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7주간 금요일>(2023. 8. 4. 금)(마태 13,54-58)
(성 요한 마리아 비안네 사제 기념일)
<나자렛의 겨자씨>
“예수님께서 고향에 가시어 회당에서 사람들을 가르치셨다.
그러자 그들은 놀라서 이렇게 말하였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저 사람은 목수의 아들이 아닌가?
그의 어머니는 마리아라고 하지 않나? 그리고 그의 형제들은
야고보, 요셉, 시몬, 유다가 아닌가? 그의 누이들도 모두 우리와
함께 살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저 사람이 어디서 저 모든 것을
얻었지?’ 그러면서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그리고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마태 13,54-58).”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은 것은, 예수님이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었고, 또 예수님 자신도 목수였기 때문입니다(마르 6,3).
목수라는 직업에 대한 편견,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견,
어떤 유명한 스승 밑에서 배운 적 없는 학력에 대한 편견 등이
모두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로막는 ‘걸림돌’이 되었습니다.
“그들은 그분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라는 말은,
나자렛 사람들이 “목수는 목수 일이나 할 것이지 어찌 감히
사람들을 가르치려고 하는가?” 라고 생각했음을 나타냅니다.
(당시에 ‘목수’는 천대받는 천한 직업이었습니다.)
“저 사람이 어디서 저런 지혜와 기적의 힘을 얻었을까?”
라는 말은, 표현만 보면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인정한 것처럼 보이는데, 그것은 아니고,
“목수 따위가 예언자 행세를 하는군.” 이라는 뜻으로 한 말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예수님의 지혜와 기적을
속임수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을 모르고 살던
이방인들은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데, 하느님을 알고 있고
믿고 있다는 너희는 왜 나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느냐?” 라고
전체 유대인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야기의 전체적인 상황을 보면,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복음을 선포하신 일은 ‘실패’입니다.
그러나 ‘완전한 실패’는 아닙니다.
나자렛에서도 예수님을 믿은 사람이 몇 명은 있었기 때문입니다.
마태오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믿지 않으므로 그곳에서는 기적을
많이 일으키지 않으셨다.” 라고 기록했고, 마르코복음서 저자는
“예수님께서는 그곳에서 몇몇 병자에게 손을 얹어서 병을 고쳐
주시는 것밖에는 아무런 기적도 일으키실 수 없었다(마르 6,5).”
라고 기록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나자렛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 믿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만, 나자렛에서도 몇 명은 예수님을 믿었고,
‘치유의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습니다.
그 몇 명의 병자들은 황무지처럼 척박한 땅 나자렛에
예수님께서 심으신 ‘겨자씨’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겨자씨가 나중에 어떻게 자라서 어떤 나무가 되었는지,
얼마나 열매를 맺었는지 우리는 모르지만, 예수님께서 겨자씨를
심으신 일이 허무하게 끝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게라사인들의 지방’에서 있었던 일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게라사인들의 지방에 가셨을 때, ‘군대’ 라는 이름의
마귀들과 마주쳤습니다(마르 5,1-9).
쫓겨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마귀들은 돼지들 속으로
들어가게 해 달라고 예수님께 간청했고(마르 5,10-12),
예수님께서 허락하시자 돼지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돼지들이 집단 자살을 해버렸고,
마귀들도 모두 제거되었습니다(마르 5,13).
그것을 본 게라사인들은 예수님께 고마워하기는커녕
떠나라고 요구했습니다(마르 5,17).
그들이 예수님을 거부한 것은, 유대인과 유대교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수도 있고, 새로운 변화를 싫어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 지방을 그냥 떠나시게 되었는데,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을 따르게 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배에 오르시자, 마귀 들렸던 이가 예수님께 같이
있게 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시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집으로 가족들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 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 그래서 그는 물러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해 주신
모든 일을 데카폴리스 지방에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랐다(마르 5,18-20).”
복음화의 관점에서 보면, 게라사인들의 지방은 사막과도 같은
불모지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시고,
그곳에 작은 겨자씨 하나를 심으셨습니다.
‘마귀 들렸던 사람’이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널리 선포한 것은
분명히 겨자씨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일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아테네에서의 선교활동’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활동의 전반적인 상황을 보면 ‘실패’인데(사도 17,16-33),
‘완전한 실패’는 아니고, 몇 명은 복음을 믿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때에 몇몇 사람이 바오로 편에 가담하여 믿게 되었다. 그들
가운데에는 아레오파고스 의회 의원인 디오니시오가 있고,
다마리스라는 여자와 그밖에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사도 17,34).”
그 몇 사람은 바오로 사도가 그리스 지역에 심은 겨자씨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들도 분명히 자기들만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름대로 ‘복음의 겨자씨’ 역할을 수행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 먼저 포기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허무하게 끝나버립니다.
신앙인은 겉으로 보이는 상황에 굴하지 않고,
또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겨자씨’와 ‘누룩’의 역할을 하면서,
항상 최선을 다해서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