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석의 축구스타 클래식 53. 둥가
필자가 [스타 클래식 39]에서 로베르토 팔카오를 다루었을 때 ‘볼란치의 유래(由來)와 어원(語源)’ 등에 관해서도 말씀을 드린 걸로 기억 되는데, 축구에서 '볼란치'라는 단어가 사용 되어진 건 1940년 대 부터라고 한다. 그리고 '볼란치'가 국내 축구팬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한 시기는 그 후 50여 년 뒤인 1994년 미국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부터인데 그 계기가 바로 둥가에 의해서였다. 둥가(및 마우로 실바)로 인해서 국내 축구팬들이 '볼란치'라는 단어를 알게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고 또한 수비형 미드필더의 중요성을 새삼 실감케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둥가는 1963년 10월 브라질 남부, 항구 도시인 리오 그란데 드 슬루주(州)의 '이지에이'라고 하는 동네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카를로스 카에나토 브레도른 베히'다. 당연히 ‘둥가'는 닉네임인데 브라질에서는 '꺼벙이(바보)'라는 의미로 통용된다고 한다.
둥가는 1980년 17세의 나이로 강팀인 인터나시오날 클럽에 입단해 5시즌 동안 활약했다. 인터나시오날이 80년대 초, 주(州)선수권에서 우승할 때 둥가가 우승에 크게 공헌하면서 브라질 국내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그 후 둥가는 고린티안스-산토스-바스코 다 가마 등을 거쳤는데 둥가가 소속했던 팀들 모두 브라질 축구 선수들이 가장 입단하고 싶어하는 명문 클럽이다. 둥가의 브라질 대표팀 데뷔는 1983년 8월 대 아르헨티나戰이었다. 그 무렵엔 둥가가 나이도 어렸을 뿐 아니라 브라질 대표팀에 워낙 뛰어난 선수들이 많이 포진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전 자리를 꿰차기까지는 꽤 긴 시간이 필요했다.(86년 멕시코 월드컵에는 둥가가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둥가는 1987년 이태리로 건너가 당시 SERIE-A의 피사에서 한 시즌을 뛴 후 그 이듬 해인 88년에 피오렌티나로 이적했다. 둥가는 피오렌티나에서 92년까지 활약을 했는데 비록 타이틀을 획득하진 못했지만 89-90시즌 피오렌티나가 UEFA컵에 진출하는데 큰 원동력이 되었다. 둥가는 피오렌티나에서 주장까지 역임하는 등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이태리 팬들을 매료시켰다.(둥가는 피오렌티나 시절 로베르토 바지오와 2시즌 정도 같이 뛰기도 했다.)그 후 둥가는 이태리 페스칼라(92/93)를 거쳐 독일 분데스가의 명문인 슈투트가르트로 이적해 두 시즌(93/95)을 보냈다.
둥가가 브라질 대표팀 소속으로 획득은 첫 빅타이틀은 89년 코파 아메리카 우승이었다. 이 대회에서 둥가가 좋은 활약을 펼쳤기 때문에 1년 뒤에 벌어질 이태리 월드컵에서도 맹활약이 기대됐다. 1990년 6월 8일. 드디어 이태리 월드컵이 개막! 브라질은 '변함없는' 강력한 우승 후보였다. 그러나 브라질은 조별 예선부터 삐걱 거렸다. 스웨덴을 2대1, 코스타리카를 1대0, 스코틀랜드를 1대0으로 이기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했으나 세 게임 모두 경기 내용이 만족스럽지 못했다.
당시 브라질의 라자로니 감독은 브라질 전통의 4-4-2(혹은 4-3-3)포메이션을 과감히 포기하고, 그 무렵 세계 축구의 주류(主流)였던 3-5-2 포메이션을 시도했는데 브라질 선수들에게는 3-5-2 포메이션이 전혀 효과적이질 못했다. 결국 브라질은 16강전에서 마라도나가 이끄는 아르헨티나에게 1대0으로 패하고 말았다.(경기 내용 상으로는 브라질이 압도했으나 후반전 종반 한 순간에 마라도나와 카니쟈를 놓치는 바람에.....[스타 클래식 43. 카니쟈]참조)
대회 후, 라자로니 감독은 자국 언론과 팬들로부터 잔혹할 정도의 비난을 받았다. 그에 못지않게 비난을 받은 인물이 둥가였다. 이태리 월드컵에서 둥가는 백넘버 4번을 달고 뛰었는데 그의 '수수한 플레이'에 브라질 팬들이 크게 실망했다. 그 이전까지 지코-팔카오와 같은 화려한 미드필더들만 보아온 브라질 팬들로써는 평범한 스타일의 둥가가 성에 찰 리 없었다.
(참고 1: 90년 이태리 월드컵 때 브라질 10번이 주전이 아닌 후보였다. 믿어지시는가? 당시 브라질 대표팀 10번이 실라스였는데 실라스는 조별 예선 첫 게임인 스웨덴전에서 후반전 종반 교체 멤버로 잠시 출전했을 뿐 대회 내내 벤치를 지켰다. '브라질 10번'은 곧 '세계의 10번' 아니 던가. 그런데 이태리 월드컵에서 브라질 10번이 벤치를 지켰으니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 10번 실라스가 어떤 선수인지 또 어떻게 생겼는지 필자도 모른다.)
(참고 2: 90년 이태리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졸전을 펼친 가장 큰 이유로, 전문가들과 자국 팬들은 라자로니 감독의 무능과 더불어 게임 메이커인 둥가의 부진을 들었는데 꼭 그렇지 많은 않은 것 같다. 필자가 얼마 전, 축구 전문 잡지(월드 사커다이제스트 특집호)를 통해서 알게된 사실인데 이태리 월드컵 개막 전에 브라질 대표팀의 스폰서인 어느 음료수 회사로부터 후원금이 지급됐다고 한다. 이 후원금 분배 문제 때문에 선수들끼리 의견 충돌이 있었다고 한다. 급기야 아르헨티나와의 16강전 하프타임 때도 라커룸에서 후원금 분배 방법을 놓고 선수들끼리 고성이 오고갔다고 한다. 이 정도면 팀 분위기는 안 봐도 뻔하지 않은가!)
이태리 월드컵에서의 부진으로 인해 둥가는 그 후 약 2년여 간 대표팀 부름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둥가는 강인한 정신력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다시 대표팀에 복귀해 94년 미국 월드컵에 출전했다. 미국 월드컵에 임하는 둥가의 각오는 비장했다. 그런데 미국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브라질 대표팀에 비상이 걸렸다. 세계적 스위퍼인 리카르도 고메즈(당시 파리 상제르망 소속)가 부상으로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가 된 것이다. 리카르도 고메즈는 188cm의 장신으로써 브라질 수비를 상징하는 세계 톱클라스 스위퍼다. (유감스럽게도 리카르도 고메즈는 한국에서는 무명이다.)
고메즈의 부상으로 인해 '브라질 우승 전선에 먹구름이 드리워지는 거 아니냐?'는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나왔다. 그렇지만 다행히 브라질에는 또 한 명의 세계적 중앙 수비수인 리카르도 로샤가 있었다.(로샤 역시 한국에서는 무명이다.) 브라질은 리카르도 로샤를 믿고 조별 예선에 임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리카르도 로샤 마져 조별 예선 첫 게임인 러시아戰 후반전에 큰 부상을 당하며 실려 나갔다.
토탈사커 독자 여러분(94년 미국 월드컵을 생생히 기억하고 계신 분들)께 여쭙겠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브라질 대표팀 중앙 수비수 두 명이 누구였는지 기억하고 계시는가? 마르시아 산토스(스위퍼)와 아우다이르(스토퍼)아니었던가. 사실 마르시아 산토스와 아우다이르는 브라질 대표팀의 붙박이 주전 수비수가 아니다. 그런데 이 두 선수는 미국 월드컵에서 고메즈와 로샤의 공백을 전혀 느끼지 못할 정도로 완벽한 수비력을 보여줬다. 그 대회에서 두 선수가 안정감 있는 수비력을 보일 수 있었던 큰 요인은 더블 볼란치인 마우로 실바와 둥가가 이들 앞에 버티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거라고 볼 수 있다.(그렇다고 해서 마르 시아 산토스와 아우다이르의 실력을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바란다.)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페레이라 감독은 마우로 실바를 스토퍼인 아우다이르 앞에 포진시켰고, 마우로 실바 앞 쪽에 둥가를 배치하며 플레이메이커 역을 하도록 지시했다. 그 이전까지 수비형 미드필더 두 명은 대개 좌(左)-우(右)로 배치되는 게 일반적이었으나 페레이라 감독은 좌-우가 아닌 전(前)-후(後)로 배치했다. 더블 볼란치 가운데 한 명인 마우로 실바는 거의 수비 쪽에 치우쳤고, 또 다른 한 명인 둥가는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담당했다. 아울러 둥가는 압박을 걸 때 항상 선봉에 섰다. 둥가의 플레이는 선배인 지코-팔카오 등의 명수들에 비해 화려함과 창조성 면에서는 한 수 아래였지만 기동력과 안정감 면에서 그들 보다 한 수 위였다.
94년 미국 월드컵 때 브라질 대표팀 주장은 원래 둥가가 아닌 10번 라이(소크라테스의 친동생)였다. 그런데 라이가 조별 예선 내내 부진한 모습을 보이자 16강전부터 둥가가 주장 완장을 두르고 경기에 임한 것이다.(그 후 라이는 간간히 교체 멤버로 출전) 둥가는 미드필드 지역에서 공수 조율을 하며 최전방의 호마리오-베베토에게 적절한 패스를 공급해 주었고, 또한 미드필더인 지뇨와 마지뇨가 마음놓고 공격에 가담할 수 있게끔 공간을 열어주었다. 둥가의 그러한 헌신적인 플레이가 있었기에 호마리오-베베토가 편하게 공격할 수 있었고, 단신 미드필더인 지뇨와 마지뇨는 수비 부담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미국 월드컵에서 브라질이 24년 만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대회 MVP는 스트라이커 호마리오가 수상했지만 음지의 MVP는 둥가였다. 대회 후, 전문가들과 특히 브라질 팬들은 둥가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느 축구인은 둥가를 가리켜 '노동자'라고 표현하며 그의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플레이에 찬사를 보냈다.
94년 미국 월드컵 이후, 둥가는 95년에 일본 J-리그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다. 둥가는 주빌로에 입단해서 2년 뒤인 97년에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고, 동시에 MVP까지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특히 둥가는 주빌로 이와타 동료 선수들 뿐 아니라 J-리그에서 활약하는 일본의 젊은 선수들에게 프로 의식을 고취 시켜주는 등 J-리그 발전에도 크게 기여했다. 그 후 둥가는 98년 프랑스 월드컵에도 주장으로 참가해 팀을 결승전까지 진출시켰고 99년 인터네시오날로 이적한 뒤, 그 해 현역에서 물러났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축구 영웅인 미우라 카즈요시가 산토스 시절 둥가와 1시즌을 같이 보낸 적이 있다고 한다. 카즈는 '둥가와 함께 지낸 1년 간이 자신에게 있어서 최고의 재산이었다'고 말한다. 둥가는 볼란치로서의 뛰어난 능력은 말할 필요도 없고,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강력한 리더쉽과 강인한 정신력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다. 브라질의 적지않은 수의 전문가들은 둥가를 ‘역대 브라질 최고의 캡틴’이라고 말한다.
둥가(DUNGA) 국적: 브라질 본명: 카를로스 카에나토 브레도른 베히 나이: 1963년생 포지션: 미드필더(볼란치) 신장: 177cm 소속팀: 인터나시오날(80/84)-코린티안스(85)-산토스(86)- 바스코 다 가마(87)-이태리 피사(87/88)-피오렌티나(88-92)- 이태리 페스칼라(92/93)-VfB슈투트가르트(93/95)-일본 주빌로 이와타(95/99)-인터나시오날(99)
브라질 대표팀 데뷔: 1983년 A매치 기록: 91시합/6골 월드컵 출전: 90, 94, 98년 대회
주요 타이틀 및 개인 타이틀 1989년 코파아메리카 우승 1994년 월드컵 우승 1997년 J-리그 우승 및 MVP(주빌로 이와타) 1998년 월드컵 준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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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박지성하고 플레이스타일 엄청비슷
박지성도 수미보면 잘할듯 ㅋㄷ 만약 ㅋ
둥가선수 나오며 지성선수가 먼저 생각난다는 ㅋㅋㅋㅋ 둥가 선수 넘 좋아해
없어져도 공을 갈구하는 플레이 ㅋ
박지성이 둥가선수처럼 되고 싶다고 했었죠.ㅋㅋㅋ
알고 있엇죠 .ㅋㅋㅋ
박지성은 스티브 코펠.
전혀...둥가의 카리스마의 깊이는 어쩌고
94 미국 월드컵 브라질 감독은 자갈로 아니에욤?
94 월드컵 감독은 이번 06 월드컵 감독이기도 하셨던 페레이라 감독 맞구요. 94월드컵때 자갈로 감독은 이번 06월드컵 처럼 기술고문으로 계셨죠. 자갈로 감독은 98프랑스 월드컵 감독을 하셨어요. 자갈로 감독은 그 이전에두 70년 대회때... 브라질 감독을 맞으셔서 우승도 하셨죠.^^
역대에서 젤 좋아하는 보란치...자료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