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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정온(鄭蘊 )종택 -혁명 기상 충만한 强骨 집안 조용헌 < 원광대 동양학대학원 교수 >
‘금색 원숭이의 정기가 뭉쳐 있다’는 뜻의 금원산(金猿山)을 배경으로 한 동계(桐溪) 정온 종택은 그 강강(剛剛)한 기세가 무림 고수가 살기에 적당한 집이라는 이미지를 준다. 바로 이 집에서 조선 후기 최대의 반란사건 주도자 정희량을 배출한 것을 우연한 일로만 돌릴 수 있을까?
동계고택이 무림고수가 살 만한 집이라는 인상을 주는 이유는 무엇일가? 바로 금원산 때문이다. ‘금색원숭이의 정기가 쳐 있다’는 뜻을 지닌 금원산은 백두대간이 덕유산에서 지리산으로 내려가다가 중간에 뭉친 산이다. 해발 1천360미터로 비교적 높고, 암벽이 노출된 강강한 바위산이다. 오행으로 보면 화기와 금기가 4대 6 정도로 화금체 산으로 봐야할 것이다.
동계고택을 마주 보았을 때 무엇보다도 고택의 좌측 뒤로 우뚝 솟은 4,5개의 금원산 봉우리가 바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엄숙함 또는 위압감을 느끼게 한다. 마치 봉암사가 자리잡고 있는 문경의 대머리산 희양산이 주는 인상과 비슷하다. 양쪽을 다 터 뒤쪽으로 높은 바위산이 받치고 있는 형국이다. 긴장감이 감도는 엄숙함이라고 표현해야 할까. 동계고택이 태조산에 해당하는 금원산이 주는 이미지는 긴장감이 감도는 엄숙함이다. 이 함부로 말 붙이기 어렵게 느껴지는 엄숙함 때문에 무림고수의 이미지가 연상되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강기다. 알려진 고택을 답사하면 금원산처럼 화금체 바위산이 조산으로 뒤에 받치고 있는 경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도를 닦는 절터라면 모를까 보통 사람이 사는 집터는 이런 곳을 피하기 때문이다. 산의 정기를 흡수하기 벅찬 일반인에게 금원산이 지닌 것 같은 강기는 단순히 강하다는데서 끝나지 않고 사람을 때리는 살기로 변하는 수가 많으니까 문제다.
지기가 지나치게 강한 곳에 집을 짓고 살면 밤에 꿈자리가 사납거나 때로는 가위에 눌리는 수도 있고, 아니면 성격이 이상하게 포악해지거나 몸이 시름시름 아파서 결국 병이 느는 경우가 많다. 1,2년은 어떻게 버틸 수 있다 하더라도 3년이 넘어가면 버티기 어렵다. 그래서 이런 장소에는 절터나 수도원이 들어서야 제격이고, 아니면 아주 기가 강한 사람이 터를 누르면서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이처럼 기가 강한 금원산을 조산으로 동계고택이 들어설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陽中陰(양중음)의 이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단단한 양에 부드러운 음이 들어 있다는 뜻이다. 바케트 빵처럼 단단한 껍질 속에는 부드러운 속살이 있기 마련인데, 이 부드러운 속살에는 묘용이 만이 나온다. 동계고택 터는 이 속살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보면 틀림없다.
금원산에서 시작된 기운이 한참 내려오는 과정에서 마침내 그 성난 노기를 풀고 야트마한 동산으로 결국을 이룬 곳에 동계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비록 화금체 바위산이 금원산에서 시작했지만, 대미를 장식한 곳은 흙산으로 봉긋하게 올라온 동산이다. 강함에서 우러난 부드러움, 이러한 고시 양중음의 전형적인 자리인데, 이런 자리가 명당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호남의 3대 수도터 중에 하나로 꼽히는 전북 변산의 월명암도 양중음의 자리다. 동계고택의 전체 국세에서 또 하나 주목을 끄는 것이 기백산이다. 이 산은 높이가 1천 320미터에 달하는 고산인데, 고택에서 보자면 정면에서 약간 우측전방에 자리 잡고 있다. 산의 모습이 전체적으로 삼각형이면서 끝이 깃발처럼 뾰족하다. 전형적인 문필봉의 모습인 것이다. 첫눈에 보기에도 대단히 우람한 문필봉이다.
기백산은 맨 끝이 뾰족해서 필력이 날카롭고, 붓을 받치고 있는 하부구조가 두텁고 웅장해서 뚝심과 자존심도 갖춘 문필이다. 끝만 날카롭고 하부구조가 약하면 외부 압력에 오래 버티지 못하지만, 기백산처럼 두텁고 웅장한 문필봉이면 어떤 어려움이 잇더라도 초지일관 지조를 굽히지 않는 저력이 있다. 봉우리 끝도 살펴보아야 한다. 봉우리 끝이 흡사 붓끝처럼 예리하면 그 정기를 받은 사람의 필력 또한 예리하다고 본다.
이렇게 보니 동계고택은 조산인 금원산의 무인적 기질과 안산인 기백산의 문사적 기질이 어우러진 집터이다. 문무겸전의 터라는 것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금원산과 기백산을 바라보니 400년전에 살다간 동계라는 인물의 성품이 어떠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는 돈을 보자. 문무겸전을 했다 하더라도 사람이 품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쓸 만큼의 돈이 있어야 하는 법, 부귀영화라는 말을 보더라도 귀보다는 부를 앞세우지 않던가! 돈이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선 물을 살펴야 한다. 배산임수라고 할때 임수의 상태를 본다는 말이다. 동계고택 앞으로는 내당수가 흐르고 있었다. 내당수는 집터를 기준으로 청룡, 백호의 범위안에서 흐르는 물을 가리킨다. 청룡, 백호를 벗어나서 바깥에서 흐르는 물은 외상수라고 부른다.
내당수는 밖에서부터 집터를 향해 흘러 들어오는 물을 으뜸으로 치고, 그 다음으로 둥그렇게 활처럼 휘어지면서 집을 감아 도는 물을 좋게 본다. 고택 앞의 내당수는 활처럼 돌아나가는 물이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내당수 바깥쪽에 외당수가 하나 더 있다. 겹으로 집 앞을 흐른다는 것은 그만큼 돈이 만다는 뜻이다. 무려 다섯 개의 물줄기가 고택 주위에서 합수한 형국이다. 물은 집 앞에서 합해질수록 좋다고 본다. 물줄기가 많이 모일수록 재물뿐 아니라 사람들의 인심도 한군데로 합쳐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를 일러 만득일파라고 하는데 들어오는 쪽 물은만갈래로 나뉘어 오더라도 이 물이 나갈 때에는 한군데로 합하여 나가나는 말이다.
툭터진 국세와 서출동류의 물흐름 입은 거의 정남향에 가깝고 고택 앞의 물은 오른쪽에서 시작해 왼쪽으로 흘러가므로 서출동류에 해당한다. 어느 사찰 노스님은 그런 물이라면 “똥물도 약이 된다‘ 고 한다. 그만큼 선호하는 물 흐름이다. 물은 서쪽으로 시작해 동쪽으로 흘러가는 물이 생태계에서 가장 좋다고 한다. 이 방향으로 흘러가는 물이 일조량을 가장 오랫동안 받을 수 있다는 것이 그 근거였다. 해는 동쪽에서 뜨니 물이 서쪽으로 시작하면 물이 흘러가는 동안 반대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마주 보는 시간이 길어지고, 빛을 만이 받을수록 그 물은 산소 함유량이 풍부해져 생태계에 이롭다는 주장이다. 마지막으로 局勢를 보자. 경상도 지세는 산이 많고 들판이 적기 때문에 이 지역의 고택들은 뼈대는 있으되 상대적으로 국세가 좋은 경향이 있다. 양쪽을 다 갖추기는 어려운 법, 그러나 동계고택은 예외다. 툭터진 느낌을 줄 만큼 국세가 넓다. 이처럼 마음을 시원하게 하는 터는 거기에 사는 사람의 포용력까지 키워주는 것 같다. 우울 산중에 사는 사람보다는 너른 들판에 사는 사람이 마음이 넓기 마련이다. 동계고택의 터는 남아로 태어나서 겸선천하를 한번 해보아야 하는 의욕이 솟는 곳이다.
동계정온 집안 초계정씨들은 일찍부터 과거급제를 한 기록이 있다. 고려시대의 과거합격자 101명의 명단이 실린 정사방복이 이 고택에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에서 발견 된 것이다. 어쨌든 이 동네 정씨가 조선시대 명문가로 부상하게 된 계기는 동계 정온이 임금에게 목숨을 걸고 올린 직언 상소문 때문이다. 동계가 46세 되던 해, 당시 임금 광해군은 동생인 영창대군을 강화도로 귀양보냈다가 강화부사 정항을 시켜 죽이고, 부왕인 선조의 계비이며 영창대군의 생모인 인목대비를 폐출하려 했다. 익에 동계는 상소문을 올려 임금이 지금 퍠륜행위를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했다. 이때 광해군은 친형인 임해군을 역모로 몰아 죽이고 외조부인 연흥부원군 김제남을 역적이라고 죽였으며, 동생마저 죽이고 선왕의 공신과 현신들이 귀에 거슬리는 상소를 했다고 해서 죽이거나 귀양을 보낸 상태였으니, 자기에게 패륜을 저지르고 있다고 직언한 동계를 그냥 살려둘 리 없었다. 동계도 이미 죽음을 각오하고 상소를 올렸음은 물론이다. 동계가 올린 상소문은 광해군이 막 수라상을 받았을 때 입직승지가 읽어주었다고 한다. “그런 짓을 하시고 죽어서 무슨 낯으로 종묘에 들어가서 역대 선왕들을 만나시겠고?” 하는 대목에 이르자, 노기가 충천한 광해군이 수라상을 발길로 걷어차니 반찬 그릇과 장 종지가 어떻게나 세게 튀었던지 옆에 있던 시녀와 승지의 머리가 터져버릴 정도였다. 뿐만 아니라 이처럼 흉측한 상소를 전달한 승정원 승지들도 책임이 있다고 해서 그 자리에서 파직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기록에 의하면 전국의 유생은 물론 부녀자들까지도 동계의 상소문을 언문으로 번역하여 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하며, 동계가 구금된 감옥의 역졸들도 선생의 인품에 감복되고 또 여론에 압도되어 지성으로 동계를 보살폈다고 전한다. 동계를 옹호하는 전국 선비들의 여론 때문에 동계는 죽지 않고 대신 제주도 대정현에 10년 동안 위리안치되는 형을 받는다. 위리안치란 유배지의 담장주위를 마치 새장처럼 가시덤불로 에워싸서 하늘만 빼곰히 보이도록 조치한 집에서 사는 형벌이다. 말하자면 지독한 가택연금인 셈이다. 후일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를 가서 생활한 곳이 동계가 위리안치된 바로 그 곳이었기에 훗날 대정현 사람들에게서 동계의 유배생활이 어떠했느지 소상하게 전해 듣고 동계의 선비다운 처신에 감동을 받은 것 같다. 추사는 제주 귀양 풀린 후 일부러 거창의 동계고택을 방문하여 당시 동계 후손인 정기필에게 동계선생에 대한 제주 도민의 칭송을 전하고 ‘충신당’이란 현판을 써주고 갔다고 한다.
동계가 충절의 선비로 존경받게 된 또다른 사건은 병자호란때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과 조선조에 일어난 2대 난리로 꼽히는데, 그 성격상 임진왜란이 인명피해와 물질적인 피해가 두루 컸다고 한다면 병자호란은 물질적인 피해는 적었지만 정신적인 피해는 오히려 임란보다 심각했다고 볼 수 있다. 비록 신의주까지 도망하기는 했지만 임란때에는 조선의 왕이 일본 장수에게 무릎 꿇고 항복하는 치욕적인 일이 없었던 반면, 병자호란때에는 그때가지 우습에 알던 오랑캐에게 임금인 인조가 맨발 벗고 덮으려 절하는 치욕을 당했기 때문이다 명분과 자존심을 생명보다 소중하게 여긴 조선조 선비들에게 임금이 남한산성에서 무릎 꿇은 삼전도의 치욕은 선비로서의 자존심을 송두리째 망가뜨리는 일대 사건이었다. 1636년 동계는 남한 산성에서 오랑캐와의 화의를 적극 반대했으나 결국 화의가 성립되자 칼로 배를 긋는 할복 자살을 기도했다. 주욕신사(主辱臣死 임금이 욕보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의 정신이었다. 그러나 모진 목숨이 마음대로 끊어지지 않자 국은에 보답 못한 것을 한탄하고 덕유산 자락의 모리라는 곳에 은거하면서 백이, 숙제처럼 죽을 때까지 미나리와 고사리를 먹고 살았다.
동계가 고사리를 캐며 살았다고 해서 그 은거지는 고사리 미(薇)자를 너어서 ‘채미헌’이라는 이름으로 전해진다. 요즈음도 후손들이 동계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고사리와 미나리를 올려 놓는다고 한다. 이 집에서 고사리와 미나리는 그냥 나물이 아니라 의리와 절개의 상징인 것이다.
무신란의 주동자 -정희량 옛말에 일치일란이라고 한번 치세가 있으며 다음번에는 난세가 오는 법이다. 이는 비단 국가뿐만 아니라 한 집안사에도 적용되는 것이가, 세상사라는 게 치세만 계속될 수는 없는 것 같다. 정씨 집안에서는 동계라는 인물이 명문가를 올려 놓는 치세를 이루었다면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은 정씨 집안을 존폐의 기로에 몰아 놓는 일대 난세로 기록했다. 정희량은 영조 4년에 발생한 무신란의 주동자다. 무신란은 조선후기에 발생한 반란사건가운데 그 규모가 가장 크고, 거기에 가담한 충청, 영남, 호남의 내로라하는 명문집안들을 거의 멸문 또는 쑥대밭으로 만든 사건이다. 상층 엘리트들이 대거 가담했다는 측면에서 무신란은 일대 민란과는 성격이 다른 정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록과 정황을 종합하면 무신란의 발생원인은 대략 4가지로 집약할 수 있다.
첫째는 경종의 독살설이다. 경종이 음식중 게장을 특별히 좋아했는데 독이 든 게장을 먹은 직후 갑자기 사망했다는 설이 파다하게 퍼졌다. 경종이 죽을때 입에서 붉은 피를 토하고 죽은점, 임종 직후 경종의 시체에 반점이 퍼진 사실이 독살설을 뒷받침한다.
둘째는 경조의 뒤를 이은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라는 점이 제기되었다. 그 증거로 역대 이씨 왕실의 남자들이 수염이 별로 없는 데 반해 영조는 이상하게 수염이 많아, 이는 결국 영조 어머니인 무수리의 미천한 신분과 관련되면서 영조가 이씨 왕통이 아니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셋째는 경종의 뒤를 이은 영조의 등장과 함께 노론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고, 노론에게 밀려난 남인들과 소론(준소)들은 정권에서 완전히 소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난을 일으켰다는 설이다.
넷째는 당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는 극심한 흉년이 계속돼 사람을 잡아먹는 상황에 이를 정도로 민심이 흉흉했다는 점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민란의 시대’라고 규정할 수 있을 만큼 수많은 민란이 발생하고 있었음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튼 여러 배경으로 인해 일어난 무신란은 이인좌(李麟佐)의 난이라고도 하고 정희량(鄭希亮)의 난이라고도 부른다. 조선시대 각종 반란사건의 수사기록인 ‘추안급국안(推案及鞠案)’에서 무신란 관련 기록을 들춰보면 문건 타이틀에 이인좌, 정희량의 이름이 보인다. 동계의 현손인 정희량이 무신란의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충신의 후손에서 일순간에 역적 집안으로 전락한 강동의 정씨들은 30명 정도가 사건에 연루되어 죽어야 하였고, 약 20년 동안 동네를 떠나 이곳 저곳에 뿔뿔이 흩어져 숨어 살아야 하였다. 한마디로 집안이 결딴난 것이다. 조선시대 죄인 중에 가장 큰 죄인이 쿠데타에 실패한 역적이었으니까, 이후로 정희량에 관한 사실은 초계 정씨 족보에서부터 문집에 이르기까지 모든 기록에서 철저하게 삭제되었음은 물론이다.
소설가 이병주가 그랬던가! 승자의 기록은 햇빛을 받아 역사로 남지만, 패자의 기록은 달빛을 받아 신화나 전설이 된다고. 정희량에 관한 내용도 마찬가지다. 강동 마을에서 구전으로만 희미하게 전해지는 정희량에 관한 이야기를 후손인 정양원씨(鄭亮元, 62세)가 99년에 ‘강동(薑洞)이야기’라는 책으로 펴냈다. 정양원씨는 현재 사업체(成現商運)를 운영하는 사장이지만 십수년간 시간 나는 대로 자료를 찾고 현지를 답사하면서 정희량에 관한 자료와 정보를 꼼꼼하게 섭렵한 향토사학자이기도 하다. 조선시대에는 역적이었지만 이제 시대가 바뀌었으니 새로운 시각에서 정희량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취지에서 책을 펴냈다는 것. 이 책에는 정희량에 관한 몇 가지 일화가 나온다. 정희량은 어릴 때부터 인물이 대단히 준수하였고 두뇌가 비상하였으며 생각하는 것이 엉뚱하다 할 정도로 호방하였다고 한다.
정희량이 네댓 살쯤 된 어느 봄날 조부인 제천공이 어린 손자인 정희량을 안고 집 앞에서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때 마침 우측으로 바라보이는 금원산에 산불이 나서 대단한 기세로 타고 있었다고 한다. 시커먼 연기가 하늘을 가리고 그 연기 사이로 불꽃이 널름거리는 광경을 보고 있었는데, 할아버지 품에 안겨 있던 어린 손자가 “할아버지, 저 둥그런 하늘이 솥(鼎)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하는 것이었다. “허허 고놈이! 하늘이 어떻게 솥이 될 수가 있겠느냐. 그래 하늘이 솥이라면 무엇을 할 것이?” “만약 하늘이 솥이라면 저 불로 죽을 끓여서 굶는 백성들을 모두 먹이면 온 나라 안에 배고픈 사람이 없을 것 아닙니까?”
어린 손자에게 이 말을 들은 제천공은 손자의 생각이 기특하기도 했으나 한편으로는 그 그릇이 너무 크고 생각이 지나치게 거창하여 걱정스러운 생각도 들었다고 한다.
‘정감록’과 풍수도참 사상
필자의 주목을 끄는 또 하나의 전설이 있다. 무신년 봄에 정희량이 거사를 하려고 하자 누나가 주역을 펴놓고 골똘히 괘를 풀어보았다. 정씨집 여자들은 주역을 공부하는 전통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뛰어난 예지력을 갖춘 여성들이 많았다고 한다. 아무튼 그 누나는 주역을 풀어본 뒤 동생 정희량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했다. “네가 정히 큰 일을 할 명운을 타고났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니 조금 더 기다렸다가 금년 가을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가 천시(天時)에 맞다. 그때 하거라.” 그러나 상황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형편이라고 정희량이 대답하니, 누나는 “이것도 역시 우리집 가운이고 너의 명운이라 어쩔 수가 없구나. 지금 거사를 하면 너는 뒷날 목 없는 귀신이 되고, 무덤 없는 혼백이 될 것이다”라고 한탄하였다 한다. 이 러한 전설들은 알고 보면 풍수도참(風水圖讖)에 관한 내용들이고, 한걸음 더 유추하여 보면 정희량 자신도 풍수도참적인 맥락에서 특별한 운명을 타고난 사람이라고 여겼을 가능성이 있다. 조선 후기 각종 반란사건의 이념적 기반 중의 하나가 다름 아닌 풍수도참이고, 대표적으로 ‘정감록’이 조선시대의 그러한 풍수도참적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 실제로 ‘정감록’이라는 이름이 공식기록에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바로 무신란 때부터다. 혹시 무신란 주도멤버 중 누군가가 ‘정감록’을 비롯한 풍수도참설을 유포하여 민심을 움직이려 한 것은 아닐까? 정씨인 정희량은 혹시 자신을 정도령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아닐까? 조선시대 사람들의 내면세계를 지배했던 풍수도참적인 시각에서 보면 동계 종택의 풍수와 정희량이라는 인물의 출생은 몇 가지 점에서 부합되는 부분이 발견된다.
다소 어렵긴 하지만 이를 풀어보기로 한다. 태조산인 금원산의 정기를 받은 인물이 강동마을 정씨 집안에서 언젠가 한 명 태어나기 마련이다. 그 사람은 열두 띠 가운데 일단 원숭이해에 출생한 신년생(申年生)으로 범위를 좁혀볼 수 있다. 바로 금원산이 원숭이(申)의 정기가 뭉쳐 있는 산이기 때문. 그 다음에는 원숭이띠 중에도 천간(天干)에 임(壬)자가 들어간 임신년(壬申年)생 인물이 금원산의 정기를 받아먹을 것이다. 바로 동계 종택의 좌향이 임좌(壬坐)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즉 풍수의 이기법(理氣法)을 동원하면 종택 좌향의 임(壬)과 태조산인 금원산의 신(申)이 결합하면 임신(壬申)이 되는 이치다.
그런데 정희량은 역적이라고 해서 모든 기록에서 지워졌으므로 그 출생연도를 확인해볼 수 없다. 추리해 보면 정희량과 함께 난을 꾸민 이인좌의 나이가 무신란 당시 36세였고, 두 사람이 흉금을 터놓고 같이 어울렸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비슷한 연배였을 것이다. 또 기록에 따르면 무신년에 정희량이 큰며느리를 보았다고 돼 있는데, 당시 혼인 적령기가 17∼18세였음을 감안하면 정희량은 무신란 당시 37∼38세쯤이 아니었을까. 무신년을 기점으로 육십갑자를 소급해 올라가면 37세 나이는 임신년(壬申年) 생이다.
그 다음에 생각해볼 요소가 거사년인 무신년(戊申年)이다. 이 역시 원숭이해다. 원숭이띠가 원숭이해에 거사를 한 셈. 이러한 중복은 상서롭게 본다. 그런데 여기에 원숭이가 한 마리 더 첨가되어 세 마리 원숭이가 삼중으로 중복되어야만 제대로 힘을 쓴다고 본다. 전설에 따르면 주역을 잘한 정희량의 누나는 “나락이 고개를 숙이기 시작할 때 거사를 하라”고 정희량에게 충고했다고 하는데, 바로 그때가 음력 7월로 신월(申月)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희량은 그 말을 듣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복구된 명문가 초계 정씨들이 반란의 주모자를 배출하고서도 멸문을 당하지 않고 다시 집안을 복구할 수 있었던 배경은 무엇인가? 가장 큰 이유는 동계와 같은 충신의 제사가 끊어지게 놔두면 안 된다는 사대부층의 여론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영조 당대에 동계 제사가 허가된다. 이는 정희량에 대한 미움보다도 선조인 동계에 대한 존경의 염이 더 컸음을 나타낸다. 중시조인 동계의 명망이 없었더라면 이 집안은 무신란 때 끝났다고 보아야 한다. 그만큼 한국 명문가는 중시조의 명망이 중요한 요소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당 정면에 정조대왕이 동계를 위해 직접 지은 어제시 현판이 그 복구를 상징적으로 말해준다. 무신란의 여파로 20년 동안 숨어 지내야 했던 정씨 집안을 다시 일으킨 인물은 영양현감을 지낸 야옹 정기필(1800∼1860년)이다. 그는 피폐한 강동 마을을 거의 복구시켰으며, 현재 강동마을 정씨들 또한 대부분 정기필의 후손일 정도다. 그만큼 동계 다음으로 비중 있는 인물이다. 야옹 이후로도 계속해서 인물이 배출되면서 정씨들은 과거의 명성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 각계에서 활동하는 이 집안 후손들을 항렬별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정종철(鄭鍾哲, 작고, 경남지사·서울시장 역임) 정종구(鄭鍾九, 작고, 동국대 농대학장 역임, 주정계의 권위자) 정종선(鄭鍾先, 유타대 박사, 미국 코닥사 선임연구원) 정종화(鄭鍾和, 고려대 교수) 정종진(鄭鍾珍, KBS 보도본부장) 정종욱(鄭鍾旭, 아주대 교수, 중국대사 역임), 정종흔(鄭鍾欣, 안양시 부시장 역임) 정도순(鄭度淳, 스위스대사) 정창순(鄭昌淳, 한일은행 전무) 정연순(鄭年淳, 무역진흥공사 본부장) 정용수(鄭龍秀, 검사) 정천수(鄭天秀, 연세대 교수, 벤처기업 사장) 정진수(鄭眞秀, 대웅제약 이사) 정준수(鄭俊秀, 한국통신 공보기획부장) 등이다. 현재 동계 종택의 15대 종손은 정완수씨(鄭完秀, 60세)이고, 종부인 류성규씨(柳星奎, 55세)는 안동의 저명한 가문인 전주 류씨 류치명(柳致明) 선생의 직계 후손이다. 안동의 전주 류씨들은 독립운동을 많이 한 집안으로 유명하다. 종손은 직장이 경북 영주에 있어서 거창 종택에서 거주하지는 못한다. 종손으로서 종가를 지키지 못한다는 부담감을 항상 가지고 있어 몇 년 안에 일이 정리되는 대로 종가로 돌아오려고 한단다.
그러나 종가로 돌아와서 사는 일도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우선 고택의 관리가 쉽지 않다. 1500평의 대지에 70칸 건물이 있는 저택을 쓸고 닦는 일만 해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봉제사 접빈객은 더 큰 문제다. 저명한 고택이기 때문에 지나는 방문객을 비롯하여, 이곳 저곳에서 많은 손님이 항상 찾아온다. 알고 찾아오는 손님들은 모모한 분들이기에 소홀하게 대접할 수도 없다. 종손에게는 손님접대가 가장 큰 일이다.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든다.
고택을 유지하려면 한 달 생활비가 어느 정도 드느냐고 종손에게 넌지시 물어보니 500만원 정도는 있어야 기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종손은 접빈객을 하면서 고택을 관리해야 하니 직장을 갖기가 불가능하다. 보통 사람이 직장도 없이 매달 500만원의 비용을 충당하기는 쉽지 않다. 이 집뿐만 아니라 전국의 유명한 종손들이 직면한 공통적인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재산이 아주 많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으면 종손들이 집을 지키면서 살기가 어렵다는 결론이 나온다.
요리솜씨로 유명한 14대 종부
동계 종택은 종손인 정완수씨 부부보다 종손의 어머니이자 14대 종부인 최희씨(崔熙, 75세)가 유명하다. 14대 종손으로 거창 교육장을 지낸 정우순씨(鄭禹淳)가 5년 전 타계한 후 혼자 이 넓은 집을 지키고 있다. 안채 뜰 앞에 보랏빛으로 피어 있는 꽃잔디도 할머니가 정성스레 가꾼 것이다. 최희 할머니는 요리솜씨로 유명해서, 요리잡지나 여성잡지에서 할머니 요리법을 자주 취재해 간다. 한국 상류층의 전통 요리법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할머니의 친정은 한국 최고의 부잣집이자 12대 만석꾼을 지낸 경주 최부잣집이었으니 그 안목과 솜씨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최희씨는 최부잣집의 현재 종손인 최염씨의 누나이기도 한데, 필자는 동계 종택을 방문하기 전 최염씨를 통해 미리 연락을 해놓은 터라 할머니가 손수 준비한 저녁식사를 안채에서 맛보는 기회를 가졌다. 음식 맛은 전체적으로 담백했다. 명가의 음식을 맛보기 위해 동행한 농심라면의 최경부 소스개발 전문연구원은 이 집의 간장맛에 찬사를 보낸다. 간장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거의 없으면서도 맛은 고소하고 담백하다는 평가다.
할머니에게 그 비결을 물어보니 고택 전체의 구조가 일조량을 많이 받는 위치에 있고, 거기에다 금원산에서 내려오는 물맛이 합쳐져서 그런 것 같다는 설명이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집의 물은 서출동류의 격조 있는 물이다.
반찬 중에 수란과 육포도 빼놓을 수 없다. 수란은 종가의 주안상에 꼭 오르는 음식이라고 한다. 달걀을 끓는 물에 데친 다음 고소한 잣국물에 띄운다. 보기에도 깔끔하면서 영양가가 많을 것으로 여겨진다. 전통예절 전문가인 이연자씨가 쓴 ‘종가이야기’에도 이 집의 수란이 소개되어 있는데, 보통 먹는 계란찜이나 계란 프라이하고는 차원이 다른 음식 같았다.
육포 또한 별미. 나는 산에 갈 때마다 비상 식량으로 육포를 챙기기 때문에 평소 이 분야에 관심이 많다. 할머니에게 들은 비법은 이렇다. 쇠고기를 물에 담가 놓아 피를 뺀 뒤 햇볕에 말린다. 이때 모기장을 쳐 파리가 붙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포를 뜰 때는 손으로 직접 떠야 맛이 있다. 물엿, 설탕, 진간장, 후추, 조미료 약간을 넣는데, 단 마늘은 넣지 않는다고 한다.
잠은 사랑채에서 잤다. 사랑채에는 ‘모와(某窩)’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1909년 의친왕 이강(李堈;1877∼1962년) 공이 이 집 사랑채에서 약 40일간 머문 적이 있다. 이강공은 구한말 승지를 지낸 이 집 종손 정태균(鄭泰均)과 한양에서 친하게 지낸 사이였기 때문에 이 집을 찾아왔으며, 그때 남긴 친필이 ‘모리의 집’이라는 뜻의 ‘모와’다.
의친왕이 묵었던 사랑채 에피소드도 전해진다. 의친왕이 사랑채에 머물고 있을 때 거창 인근은 물론이고 남원, 무주, 진안, 장수에서까지 사람들이 와서 임금님을 보겠다고 뜰 앞과 문 밖에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몇 년 전에는 이강 공의 아들인 가수 이석씨가 종택을 방문하였다. 아버지가 머물렀던 사랑채에서 자보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사랑채에 들어온 이석씨는 감회어린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아버지가 요를 깔고 자던 방바닥에 대고 몇 번이나 절을 하더란다. 종택 사랑채의 하룻밤은 상쾌한 숙면이었다. 7층 아파트의 잠자리와는 확실히 다르다는 걸 실감하겠다. 자고 나니 몸이 부드럽지 않은가! 아침을 먹기 전에 근처에 있는 수승대까지 산보를 나갔다. 거리는 1km. 뒷동산의 산길을 넘어가는 데 20분 정도 소요되는 적당한 거리다. 솔잎 냄새와 새소리를 들으면서 당도한 수승대도 절경이다. 계곡 한가운데 소나무 사이로 거북 모양을 한 커다란 바위(岩龜臺)가 신비롭게 놓여 있고, 그 꼭대기에는 사람이 앉을 수 있도록 돌로 된 좌석이 마련되어 있다. 신선은 바로 이런 곳에서 세월을 보내는구나. 집에서 불과 20분만 걸으면 산수화 속으로 직접 들어갈 수 있으니 더 이상 무얼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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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5백년 내력의 명문가 이야기..<푸른역사>.조용헌 지음....자료집을 만드느라고 책을 타이핑했습니다. 이걸 치느라고 죽는 줄 알았습니다..대장의 노고를 생각하며 꼭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 내용 자료집에 담겠습니다. 역시 명문가는 명문가가 될 충분한 이유가 있더군요.
아이구~ 이걸 다 치셨어요? 시간 내서 차근히 읽어보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시어머님이 초계정씨라서 한자도 빠짐없이 꼼꼼히 읽엇답니다..수고 많으셨습니다.
끝까지 죄다 읽어 봤습니다~너무나 대단한 집안 입니다..읽기도 벅찬데 이것을 타이핑한 대장의 노고는 정말 무어라 감사의 말을 전할지...명문가의 이야기는 늘 흥미진진 하지요...초계정씨 집안 대단한 가문입니다~
읽기도 힘들었는데...대장님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정말 대단한 가문였네요~~대장님 덕분에 편하게 읽었습니다~~..애쓰셨어요~~
한자도 빠짐없이 다 읽고, 댓글을 보니 수고하신 대장님의 노고가 있었군요. 일상사에서 벗어난 느낌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타이핑~~다음부턴 걍 시켜만주십시요. 이구...그렇게까정 공부하게 해 주시다니...돌아서면 가물가물하지만, 일단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천천히,꼼꼼하게 잘 읽었습니다. 남해와 가까운 거창답사에 참석 하고픈 마음 간절합니다. 안내가 있기도 하고, 주말부부라....
열심히 어제 오늘 두번이나 읽었네요. 감사해요..좋은 공부되었어요. 감사!..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