30냥으로 무엇을 잃는지 아는가?>
오늘 복음은 가리옷 유다가 예수님을 은전 30냥에 팔아넘기는 이야기입니다. 죄는 예수님을 팔아넘기면서도 은전 30냥의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에게서 나옵니다. 하느님 사랑을 잃는 것보다 어떻게 얼마 되지도 않는 가치를 잃는 것을 더 두려워할까요?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습니다. 모든 죄 안에는 항상 은전 30냥의 즐거움이 깃들어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은 죄를 짓고 남을 미워하는 등의 죄 속에 머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다고 말합니다. 거짓말입니다. 그 사람은 그냥 은전 30냥을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그 고집을 꺾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사람을 미워하는 것은 고통스럽지만 동시에 그 사람을 미워하며 자신은 의롭다고 느끼는 은전 30냥의 기쁨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대부분은 이 은전 30냥으로 더 큰 가치를 잃습니다.
남편을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아니면 아이를 먼저 사랑해야 할까요? 이것은 선택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남편의 사랑을 포기하더라도 자녀들에게 더 잘해주려 합니다. 자녀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 있기 때문입니다.
SBS 영재발굴단에서 “엄마, 난 언제 놀 수 있어?”라고 말하는 8살 세윤이가 나온 적이 있습니다. 세윤이는 매일 11개의 학원에 다닙니다. 그냥 여느 가정의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아이는 엄마에게 묻습니다.
“나 한자 복습 오늘 해야 해? 한자 급수 안 외워도 되잖아.”
엄마는 무덤덤하게 대답합니다.
“어, 금방 하잖아!”
“놀고 싶어. 엄마 나 그럼 언제 놀 수 있어?”
“놀 수가 없을 수도 있겠네.”
“왜?”
아빠는 식사를 빨리 마치고 “하~ 잘 먹었습니다”라고 답답한 감정을 표현하며 직감적으로 방으로 피합니다. 엄마는 세윤이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하다가 그만두면 안 한 것만 못해. 갑자기 그만두면 다 소용이 없잖아. 뭐가 남아? 어? 없잖아.” 세윤이는 뾰로통해서 방에 들어가 억지로 공부합니다. 그러나 좀처럼 마음이 잡히지 않습니다. 갑갑함에 한숨을 쉬며 노래를 듣습니다. 이런 가사가 나옵니다. “나의 꿈이 이뤄지는 날 환하게 웃으세요. 엄마를 생각하면 왜 눈물이 나지. 세상에 좋은 걸 모두 드릴게요. 엄마 사랑해요.” 아이는 눈물을 훔칩니다. 그러며 계속 공부합니다. 이 아이는 이렇게 크면 엄마와 똑같은 아이가 될 것입니다.
엄마는 남편이 싫어하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만, 자녀를 저렇게 키우며 얻는 은전 30냥도 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딸에게 사랑받을까요? 자신을 이렇게 이용한 엄마를 미워하게 될 것입니다. 전교 2등을 하던 학생이 조금만 더 하면 전교 1등 하겠다고 말했던 엄마에게 전교 1등을 한 날 “엄마 됐어?”란 딱 네 자를 유서로 남기고 목숨을 끊은 사건은 유명합니다.
엄마는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이 무엇인지 몰랐습니다. 그냥 은전 30냥만 생각했습니다. 유다 이스카리옷도 마찬가지입니다. 은전 30냥으로 잃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이런 엄마도 은전 30냥으로 남편과 자녀의 사랑을 잃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은전 30냥은 가집니다. 물론 사랑을 잃으면 그것도 가치가 없어져 결국엔 유다와 같은 최후를 맞게 될 것입니다.
모든 죄에 기쁨이 있는 것은 맞습니다. 그러나 죄에서 벗어나려면 그 기쁨을 위해 잃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은전 30냥은 탈출기에 보면 나의 소가 누군가의 종을 들이받아 죽였을 때 물어주어야 할 값입니다. 성경에서 소는 뱀과 함께 자아를 상징합니다. 나의 자아를 방치하여 누군가의 종을 죽이게 만들 때 드는 돈이 30냥인 것입니다. 하지만 30냥으로 누군가의 종을 죽임으로써 그 주인과의 관계는 그것으로 끝이 납니다. 은전 30냥은 결국 뱀의 말을 따라주면서 얻는 선악과를 뜻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악과를 내가 죄를 통해 얻는 은전 30냥이라고 여겨 십일조로 봉헌한다면 죄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섬겼던 금송아지는 결국 모세가 십계명 판을 깨면서 그들에게 먼지로 마셔졌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자아를 섬기는 값이 하느님과의 계약 단절, 곧 관계 단절을 가져옴을 깨닫고는 자신들이 섬겨온 은전 30냥이 그냥 먼지에 불과했음을 깨닫습니다. 그래서 다시 죄를 뉘우치고 하느님과의 계약을 원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한 지혜로운 아빠 엄마가 있습니다. 아빠는 아이들을 방목하고 엄마는 그런 아빠가 자녀들보다 우선입니다. 아이들보다 남편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 합니다. 아빠가 들어오면 자녀들보다 먼저 아빠를 안으려고 자녀들과 싸우며 뛰어갑니다. 아이들한테서 오는 기쁨보다는 남편한테서 오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 아는 여인입니다.
이번에 서울대에 합격한 붕어빵 지웅이의 부모입니다. 붕어빵에 아빠 정은표 씨와 출연하기도 했던 정지웅 군은 고등학교 때 래퍼로 대회도 나가고 또 서울대에 합격하였습니다. 그가 머리만 좋아서일까요? 어쩌면 좋은 머리도 부모의 사랑으로부터 비롯되지 않을까요? 저는 부부가 서로 사랑하면 자녀의 머리도 좋아진다고 믿습니다. 머리도 써야 좋아지는데, 생존보다는 더 광범위한 시각으로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에는 항상 사랑과 은전 30냥과의 사이에서 선택하는 것임을 잊지 맙시다. 사랑을 선택합시다. 물론 그러면 은전 30냥은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결국 무엇이 더 큰 행복인지 아는 것이 ‘지혜’입니다. 지혜 있는 사람은 사랑을 포기하며 먼지와 같은 순간적인 기쁨을 선택하는 일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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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사람의 아들을 배반한 그 사람은>
유다 이스카리옷은 예수님을 없애려 하는 대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15절) 하자 그들은 은전 서른 닢을 내주었고 그때부터 유다는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고 한다.
유다는 바로 최후의 만찬 뒤 예수님께서 겟세마니 동산에 혼자 계실 때 그 일을 했다. 진리의 말씀이 배반당하는 시간은 그분 곁에 충실한 지지자들이 거의 없는 바로 그때다.
“무교절 첫날”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17절) 제자들은 모여서 파스카 만찬을 나눌만한 집이 없었다. 그들은 모두 세속적인 재산을 모두 포기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아무개”라는 사람을 찾아가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18절) 하며 축제를 준비하게 하신다.
그 아무개는 주님의 제자들을 받아들인 첫 사람이었다. 그는 제자들의 말을 듣고 장소를 제공해 주었다. 우리 자신도 이제는 주님을 위해 손님방을 마련하여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셔서 파스카 음식을 먹고 있을 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1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배반자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만찬 전에 그분은 유다의 발을 씻어 주셨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하시며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신다. 이 말씀 때문에 나머지 제자들은 혼란에 빠졌지만, 유다의 구원을 위하여 그렇게 하셨다.
제자들은 자신에 관하여 묻고 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22절) 이 근심을 없애주시려, 예수님은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23절) 하신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근심에서 구해 주고자 결정하셨을 때, 유다의 정체를 밝히신다. 유다는 시간을 주었지만 변할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24절) 유다는 악마의 도구로 쓰이고 말았다. 이 불행은 유다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모든 사람에게 해당하는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넘겨지신 것은 악마 때문이지만, 그 일이 이루어지는 데 도구가 된 자들도 불행하다고 말씀하신다.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25절) 하고 묻는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이라고 했고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한다. 주님을 배반한 것이 아니라, 스승님을 배반한 정도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예수님께서는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25절)고 하시며 빌라도에게 하신 말씀으로 유다를 책망하신다. 이는 예수님과 다른 제자들 앞에서 빛으로부터 자기 자신을 완전히 가리는 말이다.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겠다는 말이다.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나는 어떠한 자세로 그분을 따르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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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유다의 배반>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복음서에는 그가 배반한 사실만 기록되어 있고, 배반한 이유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선 유다의 ‘배반의 성격’부터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유다가 배반했기 때문에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을까? 아닙니다. 그가 배반하기 전에, 또 그의 배반과 상관없이, 최고의회는 예수님을 죽이기로 결의했고(요한 11,53),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지명수배’를 했습니다.(요한 11,57) 유다가 한 일은,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할 때 ‘길 안내’를 한 것뿐입니다. 그런데 그게 왜 그렇게 ‘큰 죄’인가? 예수님을 떠나서 박해자 편에 섰기 때문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을 세 번이나 했고, 다른 제자들은 달아나서 숨었는데, 그들이 그런 행동을 한 것은 겁에 질려서 그랬던 것이고, 박해자 편에 선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다가 한 일은,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병자가 한 일과 비슷합니다. 그 병자는 안식일 율법을 어긴 일로 처벌받는 것이 무서워서 예수님을 ‘밀고’했습니다.(요한 5,15) 어쩌면 유다의 배반도 그런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님에 대한 박해가 공동체 전체에 대한 박해로 확대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그게 무서워서 박해자들 편에 섰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다는 예수님께서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 자기 잘못을 뉘우쳤고, 자살해버렸습니다.(마태 27,3-5) 그는 예수님이 사형 당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사형선고를 받으시는 것을 보고’라는 말의 원문은 ‘유죄판결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인데, ‘죄 없으신 분이 유죄판결을 받는 것을 보고’라는 뜻입니다. 유다는 예수님이 ‘죄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예수님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것은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배반할 때에는 그런 생각을 안 하다가 나중에야 생각한 것일까? 알면서도 배반했을까? 아니면 자기의 행동을 배반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복음서에 아무런 설명이 없는 것은, 사도들도, 복음서 저자들도 유다의 속마음과 생각을 도저히 알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 26,14-16)
사제들이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준 일을 즈카르야서 11장 12절의 예언이 실현된 일로 생각하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유다가 배반의 대가로 받은 돈이 형편없이 적은 금액의 푼돈이라는 것입니다. (그 돈은 아마도 예수님을 지명수배 할 때 내걸었던 현상금이었을 것입니다.)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라는 말은, 유다가 먼저 사제들에게 돈을 요구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가 돈에 대한 탐욕이 많았던 사람이긴 해도(요한 12,6), 돈 때문에 배반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라는 말은, 예수님을 체포하기에 적당한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23)
예수님께서 배반자의 이름을 말씀하시지 않은 것은, 배반자가 스스로 회개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제자들의 말은, “나는 아니다.” 라는 뜻이기도 하고, “혹시 내가?” 라는 불안감을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유다를 제외하고, 다른 제자들은 자기가 예수님을 배반한 적이 없다는 것을 확신하지만, 또 배반자가 될 생각이 전혀 없지만, 그래도 배반자가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완전히 떨쳐 버리지는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 불안감 때문에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마태 26,35)라고 맹세했을 것입니다.>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라는 말은, ‘가족’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에게 제자들은 가족과 같은 사람들, 사실상 가족보다 더 가까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에서 배반자가 생겼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는 큰 고통이었고, 큰 슬픔이었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마태 26,24-25)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당신의 길을 가신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박해도, 배반자도 당신의 길을 막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이라는 말씀은, 배반자의 멸망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저주’가 아니라, 늦기 전에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지금 유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배반이 그만큼 ‘큰 죄’ 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중에 배반자가 겪게 될 후회와 절망의 고통을 예고하시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는 유다의 말은, 별 의미 없이 다른 제자들의 말을 흉내 낸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불렀는데, 유다는 ‘스승님’이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그가 이미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버렸음을 나타냅니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라는 말씀은, “네가 배반자라는 것은 너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라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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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맹자는 우리에게는 4가지 마음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입니다. 예전에 어르신들이 싸가지가 없다는 말을 하곤 하였습니다. 맹자가 이야기한 4가지의 마음이 없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다윗이 욕망에 눈이 어두워서 충실한 장군 우리야를 죽게 한 것은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시비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 세리의 겸손한 기도를 칭찬하셨습니다. 요한과 야고보가 예수님께 높은 자리를 청한 것은 겸손해야 하는 사양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늘 풍족하였고, 좋은 옷을 입었지만 죽어서 하느님과 멀어지는 곳으로 갔습니다. 그곳에서 고통을 받았습니다. 불쌍한 라자로에 대한 측은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했던 레위와 사제는 불쌍한 사람을 돌보려는 측은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수렁에 빠진다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눈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남의 눈에 티끌을 빼주려는 사람은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바리사이의 위선과 허영을 비난하셨습니다. 그들은 부끄러운 마음인 수오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주님의 수난 성지주일, 성유축성미사, 주님 만찬 미사, 현양제대 묵상, 십자가 경배, 부활성야미사를 성주간에 하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가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파스카의 성삼일을 하루 앞두고 있습니다. 교회 전례의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주님 수난 성삼일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의 몸가짐을 돌아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주님께서 왜 고난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묵상하면서 오늘 하루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말씀은 우리를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재물에 대한 욕심’입니다. 유다는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대사제들에게 팔아넘겼습니다. 유다는 부끄러운 마음인 수오지심이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 앞에 자신의 양심을, 친구를, 하느님과 함께한 신앙을 팔아넘기는 것을 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 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을 모른다고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예수님의 죽음에 책임이 없다고 변명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얼굴에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릴 것입니다. 어떤 이는 그분의 고난을 가슴아파하고, 마음에 새길 것입니다. 2022년 성삼일이 시작됩니다. 나는 어느 편에 있을까요? 예수님 수난의 길에 측은지심,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의 마음을 가지면 좋겠습니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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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상현 바오로 신부님]
<집착과 욕심>
우리는 살아가면서 자신에게 모자라는 것들을 중심으로 채우면서 살아가기를 원합니다. 집이 가난한 사람은 부유함을, 몸이 아픈 사람은 건강을, 남 아래에 있는 사람은 권력을, 가정이 불안한 사람은 평화를 추구합니다.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간다는 것...그것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 매우 좋은 현상입니다. 그러나 추구할 필요도 없으면서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욕심을 가지게 되면 원래 가지고 있었던 상태보다 더 나쁜 결과를 낳습니다.
매우 건강함에도 불구하고 심한 운동을 한다는 것은 건강을 오히려 해치는 행위 밖에 되지 않습니다. 또한 남들과 평화로운 관계를 이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들 위에 올라서려고 한다면 오히려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더욱 위험한 것은 더 이상 물질적인 것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 특히 다른 사람들을 해치면서 자신의 배를 채우려는 사람은 그 영혼까지 팔아먹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오늘 제자 유다는 스승이신 예수님을 넘보고 있는 유다인들과 흥정을 합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결국 유다는 그동안 모시던 스승을, 믿고 따랐던 주님을 은전 서른 닢에 바꾸게 됩니다. 과연 유다에게 은전 서른 닢이 예수님과 바꿀 정도로 그 돈을 필요로 했을까요? 유다는 그 돈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그는 돈의 노예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의 눈에는 돈 밖에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집착이고 욕심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는 돈과 그의 영혼을 바꾸고 말았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추구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그 추구함에 있어서 욕심과 집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느님과의 만남에 있어서 이 집착과 욕심 때문에 주저하지는 않습니까? 처음부터 돈의 노예가 되는 이는 없습니다.
점점 돈에 집착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노예가 되어버립니다. 삶의 길에 있어서 우리 주위의 많은 것들이 예수님과 바꾸자고 유혹합니다. 때로는 심한 갈등도 느낍니다.
그러나 여러분! 우리의 영혼을 책임지시는 분은 오직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우리의 영혼을 노예로 만드는 온갖 유혹에 빠져들지 않도록 항상 반성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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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교구 곽명호 루카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신학교의 사월은 참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다. 라일락 향기가 창가에 눅눅히 젖어 들고, 고요함 속에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는 밤을 더욱 깊고 그윽하게 만들었다.
하룻밤을 자고 나면 하느님은 세상을 온통 병아리 연두빛으로 바꾸어 놓으셨다.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돌아다보면 힘겹던 기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신학교를 느지막이 들어간 내게 가장 큰 걸림돌이요 십자가는 뜻밖에도 동료 신학생들에게 자존심을 짓밟히는 일이었다.
따지고 보면 별것도 아닌 사소한 말에도 나는 상처를 받았다. 그해 사월은 내게 잔인한 달이었다. 이해받지 못한 분노와 미움이 그리고 구겨진 자존심이 뒤엉켜 갈팡질팡 하다가 결국에는 매일 습관처럼 성당을 찾았다. 묵상을 한 것이 아니라 미움을 삭이느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주님! 저는 모든 것을 다 버렸습니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조그마한 자존심 하나인데 이것마저 빼앗으려 하시니 참 어이가 없습니다.”
사월이 다가도록 주님께서는 아무런 답변도 없으셨다. 매일 물끄러미 성당에 앉아 아무 생각도 없이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길게 늘어진 현란한 봄 햇살과 창문 너머로 어렴풋이 들려오는 소쩍새의 울음소리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초라한 모습으로 졸고 있던 내 영혼 깊은 속에서 “네가 양보할 수 없다고 한 조그만 자존심과 이기심이 네가 버렸다고 말한 그 모든 것보다 더 큰 것이다” 라는 말이 울려 퍼졌다.
사월의 길고 지루했던 싸움이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순식간에 뒤집기 한판으로 끝났다. 주님 수난 성지주일은 일년 중 복음을 두 번 읽는 특별한 전례를 지낸다. 성당 밖에서 평화의 행렬 전에 읽는 복음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모습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임금이여, 찬미 받으소서. 하늘에는 평화, 하느님께 영광”이라고 찬양한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그야말로 최고의 환영식을 베풀어 준 셈이다.
그런데 성당 안에 들어와서 읽는 복음은 정반대로 처절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조롱하고 모욕하며 그들이 가장 혐오하는 십자가에 못박으라 소리친다. 방금 찬미의 노래를 부르던 입으로, 이제는 거침없이 욕설과 저주의 고함 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화나게 하였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매년 같은 수난 복음을 반복하여 읽고 있는 것일까? 예수님이 그렇게 비참하게, 그렇게 고통스럽게 돌아가셨음을 되새기자는 것일까?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너희는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일게다.
자기 이기심의 잣대로 형제들을 재고 판단하면 우리는 언제든지 미움과 분노의 미궁 속으로 빠져들 수 있다. 그리고 그 미움과 분노의 끄트머리에서 “십자가에 못박으시오!”라고 소리치며 단죄의 칼을 휘두를 수도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스가리옷 유다처럼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말한다. 그래서 오늘도 여전히 예수님은 십자가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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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유다 이스카리옷의 배반을 안타까워하시면서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제자로 부르지 않으셨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반문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심오한 구원 계획 안에서 유다의 삶과 그 종말은 ‘인간의 자유 의지’에 대해 숙고하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선의로써 인간을 구원으로 초대하셨지만 인간은 그 초대에 응답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빈부귀천을 떠나 누구든지 당신의 자녀가 되도록 부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모욕과 수난을 겪으시면서도 언제나 우리를 당신의 제자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각자의 처지에 따라,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존중하시면서 사랑하십니다.
우리는 유다처럼 예수님을 모른다고 하며 세속적인 욕심에 따라 살기도 합니다. 세례를 받고 하느님의 자녀와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지만 우리는 자주 예수님을 배신하고 맙니다.
하느님의 선하신 구원 계획과 예수님의 부르심은 인간의 응답으로 완성됩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앞서지만 인간의 자유 의지가 뒤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나약한 인간이었지만 끝까지 예수님의 자비를 간청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에 열려 있는 마음을 간직하였습니다. 자신의 죄악과 아집에 사로잡힌 사람은 구원의 은총을 받지 못합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고백하는 겸손과 자유 의지를 올바로 사용하는 지혜가 우리 영혼에 가득 차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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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 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신부.
오늘 우리는 사랑하는 제자에게 은전 30냥에 팔려 배신당하는 예수님을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 배신자에게 마지막까지 인정을 베푸시고 기회를 주십니다. 곧 예수님께서는 ‘유다야, 네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라고 말씀하시면서, 당신을 팔아넘길 자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음으로써 마지막까지 그에게 회개의 기회를 주십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다도 묻지만, 그는 “주님”이라 부르지는 않습니다.
그는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가 올리브동산으로 예수님을 붙잡으러 왔을 때도 예수님께서는 “친구야, 네가 하러 온 일을 하여라.”(마태 26,50)하고 여전히 그를 친구라고 부르십니다. 그러나 그는 스승의 사랑을 끝까지 외면하고 맙니다. 그는 뒤늦게 후회는 했지만, 결국 자책과 죄책감에 빠져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됩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을 용서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체 유다는 왜 예수님을 배반했을까? 그것은 단순히 은전 30냥에 대한 탐욕 때문이 아니라, 완고함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유다가 바라고 원했던 정치적 민족적 메시아가 되어주지 않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의 이상과 신념을 채워주지 않자, 자신의 그릇된 신념과 이상을 고집한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완고함이란 이처럼 무섭습니다. 곧 자신의 피조물인 자신의 생각과 이념이라는 우상을 섬긴 까닭이었습니다. 사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생각과 이상을 파괴시키는 혁명가였던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의 생각과 주장을 버리지 않고는 결코 예수님을 따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정녕, 진정한 혁명가는 자신이 먼저 혁명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혁명을 할 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을 쫒는 자는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마태 26,24)
이 말씀은 비단 유다에게만 해당하는 말씀인 것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저는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말할 용기가 없습니다. 제가 유다처럼, 배신할 줄을 알기 때문입니다. 아니, 당신을 배신하는 줄을 알면서도 악에 조정당하고 있고, 오늘도 넘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주님, 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건져주십시오.”라고 자비를 구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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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
주님!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게 하소서.
생각을 움켜잡기보다, 생각에 붙잡히기보다, 생각을 바꿀 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께 조정 당하게 하소서.
저의 바람이 아니라, 당신의 바람을 따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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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는 아니겠지>
마태오 26,14-25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하다, 최후의 만찬을 준비하다)
그때에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유다 이스카리옷이라는 자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
무교절 첫날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께서 잡수실 파스카 음식을 어디에 차리면 좋겠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도성 안으로 아무개를 찾아가,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하여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대로 파스카 음식을 차렸다.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와 함께 식탁에 앉으셨다. 그들이 음식을 먹고 있을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그러자 그들은 몹시 근심하며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기 시작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나와 함께 대접에 손을 넣어 빵을 적시는 자, 그자가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가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 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아니겠지>
우리 안에
우리 때문에
우리가 힘겨울 때
우리는 묻지요
우리 안에 너에게든
우리 안에 나에게든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니겠지
나는 아니겠지
너를 향한 물음이든
나를 향한 물음이든
무엇을 담았나요
나는 아니더라도
나는 아니지만
나만 아니면
우리를 이루려고
우리를 가르려고
우리는 묻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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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저는 아니겠지요?>
미국에서 교포사목을 할 때의 일입니다. 행려자 한 분이 찾아왔습니다. 젊은이였는데 분명, 아침미사 참례를 한 사람이었습니다. 밤 10시가 다 되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하니 돌려보낼 수가 없었습니다.
마침 늦은 저녁을 먹으려고 준비하던 때라 사제관으로 들어오라고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준비한 파스타를 먹으며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본인을 이탈리아사람이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종이를 달라고 하여 그림을 그리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 하였습니다.
어설프게 알아듣는 저를 보고 얼마나 답답하였을까? 음식을 챙겨 주었지만 제 마음 한구석에는 이제 사제관에서 재워야 하나? 하는 고민을 하였습니다. 결국, 담요 한 장을 챙겨 내보내고는 미처 여관비도 주지 못한 후회스러움 속에 예수님이시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부끄러운 밤을 보냈습니다. 다음 날, 아침미사 봉헌을 위해 제단에 올랐는데 그가 담요를 둘둘 말아가지고 성당 문으로 들어왔습니다. 어디서 밤을 지새웠을까? 행려자로 오신 주님을 외면하고 봉헌하는 미사에 가슴이 저며 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에 앞서서 제자들에게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26,21)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26,22) 하고 말하였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26,25). 하셨습니다. 일상을 살아오면서 오늘도 여전히 주님의 뜻을 외면하면서도 “저는 아니겠지요?” 하고 말합니다. 밥 한 끼 주고서는 할 일을 다 한양 “저는 사랑을 베풀었지요?” 하고 말합니다. 아직도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는 소리는 살아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약속한 것들을 얼마나 지키고 있는지? 혼인계약으로 새 가정을 시작하면서 다짐한 약속들, 부모와 자녀, 이웃과의 신의를 지키지 못하면서도 유다를 쉽게 비난하는 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천상을 갈망하면서도 세상의 애착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라는 격입니다.
“주님, 저는 아니지요?” 하고 물을 때 “아니 너 맞아”라는 답변을 들을까 두렵다고 고백한 한상봉 씨의 말씀이 크게 들려옵니다.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오늘입니다.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1요한 3,18)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5-17) 죽은 믿음을 살리는 부활을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입니다.
"혀로 예수님을 팔지 마십시오." 유다는 은돈 서른 닢으로 예수님을 팔아먹었습니다.
우리도 이러한 짓을 합니다. 서로 험담할 때 그런 일이 벌어집니다. 험담할 때 그 사람은 하나의 물품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유다가 한 짓입니다.
험담할 때, 다른 사람의 껍질을 벗길 때에 바로 유다가 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을 나쁘게 말하지 맙시다."
예수님을 배반했을 때 유다는 마음이 닫혀있었습니다. 이해심이 없었고, 사랑이 없었고, 우정이 없었어요. 우리도 역시 남들에 대해 슬데 없는 말을 할 때 우리에게 사랑이 없고, 우정이 없으며 모든 것이 시장이 되고 맙니다.
우리가 친구와 친지를 팔아먹는 것입니다. 그러니 용서를 청합시다. 친구에게 용서를 청하면 예수님께 용서를 청하는 것입니다. 그 친구 안에 예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아무에게도 껍질을 벗기지 말고, 아무도 험담하지 않는 은총을 청합시다. 어떤 사람에게 결점이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우리 입으로 정의를 이루려고 하지 말고, 그를 위해 주님께 이렇게 기도합시다. "주님, 그를 도와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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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서울대교구 김상우 바오로 신부님]
오늘은 마태오 복음에 따른 최후의 만찬 장면을 읽습니다. 첫 장면은 유다가 수석 사제들에게 가서 예수님을 넘겨주면 무엇을 해 줄지 묻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유다에게 은돈 서른 닢을 줍니다. 구약 성경의 배경에서 ‘은돈 서른 닢’은 율법에 따른 액수입니다. 탈출기 21장 32절에 “소가 남의 남종이나 여종을 받았으면, 그 주인에게 은 서른 세켈을 갚아야 하고, 소는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즈카르야 11장 12절에 이스라엘의 하느님에 대한 값어치로서 은 서른 세켈이 은유적으로 표현됩니다. 이처럼 구약의 예언이 유다를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실현될 것입니다.
한편 무교절 첫날 제자들은 예수님께 파스카 음식을 차릴 장소를 묻습니다. 여기서 무교절 첫날은 파스카 양을 잡고 집 안의 누룩을 모두 치우는 날로 여겨집니다. 무교절은 파스카 준비일인 니산 달(오늘날의 4월) 열나흗째 날을 포함하여 여드레 동안 계속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전하라 명하십니다. “선생님께서 ‘나의 때가 가까웠으니 내가 너의 집에서 제자들과 함께 파스카 축제를 지내겠다.’ 하십니다.” 여기서 “나의 때”라고 옮긴 그리스 말 표현은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 실현되며 완성되는 시간, 곧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고 영광을 받으실 구원의 시간을 가리킵니다.
끝으로 최후의 만찬 장면에서 유다는 예수님을 향하여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마태오 복음에서 ‘스승’이라는 호칭은 예수님의 적대자들을 향한 부정적 의미로만 사용되는데(23,7.8; 26,49 참조), 복음서 저자는 이를 통하여 유다가 예수님을 팔아넘길 것을 미리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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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마태26,15)
<배반을 넘어 회개로!>
유다 이스카리옷이 예수님을 놓고 수석 사제들과 흥정합니다. 그리고 흥정의 댓가로 은전 서른 닢을 받습니다. 그런 유다 이스카리옷을 두고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마태26,24)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단순히 유다의 배반을 두고만 하신 말씀이 아니라, 배반 뒤에 유다가 행한 잘못(자살)을 두고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똑같은 사람의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땀 흘리시다가 죽는 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었습니다. 때문에 이 뜻을 이루기 위한 도구가 필요했는데, 그 도구가 바로 '마리아'이고, '유다 이스카리옷'입니다. 그러니 '유다의 배반 행위'도 하느님의 뜻 안에서 보면 '작은 도구일 뿐'입니다.
유다도 배반을 하고, 베드로도 배반을 했지만, 두 배반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유다의 가장 큰 잘못은 배반이 아니라, 배반 후 보여준 절망(죄책감)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지 못하고 이 절망에만 머물러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배반 후에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잘못을 뉘우쳤습니다. 자신의 잘못에서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마음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다시 부활했습니다.
어제도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을 배반하는 행위는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를 통해서, 나를 통해서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은 '나의 진정한 참회'와 마음을 돌리는 이들(회개하는 사람들)에게 베푸시는 '하느님의 무한하신 자비' 때문입니다.
유다 이스카리옷처럼 배반 그 자체에만 머물러 있지 말고, 베드로처럼 배반을 넘어 회개로 넘어가는 사람, 그래서 다시 부활하는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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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30년 이상 결혼생활을 해왔던 부부가 있습니다. 그러나 둘의 사이가 별로 좋지 않습니다. 각방을 쓴 지 오래되었고, 결혼생활이 최악이었다고 서로 말합니다. 진작 이혼하고 싶었지만, 사랑하는 자녀들 때문에 하지 못했을 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모두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게 되면 그때 깨끗하게 갈라지자고 약속했습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의 감정은 완전히 사라졌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그 사랑이 다시 생기게 되는 계기가 생겼습니다. 남편이 치명적인 암에 걸린 것입니다. 이때부터 신기한 일이 생겼습니다. 서로에 대한 분노는 완전히 사라졌고, 대신 서로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생긴 것입니다. 이제까지 잘해 주지 못한 미안함,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자신의 완고함이 비로소 보인 것입니다.
이제 연애할 때의 감정으로 서로를 위한 사랑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절대 사랑할 수 없다고 했던 그들에게 변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요? 암이라는 치명적인 병을 통해 상대방을 새롭게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상대방이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라, 내가 바뀌어야 사랑이 생기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변화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변화를 위한 행동을 해야 합니다. 내 주변의 변화가 비로소 찾아옵니다.
예수님도 우리의 변화를 원하십니다. 사랑하지 않는 이유를 찾는 변화가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을 찾는 변화를 말이지요. 그 안에서 믿음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누구인지를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공개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21) 이 말씀에 제자들은 몹시 근심하면서 저마다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2)라고 묻습니다. 아직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한 사람’이 자신일 수도 있다는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지요. 이 질문을 은전 서른 닢에 예수님을 넘긴 유다도 똑같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마태 26,25)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네가 그렇게 말하였다.”(마태 26,25)라고 대답하십니다.
믿음이 확고하지 않으면, 우리 역시 유다와 같은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한 사람’이 되어, 예수님을 팔아서 자기 세속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아닌, 주님과 함께하면서 영원한 생명이라는 영적 이익을 챙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진정한 변화가 필요한 지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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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삶의 중심>
-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관계-
내 평생 삶의 우선 순위는 매일 강론입니다. 내 삶의 마지막 보루요 하루하루 삶의 의미입니다. 허무하게 사라가는 날이 되지 않도록 날마다 새하늘, 새땅의 하루를 살기위한 노력입니다. 내적으로 무너지지 않고 늘 새로운 시작의 하루를 뜻하는 강론입니다.
강론중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것은 강론 제목입니다. 쓰다보면 반복되는 제목도 많지만 개의치 않습니다. 제목은 강론의 “눈(眼)”과 같고 강론 속을 드려다 보는 “창문(窓門)”과 같습니다. 요즘 삼일째 복음에 등장하는 배신자 유다요, 오늘 복음은 유다의 배신이 노골적으로 시작됩니다. 여기 유다의 삶에서 착안한 강론 제목이 “삶의 중심-영원한 도반,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유다는 제자공동체의 돈과 직결된 살림꾼으로 수도공동체로 말하면 당가(재무)와 같습니다. 참 공동체에서 가장 중요한 소임으로 믿음 좋고 유능하며 신뢰를 받는 정직한 사람이 당가(재무)를 맡습니다. 참으로 내적으로 메말라지기 쉬운 소임이라 누구보다도 기도도 많이 해야 되고 하느님과 공동체를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우리 수도공동체에서 33년 당가(재무)를 맡고 있는 안마르코 수사가 전형적인 재무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당가 소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면 그 삶의 진정성은 저절로 검증된 것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제31장 수도원의 당가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항목을 보면 당가의 자질과 위상은 공동체의 지도자 아빠스의 역할에 필적합니다. 몇절을 그대로 인용합니다.
“수도원의 당가로 선정될 사람은 공동체에서 지혜롭고, 성품이 완숙하고, 절제있고, 많이 먹지 않고, 자만하지 않고, 부산떨지 않으며, 욕을 하지 않고, 느리지 않으며, 낭비벽이 없고, 오히려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전체 공동체를 아버지처럼 해야 한다.
형제들을 슬프게 하지 말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무엇을 부당하게 청하더라도, 무시함으로써 그를 슬프게 하지 말고, 부당하게 청하는 사람에게 겸손되이 이치에 맞게 거절할 것이다.
사도의 말씀을 항상 기억하여 자기 영혼을 보살필 것이다. 온갖 염려를 다하여 병자들과 어린이들과 손님들과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아 줄 것이니, 이 모든 일에 대하여 심판의 날에 헴바치게 되리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어지는 전 장도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1500년전 이런 규칙이 나왔다는 자체가 불가사의의 신비입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깊은 사랑과 지혜를, 영성을 배울 수 있는 장입니다. 이런면에서 유다는 이런 당가직에 많이 못 미쳤던 듯합니다. 마침내 결정적 유혹에 빠져 잠시 탐욕의 무지에 눈이 멀어 예수님을 팔아 넘깁니다.
‘“내가 그분을 여러분에게 넘겨주면 나에게 무엇을 주실 작정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은돈 서른 닢을 내주었다. 그때부터 유다는 예수님을 넘길 적당한 기회를 노렸다.’(마태26,15-16)
유다의 소행을 알아챈 주님의 말씀이 충격적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갈 것이지만 유다 역시 결코 책임을 면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자기에 관하여 성경에 기록된 대로 떠나간다. 그러나 불행하여라, 사람의 아들을 팔아넘기는 그 사람!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에게 더 좋았을 것이다.”
얼마나 유다가 딱했으면 이런 불행선언일까요! 유다야 말로 우리의 반면교사가 됩니다. 유다의 불행에 결정적 원인은 무엇일까요? 삶의 중심,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이신 예수님과의 우정 관계가 대단히 빈약했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보고 배우는 것이 제자입니다. 예수님께 보고 배우는 것에 정말 소홀했던 유다같습니다.
바로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의 ‘주님의 종의 셋째 노래’에 나오는 주인공은 그대로 우리의 영원한 스승이자 도반이시며 주님이신 예수님을 지칭합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을 그렇게 읽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는 나에게, 제자의 혀를 주시어, 지친 이를 말로 격려할 줄 알게 하신다.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 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바로 이런 '주님의 종' 예수님의 하느님과의 관계를 보고 배워야 했을 유다입니다. 무엇보다 유다는 영원한 도반이자 주님을 모범으로 삼아 사랑과 신뢰의 우정 관계를 날로 깊이했어야 했습니다. 주님의 종처럼 하느님께 간절히 항구히 기도하며 늘 하느님과 깊은 사랑과 신뢰중에 살아야 했습니다.
바로 이것이 유다의 결정적 실패인생의 원인이었습니다. 공동체 형제들 누구보다도 당가인 유다는 더 많이 기도하고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이해야 했습니다. 바로 삶의 중심인 우리의 평생 도반이자 주님과의 우정을 깊이하는 데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큰 도움이 되는 수행은 없을 것입니다.
2년전 6월달 예수성심성월 주님과의 깊은 우정을 소망하며 신록 짙었던 수도원 하늘길 가로수곁에서 써놨던 “당신 곁에 서면” 이란 시로 강론을 끝맺습니다. 늘 푸른 가로수는 영원한 도반인 주님을 상징합니다.
“당신곁에 서면
하늘 높은 줄 알겠다
하늘 향내가 난다
하늘 향해 우뚝선 아름드리 침묵의 나무가 된다
늘 설렌다
늘 새로워진다
늘 푸르른 정신이 된다
누군가의 그늘이 되고 싶어진다
혼자가 아닌 둘이 된다
늘 푸른 가로수같은 당신 곁에 서면!
어제도 오늘도 날마다 당신과 함께 걷는 하늘길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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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QUbr8TYaXO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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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 가운데 한 사람이 나를 팔아넘길 것이다."(마태 26, 21)
꽃을 씻겨주는
봄비가 내린다.
끝까지
예수님을
따르겠다는
이 약속 또한
얼마나 어리석고
얼마나 잘
뒤집힐 수 있는
허약한 것들인가.
예수님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참된
여정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없다.
우리 자신만
있을 뿐이다.
하느님 나라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들의 것이다.
너무 커져버린
우리들 교만이다.
수 많은
약속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을 위해
성급한
우리자신의
뜻마저
내려놓을 줄
아는 것이다.
성급하고
나약한 의지가
아니라 간절한
주님의
은총이 필요할
뿐이다.
주어진 신앙이
우리들 삶의
가장 좋은
은총이 된다.
주어진 은총마저
팔아 넘기며
본능으로 치닫는
우리들 삶이다.
신앙과 본능은
함께갈 수 없다.
신앙은 본능을
십자가로
뛰어넘는다.
안주하려는
이 본능을 뛰어넘는
신앙의 새로움이
필요한 성주간이다.
새로운
신앙의 도약이란
주님께 우리의
의지와 보능
교만과 욕심까지
맡겨드리는 것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호흡으로
마음을
가다듬는다.
한 사람은
우릴 살리고
한 사람은
팔아넘긴다.
우리는
주님의 땅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주어진 은총이
주어진
십자가이다.
십자가로
우릴 새롭게
하시려는
사랑을 진실로
믿는 새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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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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