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8일(연중 제20주일) 영적인 음식 달동네에서 사목할 때 일이다. 동네 개신교회 목사님들이 동네 마당에서 성탄 연합 예배를 한다고 초대했다. 다른 신부님과 함께 참석했는데, 연단 귀빈석(?)으로 안내를 받았다. 예배 중 성찬식을 거행한다고 우리 사제들을 불렀다. 다른 신부님이 일어나 연단으로 가려는 것을 말려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것은 기념식이지 성찬례 미사가 아니고, 설령 그걸 알고 함께 했다고 해도 그 자리에 참석한 다른 교우들에게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미사 중 사제에 의해 축성된 빵이 예수님 몸이고, 축성된 포도주가 예수님 피다. 그분 몸과 피의 상징물이 아니다. 빵과 포도주가 상징물에 불과하다면 시간을 내서 온 마음으로 참례할 필요 없다.
그때만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예수님 말씀은 듣기 거북하다. “내가 줄 빵은 세상에 생명을 주는 나의 살이다(요한 6,51).”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요한 6,55).” 아마도 죽는 날까지 빵과 포도주가 어떻게 예수님의 몸과 피가 되는지 알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도 예수님은 말을 바꿔 다르게 표현하지 않으셨다. 그럴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는다. 주님을 직접 뵈면 왜 그렇게 말씀하셨는지 다 알게 될 거다. 이렇게 육적인 눈으로는 알아들을 수 없어 이를 거북해하고, 영적인 눈에는 성체와 성혈이 맛있는 음식이어서 반가워한다. 허기진 사람이 푸진 밥상을, 목마른 이가 맑은 생수를 맞는 거처럼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신다. 예수님이 곧 생명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그분을 통하여 생겨났고 그분 없이 생겨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비치고 있지만 어둠은 그를 깨닫지 못하였다(요한 1,3-5).” 아무리 어두워도 촛불 하나를 이길 수 없는 법인데, 얼마나 어둠 속에 깊이 파묻혀 있길래 그 빛을 발견하지 못할까? 세상사에 얼마나 마음을 빼앗겼으면 예수님 말씀이 마음에 와닿지 않는 걸까.
인도 사람에게서는 카레 냄새가 나고, 한국 사람에게서는 마늘 냄새가 난다. 그리스도인에게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향기가 풍긴다. 그들은 봉사와 희생에 익숙하고, 배려와 양보가 몸에 배어 있다. 한국 사람끼리 모여 있을 때는 마늘 냄새를 못 맡는 거처럼, 성당에 모여 있을 때는 서로 그리스도 향기를 못 맡는다. 그런데 그들이 미사를 마치고 세상 속으로 파견되어 흩어지면 그들 향기가 세속 냄새와 확연히 구별돼서 사람들은 그 향기를 맡는다. 그것은 마른 땅이 비를 맞아 내는 향기이고 아침 이슬을 맞은 숲이 내는 향기이다. 각박한 세상이지만 살만하고 희망을 주는 그런 사람들의 향기다. 생명이 내뿜는 향기다. 그리스도 예수님과 친하면 친할수록 그 향기는 더 짙을 거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요한 6,56-57).”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체를 먹고 산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사는 길이고, 생명이다. 행복하기를 원하면, 영원히 살기를 원하면 그분 곁에 찰싹 달라붙어 있어야 하고 그분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믿는 대로 실천하지 못한다고 비난을 받는다. 그런 질책을 겸허히 받아들이고 동시에 감사한다. 그들은 우리가 예수님과 더 가까워지게 돕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체를 영하며 매일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 얼마나 어떻게 자라는지 잘 모른다. 그냥 그대로 있는 거 같지만 우리는 자란다. 나의 내적인 인간, 영적인 인간은 예수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시며 성장한다. 그래서 늙어서도 언제나 싱싱하고 계속 열매를 맺는다. 이 세상에 나타난 영원한 생명의 모습이다.
예수님, 술에 취하면 방탕해져 후회할 짓을 저지르지만, 성령에 취하면 더 큰 사랑과 선을 실천해서 더 기뻐합니다. 주님이 당신 몸과 피를 내어주신 덕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께 가까이 갈수록 아드님과 더 친해진다고 믿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