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현의 야구 인생이 만개하기 시작한 것은 광주일고 유니폼을 입은 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난 1994년 광주일고에 입학한 김병현은 그 해 처음으로 생긴 무등기 대회에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서서히 주목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김병현은 ‘초고교급 투수’라는명성을 얻으며 일약 고교 야구 최고의 투수로 자리 매김한다.
제 50회 청룡기 대회에서는 덕수상고를 5-3으로 꺾고 팀을 7년만에 전국대회정상에 올려 놓으며 최우수 선수에 선정됐다. 특히 김병현은 결승전까지 43개의 탈삼진을 잡아내며 방어율 0.035를 기록, 야구 관계자들을 깜짝놀라게 했다.
석달 후인 95년 8월 김병현은 난생 처음 태극 마크를 다는 영광을 안았다. 그해 보스턴에서 열린 세계 청소년 야구 선수권대회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에 김선우(보스턴 레드삭스)등과 함께 선발된 것.
또 이 대회를 계기로 김병현의 꿈이 해태 타이거즈 선수에서 메이저리거로 바뀌게 된다. 올 시즌이 끝날 때쯤 김병현은 “당시메이저리그 구장에서 경기를 가진 후 나도 언젠가는 미국에 진출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호텔 방에서 잘때도 메이저리그에서 뛰는 꿈을 꾸었다”라고 털어 놓기도 했다.
탄탄대로를 달리던 김병현은 고 3때인 96년 봄 대통령배 대회에서 오른 팔꿈치의 통증을 느끼며 야구 인생의 큰 고비를 맞는다. 너무 많이 던진 후유증이 발생한 것이었다.
그래서 김병현은 야구를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4개월간 마운드에 서지 못했다. 이 때의 부상으로 인해 ‘김병현의 오른 팔꿈치에는 뼛조각이 들어있다’는 악성 루머가야구계에 퍼졌고 이는 아직도 진실처럼 믿어지고 있다(97년 대학 진학시, 99년 애리조나와 계약을 맺은 후 받은 신체검사에서도 뼛조각은 발견되지 않았음).
그러나 김병현은 약 반년만에 당당히 재기, 10월 춘천에서 열린 전국 체전에서 다시 팀을 정상에 올려 놓았다.
잠시 주춤했던 김병현 스카우트 전쟁이 다시 불을 뿜은 것은 당연지사. 고려대 인하대 성균관대 등 대학 감독들과 연고 구단인 해태 김경훈 스카우트는 매일 아버지 김연수씨를 쫓아다녔다.
해태는 당시 기준으로 역대 고졸 선수 최고 대우(3억원)를 약속하며 김병현의 스카우트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뜻밖에도 최후의 승자는 2억원을 베팅한 성균관대였다. 대학 진학 스카우트비 2억원은 야구판에서 아직도 깨어지지 않는 최고액으로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