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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도.
예나 지금이나
영흥도 가는 길은
바다를 세번 건넌다.
12.4km 시화방조제도로.,좌측 시화호, 우측 서해.
'대부도 ~ 선재도' 바다 위로 영흥대교를 건널 때.
'선재도 ~ 영흥도' 바다 위로 선재대교를 건너갈 때
그전까지는
뭍에서 배 타고
바다 건너 다닌 섬.
1973년 여름에
인천에서 배를 타고
대부도에 놀러 들어 갔다가
태풍 때문에 해수욕도 못하고
뱃길이 끊겨 며칠, 갇힌 적이 있다.
그당시 원래 목적지는
덕적도 서포리해수욕장 또는
용유도 을왕리해수욕장이었으나
배표를 구할 수 없어 목적지를 바꾼 곳.
대부도는 들어갈 때보다
나올 때가 힘든 섬이었다.
그 옛추억이 아직도 새롭다.
'시화방조제도로~대부도~
선재도 ~ 영흥도.,가는 길.'
'선재도 ~ 영흥도'
영흥수도(靈興水道) 물길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조류가 급해
옛부터 선박 전복사고가 잦았던 해협.
그리하여, 수도권에서
가까우면서도 멀었던 섬.
지금은 육지와 연육교로 이어진.,영흥도.
인천에서 남서쪽 32km 거리에 있는 영흥도.
영흥도는 옹진군에서 백령도 다음으로.,큰 섬.
영흥도는 흥도, 선재도, 측도.,유인도서 4개와
외항도, 중도, 자암도 등 18개 무인도서를 포함해
서해 연근해에 광활하게 펼쳐진.,수산어업 전진기지.
과거에, 연평군도 덕적군도 등이 어업 전진기지.
지금은, 옛 어업 기지들을 모두 품고 있는.,영흥도.
지리 상으로 연평도, 덕적도 보다 유리한 위치인 때문.
수도권에서 가까워
'수산어업 전진기지'
'영흥군도'라 불러도
전혀 흠잡을 것이 없다.
망망한 서해바다 최전방에
연육교로 이어진.,전진 기지.
현재, 뭍이나 다름 없는 영흥도.
머지 않은 미래에
덕적도, 백령도까지도
연육교로 이어질.,교두보.
'영흥도~ 송도신도시~영종도' 구간.
연육교, 지하터널, 해상순환도로 등으로
이어진다면, 미래에 삼각 벨트해역.,포스트.
위치 상으로
무한한 잠재적인
가치를 지닌.,영흥도.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에 위치한.,영흥도(靈興島).
면적은 23.46㎢에 해안선길이 42.2km, 최고봉 127.7m.
인구수는 1999년을 기준으로 1,840명의 주민이 거주 중.
옛날 중국에서 오던 배가 풍랑을 만나 암초에 부딪혀
파손되어 침몰 직전에 있었는데, 거북이 한마리가 나타나
구멍을 막아 육지로 인도해 신령이 도와준 섬이라 하여 영흥도.
그 배는 이곳에서 밑구멍을 수선한 후에
목적지 제물포 항으로 무사히 귀환했단다.
이 전설에 의하면,
영흥도는 옛날부터
중국과 한반도를 잇는
고대 항로 상 중요한 위치.
항로 상에서 배를 수선했던 섬.
'조선시대 전설일까?'
'고려시대 전설일까?'
'삼국시대 전설일까?'
고려 때, 영흥도는 삼별초의 거점으로
몽고에 70일 동안 대항한 항전처였던 곳.
'선재도~ 영흥대교' 연육교가 2001년 11월 15일 개통.
영흥면 외리에 수도권지역 전기공급을 위한 화력 발전소.
영흥도는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거주하기 시작하였다.
삼국시대 백제의 영토에 속하였으며,
이후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로 넘어갔다.
고려 현종 9년(1018년) 수주 속군으로 되었다가 인주로 편입.
조선시대 남양도호부 관할구역을 두었다가 1914년 부천군 관할.
1973년 7월 1일 부천군 해체 이후 옹진군 관할
1995년 강화군, 김포군 검단면과 함께 인천광역시.
영흥도에 전해오는.,두 전설.
'탑골우물' & '비운의 김장사.'
1. '탑골 우물' - 영흥면 내4리 입구.,우물.
주민들이 탑을 허물어 우물을 만들었다는 곳.
어느날, 절에 빈대가 끓어 사람이 살 수가 없어
절을 헐어 버렸으며, 그후로 탑만 남아 있었는데
마을 사람들이 탑을 헐어 우물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 연유로 이 마을을 '탑골'이라 부르며
우물 역시, '탑골우물'이라 부른다고 전한다.
2. '비운의 김장사' - 영흥도에서 장사가 태어났는데,
부모가 벌을 받을까봐, 아이의 두 팔을 잘랐다고 하며,
그 아이가 성장한 훗날에 나루터 사공이 되었다는 이야기.
영흥면 외리 나주김씨 가문에 힘센.,아기 장사.
당시, 장사가 나면 힘을 믿고 나라에 반역할 것이 염려.
이를 미리 없애지 않으면 부모들까지 벌을 받는 까닭에
부모들은 그 후환이 두려워 '아이를 미리 죽였다.'는 풍습.
김 아기장사의 아버지는 아들을 차마 죽일 수 없어
양팔 겨드랑을 도려내 병신을 만들었는데 그 아이는
불구의 몸으로 성장해 부모가 원망스럽고 미워져 가출.
김 아기장사는 그후 정처없이 방황하다가
충청도 아산으로 흘러들어 그곳 사공이 되어
오가는 행인을 태워 건내주며 일생을 마쳤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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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내리,
영흥도에 있는 어항.,'진두선착장'
지방어항으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시설관리자는 옹진군수이다.
'비운의 김장사'.,전설의 고향.
영흥도~선재도' 사이
'영흥수도(靈興水道)'는
수심이 깊고 조류가 빠르다.
전국 어디나
'수도(水道)'는
위험한 해역이다.
맹골수도(孟骨水道)는
전남 진도군 조도면 맹골도와
거차도 사이에 있는 수도(水道)로서
2014년 4월 16일 세월호가 침몰한 해역.
해마다 연초에
선재도 당(堂)고개에서
풍농풍어를 기원하는 굿을 한다.
영흥대교 & 영흥도 진두선착장.
진두선착장.,시간낚시배 & 관광 요트.
한강 이남 수도권 시민들이 즐겨 찾는다.
'영종도 ~ 덕적군도 ~영종도'.,진두선착장.
'영흥수도(靈興水道)'가 있는
영흥도 일대 해역은 조류가 빨라
생선을 회 치면.,육질이 '쫀득쫀득'.
전국 어디나
조류가 급한 곳은
생선회 맛이 다르다.
선재도에서 영흥대교를 건너면
바로 아래에 진두항(진두선착장).
영흥도 관광명소는 다음과 같다.
영흥도전적비
통일사
영흥대교
서어나무군락지
십리포해수욕장
장경리해수욕장
진두선착장에서.,
영흥도 섬일주 보트.
女心도 설레게 하는 뱃길.
웅진군에 속한 섬 중에서
여객선을 이용하지 않고도
유일하게 승용차로 갈 수 있어
가정주부가 즐겨찾는.,진두선착장.
진두선착장에 위치한
'영흥수협수산물직판장.'
시장도 볼겸,
회맛도 즐길 겸,
바다도 구경할 겸,
겸사 겸사 찾는 명소.
'선재도 ~대부도' 사이는
바다가 얕고, 간석지 발달.
해안에는 염전이 분포한다.
선재도는 서쪽 영흥도와 영흥대교를 통해 연결.
동쪽의 대부도와는 선재대교를 통해 연륙되었다.
영흥대교는 2001년 11월 개통(길이 1,250m, 너비 9.5m)
선재대교는 2000년 11월 개통(길이 550m, 너비: 13.3m).
.....................선재도(仙才島).......................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선재리.,선재도(仙才島)
동경 126°32′, 북위 37°14′, 인천에서 남서쪽 13㎞ 지점.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 하여 선재도.
선재도는 소우도(小牛島 또는 '독우도(犢牛島).
조선 후기부터 '선재도'로 개칭되었다고 전한다.
'소우' '독우' 지명 유래는 송아지를 뜻하는 것.
‘영흥도를 어미소처럼 따라다니는.,송아지 섬.’
조선시대 '국영소목장'이었음을 뜻하는 지명이다.
'영흥도 & 선재도'는
조선시대.,국영소목장.
젖소가 없었던 조선시대.
소젖을 먹을 수 있었던 곳.
'송아지 섬' 선재도(仙才島).
오늘날, 우유는 누구나 마실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 어린 왕세자를 키우던 유아식.
조선시대 왕도 아플때 원기회복을 위한 보양식.
그것도 찹쌀을 넣어
타락죽을 만들어 섭취.
조선시대 군왕에 못지 않은
호사를 누린 이가 있었으리라.
조선시대 부호들이 많았던.,대부도.
대부도에서
영흥로로 가는
길목에 있는 선재도.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던 곳이라
하여, 명명된.,선재도.
선재도 토지 현황은 논 0.27㎢, 밭 0.33㎢, 임야 1.06㎢
쌀· 콩· 고구마· 배추· 무· 마늘· 시금치·고추·땅콩 등 산지.
근해에서 낙지· 새우· 조개 등 어획, 굴양식업도 성행한다.
선재도 교육기관으로는.,영흥초등학교 선재분교장이 있다.
1월 평균기온 -2.1℃,
8월 평균기온은 25.2℃,
연강수량은 1,234㎜이다.
선재도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섬으로 100m 이하 평지.
2010년 기준인구는 928명(남 489명, 여 439명), 432세대.
연륙교 건설후 인구가 증가하고 관광객도 많이 찾고 있다.
영흥도(靈興島)와 대부도(大阜島) 사이에 위치.
선재도 면적은 2.47㎢이고, 해안선 길이는 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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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대교 건너 영흥도에 진입하여
왼쪽길로 들어가면 영흥면사무소 방향이고
방파제 도로로 좀 더 달리면.,영흥도 해군전적비.
인천 옹진군 영흥면 내리 산314번지
1백 계단 동산 위에 하늘높이 솟은.,기념탑과
바다를 향해 용감히 돌진하려는.,해군병사 동상.
맥아더장군 인천상륙작전 해군전적비가 세워진 곳.
북한의 남침으로 남한이 풍전등화 같던 1950년 9월 15일.
국군과 유엔군은 세계 전사에 빛나는 인천상륙작전을 성공.
영흥도 주민으로 조직된 대한청년단 방위대원도 전투에 참여.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은
영흥면 서북청년회(西北靑年會).
미군정 당시 조직된 극우 반공 단체.
백골이 되서라도 고향땅을 되찾겠다.
'철모에 백골을 그려 넣어.,"백골부대".
천하무적.,"벼락부대" "호림(虎林)부대"
이 작전 기간 중 9월 13일 북한의 대대급 병력과 맞서
청년방위 대원들은 703함대의 필사적인 함포 지원 아래
인천상륙작전을 승리로 이끄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이 때 순국한 해군 영흥지구 전투전사자와
영흥면 대한청년단 방위대원 14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이곳에 해군전적비를 건립한 것.
..................'비문' 줄거리.................
한국군과 유엔군은 북괴의 불법남침으로
조국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던 1950년 9월 15일
세기에 빛나는 인천 상륙작전을 성공하여 전세 역전.
이로써 수도 서울을 탈환하고 38선을 돌파하여
압록강까지 승승장구 북진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 인천 상륙작전에 앞서 한국 해군 기동함대
701, 702, 704, 513, 301, 307, 309, 310, 313함의
승조장병으로 편성한 육전대가 함포 지원 하에서
적전 상륙작전을 감행해 동년 8월 18일 덕적도를,
8월 20일 영흥도를 차례로 탈환하고, 8월 23일부터
LST에 탑제하고 있던 해군 이동기지 육전대가 상륙.
영흥도 청년방위대와 함께 영흥도를 사수함으로써,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거점을 확보하였고
인천상륙작전 기동부대의 안전항행을 보장 하였다.
동년 8월 24일 영흥도를 거점으로
작전을 개시한 한국 해군첩보부대는
9월1일 미 극동군에서 파견한 첩보팀과
긴밀한 협조 하에 상륙목표 해안을 비롯한
인천, 서울, 수원 등 적이 장악 중인 지역에서
첩보활동 전개로 상륙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제공.
이 작전기간 중 9월13일 북괴군은
대대급 병력을 영흥도에 긴급 투입.
북고군이 일시적으로 영종도를 점령.
그러나, 우리 해군장병과 청년방위대원들.
703함의 근접 함포 지원 아래 적을 격퇴한 것.
여기에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인 공헌을 한
해군장병 및 현지 청년방위대의 빛나는 무훈과
삼화한 영령들의 명복을 기원하면서 비를 세운다.
..........1992년 12월 2일 해군참모총장................
건립일자 - 1992년 12월 5일
부지면적 - 390평(1,289㎡)
시설물 - 화강암탑(높이 1.35m) .
영흥도는 서쪽에 최고봉 양로봉(養老峰:133m).
섬 중앙에 국사봉(128m)을 제외하면.,대부분 평지.
국사봉 북쪽 산자락에 비구니 사찰 '통일사'가 있다.
통일사는 섬 북서쪽 '장경리해수욕장' 인근에 위치.
'장경리해수욕장과 십리포해수욕장' 갈림길에 위치.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은
6.25 당시 인천상륙작전을 위한
정보수집 캠프를 설치했던 곳이다.
통일사는 6.25 당시 전사한 남편의 넋을 기리기 위해
비구니가 된 최선규(崔善奎) 스님이 1983년 창건하였다.
건평 20평 비구니 사찰로 석가모니불을 주불로 하고 있다.
남편인 서형석씨가 1951.1.4 후퇴시 학도병(하사관)으로
서부전선에서 1개소대 병력으로 중공군 대부대와 싸우다가
전우들이 모두 전사하자 자신도 장렬하게 자결하였다고 한다.
그후, 미망인이 된 스님이 그 한을 풀기위해
이곳 국사봉 아래 사찰을 짓고 조국통일을 염원.
영흥도 이곳 '통일사약수터'에는
고려 말, 슬픈 비사(秘史)가 전한다.
고려 말, 이성계 세력에 몰려 영흥도로 표류하여
은거하던 왕족 익령군 '왕기'가 국사봉을 지나다가
작은 옹달샘을 보고 떠서 먹으니 물맛이 매우 좋아
주민들을 동원해 우물을 팠으나 물줄기가 끊어지고
콩가루 같은 흙이 나와 겁이 나서 다시 묻고 작업 중단.
'왕기'는 이 샘물이 범상치 않음을 알고
매일 이 물에 목욕재개한 후 국사봉에 올라
북쪽 왕도를 바라보며 환향하기를 기원했단다.
이후, '그 후손들이 화를 피하려 성을 바꾸어
옥(玉)씨와 전(全)씨로 개명해 살았다.'고 한다.
조선 개국 초, 고려왕조 왕씨를
"살기 좋은 곳으로 보내준다."면서
배에 구멍을 뚫어.,강화 앞바다 수장.
그당시, 극적으로 생존한 왕씨들이
영흥도에 들어와 몰래 숨어산 것일까?
아니면, 고려의 부활을 꿈꾸었던 곳일까?
'이성계' 고향.,함경도 영흥(永興).
영종도 지명은.,영묘할 靈, 일어날 興.
'한글 지명이 같은 것은 우연의 일치일까?'
'영흥도는 고려가 망하자
고려 왕족의 후예인 왕씨가
영흥도에 피신해 사는 동안에
섬 한가운데 있는 국사봉에 올라
옛 고려를 생각하며 한양을 향하여
고려가 다시 흥(興)할 것을 신령께 기원.'
'영흥도(靈興島)' 지명의 유래.'
고려 말, 정국이 불안할 때 왕실의 실권이 없어지며
목숨을 부지하기가 어려울 것을 짐작한 익령군 왕기는
개경을 탈출하여 배를 타고 떠다가 도달한 곳이.,영흥도.
항로도 모르는데다가 파도가 심하여
난생 처음으로 고생하며 구사일생으로
이 섬에 닿은 후에 매일 국사봉 정상에 올라
북쪽 송악산을 바라보며 고려의 무사안녕을 기원.
그러나, 이와 같이 기원도 보람 없이
고려는 3년만에 결국 망하고 말았다.
국사봉은 지금도 옛 송도를 바라보며
익령군 왕기의 한 많은 사연을 전해준다.
나라 國, 생각 思, 봉우리 峰.,국사봉(國思峰)
구전에 의하면 공양왕 후손 '익령군'이
조선 개국 초, 이성계의 탄압을 피해 정착.
임씨, 채씨가 함께 살았다는데, 그래서인지
현재, '평택 임씨'가 영흥도에 많이 살고 있다.
통일사 작은 법당 뒤에는 옻나무 군락지가 있는데
옛부터 옻나무 밑에서 나오는 물은 만병통치라 하여
귀히 여겼고 아무리 가물어도 물이 마르는 적이 없단다.
이 약수터는 최근에도 물맛이 좋고
소화가 잘된다 하여 찾는 이들이 많아
보존될 수 있도록 샘터를 정비한 약수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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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은 '고려시대 국사를 배출했다.'는 곳.
사실은 전국 어디나 고려에 충절을 바친 충신들과
고려 유생들이 조선 개국 초, 벼슬까지 버리고.,은둔.
두문불출(杜門不出) 고사숙어에는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의 역사가 함축.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킨 뒤
고려의 유신 72명이 새 왕조를 거부.
경기도 개풍군 두문동에 깊숙이 들어가
죽도록 나오지 않은데서 유래된.,두문불출.
고려의 유신 72명은
조선 개국공신들로부터
관직 등용의 회유에도 거부.
결국, 두문동에서 불타 죽었다.
두문동에 불을 질렀어도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던 탓.
.
고려의 재기를 꿈꾸며
고려에 충절을 바친 곳을
오늘날, 국망봉이라 부른다.
고려의 충신 또는 유생들이
고려의 도읍 개경을 바라보며
고려의 패망을 가슴 아파 한 곳.
이곳은 국사봉(國師峰)이라고도 한다.
고려 때 왕사를 배출한 사찰이 있는 산.
통일사는 고려시대에 '큰 절터'였으리라.
원래, 영흥도는 백제 영역.
이후에 고구려와 신라의 영토.
삼국시대 군사요충지이자 격전지.
'삼국시대에도 사찰이 있었으리라.'
'통일신라 사찰은 오늘날 군부대 역활.'
'이곳은 서해 항로 감시 파수대였던걸까?'
통일사 뒷산 국사봉(128m)은 영흥도 중앙에 위치.
영흥도는 저평한 지형, 해안에는 간석지가 넓게 발달.
곳곳에 사빈해안이 나타나며 겨울에 눈이 많아 내린다.
연강설량 91㎜.
1월평균기온 -3℃,
8월 평균기온 25.5℃,
연강수량 1,273㎜,
국사봉에 오르면, 송도신도시, 시화호,
인천항에서 출입하는 외항선과 낚시배들.
야간에는 인천광역시 야경이 장관을 이룬다.
인천여객터미날에서 여객선으로 30분 거리.
승용차를 배에 싣고 영흥도로 들어올 수 있다.
경지면적.,논 3.02㎢, 밭 2.07㎢, 임야 16.23㎢.
.
1990년대 초반까지는
주민 80%가 농업에 종사.
어업의 비율은 낮은 편이었으나, 육지와 연륙된 이후
사업체수는 424개 종사자 숫자도 1,705명에 달할 정도.
산업구조가 바뀌었으며, 농업 인구도 897명에 이른다.
농산물로는 쌀ㆍ보리ㆍ콩ㆍ땅콩ㆍ마늘ㆍ고추가 생산
근해에서는 낙지ㆍ숭어 등이 어획된다. 굴, 바지락, 김,
대합, 양식업이 활발하고, 제염업도 일부 행해지고 있다.
조선시대 남양군에 속하였으나,
1914년 부천군에 편입되었으며,
1973년부천군의 폐지로 옹진군에
1995년 인천광역시에 속하게 되었다.
영흥면(영흥도)은 3개 유인도와
19개 무인도서로 구성되어 있다.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32km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
섬 동쪽에 육지와 연결된.,대부도.
섬 서쪽에는 자월도(紫月島)가 있다.
섬 북쪽에는 수백년된 서어나무숲 900평.
약 4km왕모래와 자갈이 섞인 해안.
약 1km 모래밭 해안이라.,십리포해수욕장.
간조때 뻘에서 소라 고둥 바지락 등이 잡힌다.
십리포해수욕장 방풍림.
역활을 하는.,서어나무숲.
서어나무숲을 지나서
해수욕장에서 국사봉으로
산책하듯 오르는 것도 좋다.
자전거를 타고 오를 수도 있다.
영흥도 국사봉에서 바라본,
'선대도 남쪽'에 있는.,목섬.
'바다갈라짐' 현상이 있는 곳.
영흥도 북서쪽에 위치한.,장경리해수욕장.
영흥도 장경리해수욕장은 백사장이 아늑하다.
동해처럼 파란 빛은 아니지만, 편안한 느낌이다.
영흥도를 찾는 자전거 라이더들이 즐겨 찾는 코스.
승용차에 자전거를 싣고
영흥도로 들어와 섬 일주.
영흥도 용담리 해수욕장.
가족동반 캠핑장소로 적합.
영흥대교에서 서남쪽으로 4m.,해수욕장.
옛날에 용이 승천한 못이 있다고 하여.,용담.
이곳은 물맛이 전국적으로 유명하기도 한 샘터.
용담리 우물에서는 장사가 나왔다고 전해온다.
이 장사는 겨드랑에 날개 죽지가 난 장사였단다.
옛날에 영흥도에서 장사가 나오면 친척까지 멸족.
마을 주민들은 크게 겁이 나서
아기장사의 날개 죽지를 자르고
큰 돌로 찍어 죽였다고 전해온다.
이 우물에서 태어난 아기 장사가 죽고난 다음해에
용마가 세상에 나와 보니 아기장사는 이미 죽은 후.
용마는 크게 슬퍼하면서 용담을 몇 번씩 돌아보고는
양로봉 무선대 바위에서 울부짖다가 사라졌다고 한다.
이때 이 용마가 뛰어다니던 발자국들과
말웅덩이 자국이 남아있다 하여 용마바위.
조선 17대 효종은 강화도에 키운 어마를
벌대총 또는 "벌대추니" 등으로 불렀단다.
매어 기르지 않고 제맘대로 쏘다닌 방목말.
"벌떼추니" "벌떼총이" 하면
'짤짤 거리며 돌아다니는 계집애'
영흥도에도 석성(石城)을 제맘대로
넘어 다니며 돌아다니는 말이 있었는데
우리를 나와도 곡식을 함부로 먹지 않았다.
이곳에서도 방목한 말을 "벌대추니"라 불렀다.
고기가 귀한 때라 나와 다니는 "벌떼추니" 말은
마을 주민들이 몰래 잡아먹기도 했다고 전해온다.
나라님이 알면,
극형을 면치 못할 일.
"벌대춘이 먹이를 안 먹은 지가 사흘이요,
일어나지 못한지가 사흘." 라고 마부가 보고.
이때 보고 받는 관리 측은
이를 궁굼히 여겨 되물었다.
"사흘이나 먹지 않고 사흘이나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으니 죽었다는 말이냐?"
"네, 그런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먼저 보고했던 마부 측은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고, 보고받은 관리가
먼저 죽었다는 사실을 전해, 처음 알렸던 마부는
'죽음의 형벌을 겨우 모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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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 70일간 삼별초 거점.,영흥도.
용담리는 옛부터 장사가 많이 배출된 고장.
용담리는 조선시대 국영말목장터였던 것 같다.
영흥도 전설을 종합 분석해 보면,
조선 개국 초, 핍박을 많이 받은듯..
용담리 해수욕장은 새로 개발된 곳으로
서해에선 보기드문 1,000m 가량의 백사장.
50~100여년 해송숲이 주위에 군락을 이룬다.
갯벌에는 낙지, 굴, 바지락, 동죽, 고동, 게 등
자연어족 자원이 풍부해 자유롭게 잡을 수 있다.
민박은 해수욕장 주변에 10동, 마을에 20여호 있다.
영흥화력발전소.
영흥도는 서해 '수도권 최대 에너지기지'
서울에서 차로 2시간 가량 떨어진 영흥도.
시화방조제(길이 11㎞)와 서해안 섬들을 연결하는
연륙교 건너 영흥도 서남쪽 해안가.,영흥화력발전소.
3340㎿ 시설용량을 자랑하는 수도권 최대 화력발전기지.
수도권 전력 사용량의 19%가량을 공급.
발전소 가운데 200m 높이 대형 굴뚝 3개.
이곳이 '화력발전소'임을 대변해주고 있다.
'서울(구 당인리)화력발전소.,388.801㎿'
발전시설용량에 비해 8~9배에 달하는 규모.
........서울화력발전소........
대한민국 최초의 화력 발전소
마포구 당인동., 화력 발전소로,
한국중부발전에서 운영하고 있다.
2013년 세계 최초로 지하화 공사에 착공했다.
이 발전소의 수송을 위해 당인리선이라는 철도
노선이 생기기도 했으나, 지금은 폐지되었다.
2013년 현 부지 지하에 LNG 복합화력 방식의
새로운 1,2호기가(400MW × 2기) 착공되었으며,
2016년 9월 완공될 예정인.,지하발전소 건설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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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도 서남쪽 석탄하역부두 옆 저탄장에는
호주 인도네시아 등지에서 실려온 석탄(유연탄).
28만㎡ 부지 위에 가득 쌓여있고 소나무 방풍림으로
둘러싸인 저탄장 위 스프링쿨러가 연방 물을 뿌리며
저탄장 석탄가루가 바닷바람에 날리는 것을 막고 있다.
지금은 수도권 최대 화력발전기지.,영흥도.
2004년까지만 해도 이곳은 주민들 대부분이
어업에 종사하는 평범한 어촌마을에 불과했다.
육지와 멀리 떨어져 있다 보니
영흥도 주민들의 소득 수준은
인근 섬들 가운데 최하였다.
2004년 7월 영흥도 서남쪽 해안가 310만㎡ 부지 위에
화력발전소 1호기가 들어선 후, 발전소가 들어서면서
육지와 영흥도를 연결하는 영흥대교·선재대교가 놓였고,
2008년 6월과 12월 870㎿급의 화력발전설비인 3, 4호기가
1, 2호기 옆에 나란히 들어서 섬 주민은 전기요금 감면 혜택.
“2004년~2009년 10월까지 990억원이
영흥도 주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사용”
“인근 대부도와 선재도 주민들은 우리도
전기요금 감면 혜택을 받을 수 없느냐’ 문의
난감할 때가 있다” - 영흥화력발전소 관계자 -
15만t, 20만t의 석탄운반선 2대를 동시에
접안할 수 있는 석탄하역부두(길이 636m)에는
시간당 4800t에 달하는 유연탄을 처리할 수 있는
석탄하역기가 배에서 유연탄을 끌어 올리고 있다.
영흥화력발전소 석탄하역부두.
끌어 올려진 유연탄은
컨베어벨트에 실려서
저탄장으로 직행한다.
컨베어벨트는 뚜껑이 덮인 밀폐형으로 설계.
석탄가루가 날리는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저탄장에 쌓인 유연탄은 다시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보일러실로 옮겨져 500도가 넘는 온도에서 태워진다.
태워진 석탄은 터빈을 돌리며 전기를 생산하게 된다.
“2008년 80척에 실린 697만t 유연탄이
호주와 인도네시아로부터 들어왔고
2009년에는 960만t가량이 입항할 것.”
“저탄장에는 20일간 연료.,60만t 유연탄 비축.
하루 1t트럭 2만8000대 유연탄이 전기를 생산."
- 2009년 영흥화력발전소 안동희 자재팀장 -
대규모 공단이 밀집한
서울· 경기· 인천· 수도권
늘 전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분당· 일산 등 신도시와
남동공단, 반월공단, 시화공단
각종 산업시설이 몰려 있는 수도권
최대 전력 수요는 연간 15만1728GWh.
우리나라 전체 전력수요량
39만7930GWh의 40%에 육박.
반면 영흥화력발전소를 포함한
수도권 발전용량은 전체의 23%.
수도권 전력의 상당 부분은
충청권 이남에서 끌어다 쓴다.
심지어 수도권 전체 전력사용량 55%를
충청도 이남 발전소에서 받을 때도 있다.
경남 고성 삼천포화력발전소 전기가
송전선을 타고 수도권으로 올라간다.
문제는 송전 과정에서 막대한 전력손실.
송전 과정에서 손실되는 전력을
금액으로 환산하면 연간 940억원.
고스란히 전기료 인상으로 연결된다.
원거리 전력 공급을 위한 송전탑과
송전케이블 등이 무분별하게 들어서면서
삼림훼손 등 부가적 손실도 나타나고 있다.
영흥화력발전소는 이점에서 자유롭다.
이곳에서 생산된 전력을 실어 나르는
높이 100~160m의 육중한 송전철탑 70개.
바다 위에서 육지를 향해 39㎞ 늘어서 있다.
바다 위를 넘는 송전탑.,‘해월철탑’
해월철탑을 타고 내륙으로 건너간 전기는
1차로 신시흥변전소에 모였다가 인근 시화공단과
반월공단, 인천 남동공단, 수도권 산업기지로 들어간다.
6·25전쟁 때 인천상륙작전 전초기지로 사용된 영흥도.
이제는 전기를 생산해 육지로 상륙시키는 산업지원기지.
개성공단을 포함한 대북송전이 현실화되면
그 역할을 맡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곳이다.
화력발전소에 멍에처럼 따라붙는 환경문제
발전소 구조물들은 외벽으로 말끔하게 포장.
군데군데 잔디밭 발전소 경내는 공원을 연상.
발전소 곳곳에는 직원들과 섬 주민들의
체력 단련을 위해 배구장 등의 운동시설.
석탄회 활용 기술개발로 건축자재 재활용.
2007년 전체 석탄회 84.5%가 보도블록.
도로경계석, 인공 경량 골재로서 재활용.
영흥화력발전소 내의 에너지 파크 앞마당은
석탄회를 재활용해 만든 보도블록으로 포장.
2008년 영흥화력발전소 3, 4호기
황산화물과 질소산화물의 배출량은
법적허용기준보다 낮은 각각 20과 12.
이는 친환경 화력발전소인
일본 헤키난(碧南)발전소나
독일 이벤뷔렌발전소보다 낮다.
2005년 ‘세계 10대 우수발전소’로 선정됐고
2007년 ‘아시아 최고 청정 석탄화력발전소’
“총건설비 25% 8100억원을 환경설비에 투자."
“환경설비 운영비용만 발전원가의 약 4%를 차지."
2013년 1월 발표된 6차 전력수급 기본계획.
7 ,8호기 (870MW × 2기)의 증설계획이 포함
2018년 12월까지 완공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영흥화력발전소(靈興火力發電所)는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외리에 위치.
현재,화력발전소로, 한국남동발전에서 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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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0월 08일(수)
영흥화력발전소 증설논란.
"섬에서 2년간 이장을 맡아 일해봤지만
주민들은 불이익을 당해도 참아야 하는지?"
"영흥도 주민이 화력발전소 증설에 찬성한다지만
유연탄 연료 사실을 알았다면 거의 모두 반대했을 것"
"현재 인천지역 대기오염물질 배출량이
배출총량 한계치에 근접하고 있는 점을
직시하면 증설계획을 중단하는 것이 이상적"
"증설보다는
에너지 절약정책을
수립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수도권 전력난이 문제라면
발전소를 늘릴 것이 아니라
전력수요 억제대책을 고려할때,
유연탄 화력발전소로 인한 환경피해는
주민이 입고, 이익은 발전소가 챙기는
구조는 정의롭지 못하다"
'이클레이(ICLEI) 세계도시 기후환경총회가 개막한
2015년 4월 8일 환경운동연합 회원들이 서울광장에서
영흥화력발전소 석탄화력 발전시설 증설 반대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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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은 대기환경보전법 상 청정연료 사용지역.
유연탄 화력발전소 증설은 허용될 수 없는 지역.
그러나, 대기오염물질 배출을 증가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같은 부지에 증설하고 환경부 장관이
인정하는 경우에는 청정연료 외 연료 사용이 가능.
인천시는 석탄연료 아닌 청정연료 사용방침.
그 조건으로 7.8호기 증설에 동의 입장을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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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영흥도에는.,영흥초등학교 199명.
영흥중학교에 90명이 재학 중(2008 현재).
영흥도 장경리에 위치한 장경리해수욕장.
십리포해수욕장, 용담리 해수욕장.,3군데.
수도권에서 가까운 지리적 이점을 이용.
많은 펜션이 건설되는 등 관광산업 발달.
영흥도는 인천과의 사이에 정기여객선이 운항되었으나,
현재 2001년 11월에 개통된 동쪽으로 선재도와 연륙이 된
대부도를 거쳐 경기도와 인천으로 연결되었으며 영흥면 외리에는
수도권에 전기를 공급하기 위한 화력발전소와 태양광 발전소가 위치.
2009년 3, 4호기(총시설용량 174만 KW)를 완공.
현재, 수도권 전력 공급원.,영흥도 영흥화력발전소.
미래를 위한 '대체 에너지 개발'이 절실하게 요구된다.
'서해 조류 및 간만의 차를 이용한
조력발전소를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발.
대체 에너지를 확대 생산 할 수 없는걸까?'
서해바다 자연환경은
후손만대에 물려줄.,보고.
서해(황해)
남쪽은 동중국해와 접하고
서쪽은 산둥반도(山東半島),
북쪽은 랴오둥반도(遼東半島),
동쪽은 우리나라에 의해 포위되는
서부 태평양 북부에 위치한 연해(沿海).
국제수문기구에 의하면 남부 경계는
한국의 제주도에서 중국 상해 부근
양쯔강(揚子江) 하구까지 선을 택해
북쪽은 랴오둥만과 산둥반도를 잇는 선.
보하이만(渤海灣)과 구분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보하이만'까지 합쳐서.,황해.
황해는 남북 약 1,000㎞, 동서 약 700㎞로
전 해역에 걸쳐 100m 이하의 수심을 가지는
동부아시아의 거대한 대륙붕을 형성하고 있다.
대체로 수심은 20∼80m이며
평균 심도 44m, 최심도 103m.
얕은 바다는 한반도에 치우쳐 남북으로 연장되어 있다.
신생대 제4기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최후의 빙하기 때
해수면이 현재보다 100m 이상 낮아 전체적으로 육지였다.
그뒤 후빙기(後氷期)에 해수면이 점차 높아져.,황해.
황해의 동부 및 서부 해안 지역은 강한 조류에 의하여
사질저층(砂質底層)을 형성하였고, 중앙분지의 저층은
점토(극히 미세한 암석풍화의 분해물)나 가는 모래로 구성.
특히, 중국 본토 쪽의 저층 퇴적물은 대체로 점토이다.
황하(黃河)에서 유출되는 점토는 내륙의 황토에서 유래.
이 혼탁한 물질 때문에 바닷물이 누렇게 흐려 있어.,황해.
황해의 서쪽 해안은 고기암석으로 둘러싸여 있고
산둥반도, 랴오둥반도는 좋은 항구로 이용되고 있다.
황해의 바람은 동해· 남해처럼 계절풍의 지배를 받는다.
겨울에는 북서풍, 북풍이 탁월하여 풍속이 매우 강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남서풍이 많이 부는데 풍속은 약한 편.
통일신라 신라인들은 이미 계절풍을 이용하여 황해를 횡단.
태풍은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빈도가 높고,
돌풍현상은 겨울에서 초봄까지 한랭전선 통과시
나타나 항해하는 배들에게 위험을 초래하기도 한다.
해무(海霧)는 봄부터 초여름에 걸쳐 섬,
첨단부 등 한랭한 상승류 해안에서 현저하다.
중부 이북 해저에서는 여름에도 5∼6℃.,냉수괴.
남해 연안까지 신장하여
안개 발생의 원인이 된다.
황사현상(黃砂現象)은
봄에 빈번히 나타나서
해상교통에 지장을 준다.
표면 수온은 대륙성기후의 영향을 받아서
여름 25∼27℃, 겨울 2∼8℃로 연교차가 크다.
한반도의 서해안은 압록강 입구에서
전라남도의 해남갑(海南岬)에 이르는
직선 거리 650㎞로 지절률(肢節率) 7.26.
해안선 길이는 육지부 4,719㎞,
도서 지방은 3,700㎞에 이른다.
해안선의 지절률은 매우 높은 편이나,
해저지형과 조차(潮差)의 영향으로
항만 발달 조건에는 불리하다.
조차가 큰 황해는
간석지의 발달이 현저하여
만조시에는 침수되고 간조시에는
해면상에 넓은 조간대(潮干帶)가 형성.
이와 같은 곳은 염전으로 많이 이용된다.
또한, 우리 나라의 서해안 쪽은 산사면이 완만한 반면에
여름에 압록강· 대동강·한강·금강 등에서 많은 토사가 유출.
하구에 퇴적지를 형성하며 만입을 중심으로 넓은 갯벌을 형성.
특히, 해저물질의 퇴적으로
지면이 차차 높아져 육지면이
바다 쪽으로 성장하는 반면 만조시
지역에 따라., 침수되는 경우가 많다.
지역에 따라 해식애와 파식대(波蝕臺)가
육상에까지 노출되어 경관이 아름다운 곳.
전남 신안의 홍도(紅島)는 절경을 이루고 있다.
황해에 면한 한반도 서해안과 중국의 동해안은
저평지가 넓으며 인간생활의 중심지가 되어왔다.
하여, 황해는 일찍부터 인접한 해안을 연결하는 통로.
김상호는 서기 전 3000년대 이전에
잡곡 재배 농업이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전래되었으리라는 가능성을 제시.
도해전래(渡海傳來) 가능성의 근거로는,
육로를 통과하게 되는 황하의 하류 일대는
훨씬 후대인 주나라 때에 비로소 개발되기 시작.
삼한시대 한반도의 남부가 북부보다
인구가 많은 사실이 농업의 전래 기간과
관계가 있으리라는 점 등을 들어 주장한다.
또한, 수전농업(水田農業)의 경우에도
중국에서 황해를 건너 한반도에 전래된듯.
삼국시대 중국과의 내왕에 해로를 많이 이용.
백제는 수차에 걸쳐 해로로 서진(西晉)에 사신을 파견
신라는 진흥왕 때 한강 유역을 점령하여 황해를 통하여
중국과 외교를 맺어 삼국통일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은
660년(의자왕 20) 수군을 이끌고
금강을 거슬러 올라 백제 사비성을 공략.
이듬해 다시 수군을 이끌고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
고려 시대에도 황해를 통하여
송 사신 및 상인의 내왕이 활발.
이때 예성강 입구.,벽란도.
국제항구로 성황을 이루었다.
황해는 조차가 커서 얕은 해안의 해협이나
반도의 첨단부에서 급격한 조류가 나타난다.
이러한 급류는 근대적인 항해 장비와 항해술이
등장하기 전에는 연안 항해에 큰 위협이 되어왔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화물의 운송은
하운(河運)과 해운(海運) 등 수운이 중심.
화물의 대부분은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양곡이었는데,
세곡미는 하천을 통해 남해, 황해로 나와 한양으로 운송.
서해 연안에 급격한 조류가 나타나는 곳은 항해에 큰 문제.
연안 항로 가운데
험난한 곳은 황해도 장산곶,
충청남도 태안반도 안흥량(安興梁),
인천광역시 강화 손돌목(孫乭項)등이었다.
그 중 양곡 수송량이
많은 안흥량과 손돌목은
해난사고 규모가 크고 빈번.
이에 안흥량과 손돌목의 험난을 피하기 위하여
안흥량운하와 김포굴포를 뚫는 방법이 추진되었다.
안흥량운하(일명 가적운하)는 태안반도 동쪽의 가로림만과
적돌만을 연결하는 운하로서 '고려~조선'시대 10 차례에 걸쳐
공사를 추진하여 운하의 형태를 갖추기는 하였으나 개통에는 실패.
김포굴포는 '인천~김포평야~한강'에 이르는 운하.
고려와 조선 시대에 공사가 추진되었으나 풍수지리상,
문제로 일부 구간을 뚫지 못하게 하여 개통되지 못하였다.
험난한 항로였던
황해도의 장산곶과
태안반도의 안흥량은
각각 경기만의 최북단과
경기만의 최남단에 위치한다.
따라서, 경기만 연안 사이의
항해에는 지장을 주지 않았다.
경기만은 형태 상 지중해 구실을 하여
'경기· 황해· 충남' 해안 지방을 잇는 구실.
경기만 연안 지역은
해상교통 중심을 이룰 때
하나의 생활권을 형성했다.
최근 우리 나라와 중국 사이의
경제적 교류가 확대될 전망이라서
서해안의 개발이 활발하여지고 있다.
대규모 방조제들이 축조되고
공업단지들이 곳곳에 들어서며
주요 항구 시설확장이 되고 있다.
앞으로 황해는
사람과 물자가
활발하게 교류되는
주요 활동 무대가 될 것.
<삼국사기> 백제본기(百濟本紀)에 의하면
해물(海物)을 위(魏)나라에 바쳤다는.,기록.
해물이 어떤 종류의 수산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서해안은 좋은 어장이었고,
어업 기술도 발달햇으리라 생각된다.
백제 말, 법왕은 숭불사상에 연유된
살생금단 풍조에 의하여 어업 금지령.
이러한 조처는 비록 일시적인 것일지라도
백제 어업에 적지 않은 타격을 주었으리라.
<고려사>에 의하면 왕자가 탄생하였을 때
여러 보물과 함께 소금과 어량(魚梁)을 하사.
즉, 고려 시대에 어량의 경제적 가치가 컸고,
그당시 어량 어업이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어량은
서해안을 중심으로
하천과 해면에 설치되어
조기와 청어를 비롯한 각종
어류 및 새우와 게류가 많이 어획
조선 전기에 포획한 수산생물은
어류가 약 50종, 패류와 해조류 및
기타 생물이 각각 10여 종으로 되어 있다.
현재에는
어류가 약 100종,
패류와 두족류(頭足類) 30종,
갑각류 40종, 해조류가 10여 종,
기타 생물이 15 종으로 합계 195 종.
조선 전기에는 수산생 종류가 많지 않았지만,
현재와 비슷한 종류가 대략 있었을 것이고,
자원량이 현재보다 훨씬 풍부하였을 것.
조선 시대에 사용하였던 어구와
어획하였던 어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어전(魚箭)에 속하는 정치망으로
민어· 삼치· 가자미· 붕장어· 달강어.
중선(中船)으로는 조기·새우 등을 어획.
궁선(弓船, 횟배)으로 새우·뱅어·조기·뱀장어 어획.
비교적 적극적인 어구 어법인 망선(網船)으로는
도미·삼치·청어·방어·전어·민어·준치·갈치 어획.
자망(刺網)으로는 참조기를 어획하였고,
지인망(地引網)으로는 주로 멸치를 잡았다.
1900년경 안강망어업(鮟鱇網漁業)을
일본에서 도입하여 개량, 발전시켰다.
1970년대까지 암해와 수해로 구성된 어구를 사용하였으나
1980년대 국립수산진흥원 개발.,전개범포(展開帆布)를 사용
효율적인 어구로 개량되었고 어군에 관한 정보는 소나(sonar)로,
선위와 항적에 관한 것은 인공위성으로, 어구에 관한 것은 원격조정.
이들 세 가지를 조화시키면
바다 속을 환히 들여다보면서
머지않은 장래에 조업하게 될 것.
황해는 넓은 대륙붕이 형성되어 있으므로
조기·갈치·민어·도미·고등어·새우 등과 같은
어류를 대상으로 저인망 어업이 성행하고 있다.
또한 빠른 조류 때문에
안강망어업도 많이 보급.
황해어장 주요어획 대상 온대성 어종은
조기 민어· 전갱이·멸치·광어·삼치·도미 등
한대성 어종으로는 대구나 꽁치 등도 있다.
온대성 어종 중에 새우는
특히 황해에서 많이 난다.
황해는 각종의 새우가 풍부하기 때문에
안강망·저인망 등에 의하여 다량 어획된다.
대하는 3∼5월에 걸쳐 산란하기 위해서
연안으로 들어와 서해안에서 많이 잡힌다.
이 밖에도 많은 온대성 어종들이
황해에서 산란을 하고 성장하기 때문에
황해는 해양 생물의 좋은 번식장 구실을 한다.
또한, 넓은 대륙붕의 영향으로
패류들의 훌륭한 서식처가 된다.
그 중에 특히 참조개·백합·홍합·전복·키조개·
피조개· 바지락· 가리비 등이 많이 서식한다.
최근에는 이런 좋은 조건 때문에
연안을 개발하여 패류 양식장이 많다.
황해에서의 유용 해조류(海藻類)는
동해 남해 같이 종류가 다양하지 않지만,
전남 지방에서는 김양식을 많이 하고 있다.
김은 우리나라 최초의 해조류 양식품종이다.
1640년(인조 18)에 처음 양식법이 개발되었다.
가선대부 호조참판 지의금부사를 지낸 김여익은
전남 광양군 태인도에서 은둔할 때 참나무 유목에
김이 착생하는 것을 보고 싸리 빗자루 같은 나뭇가지를
바다 얕은데 꽂아 김을 양식하는 ‘일본홍’ 김 양식법을 개발.
일본의 김양식(1673~1683년) 보다
시기적으로 30년 이상 앞서는 것이다.
조선 헌종·철종 때인 1834~1863년에는
전남 완도에 사는 주민 정시원이 대나무 등을
길게 쪼개 엮어 묶은 떼발 형태의 반부동식 김발
‘염홍’ 양식법을 개발해 생산을 늘리는 등 기술 혁신.
김은 그물을 이용한 말목식, 부류식, 뒤집기식
등 양식기술 진화로 대량생산 체제를 갖추었다.
밥반찬으로 개발된 조미김의 시초는 1986년 ‘해표김’
마른 김 생산은 2000년 이후 세계 1위 생산량을 올렸다.
2015년 김 수출량은 5144만속(1속=마른 김 100장).
길게 이어 붙이면 지구를 27바퀴 돌 수 있는 양이다.
비만 등 성인병 예방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지면서
'스낵김'은 "미국 실리콘밸리 스낵" 국가대표 한류상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