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1965년 KBS 공채 탤런트 5기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지만, 연기자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일찍 돌아가신 부모 대신 집안을 책임지고 있던 큰형은 9남매를 돌봐야 했고 하명중은 막내였다. 경희대 영문과를 다니던 그는 학비를 스스로 벌지 않으면 안 될 형편이었다. 친구 따라 원서를 냈던 탤런트 공모에 합격한 뒤 TV 드라마에서 지나가는 행인 1, 2나 하던 그가 갑자기 주연을 맡게 된 것은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때문이었다. 휴일 청와대에서 함께 TV를 시청하던 대통령 부부는 얼핏 지나가는 행인들 속에서 얼굴에 광채가 나는 젊은 청년을 발견했다. 대통령은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전화를 걸어 그 청년이 누구인지 물어봤고, KBS는 발칵 뒤집어졌다. 그 다음 드라마에서 하명중은 주연을 맡게 된다.
그러나 하명중을 이야기할 때 이런 일화보다 먼저 이야기되어야 할 것은, 그의 형 하길종 감독이다. 하길종 감독은 9남매 중 일곱째였고 하명중은 막내였다. 그사이에는 누나가 있었기 때문에, 두 형제는 언제나 집에서 한이불을 덮고 잤다. 한국 영화사의 신화로 남아 있는 하길종 감독은,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UCLA)에서 영화이론과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국내 영화인으로서는 최고 학부를 나와 미국 대학에서 정통 코스를 밟으며 체계적으로 영화 공부를 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하길종 감독은 대중문화 종사자인 영화인들을 ‘딴따라’라고 경원시하던 당시 풍토에서는 너무나 이질적인 인물이었다. 이미 대학 시절 시집도 낸 바 있었던 그는 귀국 후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안목과 뛰어난 글 솜씨로 <조선일보> 등에 칼럼을 집필했고 많은 팬들이 생겨났다. 나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길종 감독은 이효석의 소설을 각색한 <화분>(1972년)을 데뷔작으로 만든 후, <수절>(1975년)을 거쳐 <바보들의 행진>(1975년) <병태와 영자>(1979년) 등 7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병태와 영자>가 대중적으로 큰 성공을 거둔 후 이제는 본인이 정말 만들고 싶은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며 다음 작품을 준비하던 중, 1979년 2월, 불과 3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권력과 유신체제에 대한 비판의식을 우회적으로 담은 <화분>이나 <수절>은 검열 당국의 가위질로 제대로 상영되지 못했고, 새로운 미의식과 실험적 형식으로 대중들에게는 낯선 작품이 되었지만, 정통 드라마 형식으로 짙은 페이소스가 담긴 뛰어난 청춘 영화 <바보들의 행진>은 흥행과 비평 모두 대성공을 거두었다.
영화감독 되겠다고 형인 하길종 감독 임종 때 약속
시사회에서 두 아들과. |
“나를 감독으로 만든 사람은 형이다. 형의 감독 데뷔작인 <화분>은, 내가 각색한 시나리오를 보고 형이 원작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작가 홍파에게 다시 각색 의뢰를 한 것이다. 형은 그때부터 나에게 감독을 하라고 권유했다. 형의 임종을 지키면서 나는 형과 약속했다.”
하명중은 감독 데뷔작
“큰아들 상원이는 동국대에서 연극을 공부한 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 대학(USC)에서 영화연출을 공부했다. 현재는 경희대 연극영화과 교수로 있고 싸이더스HQ의 기획팀장으로 있지만 이번 작품의 주인공을 맡아 6개월 휴직계를 내고 촬영을 했다. 내가 노년의 최호를 연기하니까 상원이가 내 젊은 시절을 연기하는 게 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오디션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선발되었다. 둘째 아들 준원이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 출신이다. 졸업 작품으로 칠레 국제단편영화제 그랑프리를 받았다. <괴물> 시나리오도 봉준호 감독과 공동 집필했고 지금 감독 데뷔를 준비하고 있는데, 하던 일을 잠시 미루고 내 작품의 프로듀서를 맡았다.”
17년 만에 다시 감독으로 복귀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각각 감독 데뷔 중인 두 아들이 자신의 일을 젖혀 놓고 아버지의 작품에서 주인공과 프로듀서로 참여한 것이다. 마지막 편집을 끝낸 후 쓰러져 응급실로 실려 갔던 하명중 감독은, 오래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허리가 아프지만 두 아들 이야기를 할 때는 어느 아버지처럼 눈빛이 빛났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작가 최인호의 자전적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다. 일찍 혼자 된 어머니가 하숙을 치면서 힘들게 자식들을 키웠지만 그 자식들은 성장하면서 어머니 곁을 떠나간다. 현재와 과거가 교차로 편집된 영화는, 노작가 최호(하명중 분)가 글을 쓰다가 책상 위의 작은 액자에 걸려 있는 ‘I love you 알라뷰’라는 글귀를 보면서 시작한다. 어머니와 함께 그가 청소년기를 보낸 구파발의 집은 재개발로 폭파되기 직전에 있다. 최호는 자신의 옛집을 찾아 출입이 통제된 골목 안으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늘 정갈한 모습의 어머니(한혜숙 분)가 있다. 그녀는 막내아들 최호(하상원 분)가 작가로 데뷔하고 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단의 주목을 받는 한편, 연애를 시작하면서 점점 자신의 곁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본다.
영화 촬영장에서. |
이번 인터뷰를 핑계로 나는 10년 만에 다시 그를 만났다. 10년 전, 한 번 보고 싶다는 연락이 와서 나는 그가 경영하는 강남의 뤼미에르 극장 사무실로 찾아갔었다. 마돈나와 안토니오 반데라스 주연의 뮤지컬 영화 <에비타>가 극장 개봉할 무렵이었는데, 그는 아르헨티나에서 에비타를 소재로 만든 비디오테이프를 보여주기도 했다. 저녁 술자리에서는 하길종 감독의 일화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했다. 마치 살아 있는 한국 현대영화사의 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것 같았다. 이번에 10년 만에 다시 만났는데, 나도 그렇겠지만 그도 많이 나이 들어 보였다. 그때 하명중 감독은, 자신을 성폭행한 남자를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찾아가 살해한 김부남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17년 만에 이번 작품을 만들었지만 그동안 나는 꾸준히 영화를 준비해 왔다. 김부남 사건이라든가 명성황후 등을 소재로 영화를 만들려고 수없이 시나리오를 썼고 제작을 위해 뛰어다녔다. 하지만 여건이 맞지 않아 모두 무산되었고, 최인호 작가의 이번 작품을 만나 다시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
하명중 감독의 본명은 하명종이다. 그의 형제들은 하길종 감독처럼 종(鍾)자 돌림이다. 홍콩 영화 전성기이던 1970년대 중반, 쇼브라더스 사장이 한국에 왔다가 TV에서 꽃미남 하명중의 마스크와 연기를 본 후 곧바로 홍콩으로 스카우트했다. 그러면서 하명종의 예명을 중국의 중(中)자를 넣어 하명중으로 바꿨다. 말하자면, 하명중은 원조 한류인 셈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는 최근 한국 영화의 감각으로 보면 흐름이 조금 완만한 편에 속한다. 극중 주인공인 젊은 시절의 최호 작가와 노년의 최호 작가를, 실제 부자지간인 하명중, 하상원이 연기한 것도 눈에 띄지만, 늘 단아한 모습으로 다정하고 따뜻한 우리들의 어머니를 연기한 한혜숙의 연기도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이제 곧 그의 두 아들인 하상원이나 하준원의 감독 데뷔작도 나오겠지만, 한국의 대표적인 영화인 가문의 중심인물인 하명중 감독의 신작 영화를 계속해서 볼 수 있기를 희망한다.
사진 : 장성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