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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중한담(茶中閑談)3
- 박현선생님과 함께 하는 이야기마당
(2023년 10월 22일 14:00, 지유명차 청담점)
나의 속과 껍데기에 대하여
인사 올리겠습니다. 미리 앉아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시작하려니까 좀 이상하기도 한데요. 하나의 예로 이야기를 시작해보려고 합니다. 여기 가방이 있습니다. 가방이 있으면 가방 안에 물건이 들어있겠죠. 물건이 들어있는 이 가방의 내부를 우리가 속이라고 하겠죠. 그리고 이 속을 감싸고 있는 이 바깥을 겉이라고 하겠죠.
그런데 이 가방 안에는 제가 보여드릴 수 있을 만큼 그렇게 소중한 것이 안 들어 있어요. 지갑 하나, 핸드폰 하나 뭐 이렇게 들어 있어요. 그리고 손수건 두 개 이렇게 들어 있는데요. 가방이 잘 휘어지진 않지만 휘어진다고 생각을 하고요. 이렇게 접었던 가방을 펴면 풀어지고, 가방을 다시 접어서 이 안에다가 (사람마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겠지만) 자본주의 사회니까 그냥 돈으로 할게요. 여기다가 10억짜리 수표를 하나 끼웠어요. 그러면 이 가방 전체가 겉이 돼버리죠. 가방 안에 있는 물건들을 포함해서 가방이 겉이 돼버리는 거죠.
어떻게 보면은 요즘에 ‘우리가 사는 게 그럴 수도 있겠다’라는 생각을 많이 해요. 내가 살면서 몸이 있고, 그 몸은 겉과 속으로 이루어져 있는데요. 그러면 속과 겉을 어디서부터 구분하느냐, 물질적으로 복막으로부터 구분하느냐? 어디서부터 하느냐 차이는 있겠지만요.
아무튼 몸은 그렇게 겉과 속이 있는데, 이 겉과 속은 신경으로 연결돼 있죠. 엄밀하게 보면은 마치 사람이 자동차를 타고 있는데 자동차를 자신이 몸처럼 움직이기 위해서 기어도 있고 페달도 있고 핸들도 있죠. 그래서 자동차의 페달을 밟고 핸들을 조작하는 사람이 안이죠. 그리고 자동차는 그 겉이 되죠.
어떻게 보면 애초에 태어나면서 몸을 갖고 태어났느냐, 아니냐의 문제지만 그것도 애매한 부분이 있어요. 태어나면서는 대개 2.8kg에서 강호동 씨 같은 경우는 4.0kg로 태어났다고 하니까. 보통 요즘 3kg 조금 넘게 태어나는데 그 3kg가 아무리 몸이 안 불어도 15배는 붓거든요.
그러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처음부터 이 수십 kg을 다 갖고 태어나는 것은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만들었고 어떻게 보면은 나와서 그냥 생겼죠. 그렇게 비교하면 애초에 갖고 태어났느냐, 만들어놓고 그 안에 탔느냐 하는 차이는 크지 않을 수도 있어요. 어떤 면에서는 굉장히 큰 차이지만요.
아까 제가 속과 겉을 얘기했잖아요. 우리는 분명히 겉이 있고 속이 있어요. 그런데 가방처럼 몸을 이렇게 아주 유연하게 휘감아서 아까 10억짜리 수표를 얘기했지만, 100억짜리 금덩이를 안고 있다면 내 몸 전체가 껍데기가 됐다 이거죠. 내 몸 전체가 속을 포함해서 껍질 즉 보자기가 되는 거죠. 그게 가장 서글프게 사는 거죠.
내 속이 따로 있는데 내 속마저 그렇게 껍데기로 만들어버리는 거죠. 내가 그렇게 집착해서 뭔가를 감싸고 그것이 가치 있다고 생각해서 잡아버리면은 그렇게 되는 거죠. 만화를 그리면 아주 쉽게 그릴 수 있겠죠. 그처럼 느낌이 딱 오잖아요. 서 있으면 이렇게 속이 있고 겉이 있는데, 자기가 전부 오므려 가지고 꽉 안고 있으면 자기가 통째로 겉인데요. 그렇게 안고 있지 않아도 겉이 되는 경우가 있어요.
자동차는 사람을 안에 태우고 속에 태우고 가는 물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저 네팔 같은 데 가면은 아니 우리 사회에는 화물차가 있으니까요. 그 위에 뭔가를 얹고 가죠. 사람도 타고 가기도 하지만 때로는 물건을 싣고 가기도 하죠.
속과 껍데기 그리고 주인과 노예
이렇게 감싸고 있지 않아도 머리 위에 이고 있어도 내가 껍데기인 거죠. 내가 수레인 거죠. 보자기가 겉은 겉인데 그 물건의 겉은 겉인데 보자기가 아니라, 수레인 거죠. 그래서 우리가 살면서 이고 가고 있는 것, 감싸고 가고 있는 것을 빼고 나서 내 속은 어디 있는가? 그 속이 없으면은 내 인생인가? 내가 노예지! 안고 있는 것의 노예고 이고 있는 것의 노예라는 것이죠.
물건으로 이고 갈 수도 있지만, 어떤 이념이 있다! 어떤 이념이 있고, 어떤 가치관이 있다고 하여도 이고 가는 걸지도 몰라요. 그리고 안고 갈지도 몰라요. 근데 이런 일이 왜 벌어질까? 이런 일이 벌어지는 것은 내 몸 자체에서 민주주의가 안 돼서 그런 거예요. 수많은 세포 세포들이 다 자기 얘기를 하고 있고 자기 나름대로 그것도 독립적인 생명에 가까울 정도로 있어요. 하나만 떼가지고 복제하잖아요. 하나만 떼서 복제한다는 얘기는 자체 DNA가 있는 것이고 하나의 독립 생명으로서의 가능성이 있다는 거잖아요.
물론 아직 복제가 성공한 건 아니라고 말씀 드리고 나면 께름칙한데요. 그냥 제 막연한 느낌입니다만 복제는 됐는데 공개를 안 하는 느낌이 살짝 있거든요. 아무튼 복제는 된다는 거죠. 세포 하나만 갖고도요. 엄밀하게 현실적인 하나만 갖고는 되는 건 이론이고 약간의 덩어리가 있어야 되는 거지만, 그 세포 중에서도 완전해야 되고 뭐가 있어야 되고 뭐가 있어야 되고 조건이 있지만요. 조건을 떠나 이론적으로는 하나의 세포가 한 생명을 복제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게 봤을 때 그렇게 복제되는 내 안에 있는 생명들의 이야기를 내가 안 듣고, 내 머릿속에 들어있는 하나의 생각으로 독재를 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것이 가치 있는 일이야’, ‘이것이 의미 있는 일이야’ 하고 감싸버리는 거죠. 감싸는 순간 나는 보자기가 되죠. 내 몸의 독재에 의해서 보자기가 돼버린 거죠. 그것이 머리에 있는 의식 작용일지, 의식 작용 속에서도 어느 세포의 작용인지.
우리가 정부의 작용이라고 그러지만 사실 정부도 구성하고 있는 사람들로 구성돼 있잖아요. 행정부 그러면 행정부가 있지만 행정부도 사람 없이 안 돌아가잖아요. 대통령이 있고 총리가 있고 국무위원들이 있고 기타 또 여러 중요한 기관들이 있고 그 기관들이 일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마찬가지로 어떤 경우에 복제는 대통령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행정부라고 말하지만. 어떤 경우에는 실권 총리에 의해서 이루어질 수도 있겠죠.
그러나 그 한 존재의 독재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 모여 있는 기관의 독재일지도 모르지만, 독재를 하는 순간 그것에 의해서 나는 뭔가를 이고 가고 뭔가를 끌어안고 간다는 거죠. 내 자신이 수레가 되고 내 자신이 보자기가 되는 거죠. 이런 것을 전제로 해서 그걸 못 내려 놓으면 내 속을 어떻게 깨울 것이냐? 내 속이 주인 되는 방법은 내가 수레를 그만둬야 되는 거죠. 설령 이고 가더라도 수레가 아니라 내가 필요해서 들고 가는 사물이어야만 되는 거죠. 안고 가더라도 내가 필요해서 살기 위해서 필요한 생활 도구이거나 뭔가 필요한 물건이어야 되는 거죠. 그런데 이렇게 꼭 끌 안고 있는 내가 보자기가 되면 안 된다는 거죠.
그렇게 속을 주인으로 삼으려면 내려놓을 것은 분명히 있다! 그런데 그게 잘 안 내려진다는 거죠. 쉽게 안 내려지는 이유가 있겠죠. 그런 것을 유지해 왔던 것이 내가 입으면서 만들어져 왔고, 먹으면서 만들어져 왔고, 어딘가에 살면서 만들어져 왔던 것이죠. 식과 의와 주가 모두 그런 것을 만드는 요인이고, 내가 맺고 있는 인간관계가 다 그런 것을 만들어준 요인들인데 쉽게 벗어날 일이 아니죠. 그런데도 우리는 놓지 못해요. 첫 시간에 얘기했듯이 환경운동 불가능하지만 하는 이유는 안 하면 안 될 것 같기 때문에 하는 거예요. 그게 남아있는 사람들이 하는 거예요.
70년대, 80년대 때 이 한국 사회에서 민주화 운동이라는 게 있었죠. 특히 80년대에는 격렬했었죠. 격렬했을 때도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어요. 한 사람들은 안 하면 차마 안 돼서 했던 사람이 있어요. 또 한쪽은 현실적으로 살아보려는 길에 하나였던 분도 있어요.
지금 그렇게 후자로 계시던 분들께서는 거의 여의도에 가 계세요. 여의도 내지 지방의회 뭐 이런 데 다 가 있어요. 반대로 차마 하지 않을 수 없어서 있었던 사람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어요. 그리고 그 사람들은 진짜로 해가지고 그 중에서 일부는 밀려 갖고 여의도 관리하는 사람도 있었는데 다 일찍 죽었어요. 제가 알고 있던 선배, 벗들은 다 죽었어요. 다 아파서 죽었어요. 어떻게 보면 제가 같이 손 잡고 일했던 분들 중에는 제일 제가 장수하고 있는 거예요.
아무튼 안 하고 싶어서 안 할 수가 없어서 하는 것처럼, 그런데도 불구하고 감각상 어디선가 미미하게 속의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내가 보자기가 돼서 살 수는 없지’, ‘내가 뭔가를 모시고 이고 가는 수레가 돼서 살 수는 없지’라는 소리가 들리는 거예요. 느낌이겠지만 소리라고 표현할게요. ‘안 할 수가 없는 거야!’ 안 할 수 없어서 기껏 모여가지고 얘기해 보는 거예요. 얘기해 보다 보면 어느 순간은 버려져요. 어느 순간은 버려져 있어요.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는 것
<논어>라는 책의 첫 구절을 저는 그렇게 늘 해석을 해왔습니다. 학이시습지(學而時習之)라고 할 때 학(學)이라고 하는 것은 타동사예요. 언제나 ‘배우다’라는 것은 목적어를 가지고 있어요. 목적어가 없는 ‘배우다’라는 건 없어요. 그냥 ‘나는 배웠다’ 그러지만은 사실상 괄호 열고 닫고 안에 목적어가 포함돼 있어서 생략한 거예요.
근데 배움의 대상은 언제나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이상 대개는 원칙적으로는 지나가는 것뿐이에요. 1초 전에 지나갔을지라도 내가 보고 순간적으로 깨닫고 배워도 이미 지나간, 0.1초 앞에 지나갔을지라도 찰나 앞에 지나 갔을지라도 지나간 것을 배워요. 외우고 그리고 익히죠.
그 다음 두 번째 구절은 유붕자원방래(有朋自遠方來)예요. 유(有)가 앞에 붙으면 ‘someone’의 뜻이에요. ‘어떤 벗’이에요. 먼 곳에서 찾아온 그 벗이, 먼 곳이든 아니든 간에 나로부터 공간적으로 다른 곳에 있는 벗이에요. 그가 1m 옆에 있어도 내가 아닌 내 좌표가 아닌 근처 좌표예요. 그 벗은 다른 좌표를 차지하고 있어요. 다른 좌표를 차지하고 있는 사람이 내 좌표를 향해서 온다는 것이에요.
엄밀하게 보면 내 삶을 시간적으로 확장할 수 있다면 이 얼마나 기쁜 일이냐! ‘즐겁다’와 ‘기쁘다’를 비슷하게 쓰더라도 둘은 다르지요. 무엇이 찾아오는 순간 내 좌표가 더 확장될 수 있다는, 사실상 내 의식 세계와 내 삶 속에는 소통과 연결을 통해서 공간의 좌표가 확장되잖아요. 하나의 점이 하나의 면적으로 내가 확장되는 거죠.
그래서 시간상으로 내 삶이 확장되고, 공간상으로 내 삶이 확장된다면 얼마나 좋은 일이냐! 그럴 경우에 누군가의 평가에 의해서 나는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나로서 존재한다! 누군가의 평가로 의해 존재한다는 건 지난 시간에도 말씀 드렸고 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고 지지난 주에도 말씀 드렸던 하나의 팍스(Pax), 하나의 패러다임이 주는 평정 상태에 의한 평가인 것이죠. 누군가는 돈이라는 기준에서 나를 평가할 것이고, 누구는 권력이라는 것으로 평가할 것이고, 누구는 지식에 의해서, 누구는 외모에 의해서 평가하겠죠. 그런 평가는 반드시 피라미드를 만들게 되죠.
요즘 젊은 분들이 유튜브에 자기들 옷 입는 걸 올리더라고요. 제가 한 번 봤더니만 연계가 돼가지고 검색 기록 싹 지워버리고 다시 올렸는데도 또 뜨더라고요. 그걸 봤는데, 요즘 청바지에 계급이, 옷에도 계급이 있더군요. 그 계급을 가만히 들여다 봤더니 가격이에요, 가격!
이 젊은 사람들이 기존의 꼰대들이 하는 얘기가 싫어 가지고 자유롭게 살겠다고, 자유로운 옷과 문화를 입겠다고 하면서, 하는 것이 계급도를 그리는 거예요. 스파 브랜드(SPA brand), 컨템포러리 브랜드(contemporary brand) 그 다음에 명품 브랜드, 엣지 브랜드(edge brand) 등등 이런 것을 쫙 그려놓아요.
설령 돈 말고 그리더라도 마찬가지죠. 그러면 인지도나 인기도별로 그릴 수도 있겠죠. 그렇게 그리는 건 다 밖에서는 그렇게 평가해요. 모든 평가는 그렇지 않은 것 같지만 계급 부호의 일부분의 좌표로서 자기를 평가해요. 남이 나를 알아주지 않더라도 즉, 남의 평가에 의해서 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말입니다.
내가 나로서 밝아지기
나는 내 속에서 내가 느끼는 나의 모습으로서 존재할 뿐이라는 거죠. 그렇게 존재하는 순간을 뭐라고 하느냐? ‘입(立)’ 즉 선다고 해요. ‘선다’는 표현을 ‘밝히다’라고 해요. 자기를 밝히는 거예요. 밝힌 게 아니라 밝아진 거예요. 자기를 밝힐 수는 없어요. 어떤 분이 전주에서 지난주에 물어보시더라고요. 자기를 밝히며 살고 싶다고! 제가 그랬어요.
“자동사와 타동사의 밝다는 현실적으로 자동사다. 자기가 할 수 없다. 자기는 그 길을 갈 때 밭을 갈면 농사가 되어지는 것처럼, 농사를 지을 수 없다.”
밭을 갈고 밭을 매고 김을 매고 씨를 뿌리고 거둘 뿐이지, 농사는 그렇게 지어지는 건데 요즘 귀농하는 분들은 농사를 지으러 가시는 거예요. 농사라는 것은 시장처럼 실체가 없어요. 우리 시장에 실체가 있습니까? 마켓(market)은 실체가 있는데 경제학에서의 시장은 실체가 없잖아요. 실체는 돈이고 상인이고 장터고 화폐고 이런 거잖아요. 만질 수 있는 것은 시장이 아니잖아요. 그런 것을 합해서 그냥 시장이라고 부른 거죠.
농사도 그런 거죠. 농사라는 게 씨 뿌리고 미리 갈아놓고 엎어놓고 그리고 이제 적당히 물을 댈 때 물도 대고 잡초도 제거하고 씨도 뿌리고 또 다른 풀들도 뽑아주기도 하고 또 필요하면 거름도 주고 그리고 거두기도 하고 거두어서 보관하기도 하고 필요하면 팔기도 하고… 이러는 총괄적인 과정이 농사지, 농사를 지으러 갈 수 없는 거예요.
똑같은 말인데 옛날 사람들이 나 농사 지으러 간다! 그러면 당연히 밭 매러 가고 씨 뿌리러 가고 이것이 먼저 머릿속에 있었던 거예요. 요즘 분들은 상대적으로 그냥 농사 지으러 간다는 생각에 앞서 있는 거예요. 농사는 되어지는 거죠.
마찬가지로 자기를 밝힐 수는 없어요. 내가 나를 혁명하기 위해서 나를 바꾸기 위해서, 나를 밝히기 위해서, 참된 나를 세우기 위해서 수양을 한다! 절대 수양이 될 리가 없습니다. 수양은 그런 걸 하는 일들을 하다 보면 되어지는 거죠. 되어지는 것을 처음 목표로 삼는 순간 그 목표는 갈수록 멀어져요. 그래서 예전에 한 30년 전에 제가 이런 비슷한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어요. “진정한 농부는 사래의 긴 밭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만큼 되어지는 거예요.
근데 어쨌든 남의 평가로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기로부터 자기를 세우는 거죠. 자기가 밝아진 거죠. 그래서 서른에 입(立)했다. 공자가 열 다섯의 배움의 뜻을 두었고 서른 살에 자기를 세웠다고 하는 것은, 자기가 적어도 누군가의 도구가 아닌 주체로서 성립했다는 것이죠. 주체로서의 자기를 확인했다는 것이죠. 그러면 바로 무슨 자격이 생기느냐, 남을 가르칠 자격이 생겨요.
자기가 자기를 안 세우고 그 도구와 도구를 전달할 수도 있겠죠. 가령 컴퓨터를 통해서 배우잖아요. 유튜브를 통해서도 배우잖아요. (하지만) 유튜브가 생명은 아니거든요. 컴퓨터가 생명은 아니거든요. 도구거든요. 도구를 통해서도 도구를 배울 수 있어요. 그러나 진짜 사람이 말하는 인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통제 영역으로서 인문이든 상호 공존의 기술로서 인문이든 간에 그것은 사람이 자기가 서야만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부끄러움을 아는 사람만이 앞에 설 수 있어요.
사실 앞에 설 때 제가 40대까지, 50대까지는 많이 부끄러워할 수 있어요. 많이 부끄러우면 어느 순간 말이 쫘악 나가요. 말이 청산유수로 나가요. 그래서 40분 그러면 39분 50초에 딱 끝나요. 그런데 그 부분에 대해서 부끄러움이 없어지면 그냥 말이 더 오히려 헤매요. 지금 요즘 제가 좀 그런 상태입니다. 요즘 이렇게 사는 게 별로 부끄럽지 않아요. 편해요.
내가 쓰는 단어와 개념의 정체
아무튼 이제 사람이 보자기가 되고 수레가 되는 것을 피했다면 제가 한번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요. 늘 어디서나 여쭈고 있는 것이기도 한데요. 바로 내가 알고 있는 단어를 한번 쫙 써보자! 명사는 명사로 쓰고, 형용사는 예쁘다 그러면 예쁨으로 해서 명사형으로 만들어 쓰고, 동사도 동명사로 만들어서 ‘나가다’는 ‘나감’이라고 쓰고, 이렇게 명사형으로 만들어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쫙 써보자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어의 구성표가 나를 설명할 거예요.
여론조사를 할 때 5천만 명이 있으면 5천 만 명한테 다 안 물어보잖아요. 기껏 많이 조사해야 5천 명, 대개는 2천 명 하잖아요. 2천 명으로 5천 만 명의 상태를 아는 그 기술이 통계학에서 허용되는 기술인 거죠. 그렇게까진 안 하고 알고 있는 단어를 쭉 쓰라고 하면, 아는 단어는 아마 누구나 몇 만 단어는 될 거예요. 근데 쓰라고 하면 몇 천 단어를 못 쓸 거예요. 천 단어만 써도 여론조사 5천 만 명 대신에 2천 명 (혹은) 5천 명이라고 해도 만분의 1 갖고 이렇게 뭔가를 잡아내는 것보다는 훨씬 더 확률적으로 (통계학을 안 배웠을지라도) 확률이 높죠. 10만 단어를 안다 치더라도 천 단어만 하면 100분의 1밖에 더 되나요? 여론조사 숫자의 100분의 1로 줄어드는 건데요. 그래서 천 단어만 나열해도 저는 그 분이 어떤 팍스를 갖고 있는지 어느 정도는 짐작할 것 같아요.
확실한 건 있어요. 피트니스를 한 직업으로 한다든가 안마를 직업으로 한다든가 치료를 직업으로 한다든가 하는 분들은 자기 직업 때문에 예외적 상황이 있을 텐데 대개 몸과 관련된 단어가 매우 적을 거라는 거예요.
(그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기 삶의 수단이 되는 단어가 많이 나오지, 자기가 자기 자신의 껍데기와 속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는 그렇게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면 아니기를 바라고 살아왔지만 나는 보자기였던 거예요. 서글프지만 보자기의 연이 많이 있었던 거예요. 보자기는 아닐지라도, 차마 보자기라고 스스로 인정할 수 없을지라도... 그리고 이고 가는 수레였을 가능성도 있는 거예요.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분명 최소한 2만 단어는 알고 계실 텐데 누구나 써보라고 하면은 2천 달러가 안 나온다는 거죠. 뒤집어 말하면 뭐냐? 내가 하는 말을 내가 안 살펴보고 살았다는 이야기예요. 저는 앉아서 쓰라 그러면 손가락 부러질 때까지 다 나와요. 한국어 단어만 늘어 써라 하더라도, 저는 적어도 12만 단어가 나와요. 제가 쓰는 단어의 수, 제가 확인한 단어일수록 제가 알아요.
지금은 그 뜻이 무엇인지 모르고 쓴 단어는 거의 없을 정도로 나와요. 50대까지는 그러지 않았을 것 같아요. 지금 제가 드리는 말씀이 막 드리는 것 같아도, 이 단어 하나하나 제가 다 검토하는 단어들이에요. 그냥 무심결에 나오는 단어들은 아니에요. 어떤 것을 선택하느냐를 가지고 순간적으로 안 떠올라서 다른 단어를 쓰는 경우도 있지만 검토되지 않은 단어는 아니에요. 완벽하게 그 상황에 맞는 단어는 아니라고 판단해도 그래도 어느 정도 근접한 단어를 갖다 씁니다.
이것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쓰고 있는 단어를 모른다? 나는 누군가가 주는 단어와 그 용법에 끌려왔다는 거예요. 10분의 9만큼 나는 내가 자체적으로 단어의 뜻을 판단해서 언어 생활을 하고 소통을 해온 것이 아니라, 그렇게 교류를 해온 것이 아니라, 누군가에 의해서 주어진 개념으로 교류하고 소통해 왔다는 거예요. 소통이 아니었을 수 있어요. 그 누군가가 준 그 개념을 싹 드러내버리는 순간 아무것도 안 한 허공의 메아리를 냈던 것과 같은 것일 수도 있다는 거죠.
그리고 남이 쓰니까 써요. 제가 그런 유튜브를 좀 봤다 그랬잖아요. 당황스러워요. 저 친구들이 저걸 다 알았을까? 저는 당황스러운 것을 찾아봐요. 그 단어 하나를 그냥 못 넘겨요. 그러려면 안 쓰는 게 나으니까. 앞에 있는 음식이 독인지 아닌지 모르고 여러분 드실 수 있겠어요? 배는 많이 고프고, 앞에 음식거리가 있는데 이걸 먹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누군가는 말해주지 않고, 꼭 먹어야 된다면 확인 안 하고 먹을 수는 없잖아요. 뭐 이렇게 찍어 먹어보든지 뭔 짓을 해보든지, 은 숟가락을 넣어보든지 뭘 해도 할 거잖아요. 그리고 배가 그다지 고프지 않다면 아쉽지만 지나가겠죠. 내가 먹는 밥보다 내가 쓰는 말이 못하냐는 거예요.
제가 입고 있는 이 옷을 무슨 셔츠라고 그러는지 아세요? 저는 이것을 샴브레이 셔츠라고 그래요. 프랑스 지명 감브레(Cambrai)에서 온 거예요. 감브레 지역에서 이렇게 씨줄로 파란색으로 염색된 씨를 넣고 날줄로 흰 선을 넣어서 만든 것인데, 평직이죠. 그래서 이거 넣고 탁 짜고 탁 짜고 해서 얼핏 보면 푸르무리하지만 탈색 된 색이 나오는 거죠.
우리가 일반적으로 짜는 평직은 잘 구겨지죠. 평직이니까. 이런 것에 두 가지의 색을 넣어서 평직으로 짜는 천을 샴브레이(chambray)라고 불러요. 샴브레이로 만든 셔츠니까 샴브레이 셔츠죠. 색깔은 인디고(indigo)가 들어갔으니까, 쪽 색이 들어갔으니까 샴브레이 인디고 셔츠가 되겠죠.
근데 데님은 뭐죠? 데님은 씨줄이 이렇게 두 개가 오가죠. 촥 오가면 그 사이 하나 탁 집어넣죠. 또 착 가고 집어넣죠. 그러면 이렇게 각이 져서 옆으로 45도가 생기는 모습이 나오죠 그걸 데님이라 그러죠. 아니죠. 데버란이라고 그러죠. 영어로. 데님은 세르지(Serge), 천이라는 뜻이죠. 세르지 드 님즈(Serge de Nîmes), 님(Nîmes) 지역에서 온 천인데 이건 님 지역에서 안 왔어요. 이거는 뭐 데님도 아니고 데버린도 아니죠.
근데 그 능직은 데버린인데 모든 능직을 데님이라 그러면 안 되잖아요. 데님은 어느 지역에서만 있었던 거죠. 근데 데님이라고 불러요. 심지어 막 불러요. 그러면 데님(denim)과 샴브레이(chambray)는 많이 다르죠. 샴브레이 데님 셔츠라고 그래요. ‘안 뜨거운’, 누구 말대로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라고 써요. 쓰는 용어들을 보면서 ‘나 저 친구들 불러다 강의 좀 해야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물론 농담 같은 생각이지만요. 문화를 입으려면은 거기에 포함돼 있는 개념을 놓치고 가면 안 되잖아요.
용어의 정리
아무튼 자기 몸에 대해서도 너무 모르는 단어가 많아요. 중요한 용어라는 것은 자기 몸과 관련된 용어인데요. 제가 오늘부터 이제 한 2시간 동안 말씀 드리는 용어들은 여러분들이 낯선 용어들이 많이 있을 수 있어요. 낯설지 않은데 들어보니까 낯선 것도 있을 수 있고요. 정말 낯선 것도 있을 수 있고요. 너무너무 익숙한데 ‘이런 거였어?’ 하는 것도 있으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은 정확히 알고 계신 분도 있을 수가 있어요.
정몽주 시인가요? 그렇죠. “이 몸이 죽고 죽어…” 거기에 ‘‘’넋이라도’라는 표현이 나와요. 혼백(魂魄)이라는 표현을 쓰죠. 한자로는 혼백이라 그러는데 혼과 백이 다르니까 혼백일 거 아니에요. 같으면 혼이거나 백이거나 둘 중에 하나만 썼겠죠. 그러면 왜? 섞어서 혼백이라고 했을까요?
우리가 쓸 때 항상(恒常)이라는 표현도 제가 늘 말씀드리지만 항과 상의 뜻이 다르니까 항과 상을 같이 썼겠죠. 이런 건 제가 자주 드리는 예에요. 우리 건강(健康)도 건(健)과 강(康)이 다르니까 나눠서 붙였었겠죠. 예를 들어 ‘건’은 형태적인 정상적인 또는 일반적인 형태의 건전함이죠. 형태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죠. ‘강’은 에너지적으로 문제가 없는 것이죠. 근데 구분이 잘 안 되니까, 그냥 건강이라고 그러는 거죠. 그래서 옛날 분들은 그 중에서 에너지적인 게 더 중요하니까 건강이라고 하지 않고 강건이라고 표현했죠.
서양 문명이 들어오고 그 문명에 의해서 일본 사람들이 한자의 어순을 많이 바꿨죠. 그렇게 일본 분들을 거치면 단어가 이상해지는 게 많아요. 여러분 삐라 아세요? 하늘에서 뿌리는 전단지 삐라가 일본 말인 거 아시죠? 일본 말이 아닌 것도 아시죠? 일본말은 비라죠. 비라! 외국 말은 한국에 들어오면 웬만하면 어느 순간 경음화가 돼요. 그래서 비라가 삐라가 됐죠.
비라는 원래 일본 말이 아니죠. 영어의 빌(bill)이죠. 현금도 되고 수표도 되지만 전단지도 되죠. 빌을 뿌린 거죠. 일본 사람들은 그걸 비라로 발음했죠. 우리는 삐라라 그러죠. 나중에 줄여가지고 80년대 운동권 학생들이 그걸 뭐라고 그러는지 압니까? 삐라를 p라고 그랬어요. 삐라의 P니까 알고 보면 영어의 b였어요. 한 바퀴 돌지만 영어 b로 대문자 약자가 될 것이 p가 약자가 됐어요. 아무튼 그렇게 일본 분들을 거치면 물질 중심적인 단어가 앞에 가요.
그리고 恒도, 우리가 의식적으로 우리의 생각에 ‘늘’이라고 생각하면은 항이 되고 마음 심(心)이 붙죠. 이와 달리 常은 우리의 의식과 독립적으로 늘 있는 거죠. 그렇지만 구분이 잘 안 되니까 붙여 쓰죠. 그래서 인간으로 살아야 될 떳떳한 길, 오상(五常)은 상도(常道)라고 하죠. 항심(恒心)은 항상 그냥 우리의 주관적인 영역 속에서의 장기적인 영속성이에요.
슬과 넋
혼백도 그런 거죠. 한자로 혼백도 혼과 백이 다르니까요. 혼백이 우리 한글로 번역될 때 한 글자로 번역된다면 이것은 이상한 거죠. 그러면 혼백에 해당되는 우리 말이 약했거나 아니면은 발달이 안 돼 왔거나 두 가지를 애초에 나눠 부르는 언어가 없었거나 뭐 이런 걸 텐데 그렇지 않거든요. 근데 ‘넋’이라고 그래요.
자동차가 있잖아요. 자동차가 사람의 몸은 아니지만 사람의 몸이 부릴 수 있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져 있잖아요. 그리고 그런 얘기도 하죠. “자동차도 자꾸 운전하다 보면 길이 든다”고. 길이 들었다는 얘기를 조금 더 확장하면 자동차가 내 것이 돼가고 있다는 이야기죠. 그러니까 ‘나’로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죠. 자기화 되어가고 있다는 얘기죠. 자기화된 성격이 순수 기계인 자동차에도 생겼다는 거죠.
우리가 ‘넋’이라고 말하는 것은, 우리 몸에 또는 몸뚱이에 ‘나’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생겨나 있을 때, 그렇게 생겨나 있는 자기화된 영역을 ‘넋’이라고 해요. 그러니까 자기가 아니에요. 자기화가 되어 있는 내 몸이 내가 살다 보니까 오랫동안 길이 들었잖아요. 내 속이 데리고 살다 보니까, 신경을 연결해서 끌고 다니다 보니까 길이 들었잖아요. 고장도 내 길 낸 모습의 하나겠죠. 병 난 것도 내 길 낸 모습에 하나겠죠. 어딘가 근육이 강화된 것도 내 길 내 모습에 하나겠죠. 그래서 길이 내져 있는데, 길이 나져 있는 뭔가의 영역이 있다는 거죠. 그걸 ‘넋’이라고 하는 거죠.
그러면 반대로 자기화를 시킨 그 자기는 뭐냐? 그게 혼이죠. 혼은 우리 말로 ‘슬’이라고 불러요. 그러니까 혼백이 있고 없고 하면, ’슬’과 ‘넋’이 있고 없고 간에 그렇게 불러요. 근데 이런 것 자체의 말이 일단 나오려면 몸이란 말이 먼저 나와야죠. 그래서 알고 계시는 분들 많으시겠지만 몸을 우리가 만질 수가 없어요. 몸은 시장처럼 만질 수가 없어요.
몸뚱이와 몸
만질 수 있고 냄새 맡을 수 있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몸의 재료인 몸뚱이에요. 물질화 돼 있는 영역이에요. 손을 만질 수 있고 팔을 만질 수 있죠. 어제 집 정리를 하다가 이마를 박아가지고 지금 상처가 나 있죠. 그래서 평생 안 사던 이런 잠시 생경한 클리오에서 나온 쿠션이라는 걸 사가지고 감췄어요. 그래서 표가 잘 안 나도 지금 찍어 바른 거 잘 찍어 발랐죠.
아무튼 그런 건 만질 수 있어요. 머리카락도 만질 수 있고요. 다만 몸은 만질 수가 없어요. 만지는 건 엄밀하게는 몸뚱이에요. 우리가 몸이라고 말하면서도 몸뚱이라고 생각하고 쓰면 문제가 안 돼요. 그러나 어쨌든 몸은 시장처럼 운행의 시스템이에요. 만질 수는 없지만 팔이 있고 다리가 있고 또 신경이 있죠. 이들이 안에 있어서 해부하면 볼 수 있죠 그것이 머리카락도 있고 귀도 있고 그런 것들이 운행되고 있는 하나의 시스템이 몸이에요.
그래서 몸은 원래 동사 ‘뮈다’라는 말에서 왔어요. 하지만 가슴이 ‘미어지다’ 할 때 가슴이 ‘미다’는, 우리가 생각할 때 속이 이렇게 확 막히는 그런 걸 ‘뮈’라고 하는 게 아니에요. ‘미다’는 속이 움직이는 거예요. 뭔가 움직이는 것! 움직이는 것의 ‘뮈다’의 동명사형이 뮈욤이고, 뮈욤이 몸이에요.
이런 것은 뭐 어떻게 확인하느냐? 저도 배운 거 말고 학문적으로 확인을 해야 되기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지리지라든가 인명이라든가 이런 것에 원래 뭐라고 불렀다를 통해 확인하죠. 가령, 충청북도에 있는 칠중현(七重縣)은 ‘난은(難隱)’이라고 불렀다고 하죠. ‘난은’은 그러면 당시 발음이 뭘까? <광운성계> 같은 걸 뒤져 갖고 당시 발음을 복구한 거예요. 복구를 해서 보니까 ‘난안’이었어요. 옛날에는 칠중이라는 지역을 ‘난안’이라고 불렀구나 확인할 수 있는 거죠. 일곱 칠(七) 거듭 중(重) 해서 ‘일곱 겹’인데, ‘난안’은 그 가운데 ‘칠(난)’이라는 것만 있구나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 번역한 게 아닌 거죠.
이런 식으로 복구해서 우리 말이 어떻게 변천해 왔는지, 훈민정음 전까지 어떻게 변천해왔느냐를 찾아낸 거예요. 그리고 <고려도경(高麗圖經)> 같은 데도 남아 있는 게 있는데 그때는 또 송나라 때 사전을 갖고 발음을 보고 하면 돼요. 큰 차이가 없어요. 우리 말의 발음의 차이는 1896년을 기준으로 해서 전후로 바뀌어요.
1896년 대한제국 국어 교과서가 나오기 전까지 발음이 그다지 변화가 없어요. 근데 대한제국 교과서가 나온 지금으로부터 대략 127년 전,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 사이에 엄청나게 많은 말이 변화가 일어나요. 그만큼 교류가 많았다는 뜻도 되고 단어의 사용이 많았다는 뜻도 되고, 단어를 함부로 썼다는 뜻도 되죠. 바쁘니까요. 단어가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통제가 사회적으로 잘 존재하지 않았다는 뜻도 되고 됩니다.
그렇게 바뀌는데 그때 보면은 동사형이 ‘뮈다’이고, 동명사형이 뮈욤이에요. 뮈욤의 축약 발음이 몸에요. 따라서 몸은 우리의 물질적 구성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근데 우리는 몸을 갖고 있지만 몸뚱이가 있기 때문에 몸을 갖고 있는 거죠. 엄밀하게 말하면은 몸뚱이가 있으면 몸이 있겠지만 몸뚱이가 없어도 몸은 있을 수 있어요.
언제? 꿈에! 내 상상에! 몸뚱이를 벗어나서 몸을 굴릴 수 있는 기회는 꿈에 약간은 연결돼 있어요. 소변이 너무너무 마려워가지고 꿈에서 소변 보면 시원하지 않을 수가 있죠. 그래서 일어나서 소변 보러 가죠. 안 일어나고 하면 큰일 나죠. 어른이 대실수를 할 수가 있죠.
근데 그럴 때 대실수하는 창피함보다도 그런 꿈이 없는 게 부끄럽고 안타까운 거예요. 사실은. 이불 적시면 빨면 되죠. 자꾸 그러면 이불을 깔지 말고 덮지 말고 자면 되죠. 그것은 부끄러우나 내 몸이 해결할 수 있는 거예요. 꿈이 없다는 건 내 몸이 도와줄 수가 없는 거예요.
몸뚱이를 굴리는 몸이 있는데 이 몸이 몸뚱이가 없을 때는 안 굴러간다 그러면 몸뚱이로부터 얻은 건 뭘까요? 현실적인 수확 밖에 없는 거예요. 몸뚱이로부터 내 마음에 생긴 그 영향은 없는 거예요. 꿈에서는 어쨌든 잠에서는 또는 상상에서는 내 몸뚱이를 벗어나서 몸을 움직일 수 있어요.
근데 그렇게 몸을 움직이는 사람은 그것이 버릇이 돼서 그 움직임으로 거꾸로 몸뚱이를 움직이기도 해요. 병든 몸뚱이가 낫기도 해요. 아팠던 몸이 낫기도 해요. 그래서 그런 것을 읽어서 정신 작용의 일부분이라고 얘기할 수 있겠지만, 정확하게는 몸이 몸뚱이를 떠나서 이미 하나의 시스템으로 움직일 만큼 자기 안에서 자기의 영역이 됐을 때 가능한 거예요.
마음
어쨌든 그런 몸이 있고 움직이는 몸의 뚱이가 있어요. 몸을 움직이는 무엇이 원래 또 있었을까? 꿈 속에서라도 나를 막 움직이고 하는 게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 것을 크게 마음이라고 불렀어요. 마음에서 우리 말의 ‘음’은 원래 ‘ㅜ’ 아니면 ‘ㅓ’가 음운 변화된 거예요. 1930, 40년대 이후 서양에서 영문학을 배워오신 분들이 만들어낸 것이 ‘ㅡ’예요. 대개 ‘ㅡ’는 자체적으로 쓰이는 것이 거의 없어요. 지시대명사의 ‘그’가 있는데 그것도 원래 ‘긔’예요. ‘그’와 ‘ㅣ’가 결합된 거예요. 그 사람이 ‘긔’ 사람인데 ‘ㅣ’가 떨어지고 ‘그’만 남은 거죠. ‘ㅡ’는 원래 대한제국 교과서에도 없던 표현이에요. 있으면 실수예요.
지금은 많아요. 그래서 우리가 마음이라고 부르는데, 예전 문장은 다 마움이라고 돼 있어요. 마움이라고 하는데 마암이라고 돼 있는 경우도 있어요. 심지어 마알이라고 돼 있는 경우도 있어요. 마음을 마알로 쓰는 경우도 있어요. <고려도경>의 발음을 옮겨서 쓰면 마알이라고 나와요. 마움의 ‘마’라는 것은 우리가 많이 쓰고 있죠. ‘맞다’ 아직도 쓰고 있어요. ‘맏이’와 ‘마땅하다’ 이에 대한 뜻으로 뭐가 있죠? 앞에 있는 것, 맞다, 맞는 것, 뿌리가 되는 것… 이런 거죠. 그래서 뿌리가 되는 진정한, 마땅한 움이 ‘마움’이에요. 마땅한 움이고 마땅한 알이에요.
그러니까 내 안에 있는 뿌리가 되는 움이에요. 이 움이 가만히 몸을 못 움직여요. 몸뚱이를 못 움직여요. 그러니까 가만히 있는다고 해서 몸의 작용이 일어나지 않아요. (마음이라고 할게요) 이 마음이 뭔가 연결이 돼야죠. 마음, 우리가 싹이 튼다 할 때 진정한 움인 진정한 꿈이 뭔가를 움직이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해요.
자동차도 면허를 얻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해요. 자동차는 조작하는 게 많지 않아요. 뭐 좀 누르고 대충 핸들 움직이고 발 좀 움직거리고 이러면 돼요. 근데 몸은 저 같은 사람이 그런 말하면 웃기는데 몸은 그것보다는 더 오랜 훈련이 필요해요.
한때 저하고 절친이었고 후배면 후배지만 절친이었는데 박사학위가 있는 사람이 있었어요. 사회학 박사까지 갔어요. 어느 날 운전면허를 실기 말고 필기를 두 번을 떨어지고 왔어요. 그때 제가 놀렸어요. “너 박사 논문 누가 써줬지? 논문 너 아무리 봐도 나이롱 같다.” 그랬더니 그 다음에 붙어 오더라고요. 근데 실제로 실기도 좀 애먹었던 거 같아요. 사람이 그런 것도 힘든데 그래도 1년 안에 웬만한 분들은 면허는 못 따도 차를 다 몰 수는 있어요.. 앞으로는 더 쉬워지겠지만요. 앞으로는 입력만 해놓으면 다 갈 텐데요.
객담으로 저는 자율주행 자동차 나오면 안 사요. 언제 사긴 살 거예요. 언제? 화물차와 대형차가 자율주행이 된 이후에 살 거예요. 화물차와 대형차가 자율주행이 되고 나면 그 다음에는 겁날 게 없어요. 근데 화물차와 대형차가 자율주행이 안 되면 도저히 탈 수가 없어요. 이 사회에서 자율주행이 완성되려면 화물차와 대형차가 먼저 자율주행이 되면은 안심하고 살 수 있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제가 한때 철이 없어서 그런 걸 만들어보려고 잠시 한 적이 있었는데 차는 아무리 비싸고 싸고의 차이가 있어도 적어도 차의 안전성은 차의 프레임의 소재가 바뀌어서 평등하기를 바란 적이 있어요. 그리고 강철을 자꾸 쓰는 게 아니라 복합 애시드를 써서, 멀티 애시드는 그걸로 비행기에 들어가는 물건도 만드니까요. 그런데 그건 나중에 다시 산화시키면 녹아버리니까.
아무튼 그걸로 하면 차체끼리 박치기를 해도 서로 받아도 G90과 소울이 박아도 안전성에서는 보장이 둘 다 된다는 거죠. 그게 되고 그 다음에 대형 차가 자율주행이 되면은 그때는 노인에게 면허 반납하라가 아니라 노인에게 면허를 자꾸 강요해야죠. 노인들이 최대한 이용해야죠. 목적지 잘못 입력해서 포천 가는데 부산은 갈 수 있겠지만 사고를 내지는 않을 테니까요. 아무튼 객담을 했습니다만.
마음이 몸을 부리는 시간
사람은 몸을 부리는 데 최소한 1년 걸려요. 그죠? 인간이 몸으로 진화해 오는 데는 아메바에서도 진화가 쭉 돼 왔겠죠. 근데 그 진화의 과정을 일단 복원을 해야 돼요. 태어나서 그게 1년 걸려요. 직립하는 인간으로서의 능력을 복원하는 데까지만 하더라도 1년이 걸려요. 1년 사이에 수백만 년의 진화를 복원하는 거죠. 어쩌면 더 긴 수억 년의 진화를 복원하는 거죠. 복원하고 나서도 섰다고 해서 잘 걷는가 하면 그렇지 않죠. 까치발 딛고 뛰뚱뛰뚱 하다가 자빠지고 엎어지고 하잖아요.
유치원 애들은 고학년 7살이 되면 가끔 가다가 싸우고 와요. 싸우고 어디 찢어져 오고 이래요. 저는 안 키워봐서 모르지만… 근데 유아원 애들은 사고를 안 내요. 잘 안 다쳐서 와요. 저것들끼리 싸울 만큼 자기 몸뚱이를 못 부려요. 싸울 수 있는 정도로 몸을 부리자면 7, 8살은 돼야 돼요. 내 몸뚱이에 대한 완벽한 면허를 얻기까지 7년이 걸려요. 사회는 이걸 인정하지 않아요. 사회는 그들을 미성년이라 하면서 몸뚱이를 굴리는 완전한 몸의 능력을 획득했다고 보지 않고 더 연장시켜서 16세, 18세까지 막 끌어올려요.
성인이라는 칭호를 어김없이 받으려면 우리 나이로 20살이 돼야 돼요. 20년 동안 면허가 유보된 겁니다. 면허 유보됐다고 세상에 선거권도 안 줘요. 이런 불공평이 있을 수가 없죠.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하면은 당연히 참정권이 있어야죠. 애들한테 재산은 줄 수 있어요. 그럼 참정권도 그래야죠. 줘야죠. 주고 성인이 될 때까지 참정권을 제한해서 행사권을 제한해서 어른들에게 위탁시켜놓으면 되죠. 그 부모가 대신 행사하면 되죠. 왜 빼 써요? 처음부터 말도 안 되는 거고요. 이런 얘기 헌법 소원하면 굉장히 심각해져요. 예전에 헌법소장 재판소 소장하던 분 중에 친구가 한 명 있었어요. 그래서 그 얘기를 했어요. 제가 그랬더니, 웃으면서 농담 반 진단 반으로 “제가 헌법재판소에 있을 때까지는 소원하지 마십시오.”라고 했습니다.
실제 소원하면 골치 아파져요. 세계 어느 나라 사람들도 소원하지 않아요. 그건 당연하게 생각해요. 재산권은 행사할 수 없을 뿐 재산권은 있는데 왜 참정권은 안돼요? 행사 되지 않아도 있어야죠. 애 낳으라고 그러면서 참정권도 안 주면 어떻게 해요? 애 둘인데 그리고 가족 중심으로 살아라! 그러면 가족의 대표가 나가지고 그 집에 4명이면 4표 행사하면 돼지. 4표를 잘못 행사했든 말든 그 집안 문제고.
전부 다 아버지 표를 엄마가 모른대. 그게 가족이에요? 남편 보고 어디 누구 찍어 그러면 “왜 물어?” 그러죠. ‘왜 물어’라고 물으면 그건 가족이 아니에요. 남남이에요. 어떻게 그게 가족이에요. 그리고 아들 보고 누구 찍어 그러면 “어머니 그런 거 왜 그래요. 그건 개개인의 권리인데” 하면, “나가 살아!” 그래야죠. 가족이 그렇게 해체하면서 가족끼리 잘 살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들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당연한 듯이 받아들여요.
왜? 내 자신의 삶을 검토해 본 경험이 너무 적어서예요. 우리는 말도 안 되는 얘기에 100% 환호와 박수를 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 이런 몸에 대한 용어들이 점점점 하나씩 늘어나잖아요. 내가 무엇에 박수를 쳤는지 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생기신 거예요.
아무튼 몸을 그렇게 해서 몸이라는 게 생겨요. 제대로 된 몸이 생겨요. 현대 사회에 인정된 것으로 하면 20년, 제가 보기에는 7년 정도면은 몸뚱이를 움직일 수 있는 면허 아닌 면허를 그렇게 얻는데, 그 면허를 습득하는 자가 누구냐 마음이겠죠.
마음은 어떻게 습득하느냐?. 애를 보행기에 태우고 보행기 상태에서 걸어도 애들이 빨리 못 걸어요. 왜? 보행할 수 있는 그 아이가 보행할 수 있는 다른 조건이 안 갖춰졌기 때문에 못 걸어요. 보행기 태워서 다리를 훈련시키면 걸을 것 같죠? 아기만 버려요. 까치발로 딛는 습관만 생겨요. 보행기 탔던 세대는 불행한 세대일 수 있어요. 제가 보행기를 못 타봤다고 심술을 부려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제 세대가 타봤을 리가 없잖아요.
마음씨
언제 타느냐? 마음이 작용을 해야만 연결이 돼요. 태양계가 태양의 힘을 발휘해야 태양계가 돌듯이, 태양계에 있는 행성들이 돌아야 뭐가 되듯이, 그렇게 마음이 작용을 해서 마음의, 무언가의 행성적인 몸뚱이와 연결될 수 있는 시스템이 커야만 돼요. 그래서 아무리 두 달 된 애를 보행기를 태운다고 해서 걸을 수 없어요. 몸의 뿌리도 성장을 해야 되지만, 동시에 함께 그 안에서 마음도 그것을 움직일 만큼의 (성장과 진화라기보다는) 복원이 이루어져야 돼요. 그렇게 복원된 마음의 작용세를 뭐라고 그러느냐? 우리가 마음씨라고 그래요.
마음씨가 ‘착하다’ ‘못됐다’에만 쓰는 말이 아니고, 마음이 몸뚱이를 움직이기 위해서 또는 몸뚱이를 통해서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 발동된, 마음이 만약에 가운데 중(中)자를 써서 그냥 중심부라고 한다면, 그 중심부가 작동하기 위해서 발현된 최초 또는 발현된 시스템을 마음씨라고 하는 거예요. 손이 있잖아요. 손이 있는데 손이 가만히 있다고 뭘 할 수 있나요? 열심히 손이 훈련이 되어 관련 돼서 무언가를 할 수 있게 됐어요. 그걸 솜씨라고 하죠.
볍씨 할 때 씨도 마찬가지예요. 이미 작동이 돼야 볍씨예요. 그렇지 않으면 그냥 벼 알이에요. 그냥 벼 알이고 낱알이에요. 낱알이 볍씨가 돼야 하고, 이를 뿌리면 뭐가 나오죠? 씨라는 것은 어떤 실체가 자신을 발현하고 드러낸 상태의 시스템을 말해요. 그러니까 마음이 마음씨를 발휘하고 마음씨가 몸뚱이를 움직여서 마침내 훈련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 몸인 거예요. 그렇게 해서 우리는 존재하는 거죠. 그런데 마음씨가 안 따라오잖아요. 몸을 아무리 훈련시켜도 그 아이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어요. 그럴 경우에 물리치료를 받거나 재활치료 또는 성장치료를 받아 해결될 문제가 아니에요. 그 아이는 아주 매우 어린 아이지만 마음에 대한 발현의 훈련과 자극을 받아야 돼요.
그래서 그런 것은 현대 의학과는 상충할 수 있는 게 많아요. 요즘 양의학에서는 한의학을 한무당이라 불러요. 무당스러워요. 자기가 맥도 못 짚어요. 물론 맥만 짚으면 큰일 납니다. 한의사가 맥 짚기 시작하면 그걸로 의사 생명 끝납니다. 맥 짚는 것만 너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깊어져요. 옛날에 청나라 때도 <대청의방>에 맥 짚는 맥기가 따로 있었어요. 맥 짚는 사람은 맥만 가지고 평생을 파야 돼요. 다른 것을 겸업할 수가 없어요. 그러면 또 약에는 약기가 있고 다 분야가 있었어요.
기본은 짚어야 되는데 맥을 못 짚으면 어떻게 해요? 요즘에 병원에 청진기 갖고 대가지고 하는 내과 의사들 계십니까? 없죠. 그분들은 70대 중반 이후예요. 그래서 더 이상 드라마를 봐도 청진기를 걸고 다니는 의사는 안 나와요. 마침내 드라마에서 아예 청진기 자체가 안 나와요. 그죠? 근데 어쨌든 청진기랑 맥이랑 비슷한 건데 좀 짚었다 쳐요. 근데 못 짚고 서양의학에서 발전시킨 기계를 갖다 놨어요. 그럼 머죠? 그리고 치료를 제대로 못하고… 그러면 무당이죠. 그 의학의 가치가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의학의 현실이 그렇다는 거예요.
반대로 서양의학은요? 로버트 놀이에요. 사람이 하는 게 없어요. 이제 드디어 하는 게 없어요. 손가락으로 키보드 움직이는 정도예요. 의학 드라마에서 아직도 배 팍팍 열지만 팍팍 여는 일은 드물어요. 너무너무 안전해서 배 여는 게 쉬울 때 그럴 때나 배 열거나, 아니면 이판사판을 해보자 할 때 배를 열지 배 잘 안 열어요. 앞으로는 더 안 열 거예요. 이제 한쪽은 무당이고 한쪽은 로보트들이 사람의 몸뚱이를 치료하게 되는 거죠.
몸과 마음 그리고 슬과 넔
문제는 아까 말한 마음씨가 안 갖춰지면 어쨌든 몸뚱이를 움직일 수 없어요. 그 과정이 잘못되면 아이들의 마음씨를 제대로 못 펴주면 일정 시기에 뭔가 막혀서 나가요. 대부분 정상적이면 다 그냥 마음씨가 작동해서 나오는데 요즘은 환경 요인도 커요. 중금속이라든가 뭐 이런 것들이 작동하면 마음씨가 몸뚱이로 펴지는 데 지장이 있을 수 있어요. 그것은 마음씨는 펴졌는데 그것이 몸으로 미치는 부분을 가로막을 수가 있어요. 한자로 왜 신경을 귀신 신(神)자를 썼겠어요? 내가 막아버릴 수도 있어요. 그런 것이 거듭되면 특이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될 수 있죠.
그렇게 몸이 있고 마음이 있고, 몸에는 몸뚱이가 운행 대상으로서 물체화되어 있죠. 마음은 몸뚱이와 연결되고 몸을 이루기 위해서 마음에 작용이 있는 마음씨가 있어야 되는 거죠. 이 마음을 우리가 ‘슬’이라고 그러거든요. 아까 그랬잖아요. 몸에서 몸뚱이를 움직였는데 몸뚱이 없이 꿈에서도 움직여요. 몸뚱이 없잖아요. 움직였는지 안 움직였는지 누구도 몰라요. 자기밖에 몰라요. 지켜보면은 몸뚱이에서 원래 생긴 흔적이기 때문에 그런 꿈을 꾸고 있으면 몸뚱이가 꿈틀꿈틀하고 눈도 꿈쩍꿈쩍하기도 해요.
엄밀하게 몸이나 몸뚱이를 다 움직인 건 아니에요. 그리고 꿈을 꾸면서 막 몸이 막 작용하고 있는 거예요. 그 작용하는 것이 만약에 몸뚱이가 코마 상태에 들어가 있다고 한들 없어지겠냐는 거예요. 코마 상태에 들어갔다, 아예 코마보다 더 깊은 상태에 들어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그의 생명이 유지되고 있다는 그런 꿈을 꿀 거예요. 그렇게 남아 있는 그 작용을 ‘넋’이라고 해요.
‘넋’은 몸뚱이와 상관이 없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러나 원래 몸뚱이로부터 연결돼 있었던 작용인 몸으로부터 온 거죠. 그러니까 몸뚱이를 잃어버린 몸, 무게도 없고 형상도 없어요. 그걸 ‘넋’이라고 해요. ‘넋’이라는 게 막연한 의미의 귀신스러운 것, 죽으면 날아가는 0.16g짜리 뭐 이런 게 아니에요.
그럼 ‘슬’이라는 거는? 마음은 첫 움이지만 펴지기 전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왜? 너무나도 보편적이어서 고유의 DNA가 없는 거예요. 쉽게 비유하자면 마음씨죠. 그 마음씨도 경우에 따라서는 움직여요. 그걸 ‘슬’이라고 불렀어요. 그러니까 ‘슬’과 ‘넋’은, ‘넋’은 물질화되면은 어떤 표현이 있기가 어렵지만, ‘슬’은 물질화가 될 수 있죠. 거꾸로 마음으로부터 떠났는데도 그 마음씨의 흔적은 몸뚱이 안에서 남을 수가 있어요.
이렇게 비유하면 쉬울 겁니다. 닭에 목을 쳐놔도 닭이 한참 움직여요. 닭의 몸의 운행 작용 때문에, 그 관성 때문에 움직일까요? 아니면 닭이라는 것에 있었던 그 몸의 씨 작용 때문일까요? 애매하죠. 근데 그걸 씨 작용이라고 해본다면 몸뚱이를 잃어버리거나 정지돼도 일시 또는 한참 동안 일정 기간 동안 유효하게 마음씨는 작용할 수 있어요. 그걸 ‘슬’이라고 했던 거예요.
슬개 혹은 슬애
따라서 그런 것은 일정한 경우에는 몸에 들어가서 관성을 만들기도 해요. 왜? 지가 몸뚱이랑 연결하면서 뭔가 작용을 했기 때문에 그 몸뚱이 안에 남아 있는 거예요. 그래서 엄밀히 보면 ‘넋’과 ‘슬’은 약간 분간이 어려운 데가 있어요. 그래서 혼백이라고 붙여서 말하는 거고 ‘슬’과 ‘넋’이라고 하는데, ‘슬’이 대표적으로 들어가서 물질화돼 있는 영역도 있어요.
우리는 그걸 ‘슬개’라고 그래요. ‘슬애’라고도 불러요. ‘애’라는 것은 물질화된 생명이라는 뜻이에요. 기어다니는 생명은 ‘기애’예요. 곧 ‘게’예요. 원을 죽 그리는 생명체는 ‘솔애’ 곧 ‘솔개’예요. 그런 애를 끓여놓으면 ‘찌개’예요. ‘애’라는 것은 물질화된 그 무엇, 물질 이상의 그 무엇 혹은 그런 일일 때 붙여요.
옛날 분들이 슬개라는 것을 그렇게 봤던 거예요. 그래서 슬개는 흔히 사람의 슬기를 자극하기도 하고 관장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혼을 관장하기도 해요. 이런 이해에서 예전에 전혀 다른 영역에서 인체에 대한 이해가 발전해 온 기마종족의 인체론과 중국 한의학의 뿌리가 인체론이 내용에서 궤를 같이 해요. 가령 <황제내경(黃帝內經)> ‘영추(靈樞)’ 같은 데에 나오는 내용이 궤를 같이 했던 거예요. “간은 혼을 갈무리하고”라고 하죠. 그때 간이라는 건 우리가 말하는 쓸개와 간까지 표현한 것이에요.
아무튼 그런 것이 물질화돼 있다고 보면 됐던 것에요. 그것이 ‘슬’이에요. ‘슬’은 ‘슬개’에만 들어가서 물질화되는 것이 아니라 수많은 영역에 있을 수 있어요. 사람이 특히 생각을 많이 하고, 자기를 보살피고 살면 온 몸이 ‘슬개’처럼 될 수가 있어요. 온몸이 정신덩어리가 될 수가 있어요. 그렇게 되면 등신(等神)이 되죠. 뭐 물질 가진 등신이 되죠.
아무튼 손가락 끝으로도 실제로 섬세하게 자식을 만지고 했던 부모들 있잖아요. 특히 어머니요. 앞으로 미래의 꼰대가 될 무뚝뚝한 아버지를 빼고요. 남자들은 그냥 다 꼰대입니다. 우리 멀지 않았어요. 남자들은 진짜 배우기를 싫어해요. 여자들은 배우는 거 싫어하면서도 열심히 배워요. 보면 진짜 필요한 걸 배워요. 남자들은 필요한 말만 한다고 말을 적게 해요. 사실 그게 아무런 필요 없는 말이에요.
여자들은 아무 쓸모 짝이 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 같잖아요. 다 쓸모 짝이 있다는 거죠. 제가 증명해 드릴게요. 평생 필요한 말만 하고 살았던 남자가 그 필요한 일에서 나와서 퇴직을 하는 순간 친구가 하나 없어요. 그게 필요한 말만 했던 결과물이에요. 아무런 쓸데 없는 농담이나 하면서 놀던 동네 아주머니들이 70이 넘어도 여전히 친해요. 어느 게 더 실용적이에요? 알 수 없는 거예요. 제가 하는 것도 일방적인 말입니다만 객담으로 드리는 말씀이고요.
아무튼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는 손만 대보고 그 아이가 슬픈지, 지금 기뻐하고 있는지 알아요. 그때는 적어도 자기의 ‘슬’이 손가락 끝까지 가 있었다는 거예요. 이것도 제가 지금 앞으로 드릴 큰 이야기에, 자세한 이야기의 줄거리만 말씀 드리는 거에요.
몸의 언어에 친숙하기
이와 같은 용어들이 앞으로 200개가 나올 겁니다. 200개 많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러분들 집에 가셔서 신발장 열어보고 신발에 관련된 거 단어 한번 꼽아보세요. 신발 밑창, 신발 끈 단어가 한두 개예요? 그 다음 옷장 열어보세요. 그 다음에 주방에 가서 그릇장 한번 열어보세요. 단어 200개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200개를 왜 부담스러워 하십니까?
예전에 제가 중국에 잠시 머무를 때, 산동 친구들도 남경사범대학교에 유학 와 있고 강소성 본지 아이들도 유학이 아닌 준 유학이지만 기숙사에 있었습니다. 학교를 다녀요. 그리고 저 동북 지역 청년들도 와서 학교를 다녀요. 우리 한국 학생들도 교환 학생 와 있는데 가끔 제가 밥을 사줘요. 제가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사주는 거예요. 남경사대에 전각루라든가 2층에 식당이 싸고 괜찮은 게 있는데, 학생들은 그래도 감히 못 들어가요.
밥을 먹으면 강소성에서 온 아이들은 워낙 양자강(장강) 이남의 비옥한 땅에서 자랐잖아요. 온갖 야채가 다 자라는 데서 자랐잖아요. 야채 이름을 무슨 야채, 무슨 야채라고 남학생 여학생 할 것 없이 다 잘 알아요. 산동성에서 온 학생들은 남녀 할 것 없이 그냥 나물이에요. 그냥 청채예요. 그냥 푸른 나물이에요. 왜? 그 근처에 나물이 없거든요. 익숙한 것이 익숙하고 그 사람들은 외우려고 외운 게 아니잖아요.
우리는 외우려고 하지 않은 수많은 단어를 가지고 있잖아요. 몸에 대한 단어는 외우지 않아서,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여러분들이 앞으로 다섯 번 정도 듣고 나면 익숙해지실 거예요. 내 몸을 보는 눈이 달라지죠. 아무튼 오늘은 그것까지는 못 가요.
오늘은 마음과 몸과 몸뚱이, 마음과 마음씨, ‘슬’과 ‘넋’을 가는데요. 그럼 몸과 마음은 어떤 면에서 그러면 구분이 될까? 많은 사람들은 또 이렇게 표현을 해요. “넋과 슬은 죽어야 나오는 거 아니야?” 그런 문화가 있는 건 뭐냐면요? 죽기 전에는 관심 가질 게 못 된다는 뜻으로 살아왔던 시대가 되었다는 이야기에요. 살아 있어도 ‘넋’이고 정몽주가 혼백이 있고 없고를 따지는 게 죽었을 때만 따졌을까요? 살았을 때도 ‘넋’이 있고 없고 하는 거죠. ‘슬’이 있고 없고죠.
우리가 혼백이라 그러면, 죽은 사람에게나 있는 것! 아니라는 것도 알면서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아요. 그만큼 혼백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지 않아도 되는, 살 필요가 없는, 어쩌면 그렇게 살지 않도록 강요된 세월이 너무 길었는지 몰라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강요를 뚫고도 ‘나는 궁금해!’ ‘나는 그렇지 않고 싶어!’ 하는 분들이 꿈자리처럼 이 자리에 모인 것 같습니다.
간절함이란
오늘도 시간이 좀 안 갔네요. 많이 간 것 같았는데요. 질문을 주고받을 시간이 좋을 것 같은데 지난번에 전주 갔을 때 어떤 분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어요. 맥주의 간절함에 대해서! 제가 간절함에 대한 얘기를 지난번에도 드렸잖아요. 간절함에 대해서 뭔 얘기를 했냐면, 마라톤을 하신대요. 직업적으로 아니고요. 서울에 와서 만약 마라톤을 하면 서울은 도로가 복잡하기 때문에 4시간이나 5시간 되면 딱, 더 이상 뛸 수 없게 막아버리는데 자기는 5시간 안에 못 들어오는 거죠.
그런데 어쨌든 없는 데로 인도를 해가지고 도장 받고 나서 옆에 편의점이 있길래 가서 맥주를 사서 마셨는데, 그 맥주가 자기 평생 마셔본 맥주 중에 그렇게 제일 맛있더라는 거예요. 그래서 그 다음에 또 자기가 4시간 안에 들어올 수 있는 실력이 돼가지고 막 뛰어보는데 또 그때 생각을 하고 맥주를 먹었더니 맛없더라는 거예요. 그렇게 간절한 맛이 안 나더라고. 그래서 간절함이란 뭐냐?
그래서 제가 그때 토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의 어떤 장수 이야기를 했었어요. 일본의 전국 시대를 끝내고 나서 큰 대청에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자기 가신들 또는 다이묘(大名)들까지 다 불러놓고, 그대들이 나랑 함께하면서 가장 통쾌했던 순간이 언제냐 하니까? 뭐 언제 이겼을 때, 뭐 어느 적당히 머리를 벴을 때, 이런 게 나오는데 그 중에 가장 공로가 많았던 장수가 대답을 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궁금해서 “아니 당신이 얘기 안 하면 누가 이렇게 얘기해?” 하니까. 이야기 하면 좀 창피한 얘기긴 한데, (마지막 전투가 세키가하라 전투거든요.) 세키가하라 전투를 나가는데 똥이 너무 마려워가지고 환장하겠다는 거예요. 죽지도 살지도 못하겠고 말에서 내리지도 못하고.. 그런데 마침 숲이 나타나서 거기서 해결을 했다는 거에요. 그때가 제일 통쾌했다는 거예요. 그럼 똥 누는 모든 시기가 통쾌했을까요?
(전주에서) 그때 그랬어요. “그 간절함은 별거 아니다. 그러나 진짜 간절함이 뭔지를 느끼게 하는 감각은 유지시켜준다!” 정말로 있어야 되는 간절할 것만 있기를 바라서는 안 돼요. 사소한 것에서라도 간절함이 있다 보면 그 간절함이 습(習)이 돼가지고 진짜 간절한 걸 찾게 돼요.
그런데 간절한 게 많이 사라졌죠. 특히 컴퓨터 때문에 많이 사라졌어요. 약 같은 것이 이렇게 승인돼서 일반적으로 판매 소비가 되려면 많은 과정을 거쳐야 되잖아요. 일단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를 검증이 돼야 되고 그 다음 부작용이 있는지 없는지 검증이 돼야 되고, 그것이 다양한 경우에 보편적으로 쓰일 수 있는지 검증이 되는 1, 2, 3차 등의, 경우에 따라 더 할 수도 있어요. 실제로 내부에서는 더 하죠. 그러고 나서 쓰여요.
그 중에 제일 위험한 것은 보편성은 빼고 부작용 때문이죠. 약효는 웬만하면 나올 수가 있는데 부작용 때문에 그래서 부작용이 스스로 별로 없다고 생각하면 약으로 안 만들고 음식으로 만들어 팔아버리잖아요. 지금 음식으로 팔고 있는 것 중에 약이 많아요. 그래서 살면서 몸에 좋은 거 찾지 마세요. 해로운 것만 피하시면 돼요.
좋은 것은 모든 순간에 자기를 해롭게 해요. 어쨌든 해로운 것만 찾으면 돼요. 지난번에 그랬었잖아요. 음식 뭐 좋아하냐고? 저는 싫어하는 것만 빼고 다 잘 먹어요. 잘 안 가려요. 아무튼 검증이 된 음식들은 다 좋아요.
컴퓨터의 등장과 간절함의 변화
그런데 컴퓨터는 쓰고 나면은 한 세대 이후에 그 효과가 나타날 거 아니에요. 그 썼던 흔적이 말이죠. 약이 아니잖아요. 건강식품도 아니잖아요. 생활 편의 도구죠. 그냥 별다른 검사 없이 이 사회에 일반화가 됐어요. 그 효과가 지금 나타나고 있어요. 어떻게?
우리의 교육이라는 것은 전기로 치면 직렬입니다. 하나가 있으면 다음 다음 다음 다 이렇게 갑니다. 얼마나 빨리 가느냐 여부를 따지지 않고, 하나의 금기를 깨고 나면 다음 금기에 도전할 수 있고, 하나의 금기를 깨는 것이 다음 금기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에 간절함이 있어요. 그래서 직렬식 교육일 때는 저학년에서는 고학년에 대한 간절함만 심어주면 자기가 알아서 공부해요. 그 정도로 짜져 있었으니까요. 그래서 차츰차츰 직렬 쪽으로 가서 간절함이 커지죠.
간절함은 왜냐? 시간을 점유하는 단어이기 때문이에요. 간절함은 공간의 넓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시간의 점유를 전제로 해요. 시간이 점유 안 되고 나서 그렇게 간절하기는 어려워요. 간절함은 딴 데서라도 간절함이 있어 보는 게 좋아요. 근데 그 간절함의 방향을 못 바꾸게 되면 어느 순간 이제 보자기가 되고 수레가 돼버리지만요.
컴퓨터 교육을 받으니까 직렬적으로 되던 이 교육의 시스템이 병렬적으로, 상대적으로 금기를 아무리 시키고 15금, 18금, 19금 아무리 시켜도 다 뚫고 나와요. 창과 방패보다 쉽게 뚫고 나와요. 그래서 내 앞에 선택의 문제로 주어져요. 시간으로 말미암아서 이렇게 존재하는 시간적 직렬의 문제가 공간적 병렬 선택의 문제로 내 앞에 다가와요. 간절함이 자라기가 굉장히 어려워요. 기호의 문제로, 간절함이 기호의 문제로 전환될 가능성이 굉장히 높아요.
전 세계에서 이 세대가 지금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제 그들에게 우리는 세계를 물려줄 차례입니다. 그들이 확실하게 세계 인구를 4억에서 7억 사이로 줄여줄 겁니다. 아무런 죄의식 없이 줄여 줄 겁니다.
기성세대와 아직 접해져 있는, 마음씨와 접해져서 움직였던 몸뚱이가 있는 이상, 그 마음씨의 지배를 많이 못 벗어난 것처럼 지금은 그렇게 있지만, 거기에 다른 뭔가를 연결시켜 놓으면 하겠죠. 마음씨가 아닌 인공적인 지능을 심어놓으면 몸뚱이가 뭐든지 하겠죠. 지금 세대가 한 번 끊어지고 그 친구들 다음 세대가 오면은 이제 이 꼰대 세대의 지배가 없어져요. 그들은 게임에 있는 것보다 더 독하게 사회에서 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기성세대와 연결돼 있는 통제력이 있기 때문에 게임 안에 들어가서는 막 쏴 죽여도 밖에 나와서는 막 쏘지는 못합니다. 조금은 쏩니다. 근데 앞으로는 막 쏘고, 그리고 그것을 막고 있는 장치가 없어져요. 우리나라 사회에서 지금 좌파 우파 따지면서 옹알옹알할 때가 아니라 이것은 심각한 문제가 됐습니다. 인류 자체가 80억을 유지한다는 것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지만, 그래도 그런 식으로 사라져서는 안됩니다. 저절로 번식이 안 돼서 사라져야지, 그런 식으로 사라지면 곤란하죠. 저절로 번식이 안 되는 걸 다음 세대는 받아들여야 되겠죠. 앞으로 많이 안 되고 이미 징조는 나타나고 있지만 그러나 그때 가기 전까지 먼저 없애는 순서로 가게 되면 안 되겠죠.
아무튼 오늘 그런 질문을 하시길래 답은 그렇게 드렸어요. 그러니까 아까 그 질문이 얼마나 멋있는 질문이에요. 맥주의 간절함 그런 질문이 좋아요. 그런 질문에서부터 나가야 진짜가 나와요. 너무 정돈된 질문은요. 제가 답할 게 없어요. 말도 안 되는, 길 가다가 지금 개가 오줌을 누는데 왜 왼 다리를 들까요? 오른 다리를 들까요? 이런 질문을 하세요. 거기에서 진짜 여러분들이 그런 질문일수록 상상하지 못한 이야기를 저로부터 들으실 거예요. 저런 상상도 가능해? 하는 늙은 네가 진짜 기발하다! 이렇게까지 할 수 있는… 아무튼 오늘도 이렇게 또 봐주셨는데 질문도 안 하시네요. 안 하시면 그냥 저 혼자 떠들고요.
심각함에 대한 생각의 층차
질문: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가 저는 심각하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 제 개인적인 견해로는 미국산 소고기보다 훨씬 영향을 안 미친다고 봅니다. 그것이 영향을 안 미쳐서 안 미치는 게 아니라 너무나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앞에 크게 있어서 그래요. 어떻게 영향을 안 미치겠어요. 근데 더 큰 것, 우리는 맨날 플라스틱을 먹어요. 앞으로 참치 통조림 반, 플라스틱 통조림 반일 거예요. 참치 플라스틱 통조림, 플라스틱 다량 함유한 참치통조림이죠. 하와이 앞 위에 서부 쪽에 거대한 플라스틱 섬이 있다 잖아요. 그 섬의 1등 상품 중국, 2등 플라스틱 제공 국가 일본, 3등 한국이죠. 물론 해류가 그리 흘러가서 그쪽에 모이고 다른 나라 것은 남쪽 남태평양에 또 모이죠.
일본은 환경 운동 열심히 합니다. 잘 지키고 근데 일본이 2등이에요. 태풍이 많이 와요. 뭐 해도 소용없어요. 태풍에 다 쓸려가요. 태풍 오면은 돼지도 날아가는데 그까짓 집에 모아놨던 플라스틱 병쯤이야. 그렇잖아요. 그리고 물고기 잡으려고 거기 쳐놨던 그물망 같은 거 다 플라스틱으로 다 되어 있고. 그 플라스틱이 우리 배 속으로 들어와요.
방사선만 하더라도 제일 황당한 게 중국은 이미 자기들이 후쿠시마 오염수보다도 더 많은 오염수를 내보내고 있는데요. 심지어 얼마 전에는 중국의 핵잠수함이 복건성 앞바다에서 가라앉았다는 거 아니에요. 안에서 폭발했을지 안 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잖아요.
우리가 염려하고 있는 것 중에서 보다 염려하지 않고 있는 것 중에 더 큰 게 있는데 눈 가려서는 안 된다! 공정하게 본다면 영향력 있죠. 근데 그래 따지면요. 목성과 금성과 수성에서 방사능이 확인된 게 없습니다. 예전에 탐사선들이 지나가면서 흙을 파서 다 샘플 분석해서 보냈잖아요. 지구에만 방사선이 있습니다. 수성에도 없고 금성에도 없습니다.
그러면 왜 지구에만 있을까요? 방사선 물질이 왜 지구에만 있을까요? 방사성 물질은 대개 지하에 있어야 되잖아요. 어쩌면은 제 소설처럼, 제가 <가마몽기>라는 소설을 제가 쓰고 있습니다만 그 소설은 저로서는 역사예요. 근데 누군가가 핵전쟁을 했다면, 다른 형태의 전 문명에서 핵 전쟁을 했다면, 그 핵이 현재 지구상에 남아있는 자연 상태에 허용되는 방사선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그럴 가능성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나머지 영역을 제가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소설에 그때 있었던 곳이 어떤 식으로 굴러가다가 누가 어떤 식으로 해서 터졌는지 그 터지는 게 왜 연쇄 반응으로 터졌는지 그들은 어디로 도망갔는지 도망가다가도 또 왜 싸웠는지. 바랑은 왜 있고 패랑은 왜 있고, 낭패에 대해 얘기했잖아요.
아무튼 영향력은 있는데 그보다 더 신경 써야 될 게 많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신경 안 쓰는 것은 어떤 경우에는 그냥 누군가가 심어주니까 그렇게 하는 거고 또 어떤 경우에는 의도적으로 그럴 수도 있어요. 강조 안 할 수도 있어요. 플라스틱 우리 매일 먹고 살아요. 앞으로 사실상 객관적으로 보면 어물, 특히 부유하는 상층부의 어물은 못 먹는다고 봐야 되죠.
그렇다고 해서 플라스틱 덜 쓸까요? 여러분들 유니클로(uniqlo) 그 다음에 에이트세컨즈(8Seconds) 이른바 스파 브랜드(SPA brand)라고 그러죠. 거기서 자라(ZARA) 옷 사 입는 순간 플라스틱 생산하는 거죠. 지속 가능한 옷이 아니잖아요. 면이 아니잖아요. 모직이 아니잖아요. 면은 친환경적이고 지속 가능한 일이에요. 모직은 굉장히 훌륭한 옷이에요. 모직은 오래 가고요, 보온성도 좋고요. 방취로 냄새가 안 나요. 여러분들 그냥 일반 폴리 양말 신다가 모 양말 신어보세요. 4일이 지나도 냄새가 안 나요. 냄새를 다 없애줘요. 그리고 냄새 좀 난다 싶으면 안 빨고 심지어 그냥 서늘한데 넣어놔도 다 없어져요. 출장 길게 갈 때는 모 양말 갖고 가서 그냥 한 3개를 갖고 와서 열흘 동안 돌려 신고 해도 아무 문제 없어요. 그것은 그리고 다 썩어서 돌아가요.
단 문제는 그 모를 하기 위해서, 호주에서 키우는 메리노 양들이 엄청난 이산화탄소를 내뱉는다는 거에요. 그래서 그만큼까지는 모직 쓰지 말고 그 나머지 일정한 부분은 면화를 쓰자고 하죠. 근데 면화를 전부 다 심잖아요, 그러면 식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해진다는 거에요. 그러니까 면화나 모직 등의 적당한 배분이면 될지 몰라요. 그것도 저는 80억이면 안 되지 싶지만요.
그러나 스파 브랜드를 만드는 대다수의 무기 재료들은 다 안 썩고 배 속으로 들어가요. 여러분이 올해 입고 버린 유니클로의 패딩이 내년에 내 입에 들어올 수밖에 없어요. 내 입에 들어오면 다행인데 내 아이 입에 들어갈 수도 있어요. 흘러 흘러 내 아이의 뇌까지 갈 수도 있어요.
돼지고기 날 것을 먹었을 때 있는 충이 디스토마나 이런 충이 머리까지 올라간다 하잖아요. 수술하기도 하잖아요. 플라스틱은 더 빨리 올라가요. 그러니까 내 뇌가, 내 아이의 뇌가 언젠가 플라스틱 창구가 될 수도 있어요. 멀지 않았는데 아직은 그렇게까지 심각하게 느낌이 안 오는 거죠. 후쿠시마 오염수요? 월요일에 동네에서 몇 분이 모였는데 제가 그랬어요. 후쿠시마 놀러 갈래요? 후쿠시마 가서 후쿠시마 물로 키운 후쿠시마 쌀을 갖고 밥을 만든, 그걸로 후쿠시마 앞에서 잡은 물고기 스시를 먹고 올래요? 그랬더니 그분이 좋대요. 그분은 머릿속에 후쿠오카를 가고 싶은 게 머릿속에 가득 있었나 봐요. 후쿠시마가 후쿠오카로 들린 거예요. 여러분 제 얘기가 뭐로 들릴지 여러분의 자유입니다. 오늘 이야기 여기서 줄일까요? 줄이겠습니다.
주: 이번 강좌는 <나를 다시하는 동양학>을 함께 보시길 추천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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