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가례家家禮 / 김시덕
[정의] 동일한 의례가 집안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달리 행해지는 방식을 이르는 말.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가가례家家禮의 시작은 아마도 현종대顯宗代에 일어난 기해예송己亥禮訟(1659)과 갑인예송甲寅禮訟 (1674)일 것이다. 이 예송은 효종孝宗의 계모인 장렬왕후莊烈王后가 효종과 효종의 비妃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입을 복제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서로 다른 주장을 하게 되고, 이것이 정치적인 당쟁으로까지 이어진 사건이다. 문제는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일찍 죽자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위를 이은 데에 있었다. 인조仁祖의 대를 이어 왕이 되었으니 국가의 왕통王統을 이어 주손이 되지만, 가통家統으로 보면 둘째 아들이라는 데에 문제가 있었다.
송시열宋時烈(1607~1689)・송준길宋浚吉(1606~1672)을 비롯한 서인西人들은 효종이 비록 대통을 이었지만 인조의 차자次子이므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따라 장렬왕후가 기년복朞年服(1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허목許穆 (1595~1682)・윤휴尹鑴(1617~1680) 등은 효종이 대통을 이은 특수성이 있으므로 효종을 인조의 장자長子로 간주하여 장렬왕후가 참최복斬衰服(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당시 서인이 실세였기에 송시열의 주장에 따라 기년복을 입는다.
15년이 지나 인선왕후 장씨가 죽자 장렬왕후의 복제가 다시 거론되었다. 서인들은 효종의 상에 준거하여 둘째 며느리에 해당하는 대공복大功服(9월)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남 유생 도신징都愼徵(1604~1678)이 소疏를 올려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송시열이 효종의 사례에 따랐다고 하자 현종은 선왕을 ‘체이부정體而不正’으로 규정한 것은 박한 처사라며 국제國制에 따라 기년복을 입도록 명하여 시비는 종결되었다.
이 예송은 예禮의 적용을 왕과 백성에게 동일하게 하느냐 아니면 다르게 하느냐는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었다. 남인은 대통을 이었으면 장자로 봐야 한다고 해석하였고, 서인은 왕실이라 하더라도 종법宗法에 따라 차자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7세기 중・후반에 이러한 논쟁이 정치적인 문제로 확산될 정도로 예의 해석이 달랐기에 가가례의 조짐은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17~18세기에 고례古禮를 저본으로 『가례家禮』를 재해석해 약 200종의 예서가 출간된 것을 보면 그만큼 이견의 여지가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중에는 『가례』를 철저하게 보완한 것도 있지만, 조선의 실정에 맞게 재해석한 부분도 많다. 따라서 학파, 집안, 지역에 따라 다른 예법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내용] 의례의 행례行禮 방식은 그 본질보다 그것을 구성하는 제 요소를 둘러싼 신분・사회적 질서체계와 의식의 적합성, 환경과 연관되어 있다. 의례의 행례 방식은 예서라는 규범에 따르지만, 『가례』 등 대부분의 예서가 행례의 기본 원칙만 기술하고 세부 항목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어 행례 집단이나 지역, 학파에 따라 다른 행례 방식이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현장에서 발생하는 변례變禮에 대한 대응은 집단을 중심으로 모색 및 설정되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다른 예설이 발생하게 된다. 이것이 관습이 되고 전통이 되면서 가가례로 고착 되어 버린다.
이러한 가가례는 의례 전체의 맥락이 아니라 예서에서 규정하지 않은 세부적인 부분에서 나타난다. 잘 알려진 가가례는 첫째, 제사의 봉사대상에 대한 가가례이다. 『가례』를 비롯한 예서에서는 기제사의 봉사대상에 해당하는 조상만 모시는 단설單設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집안에 따라서 봉사대상의 배우자를 함께 모시는 합설合設을 하는 사례가 많았다. 퇴계退溪나 율곡栗谷 역시 합설을 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둘째, 상차림의 가가례이다. 상차림은 가문별로 가장 의견이 분분한 사항이다. 이는 예서에서 과일은 과果, 고기는 육肉, 생선은 어魚 정도로만 표시하고, 제물의 종류와 숫자 등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아 나타난 현상이다. 이에 따라 노론에서는 ‘홍동백서紅東白西 ’, 남인에서는 ‘조율이시棗栗梨柹’라고 의도적인 구분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일의 숫자를 홀수, 짝수로 정하는 이유는 과일의 생장 환경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적용하면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다. 생선은 숭어와 고등어, 문어를 쓰는 지역과 그렇지 않은 지역의 차이가 생겨나고 있다. 이는 혼례婚禮나 흉제凶祭의 상차림에서도 나타난다. 그 이유는 예서에서 과일이나 생선, 고기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역마다 지역 산물을 중심으로 준비하다 보니, 지역의 여건에 따라 다른 종류를 사용하면서 차이가 나타난다.
셋째, 상례에서 매장할 때 입관 여부의 가가례이다. 이는 매장할 때 관을 해체하고 시신만을 매장하느냐, 입관한 채로 매장하느냐의 차이로 풍수와도 관련이 있다.
넷째, 헌작 방법의 가가례이다. 여기에는 『가례』나 『가례의절家禮儀節』 등의 예서에서 규정한 방법이 있고, 『국조오례의』에서 규정한 방법이 있다. 『가례』에서 규정한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주인이 올라가 신위 앞으로 나아간다. 그다음에 집사자 한 명이 술 주전자를 들고 그 오른쪽(동쪽)에 선다. 주인은 진홀搢笏하고 직접 고위의 잔을 받들고 향탁 앞에서 동향하여 선다. 우집사자가 맞은편에서 서향하여 잔에 술을 따른다. 주인이 받들어 원래의 자리에 드린다. 그런 다음 홀을 들고 신위 앞 향탁 앞에 북향하여 선다. 집사자가 고위의 잔을 받들고 주인의 왼쪽에 선다. 주인이 진홀하고 꿇어 앉으면 집사자도 같이 꿇어앉는다. 주인이 집사자로부터 고위의 잔을 받아 오른손으로 술잔을 들어 세 번으로 나누어 조금씩 모사에 좨주[祭酒]한다. 잔을 다시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원래의 자리에 되돌린다. 『국조오례의』의 헌작 방법은 다음과 같다. 우선, 주인이 올라와 신위 앞 향탁 앞에 나아가 꿇어앉으면 집사자가 잔을 가져다가 술을 떠내어 주인에게 준다. 주인이 집사자로부터 잔을 받아 받들었다가 집사자에게 주면 집사자가 잔을 원래의 자리에 올린다. 주인은 부복하였다가 일어나 조금 물러나 꿇어앉는다.
다섯째, 계반개啓飯蓋 시기의 가가례이다. 『가례』나 『사례편람四禮便覽』 등에는 초헌에서 메의 뚜껑을 열고 합문闔門에서 삽시하는 것으로 되어 있어 ‘삽시정저插匙正箸’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합문할 때 메의 뚜껑을 열고 삽시하는 사례도 많아 계반삽시啓飯插匙라는 용어도 탄생하였다.
이 외에도 길제를 지낼 때 주부의 예복, 혼례의 함싸는 방법과 받는 방법, 혼례복, 초례상의 상차림,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갈 때 짚불을 넘거나 바가지를 깨는 일, 노적섬 밟기 등 세부적인 부분은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많다. 이에 따라 “남의 집 제사에 감 놔라 배 놔라 한다”,
“도랑 건너면 집사하지 않는다” 등의 속담이 생겨날 정도로 가가례에 따른 예론은 분분했던 것 같다. 가가례는 기본적으로 예학의 범주에 속한다. 예학파는 이미 그 자체로서 분파 형성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는데, 성리학의 분파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기본적으로는 퇴계와 율곡의 문인들이 퇴계학파(영남학파)와 율곡학파(기호학파)로 분파했다고 볼 수 있다 .
따라서 예학 역시 영남학파와 기호학파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함께 정치적인 분파와도 관련이 있다. 노론과 소론, 남인과 북인 등이 그것이다. 예학에서는 노론과 남인을 구분하는 것이 위의 학파 구분과 상통한다. 그러나 하나의 예학 계통에 있는 퇴계 선생의 제사상 차림과 학봉 선생의 제사상 차림이 다르기도 하여 , 가가례는 일정한 원칙이 없음을 알 수 있다.
지역사례 가가례의 지역 사례는 무척 많아 대표적인 몇 가지만 제시한다. 경상북도 안동을 중심으로 한 영남지역에서는 적炙을 하나의 적틀에 모두 쌓는 도적都炙을 쓴다. 그러나 기호학파에서는 적을 따로따로 차리는 산적散炙을 쓴다. 충청도와 경기도 지역에서는 생선으로 숭어를 차리지만, 안동 지역에서는 고등어와 문어를 차리는 차이가 있다. 영남학파에서는 대부분 『국조오례의』식 헌작獻爵을 하고, 기호학파에서는 『가례』식 헌작을 한다. 안동 지역에서는 길제吉祭 때 주부가 혼례복을 예복으로 입는다. 경기도와 충청도 등에서는 헌작할 때 젓가락을 시접에 세 번 구르는 전저奠箸를 하지만 영남지역에서는 하지 않는다.
[특징 및 의의] 가가례의 특징은 세부적인 부분에 한정된다. 이는 예서가 세부적인 행례 방법을 제시하지 않아 집안마다 다른 실천 방법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사실 가가례는 전통의 고수라는 미명 아래 원래의 규정을 찾아 바로잡으려는 노력보다 왜곡된 사실을 그대로 전승하다 보니 변이형이 계속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적용기준 역시 매번 달라지다보니 변형된 가가례는 더욱 고착되었다. 이러한 ‘가가례’는 예서와의 차이에 대한 시비를 무마시키는 역할도 하였다.
[참고문헌] 가가례로 보는 경기지역 제사의 특성(김시덕, 민속문화의 지역적 특성을 묻는다-실천민속학 새책2, 실천민속학회, 2001), 가가례를 통해 본 영남예학의 특징(김미영, 국학연구13, 한국국학진흥원, 2008), 한국의 관혼상제(장철수, 민속원, 1995), 한국의 상례문화(김시덕, 민속원, 2012).
필자 김시덕(金時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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