님의 글을 읽고 있으면
장마비가 한창인 시기에 홀로 음악을 듣고 있을때처럼
알 수 없는 무게가 느껴집니다.
잘 다듬어진...오랜 시간 익혀온 고독...
그런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답글을 다는것이 약간은 두렵습니다.
너무도 정돈되어 있는 고독의 향기에 손상을 줄까봐...
그럼에도 님의 글에는 묘한 매력이 있어
사람을 끌어 당기는 힘이 있는듯 합니다.
가끔 님의 나이가 궁금합니다...
어떨때는 정말 나이 많은 사람처럼 느껴지다가도..
내가 너무도 좋아하는
"부활, 블랙홀, 들국화, 신해철, 서태지, 이승환,
그리고 대학가요제노래들..."
을 좋아 하신다고 하는걸보면 생각만큼 많은 나이가 아닌것
같기두 하구....^^
아무튼 전 님의 글이 좋군요...
앞으로도 많은 글 볼 수 있으면 좋겠단 생각을 해 봅니다.
--------------------- [원본 메세지] ---------------------
어제 안동엔 간간히 비가 내렸다.
후덥지근한 공기를 피하려 우리는 한낮에 영화를 봤다.
연고 없이 지방대를 다니던 가난한 고학생에게 저렴한 돈으로
한 번에 두 프로의 영화와 빗바랜 만화책, 낯선 이들과 두는 몇 판의
장기와 바둑을 제공 하던 그곳의 분위기는 예전 그대로 였다.
<유호성>의 빛나는 연기가 아까운 영화였다.
<친구>를 만들었던 그 감독이 추억의 소품보단 조연 캐스팅에 더 신경을 썼으면 좋겠다.
영화가 좀 더 길었으면 좀 더 나은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두 시간만에 다시 나온 세상은 빗물로 가득 차 있었다.
택시를 잡아 매운탕 집으로 향했다.
학교 밑에서 낚시를 하다 쏘가리 같은 걸 잡으면 가져가 술값을 타 오던
그 아줌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수조를 청소해주고 맛있는 잉어찜을 얻어먹은 적도 있었는데...
매운탕과 잉어찜을 기다리는 동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하고
하나 둘 모여든 친구들에 의해 구석에 놓여있던 담요와 화투패가 펴졌다.
난 한 친구랑 <X파일>에 대해 열을 냈다.
<고도리>와 <X파일>의 공존..
우린 애매한 나이다. 아니 세월에 저항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배가 차자 안동댐에 가 커피를 마시고 안개 자욱한 길을 걸었다.
지나간 추억이 양념처럼 묻어나는 시간은 예전보다 짧아졌다.
다들 해야 할 일들이 많다.
관광호텔에서 서울서 온 친구랑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브레이브 하트>를 봤다.
(안동은 여전히 물가가 싼 모양이다. 서울의 관광호텔보다 4만원이나 싸다.)
<양지훈>의 목소리가 도무지 <월레스>역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망한 비디오가게에서 2천원에 산 비디오테입이 있는데도
TV에서 해주니 반가워서 재밌게 봤다.
<왁스>의 새 뮤직비디오도 보고 스타크래프트 한중전도 보고..
잠이 오지 않았는데 언제 잠 들었는지 모르겠다.
.....
12시가 다 되어 일어나 샤워를 하고 체크아웃을 하고 찜닭을 먹으러 갔다. 게으름..
일요일이라 외지 사람들이 많았다.
전국의 맛집을 소개 한 책을 들고 니콘 카메라를 맨 일본인들도 있었다.
찜닭은 여전히 맛있었다.
옛날엔 정말 술안주로 수도 없이 먹었는데 질리지가 않는다.
(다른 지방에서 파는 체인점의 안동찜닭은 맵기만 하고 맛이 없었다.)
우린 돈이 있을 땐 찜닭의 당면부터 먹었고 없을 땐 닭부터 먹었다.
이 법칙을 어기면 무자비한 린치(?)를 당하곤 했는데
당면은 늦게 먹으면 불어 버리니까 한 접시 더 시킬 돈이 없으면
당면을 불려서 양을 채웠다.
그랬었는데 지금은 둘이 먹어도 닭이 남는다.
은근히 그 시절이 그리운 건 배가 불러서 가지게 되는 사치일까?
비오는 거리를 걸으며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그대로인지 체크 하다가
노래방엘 들어갔다.
이젠 비 맞는 게 두려운 나이가 되었나보다.
몇시간 동안 그 옛날 함께 부르던 노래를 불렀다.
부활, 블랙홀, 들국화, 신해철, 서태지, 이승환, 그리고 대학가요제노래들...
그렇게 추억은 익어갔다.
새로 생긴 커피전문점에서 커피를 마시고
짬뽕을 맛있게 하던 중국집에서 그 옛날 한번도 먹어보지 못했던(비싸니까)
삼선짬뽕을 시켜먹고
우린 좀 머뭇거리다가 각자의 근거지로 발길을 돌렸다.
나는 대구로.. 그는 서울로...
대구는 비가 오지 않았나보다.
동대구고속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마자 특유의 후덥한 공기가 나를 감싼다.
익숙하기에 덥다기보단 어떤 안도감을 느껴진다.
버스 옆 자리에 초로의 베레모 쓴 아저씨가 책을 보고 있었는데
내리면서 두고 내리길래 내가 가지고 왔다.
이건 도둑질일까?
<바빌론 부자들의 돈 버는 지혜>라는 책인데 그 아저씨에겐 별 도움이 안 되었던 모양이다.
가방엔 여전히 몇권의 책이 들어있다.
<셜록홈즈시리즈 6권 - 셜록 홈즈의 모험>이 드디어 내 손에 들어 왔다. ㅋㅋ
사서 실망했던 <기암성>을 루팡 메니아인 친구에게 주고 얻는 것이다.
언제나 책을 얻게 되면 기분이 좋다.
16일부터 3일간 <대봉도서관>에서 책 바꾸기 행사를 할 모양인데
마음에 안 드는 책들을 가지고 가서 보물을 건져야겠다.
아! 좀 전에 여기 들어 오면서도 책이 한 권 생겼구나.
이 카페 초기화면에 <책남 자료공유방>이라고 있길래 눌러 봤더니
몇권의 책이 올려져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체게바라평전>을 다운 받았다.
나도 꽤 많은 사이버 책을 가지고 있는데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다.
집에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으니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진다.
난 점점 백수생활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 같다.
쉽게 잠들지 못할 이 밤엔 잠시 쌓여있는 책을 밀어놓고
나를 돌아봐야겠다.
내 안엔 무엇이 있을까?
그저 똥만 차 있는게 아니었으면 좋겠다.
차 있으면 퍼 내고 다른 걸 채워야 겠지.
뒤돌아보는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
내 삶의 마지막 책장을 덮을 때까지는
늘 겪는 시행착오의 연속임을
어쩔 수 없습니다.
작은 목소리에도 쉬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바람 탓만 하며
내 흔들림을 합리화하는,
아니 피치 못할 행위였음으로 변명하는
작은 인간일 뿐입니다.
너무 쉽게 표정 바꾸며 살아온 일들이
싫어서, 오늘의 나도 싫지만
앞으로 그러지 않으리라는 자신도 없기에
더욱 비참합니다.
어느새 반 이상을 넘겨본
인생이라는 책장을
후회 없이 돌이켜줄 자신도 없는데
남은 쪽을 넘기기는 더욱 두렵습니다
넘길 때마다
주위를 돌아보며
생각없이 살지나 않는지
나로 인해 우는 울음을 외면하진 않았는지.....
어둠을 지나온 밝음에서
다시 어둠을 예견하지 못하진 않았는지.
조심스레
넘어가는 책장이 또한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