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가니
공지영 지음 / 창비 펴냄
예리한 통찰력과 속도감 있는 문장으로 현실의 부조리를 파헤치는 작가, 불합리와 모순에 맞서는 당당한 정직성, 동시대 사람들과 함께 호흡하는 뛰어난 감수성으로 독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은 작품들을 발표해온 작가 공지영의 신작 장편 [도가니]가 출간되었다. [즐거운 나의 집] 이후 2년 만에 펴내는 장편이다. [도가니]는 2008년 11월 26일부터 올 5월 7일까지 포털 Daum의 ‘문학 속 세상’에 연재한 원고를 심혈을 기울여 보완하고 다듬어 출간하는 것이다.
문단의 주목과 대중의 사랑을 동시에 받으며 우리 문단의 중심적인 작가로 자리 잡은 공지영의 이번 신작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감동을 선사한다. 선과 악, 진실과 거짓이라는 자못 평범할 수도 있는 보편적인 주제를 흥미진진하게 다루면서 오늘 한국사회의 현실에 대입해 악의 본질, 거짓을 용인하는 우리들의 무의식, 진정으로 우리가 잘산다는 것의 의미를 가슴 치며 되묻게 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성실한 취재와 진지한 문제의식이 특유의 힘 있는 필치와 감수성에 힘입어 감동적으로 되살아난다.
강인호는 아내의 주선으로 남쪽 도시 무진시(霧津市)에 있는 청각장애인학교 ‘자애학원’의 기간제교사 자리를 얻어 내려가게 된다. 한때 민주화운동의 메카였던 이 도시는 ‘무진’이라는 이름이 암시하듯 늘 지독한 안개에 뒤덮이는 곳이다. 첫날부터 마주친 짙은 안개 속에서, 그리고 청각장애를 가진 아이들과 교사들이 다수인 무섭도록 고요한 학교 분위기에서 그는 불길한 예감을 느낀다. 한 청각장애아(전영수)가 기차에 치여 죽는 사고가 나도 이를 쉬쉬하는 교장, 행정실장, 교사들, 그리고 무진경찰서 형사 사이에서 강인호는 모종의 침묵의 카르텔이 작동하고 있음을 감지한다. 부임한 첫날부터 우연히 듣게 된 여자화장실의 비명소리를 신호탄으로 강인호는 점차 거대한 폭력의 실체를 알아가게 된다. 학교와 기숙사에서, 듣지 못하는 장애아들(김연두 전민수)과 중복장애를 가진 학생(진유리)에게 끔찍한 구타와 성폭행, 성추행이 오랫동안 빈번하게 자행되어왔던 것이다. 영수의 죽음과 그전에 있었던 학생들의 자살 역시 구타와 성폭행과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 그 가해자는 다름 아닌 자애학원 설립자의 쌍둥이 아들들인 교장과 행정실장이고, 여기에 기숙사 생활지도교사도 가세했던 것이다.
강인호는 대학 선배이자 무진인권운동쎈터 간사인 서유진, 최요한 목사 그리고 연두 어머니 등과 함께 사건의 실체를 파헤치고 세상에 알리려고 한다. 자애학원과 결탁한 교육청 시청 경찰서 교회 등 무진의 기득권세력들은 이 사건을 무마하기 위해 온갖 비열한 수단과 방법을 동원한다. 각 인물과 기관이 거미줄처럼 연결된 무진의 강고한 시스템은 폭력과 거짓을 동원해 자신들의 치부를 가리고 진실을 은폐하려 한다. 하지만 아이들의 증언이 매스컴을 타게 되면서 무진시는 발칵 뒤집히고, 가해자들은 재판에 회부된다. 주인공과 아이들은 진실이 규명되고 정당한 처벌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된다. 그러나 가해자와 기득권세력의 시스템은 재판 과정에서도 실정법을 이용한 갖가지 장치를 동원해 더 악랄하게 작동하고, 피해아이들은 재판과정에서 또 한번 인권유린을 당한다. 결국 기대와 다른 재판결과는 피해자측에 커다란 상처와 절망을 안겨준다. 그러나 세상 모두가 거짓을 이야기해도 진실을 놓을 수 없는 이들은 끝까지 희망을 버리지 않고 다시 싸움을 이어간다.
이 소설은 지난 2005년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광주의 모 장애인학교에서 자행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씌어진 소설이다. 작가는 현장에서 오랜 기간 취재하고 자료를 수집한 뒤 집필에 임했다. 작품 곳곳에 묘사된 폭력과 성폭행 장면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끔찍해서 읽는 이로 하여금 종종 가슴을 쓸어내리고 숨을 고르게 만든다. 하지만 작가는 소설에 묘사된 사건과 사실은 실제 일어난 것에 비하면 3분의 1도 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소설보다 현실이 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다. 작품을 읽다보면 이 현실에 대해서,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 우리사회의 극단적인 이면에 대해 곰곰이 생각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가는 우리사회에 잠재되거나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애써 외면하려는 거짓과 폭력의 실체를 적나라하게 파헤치고 진실을 똑바로 보게끔 만든다. 이를 통해 우리사회에서 민주주의와 인권이 어느 정도 성숙해졌다는 믿음이 한갓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 작가가 이 소설을 통해 들려주는 소중한 메시지인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러한 진실과 거짓, 폭력에 대한 주제의식이 어렵고 거창한 담론이 아니라 보통사람들의 일상에 스며들어 삶을 지배한다는 사실이다. 주인공 ‘강인호’와 ‘서유진’은 어떻게 보면 거대한 이념에 대해서 소극적인 보통사람을 대변하는 전형일 수도 있다. 단순화시켜서 보면 그들이 꿈꾸는 것은 상식이 통하는 세상에서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일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결말에서 두 사람의 행보가 엇갈리는 것은 뒤통수를 치는 소설의 반전이다. 서유진은 끝까지 싸움의 현장에 남게 되지만 강인호는 숱한 번민 끝에 소시민의 자리로 도피한다. 이 과정에서 분출되는 고민과 아픔이야말로 이 소설이 독자를 강하게 끌어들이는 흡인력이다. 이처럼 평범한 일상을 무너뜨리고 왜곡하는 폭력을 통해 지극히 상식적인 문제의식들을 구체적이면서도 뼈아프게 전달하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인 것이다. 일상적인 삶에서 길어 올린 진실과 거짓, 선과 악의 근원에 대한 작가의 직관은 작품 곳곳에서 깊은 사유를 동반하면서 빛을 발한다.
현실에서 진실은 비논리적이고 게으르고 거짓의 에너지는 예상보다 강력하다는 작가의 통찰력은 바로 기득권세력을 유지하는 우리사회 시스템의 속성을 아주 적확하게 파악한 것이다. 거짓되고 공고한 이 시스템 안에서 약자들의 권리와 인권은 종종 무시되고 억압당한다. 더군다나 듣지 못하고 말 못하는, 심지어 지적장애까지 있는 중복장애인, 그중에서도 어린아이들의 인권이야 아주 쉽게 유린할 수 있다는 모종의 무의식이 기득권세력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작가는 ‘서유진’의 입을 통해 말한다.
작가 공지영은 1963년 서울에서 태어나 연세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8년 계간 [창작과 비평] 가을호에 단편 〈동트는 새벽]을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지은 책으로 장편소설 [더 이상 아름다운 방황은 없다][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착한 여자][고등어][봉순이 언니][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즐거운 나의 집][도가니]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인간에 대한 예의][존재는 눈물을 흘린다][별들의 들판], 산문집 [공지영의 지리산 행복학교][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공지영의 수도원 기행][상처 없는 영혼][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아주 가벼운 깃털 하나]등이 있다. 21세기문학상, 한국소설문학상, 오영수문학상, 앰네스티 언론상 특별상, 제10회 가톨릭문학상, 2011년 35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