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작품에서 더 이상 아우라를 찾을 수는 없다
베냐민은 〈사진의 작은 역사〉를 쓰던 20세기 초반에 이미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케케묵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19세기 말부터 유럽의 귀족이나 부호는 이미 자신의 집에 화가의 초상화 대신 사진을 걸어놓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많은 공공장소에서 사진이 회화를 대체하기도 하였다. 현실에서는 이론가들의 공허한 논쟁과 상관없이 이미 사진이 예술작품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사진이 예술인가 아닌가의 논쟁은 사실 예술에 대한 케케묵은 관념과 새로운 현실 사이의 충돌을 보여주는 관념적인 사건에 불과한 것이다.
이 논쟁의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진은 이미 예술작품이다. 그렇다면 베냐민이 보기에 남는 문제는 확실하다. 예술작품 혹은 예술이라는 기존의 고정관념을 바꾸어야 한다. 사진이 이미 현실적으로 예술작품이 되었다는 것은 예술작품의 성격 자체가 바뀌었다는 의미이다.
전통적으로 예술작품에는 단지 눈에 드러난 것 외에 눈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심오한 것이 담겨 있어야 한다고 간주되었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한때 극장에 걸릴 영화 간판을 그리는 사람을 예술성 없는 간판쟁이라고 비하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간판쟁이라는 말을 그저 포스터만 그릴 뿐 그 속에 어떤 심오한 생각이나 예술적 아이디어도 담지 않는 화가를 칭하기 위해서 사용하였다. 간판쟁이는 작품에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을 담지 않기 때문에 예술가가 아니라는 말이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사람이 그린 대부분의 그림도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지 못하는데 셔터를 누르면 알아서 처리되는 기계의 이미지가 어떻게 예술작품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겠는가?
베냐민은 이러한 기계 이미지인 사진이 이미 예술작품이 되었다면, 이제 예술작품의 기준 자체가 바뀔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였다. 말하자면 사진과 같은 기계 이미지는 예술작품의 성격을 바꾸어놓았다. 그는 이러한 예술작품의 변화를 아우라(Aura)라는 그 유명한 개념과 관련지어 설명하였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의 글 중 하나인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Das Kunstwerk im Zeitalter seiner technischen Reproduzierbarkeit, 1936년 2판)에서 그는 20세기 이후 변화된 예술작품의 성격을 소상하게 설명한다.
베냐민은 사진이나 영화와 같이 복제기술이 등장한 이후 예술작품에서 발생한 가장 큰 변화를 아우라의 소멸로 이해한다. 베냐민은 아우라를 ‘공간과 시간으로 짜인 특이한 직물로서, 아무리 가까이 있더라도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것의 일회적인 현상’이라고 정의한다. 아우라에 대한 정의가 매우 모호하기 때문에 아우라의 해석과 관련하여 많은 논쟁이 발생하였다. 가장 광범위하고 통속적인 해석은 아우라의 정의에서 ‘일회적인 현상’이라는 표현에 특별히 주목하는 것이다.
특히 이러한 해석은 글의 제목에 나타난 기술복제시대와 일회성을 매우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사진과 영화는 원본과 구별되지 않는 이미지를 대량으로 복제하기 때문에 하나라는 희소성이 주는 원본의 신비감을 없앤다. 따라서 이러한 신비감이 사라지면 과거에 예술작품이 지녔던 가치인 종교적인 ‘제의가치(Kultwert)’는 없어진다.
여기서 제의가치란 숭배의 대상이 되는 가치를 말한다. 과거 예술품은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자신만의 고유한 가치를 지닌 것이어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유일한 것이며, 그 유일한 것을 보기 위해서 사람들은 먼 거리를 달려오고 숭고한 마음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그리하여 작품을 대하는 순간 아무리 가까운 거리에서 감상하더라도 자신의 손에 닿을 수 없는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더 이상 원본이라고 부를 수 없는 똑같은 것들이 수도 없이 있다면 어떨까? 작품의 신비감이 감소하거나 아예 없어질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술작품에서 아우라가 붕괴되었다는 말의 뜻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베냐민이 아우라의 붕괴를 부정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았다는 사실이다. 예술작품이 제의가치를 지닌다는 말은 마치 그것이 엄숙하고도 장엄한 어떤 종교적인 가치를 지닌다는 의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술의 체험은 마치 종교적 체험과 마찬가지로 엄숙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전통은 아직까지 남아 있어서 사람들은 예술작품을 감상할 때 매우 엄숙한 표정을 짓거나 태도를 보인다. 이는 일종의 허구이며 이데올로기이다. 그러한 점에서 마치 중세의 교회예술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은 정치적 기능을 지니는 것이다. 베냐민이 아우라의 붕괴를 긍정한 이유는 바로 예술의 이데올로기적 기능이 파괴되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제 아우라가 붕괴된 예술작품에는 어떤 신비한 힘도 남아 있지 않다. 그 안에 남겨진 것은 마치 쇼윈도에 진열된 많은 상품들처럼 우리의 오감을 충족시켜주는 표면적인 것들에 불과하다. 베냐민은 이렇게 흔하게 볼 수 있는 예술작품에 남겨진 가치를 그것의 감각적인 표면적 가치, 즉 ‘전시가치(Ausstellungswert)’라고 불렀다. 사진과 영화와 같은 복제기술의 등장에 따라 변화한 예술작품은 아우라를 상실함으로써 더 이상 제의가치를 지니지 못하고 전시가치를 지니게 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의 결론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예술작품에서 더 이상 아우라를 찾을 수는 없다 (보고 듣고 만지는 현대사상, 2015. 08. 25., 박영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