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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 남인세력의 명문가(2)...의성 김씨(2)
영남의 명문가는 안동에 몰려 있고 안동에서 유명한 명문가는 진성 이씨, 풍산 류씨, 의성 김씨 집안을 꼽는다. 진성 이씨는 글잘하는 선비가 많고, 풍산 류씨는 벼슬이 많고, 의성 김씨 집안은 대대로 입바른 선비가 많다고 한다.
의성 김씨를 안동의 명문벌족으로 발신시킨 인물은 靑溪 金璡(1500-1580)이다. 청계의 후손에서만 문과급제 24인, 생원·진사 64인, 문집과 유고를 남긴자 239인, 獨立運動으로 건국훈장 수훈자 58인을 배출했다.
청계는 청송에 거주하던 고모부 權幹(김만근의 사위)에게 수학하게 되고 후에 그곳 거주 여흥 민씨 태종의 국구 閔霽의 증손자 閔世卿의 사위가 된다. 민세경의 아우 민세정은 기묘명현으로 학덕이 있었다. 청계는 처삼촌 민세정에게 수학하여 1525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유학하면서 퇴계․하서 등과 교분을 맺었다. 아들 5형제를 퇴계 문하에 수학하게 하여 5형제 모두 소과에 등과하고 그 중 3형제는 문과에 급제하는 등 소위 ‘5자 등과댁’, ‘천전 오룡’ 으로 인구에 회자되게 된다.
또한 청계는 임하일대에 많은 田庄을 마련, 아들과 사위에게 분거하게 하고, 영양 청기농장과 강릉 금광평 개척 사업을 추진하는 등 경세와 이재에 뛰어 났다. 특히 뛰어난 후손에게 文章畓과 文章劍 玉笛 등 가보를 물려주는 제도를 마련하여 학문에 힘쓰게 하니, 과환과 학문이 이어지게 되는 기틀을 마련했다.
義城 金氏 (청계공파) 系圖
義城 金氏 (청계공파) 系圖 璡-克一-澈-是榲-邦烈-呂重-之鐸 (임하 천전) -泰重-聖鐸-樂行 -邦杰 (임동 지례) -女 趙靖 -守一-涌-是柱-薰-學基-世鉀-用河-始弘-虎運 (임하 천전) -是楗-임-泰基-世欽 -履基-昌錫 -益基-世鎬 -是楨-烋 -女 黃汝一 -女 柳城-復起 -明一-淪-是檄-黯-學培 (임하 신덕) -誠一-潗-是樞-煃-世基 -以鈺-淑濂-柱國-光燦-宗壽-鎭華-興洛 -以鏡-夢海-柱勳-驥燦 -以鋿-夢渭-柱亢-九燦-尙壽-鎭國-鴻洛 -是權 -구-啓基-以鍵-友濂-柱震-龍燦-泰壽-鎭洛-達淵 -麟燦-恒壽-鎭國-龍洛 -柱碩-琮燦-驥壽-鎭右 -瑛燦-平壽-鎭懿 -浤 - 是태-수-年基-以鍍-應濂 (서후 검제) -女 金延祖 -女 權泰一 -女 金榮祖 -復一-潪-是振 (예천 구계) -是桶-賓 -女 李逢春 |
천전에 계거한 장자 藥峰 金克一(1522~1585)은 명종때 문과에 급제, 內資寺正을 지냈는데 무남하여 아우 守一의 둘째 澈을 입양한다. 大朴 金澈은 임란창의로 공훈을 세우고 진사시에 합격한다.
大朴의 아들 瓢隱 金是榲(1598-1669)은 병자호란 후 陶淵에 은거하여 臥龍草堂을 짓고 崇禎處士를 자처하였는데, 아들 8형제를 두어 후손이 매우 번창하게 된다.
이중 넷째 지촌 김방걸(1623-1695)은 1660년 문과에 급제하여 弘文館 修撰으로 있을 때 服制문제를 거론한 '己巳疏'를 올려 尤庵 宋時烈을 제주도로 귀양 보냈다. 承旨. 大司成. 大司諫등을 지냈으나 西人이 집권하게 되자, 宋時烈을 탄핵했던 죄로 전라도 동복으로 귀양 가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표은의 증손자 제산 金聖鐸(1684-1747)은 1737년 스승 李玄逸의 억울함을 아뢰는 伸寃疏를 올린 일로 인하여 제주도 旌義현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 光陽으로 옮겨져 배소에서 죽었다.
제산의 아들 구사당 金樂行은 鄕試에 합격했으나, 아버지가 귀양가게 되자 벼슬을 포기하고 귀양지로 따라가 10여 년간 모신 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난 아버지의 시신을 고향으로 옮겨 효자로 이름이 있었다.
그 외 약봉의 후손에서 적암 김태중, 와계 김성흠, 수산 김병종 등 과환과 문학으로 이름을 떨친 인물이 많이 배출되었다. 약봉의 후손은 천전, 지례, 구수, 오대 등지에 계거한다. 포항공대를 설립한 세계적 물리학자 김호길 박사, 한동대총장 김영길 박사 형제도 지촌의 후예로 지례마을 출신이다.
청계의 차자 龜峰 金守一(1528~1583)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일직 구미에 거주하던 만석장자 조효종의 사위가 되는데, 조효종이 무남하여 처향따라 일직 구미로 이거하였다가 다시 임하 천전으로 환거한다.
아들 雲川 金涌(1557-1620)은 퇴계의 손서가 되고 1590년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의병을 규합하여 안동수성장이 되고, 이어 의주 行在所로 왕을 호종하였는데 그 때의 일기『雲川扈從日記』는 보물 484호로 지정되어 있다. 1598년 領議政 柳成龍이 削職되자 함께 배척을 받아 散官. 善山府使 등 外職으로 전전하게 되었다. 광해군 때 太常寺正으로 編修官이 되어 '宣祖實錄' 修撰에 참여했다.
귀봉의 후손에서 문과에 급제한 인물로는 아들 雲川 金涌을 비롯 손자 開湖 金是柱(1575-1656)가 병조좌랑에, 5대손 七灘 金世欽(1649-1720)이 교리에, 月灘 金昌錫(1652-1720)이 정언에, 龜洲 金世鎬(1652-1722)가 병조정랑에 올랐는데, 특히 숙종때 활약한 이들 셋 종형제(김세흠,김창석,김세호)는 의성 김씨 3학사로 불린다.
龜峰의 증손 경와 金烋는 栢巖 金玏의 외손자로 1627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海東文獻錄』을 편찬하여 당시까지 발간된 문헌을 고찰할 수 있는 자료가 되게 했다.
백하 金大洛, 일송 金東三은 한일합방 후 만주로 망명, 李始榮. 李東寧 등과 耕學社를 조직했고, 李儁. 呂準 등과는 扶民團을 결성 하였다. 일송은 1919년 상해임시정부 수립에 참여, 臨政 노동국 총판이 되기도 하고, 또 여러 애국단체들의 통합체인 統義府를 조직, 총장이 되었다. 1925년 正義府를 조직, 행정위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 1929년 日警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고 麻浦형무소에서 복역 중 옥사했다. 1962년 대한민국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이 수여되었다.
귀봉의 후손은 천전, 임하 추월, 서후 태장, 길안 길곡 등지에 산거한다.
청계의 장녀는 전주 류씨 柳城(1533-1560)에게 출가하여 영주 迂川에서 친정따라 무실에 정착하였으나, 남편이 25세에 요절하자, 3년후 부군을 따라 단식하여 자결하니 정려가 내려진다. 청계는 고아가 된 외손자 형제를 키워 숲당 상류 임동면 무실 일대에 터전을 마련하여 주니, 오늘날 무실 류씨 정착의 기반을 만들었다. 임동면 일대의 무실 류씨들은 모두 청계의 외손이 된다.
청계의 3자 雲巖 金明一(1534~1570)은 생원시에 합격하고 임하 신덕으로 분가하여 37세에 요절한다. 운암의 고손자 拙巖 金學逵, 錦翁 金學培 형제가 갈암 이현일, 목재 홍여하와 교류하는 등 이름이 있었다.
청계의 4자 鶴峰 金誠一(1538~1593)은 西厓 柳成龍, 月川 趙穆과 함께 溪門領袖로 退溪 李滉의 道統을 이어받은 嫡傳이다. 일찍이 文科에 급제하여 湖堂에 뽑히기도 했고 大司成, 副提學등에 오르기도 했으며 日本通信副使로서는 王命을 받든 신하로서 체모와 언행이 당당하여 자신의 위엄을 세웠다. 학봉은 안동 권씨 권덕황의 사위가 되어 처향인 검제로 이거하여 정착하게 되고 그 후손은 검제를 비롯 봉화 법전, 소천 등지에 산거한다.
학봉의 후손에서 문과에 급제한 이는 아들 시권을 비롯 6대손 응렴, 8대손 기찬, 10대손 진형, 진우, 진의, 11대손 홍락, 용락, 달연 등이 있다.
와룡 가구에 세거하는 안동 권씨 별장공파의 현조 藏谷 權泰一(형조 참판)과 봉화 오록에 세거하는 풍산 김씨 현조 忘窩 金榮祖(이조 참판)는 학봉의 사위가 되고, 망와의 아우 廣麓 金延祖는 학봉의 손서가 되니, 부인들 입장에서는 친가로는 숙질간이지만 시댁에서는 동서간이 되는 묘한 혼인관계라고 보여진다.
14대까지 이어져 온 학봉 종가 胄孫의 면면을 보면 다음과 같다.
· 金潗 (1558~1631) : 애경당, 세마, 정묘호란 백미 100석 의병활동희사
· 是樞 (1580~1640) : 단곡, 풍뢰헌 당호 게첨, 1621 청참 이이첨소
소수 정묘호란―안동의병장, 병자호란―안동유진장
· 煃 (1602~1685) : 여사헌 건립, 후학양성, 학봉집 발간, 신도비 건립
· 世基 (1622~1686) : 변곡 권창업 문인, 여사헌 면학
· 以鈺 (1646~1683) : 목재 홍여하, 존재 이휘일, 갈암 이현일의 문인
· 淑濂 (1689~1765) : 字 師善
· 柱國 (1710~1771) : 밀암 이재의 손서, 퇴계학 정수수학
· 光燦 (1736~1765) : 大山 이상정의 문인
· 宗壽 (1761~1805) : 이상정의 문인, 생원시, 목사, 형조좌랑, 서예조예
· 鎭華 (1793~1850) : 청송부사, 원주판관, 능주목사, 통정대부 당상관
· 興洛 (1827~1899) : 西山, 嶺南學脈의 儒宗, 建國勳章 愛族章
· 應模 (1853~1929) : 통덕랑
· 龍煥 (1887~1946) : 여헌, 참봉, 파락호, 종가전답 18만평 처분 만주
독립군자금 희사, 내앞협동학교설립 지원, 서후
광동학교 설립, 종택대청서 서후공립보통학교
개교, 獨立運動家, 建國勳章 愛族章
· 時寅 (1917~2008) : 號 소운, 지례출생, 1945 양자입적, 학봉종가 재건
구한말 이후 국권회복을 위해 싸운 지사.열사.의사는 단일성씨 중에서 의성 김씨가 가장 많다.
鶴峯의 11代 胄孫 西山 金興洛(1827-1899)은 韓末의 대학자로서 退溪學의 연원을 이은 당대의 儒宗이다. 나라에서 右副承旨 영해부사 등으로 불렀으나 모두 사양하였고 후학양성에 전념하여 수많은 門人을 배출했다. 또 日帝의 침략에 항거하여 安東 甲午義兵, 乙未義兵, 丙申義兵을 총지휘한 애국지사였으니 뒷날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고 제자들 중에서도 독립유공훈장을 받은 이가 60여명이나 되었다.
일제 때 파락호로 소문난 西山의 손자 여헌 金龍煥(1887-1946)은 문중 전답 18만평을 노름으로 탕진한 것처럼 위장 처분하여 독립군 자금으로 보낸 사실이 최근에 밝혀지게 되어 건국훈장을 받았다.
청계의 5자 남악 金復一(1541~1591)은 1570년 문과에 급제하여 창원부사, 사성, 풍기군수 등을 역임하고 처향인 예천 용문면 구계리로 이거하였다. 증손자 갈천 金賓(1621-1694)은 문과에 급제한 후 내외요직을 두루 거친 명신이다. 외직으로는 경주부사, 광주, 나주목사, 한성부 좌우윤을, 내직으로는 도승지, 예조참판을 비롯 4조의 참판을 지냈고 기로연에도 참여한 의성김씨의 대표적 관료이다.
청계의 차녀는 와룡 주촌에 세거하는 진성 이씨 慶流亭 李演의 손자 鶴川 李逢春에게 출가하였는데, 학천의 큰어머니가 의성 김씨 김예범의 딸이니, 학천 부인의 입장에서 보면 친가로 따지면 고모이나, 시댁으로 보면 시숙모 관계가 된다.
영남 남인의 핵심 중추 세력 의성 김씨 청계공파.... 비록 판서 벼슬 한자리도 못했지만 500년 세월 동안에 “차라리 부서지는 옥이 될 지 언정 구차하게 기왓장으로 남지 않는다”는 정신과 “선비 집안에는 3년에 한 번씩 금부도사가 체포영장을 가지고 찾아와야 한다”는 각오로 살아온 명문 강골 집안이다. 학봉과 운천, 지촌과 금옹, 제산과 서산, 일송과 백하는 모두 청계의 후예들로 입바른 선비, 지사형 인물들이다.
김시온(金是榲) 1598(선조 31, 무술) ~ 1669(현종 10, 기유)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이승(以承). 호는 표은(瓢隱). 극일(克一)의 손자. 진사 철(澈)의 자로 임하(臨河) 천전(川前)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재행(才行)이 경상좌도(慶尙左道)에서 이름 높았으나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으며 비분강개하여 출세를 단념했다. 숭정처사(崇禎處士)로 자처하며 길안(吉安) 도연(陶淵)에 와룡초당(臥龍草堂)을 짓고 은거하여 학문에 힘쓰며 일생을 마쳤다. 제자백가(諸子百家)와 경학(經學)․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했으며, 인근 수령과 관찰사가 문학기덕(文學耆德)으로 조정에 천거했으나 응하지 않앗다. 증손 성탁(聖鐸)으로 인하여 그 절의가 알려져, 1735년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증직되었으며, 길안(吉安) 도연서원(陶淵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표은집(瓢隱集)』이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방걸(金邦杰) 1623(인조 1, 계해) ~ 1695(숙종 21, 을해)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사흥(士興). 호는 지촌(芝村). 극일(克一)의 증손. 숭정처사(崇禎處士) 시온(是榲)의 제4자. 1660년(현종 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에 임명되었다. 1665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예조좌랑(禮曹佐郞)을 거쳐 이듬해 옥구현감(沃溝縣監)에 임명되었다. 1675년 평안도사(平安都事)를 잠시 역임한 후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지냈다. 1689년(숙종 15)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이해 인현왕후 민씨(閔氏)가 폐위되자 간관(諫官)으로서 왕의 과오를 막지 못한 자책감에서 사직, 낙향하였다. 이듬해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1692년 대사간(大司諫), 이듬해 대사성(大司成)․대사간(大司諫)을 역임하였다. 1694년 병조참의(兵曹參議)를 거쳐 참지(參知)에 있을 때 갑술옥사(甲戌獄事)로 서인(西人)에 득세하자 지난날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을 탄핵했던 죄목으로 인하여 전라도(全羅道) 동복현(同福縣)으로 귀양가서 이듬해 그 곳 배소(配所)에서 73세로 세상을 떠났다. 저서 :『芝村集』이 있다. ■참고문헌 : 肅宗實錄․國朝榜目․嶺南人物考
김성탁(金聖鐸) 1684(숙종 10, 갑자) ~ 1747(영조 23, 정묘)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진백(振伯). 호는 제산(霽山). 극일(克一)의 후손. 통덕랑(通德郞) 태중(泰重)의 자로 영양(英陽) 청기(靑杞)에서 태어났다. 김태중(金台重)․이현일(李玄逸)․이재(李栽)의 문인으로 1711년(숙종 37) 진사시에 합격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유승현(柳升鉉)․권만(權萬) 등과 창의하여 토역문(討逆文)을 지어 각지 유문(儒門)에 보내 의병 가담을 적극 권하였다. 그 공로로 안핵사(按覈使)의 천거로 참봉이 되었으며, 감진어사(監賑御史) 이종백(李宗白)의 추천에 의하여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사복시주부(司僕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였고,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의 도(道)를 영조(英祖)에게 건의하였다. 1735년(영조 11)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교리(校理) 등을 지냈다. 1737년 스승 이현일(李玄逸)의 억울함을 아뢰는 신원소(伸寃疏)를 올린 일로 인하여 제주도 정의(旌義)에 유배되었다가, 이듬해 전라도 광양(光陽)으로 옮겨져 배소에서 죽었다. 문장가로 알려졌으며,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임하(臨河) 금양서원(錦陽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문집에 『제산집(霽山集)』(16권)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
김용(金涌) 1557(명종 12, 정사) ~ 1620(광해군 12, 경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도원(道源). 호는 운천(雲川). 수일(守一)의 장자. 1590년(선조 23) 증광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로 등용되어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역임 중 신병으로 사임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안동수성장(安東守城將)으로 향군(鄕軍)을 일으켜 고장을 지키다가 그해 가을에 왕이 파천해 있는 의주(義州)로 올라가서 예문관의 검열(檢閱)․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했다. 환도 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사간(司諫)․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을 역임하며 과연 학봉(鶴峯)의 조카답다는 칭찬을 들었다. 1594년 이조정랑(吏曹正郞)으로 인사를 처리함에 극히 공정했으며,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에 올라 세자시강원보덕(世子侍講院輔德)을 겸했다. 1597년 정유왜란(丁酉倭亂)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從事官)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독운어사(督運御史)를 거쳐 사성(司成)이 되었으나,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모함을 받아 삭직당하자 함께 북인(北人)의 배척을 받고 선산부사(善山府使)․예천군수(醴泉郡守) 등 외직(外職)으로 전전하다가, 1609년(광해군 1) 태상시정(太常寺正)으로 편수관(編修官)이 되어 『선조실록(宣祖實錄)』 수찬(修撰)에 참여하였다. 이 공으로 통정대부에 올라 병조참의(兵曹參議)를 지냈고, 1615년(광해 7) 여주목사(驪州牧使)에 이르러 병을 칭하여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임하(臨河) 임호서원(臨湖書院 : 舊 德峯書院) 제향되고, 저서에 『운천집(雲川集)』․『운천호종일기(雲川扈從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宣祖實錄․國朝人物考․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시주(金是柱) 1575(선조 8, 을해) ~ 1656(효종 7, 병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이립(而立). 호는 개호(開湖). 수일(守一)의 손자. 목사(牧使) 용(涌) 의 자. 1609년(광해군 1)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하고, 1513년 중광문과에 급제하였다. 관은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병조좌랑(兵曹佐郞)을 역임했다. ■참고문헌 : 國朝榜目․安東鄕土誌(宋志香)
김세흠(金世欽) 1649(인조 27, 기축) ~ 1720(숙종 46, 경자)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천계(天啓). 호는 칠탄(七灘). 수일(守一)의 후손. 태기(泰基)의 자. 이현일(李玄逸)의 문인. 1673년(현종 14) 진사시에 합격하고, 1687년(숙종 13)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홍문관부수찬(弘文館副修撰)․사헌부지평 (司憲府持平) 등을 역임하고, 1698년 홍문관교리(弘文館郊理)가 되어 붕당(朋黨)․기강(紀綱)․기근(飢饉) 등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다. 1707년 다시 수찬(修撰)이 되어 상소가 지나쳐 장벌(杖罰)을 받아 죽게 된 이잠(李潛)의 구명을 간하다 삭탈관직되어 호남(湖南) 흥양(興陽)에 유배되었다가 배소(配所)를 진보(眞寶)로 옮겼다. 1712년 유배에서 풀린 후 벼슬을 단념하고 향리로 돌아와 독서로 여생을 마쳤다. ‘의성김씨 삼학사(義城金氏 三學士)’의 한 사람으로 필법(筆法)도 뛰어났다. ■참고문헌 : 嶺南人物考․國朝榜目
김창석(金昌錫) 1652(효종 3, 임진) ~ 1720(숙종 46, 경자)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천여(天與). 호는 월탄(月灘)․ 몽선도객(夢仙道客). 용(涌)의 현손. 생원(生員) 이기(履基)의 자. 1687년(숙종 13) 진사시에 합격하고, 1690년 문과에 급제했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제원찰방(濟原察訪)을 거쳐, 1692년 성균관박사(成均館博士)․전적(典籍)․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등을 역임했다. 이 때는 당쟁으로 시국이 어지러운 때라 벼슬을 버리고 임하(臨河) 망천(輞川)에 은거하여 10여 년을 보냈다. 1707년 다시 관직에 나아가 전라도사(全羅都事)․충청도사(忠淸都事)․강원도사(江原都事)를 역임했다. 시문, 글씨, 그림이 모두 뛰어나 시(詩)․서(書)․화(畵) 삼절(三絶)로 일컬어졌고, 특히 글씨는 장욱(長旭)․조송설(趙松雪)의 묘경(妙境)에 이르렀다고 하나 없어지고, 약간의 유고(遺稿)가 『장고세고(長皐世稿)』에 전한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義城金氏譜
김세호(金世鎬) 1652(효종 3, 임진) ~ 1722(경종 2, 임인)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경백(京伯). 호는 구주(龜洲). 수일(守一)의 후손. 익기(益基)의 자. 1681년(숙종 7) 생원시 합격하고, 1690년(숙종 16) 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藝文舘檢閱)․봉교(奉敎)․경상좌도암행어사(慶尙左道暗行御史)를 거쳐 사간원대사간(司諫院大司諫)․병조정랑(兵曹正郞)을 역임했으며, 종형(從兄) 세흠(世欽)․창석(昌錫) 등과 동시에 이름을 날려 ‘의성 김씨 삼학사(義城金氏三學士)’로 칭해졌다. 경사(經史) 및 음양(陰陽)․복서(卜筮)에 정통했으며, 숙종이 경연 때 주역의 뜻을 묻자 아무도 해석하지 못하는데 그가 정연하게 풀이했다. 문장은 격조가 높고 건실하여, 당대의 명사들이 모두 ‘금석문(金石文)의 일인(一人)’이라고 추중(推重)했다. 저서에 『장고세고(長皐世稿)』가 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安東鄕土誌(宋志香)
김성일(金誠一) 1538(중종 33, 무술) ~ 1593(선조 26, 계사)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청계(靑溪) 진(璡)의 제4자. 임하(臨河) 천전(川前)에서 출생했다. 이황(李滉)의 문인. 1564년 진사시를 합격하고, 1567년 증광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대교(待敎)․봉교(奉敎)를 역임하고, 1572년(선조 5)에 사육신(死六臣) 복관 상소를 올렸다. 1573년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병조좌랑(兵曹佐郞)․이조좌랑(吏曹佐郞) 등의 요직을 거치고, 1574년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1577년 종계변무(宗系辨誣)를 청하는 사행(使行)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1579년 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에 되어 시사(時事)를 과감하게 비판하고 종실의 비리를 탄핵하여 ‘대궐의 호랑이(殿上虎)’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또 함경도순무어사(咸鏡道巡撫御使)와 나주목사(羅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590년 통신부사(通信副使)가 되어 정사(正使) 황윤길(黃允吉)과 일본에 건너가 실정을 살피고 귀국했다. 이 때 일본 유학의 원조(元祖)인 등원성와(藤原惺窩)에게 퇴계학(退溪學)의 진수를 처음 가르쳤다. 귀국 후의 발언 때문에 안방준(安邦俊) 등에 의해 왜란을 불러온 장본인으로 매도되었고 파직되었으나, 왜란 초 경상도 일대가 왜군에 의하여 유린되자 경상도초유사(慶尙道招諭使)에 임명되어 곽재우(郭再祐)․김면(金沔)․정인홍(鄭仁弘) 등의 의병 활동을 도왔다. 또 각지를 순행하면서 의병을 모집하는 격문을 뿌리고 군량미를 모집하기도 하는 등 왜란 초기에 피폐해진 경상도 지역의 행정을 바로 세우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고제(高弟)로 정치적으로는 동인(東人)에 속하였다. 저서에 『해사록(海槎錄)』『상례고증(喪禮考證)』『조선연혁풍속고이(朝鮮沿革風俗考異)』등을 남겼고, 후손들에 의하여 문집 『학봉집』이 간행되었다. 안동의 호계서원(虎溪書院)과 임천서원(臨川書院)에 제향었다. 중년(中年)에 처향(妻鄕)을 따라 서후(西後) 금계(金溪)로 이거했다. ■참고문헌 : 國朝人物考․海東名臣錄․安東鄕校誌․陶山及門諸賢錄
김시추(金是樞) 1580(선조 13, 경진) ~ 1640(인조 18, 경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의성(義城). 자는 자첨(子瞻). 호는 단곡(端谷). 성일(誠一)의 손자. 집(潗)의 자. 유성룡(柳成龍)․정구(鄭逑)의 문인. 1607(선조 40) 생원시에 합격하고, 1621년(광해군 13) 영남 유생들이 권신(權臣) 이이첨(李爾瞻)을 극형에 처하라는 상소를 올릴 때 소두(疏頭)로 추대되었다. 1524년 유일(遺逸)로 안기도찰방(安奇道察訪)으로 천거되었고,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활약하였으며, 1630년에는 의금부경력(義禁府經歷)을 역임하고, 병자호란 때는 유진장(留鎭將)으로 활약하였다. 문집에 『단곡집(端谷集)』이 있다. ■참고문헌 : 安東鄕土誌(宋志香)․안동금계마을(안동대학교 안동문화연구소)
김빈(金빈:賓+灬) 1621(광해군 13, 신유) ~ 1694(숙종 20, 갑술)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의성(義城). 자는 빈여(賓如). 호는 갈천(葛川). 복일(復一)의 증손자. 시진(是桭)의 자로 숙부 시통(是桶)에게 출계. 김응조(金應祖)의 문인. 1657년(효종 8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 해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예조좌랑(禮曹佐郞)․문경현감(聞慶縣監)등을 역임했다. 이어 병조좌랑(兵曹佐郞)․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사간원사간(司諫院司諫)․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 등을 역임했다. 1676년 밀양부사(密陽府使)․경주부윤(慶州府尹)을 제수받고, 1680년 승정원좌․우부승지(承政院左右副承旨)를 역임한 후 귀향하여, 8년간을 향리에 있었다. 뒤에 다시 관직에 나가 남원부사(南原府使)․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지내며, 1691년에는 기로연(耆老宴)에 참여했다. 이어 도승지(都承旨)․한성부윤(漢城府尹)․예조참판(禮曹參判) 등을 역임하다가 당쟁이 극심하여 체직(遞職) 귀향했다. 항상 공손하고 청렴했으며 검소하면서도 어려운 일가를 도움에는 아낌이 없었고, 늘 주자서(朱子書)를 즐겨 읽었다. 만년에 낙향하여 예천(醴泉) 갈평(葛坪)에 정사(精舍)를 지어 거쳐하면서 스스로 갈천산인(葛川山人)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 醴泉郡誌․安東鄕土誌(宋志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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