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2년 대통령 선거가 끝난 이후 급작스럽게 쇠약해져 돼지기름 따위는 감당도 못할 속에도 걸핏하면 그 소리를 한다. 어쩔 때는 돼지기름 두 근이라고도 하고 어쩔 때는 피고름 한 사발이라고도 한다. "까짓 것 돼지 피고름 한 사발이면 돼".
아다시피 백기완은 쁘띠 부르조아지건 프롤레타리아트건, 자유주의 좌파건 사회주의자건 한국이라는 어설픈 나라에서 지난 십 수년간 진보라는 어설픈 깃발을 따라다녔던 모든 인간들의 얼굴마담이었다. 대통령 선거에 두 번이나 출마했고 극소수였건 어쨌건 매우 명확한 지지집단을 가졌던 그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쓸데없이 정치적이다. 아니 시사적이다. 더구나 나는 그에 관해 말하기엔 너무나 짠밥이 딸린다. 나는 그저 그를 먼발치에서 바라봐온 떨거지에 불과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삶에서 그를 오려낼 수 없기 때문에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보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그를 보는 사회적 입장을 공식화해야 하는 '선생' 이니 '씨'니 하는 존칭을 생략해버리려고 한다.
그 피고름, 그게 문제였다. 그것은 내 지난 십여 년의 삶에서 정열과 생명력의 상징이요 깃발이었다. 그저 부딪혀서 쏟고 박살나버리는 선지피도 아니고 나약하게 병상에서 거즈로 닦아내는 고름도 아닌 피고름. 피가 나도 끝까지 개기다가 또 깨지고 범벅이 돼서 고름이 되도 또 일어나는 것이 그 의미였다.
잠자리가 바뀌면 밤을 하얗게 새던 내가 '피고름'을 생각하면서 노지에서 박스 깔고도 잠을 잘 수가 있었고, 삼복에 수영장에서도 입술이 파래지는 내가 체감 영하 삼십도의 거리를 달리면서 유인물을 뿌릴 수도 있었다.
1987년 겨울, 세상이 뒤집어지고 난 먼지가 하늘을 덮고 있던 그 때, 나는 중학교 이 학년이었다. 종로의 구 서울고등학교 터에서 선배를 만나서 감리교 엡웟 청년회 집회에 참석하기로 했었다. 유관순의 장례가 치러졌던 정동교회 기념관에서 열린 그 집회에는 왕년에 이동휘 등이 주도했던 관록이 느껴졌다. 목사님들은 한열이와 종철이의 넋을 달래는 기도로 열을 토하고 있었고, 집회 도중에는 지나가다 플래카드를 보고 60년 전 이 청년회 멤버가 지팡이를 짚고 들어와 감동을 주기도 했다. 집회동안 실외에는 광주 학살 고발 사진전이 열리고 있었다.
어쨌든 그 집회에 가려고 선배를 기다리던 서울고등학교 자리에서 나는 백기완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는 한 이천여명 남짓한 사람들이 모여 '민중후보 백기완 선생 추대대회'를 열고 있었다. 그런데 그 날 나는 백기완을 보지는 못했다. 풍물을 치고 곳곳에서 거리연사들이 등장하는 동안 백기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선배가 나타나서 자리를 옮겨야 했지만 사실 그가 그 집회에 나타났는 지도 확실히 모른다. 뒤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때만 하더라도 백기완은 민주진영 후보분열을 우려하여 민중후보 추대를 거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때 여기저기서 주운 유인물 등등을 보니 왕년에 백범선생과 장준하 선생의 문하에 있었던 민족주의자며 지금은 문익환 목사와 함께 민통련 공동대표를 맡고 있다는 것이었다. 백범과 장준하의 법통을 이어받은 사람이라는 대목이 가장 끌렸다. 그 때 내가 제일 좋아하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선 과정에서 그는 그의 존재를 아는 모든 이들의 안타까움과 함께 행동했다. 김대중과 김영삼이 정말로 6월 항쟁의 성과를 말아먹고 광주의 학살자를 민간 대통령으로 공인해주는 게 아닌가 하는 하루하루 시시각각 피 말리는 긴장의 시간을 그는 함께 했다. 자신의 사퇴를 전제로 하는 삼인회동 중재에 전력했고 결국엔 노태우를 뺀 후보 중에서 양심에 따라 투표하라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단일화를 호소한다고 외치며 사퇴하고 말았다. 그의 사퇴를 놓고 진보진영은 또다시 논쟁으로 휩쓸렸지만 어쨌든 나는 슬펐다. 그리고 12월 18일 밤, 갈현동의 자취방에서 라디오로 집계 방송을 들으면서 세 김씨들을 진심으로 증오했다. 우습지만 내 나이 열 다섯이었다.
내가 대학에 들어간 1992년, 다시 대통령 선거 바람이 불고 있었고 우리 정치외교학과 커트라인은 평년보다 몇 점이나 올라갔다. 우리 과 지원자 중에 김영삼 김종필 이승만이 있다는 사실이 스포츠 신문에 보도돼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그 중에 이승만만 합격했다. 승만이는 얼마 전에 어학연수를 다녀와 취업 준비에 열심이다.
내가 다닌 학교는 벌써 몇 년 째 총학생회장 선거를 단독후보로 치를 정도로 정치적 논쟁이 잠재워진 곳이었고 운동권들은 거의 전원 '당선 가능한 야당후보'라는 명목 하에 김대중에 대한 무비판적 지지를 선언하고 있었다. 그 뿐 아니라 '쓸데없이 민중후보 운운하며 분열주의적 작태를 부리는' 학생 운동가들에 대한 공공연한 억압의 분위기마저 있어서 학생들 간에도 누가 누구한테 뺨을 맞았다는 둥 파이프로 맞았다는 둥 어수선했다. 더구나 우리 정외과는 학교 총학생회 간부들의 사분의 일을 배출하는 아주아주 전투적인 과였다. 그 때 동기들 중 몇 명이 민중후보라는 이름에 울림을 느끼고 있었고 기특하게 생각한 두어 명의 선배가 가담했다. 우리는 민중후보 후원회를 만들어 자보를 붙이기 시작했고 그것을 본 학교 중앙의 좌파조직과 연계가 되었다. 아마 그 때 우리가 얻어맞지 않은 것은 귀여운 새내기들이었기 때문이리라.
그 때 대통령 후보가 되려면 공탁금 삼 억이 필요했고 백기완, 그리고 그의 조직원들은 돈이 없었다. 백기완은 아내가 교직생활로 마련한 집을 내놨고 어느 처녀노동자는 전세돈을 빼서 월세로 옮기고 남은 돈을 내놓았다. 그러던 중에 여성조직원들이 몸까지 팔아서 보급을 한다는 소문까지 있을 정도로 강한 조직 '사노맹'이 침탈되고 보급해놓은 돈도 다 뺐겼다. 나는 그 때 사노맹이 빼앗긴 물건들을 뉴스에서 보면서 노트북 컴퓨터가 뭔지 처음 알았는데, 어쨌든 이래저래 좌파들이 조직침탈을 당하면서 비축된 자금도 없었다. 학생들은 스스로 금주령을 내리고 뒷풀이할 돈으로 공탁금을 만들었다. 나는 한 졸업생 형의 논문을 대신 써주고 오만 원을 받아 납부했다. 그리고 백기완의 책과 뺏지를 사고, 또 팔았다. 식당 앞에선 귤을 팔았다.
결국 등록 시한 하루 전, 선관위 사무실에서 십원 짜리 동전까지 쏟아놓고 삼 억 원을 세는 진풍경 끝에 후보등록에 성공했고 나는, 우리는 마치 당선이라도 된 듯이 기뻐했다. 정주영 후보가 조금이라도 불쾌할 지 모른다고 착각하면서. 그 날 신촌 그레이스백화점 앞의 그 좁디좁은 광장에서 출정식을 하고 내친 김에 구로공단으로 달려가 노동자들에 대한 신고식을 했다. 개봉역으로 가기 위해 전철을 타고 후보와 지지자들이 함께 이동했고 전철을 갈아타던 신도림역에서 나는 백기완에게 우리가 만든 배지를 달아드렸고, 악수를 했다. 전체에 굳은살이 백여있는, 내 손바닥 두 배는 될 만큼 두꺼운 손바닥. 그리고 선이 굵은 얼굴, 이미 사그러져가는 육신의 지탱력을 대신하는 강단 있는 눈매. 그건 그야말로 돼지 피고름의 힘 같다고 느꼈다. 그날, 개봉역에서의 연설은 사실은 평소보다 훨씬 재미가 없었다. 타고난 연설가요 선동가로서 어울리지 않게 중언부언이었다. 청중도 지지자 반, '짭새' 반이었다.
후보등록부터 시작해서 선거는 돈싸움이었다. 그것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한마디라도 더 하기 위한 싸움이었다. 방송연설 시간을 받기 위한 자금이 없어서 배분된 시간의 삼분의 일이나 썼을까. 백기완 본인의 연설이 두 번 가량, 그리고 오세철 교수의 연설이 한번정도 방송되었다. 방송은 고사하고 그 유치하기 짝이 없는 선거 유인물 프린트비가 없어 눈물을 삼켜야 했다. 백기완은 그 훌륭한 연설로 청중을 사로잡았고 유장한 시 낭송으로 마무리 지었다. 그리고 선거 전날 밤, 마지막 연설에서 그는 눈물로 호소했다. 나도 울었다.
대학로와 보라매에서 수만 명이 집회를 할 때는 흥겹기도 했다. 그렇지만 결국 당선은 고사하고 최악의 경우엔 김영삼만 돕는 꼴이 될 지도 모른다는 것은 괴로웠다. 안기부의 백기완 후원설도 아마 사실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백기완 선거운동을 해놓고 김대중에 투표하는 친구들도 부지기수였다. 처음 생각과 달리 정치적 발언이 개입되는 감이 있지만 나는 그 때나 지금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기완을 지지한 진보주의자들의 선택은 옳았다고 믿는다.
어쨌든 그 해 겨울을 백기완과 함께 달리고 울고 웃었다. 백기완은 전체의 1%도 안되는 득표를 했다. 그리고 겨울이 지나가면서 진이 다 빠져버렸다. 나는 철없는 대학생 한 놈이 백날 떠들고 뛰어다녀도 죽어가는 노동자와 철거민에게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하는 회의와 방황으로 빠져들었다. 그 허탈감을 달래기 위해 맑스 원전을 공부하기 시작했고 또 야학교사 생활을 시작했다. 얼마 후 폐 기흉이라는 초라한 병을 앓게 되면서 야학 교사 생활은 곧 끝났지만 그 이듬해 여름에는 공장에 위장취업을 해서 습기찬 지하 단칸방에서 합숙을 하며 주사바늘을 만들기도 했다. 이 시기 나의 삶을 짓누르던 슬로건은 '천착'이었다. 그 또한 피고름의 한 의미였다.
그 이후 나의 삶이 구겨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 삼 학년이 끝나면서부터였다. 친구들은 모두 군대로 떠났고 총학생회장선거를 앞두고 교내 정파가 망가져버려 그나마 할 일이 없어졌다.(내가 후보가 될 가능성이 높았다) 또, 졸업을 하기 위해서는 학업에도 신경을 좀 써야 했고 엉뚱하게 맑스 원전에 대한 흥미는 대학원에 가야겠다는 의욕을 불어넣고 있었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했다. 삶이 구겨졌다는 것은 비참해졌다는 뜻이 아니라 나의 삶에 대해 목숨 걸린 듯이 고민하는 치열함이 사라지고 두루뭉실한 봉합과 버티기가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더구나 처음 시작한 연애는 그야말로 처음 맛보는 휴식이 되어 주었다. 그런데 그 처음이라는 것이 문제였을 것이다. 나는 휴식을 불편해했고 또 고민하지 않는 자신을 불안해했다. 결국 나는 나와 그녀를 괴롭혔고 끝까지 나를 따뜻하게 포용했던 그녀로부터 도망치게 했다.
백기완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 때였다. 사 학년이 끝나가는 가을. 내가 가담하고 있던 청년단체에서 백기완 선생 초청 강연회(좌담회에 가까운)를 열었고 조그만 방 한 칸에서 삼십 명 남짓한 청중들과 함께 강연을 들었다.
흐려진 눈빛, 가끔씩 맥락을 잃어버리는 논리, 이따금 4,5초씩 할 말을 잃고 마비되는 얼굴근육... 그는 완전히 망가져 가고 있었다. 대선이 끝난 후 집도 차압당하고 직접 쓴 시나리오의 영화화가 거부되었다는 조롱성 기사가 실리는가 하면 좌파조직들이 일시에 붕괴하고 구 민중당 인사들이 대거 김영삼 정권에 합류하면서 조직적으로 발을 둘 곳을 잃는 등, 그는 사회적으로도 한참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 강단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가 내뱉는 유머 하나 하나가 투쟁이었다. 피고름이 흐르는 듯했다.
자리가 파하고 한 회원이 대기시킨 르망 승용차로 그를 모셨다. 걸음마저 당당하지 못할 정도로 망가진 그. 인상이 좋다고 자기 영화에 조연으로 써주겠다고 농을 했는데 나는 그걸 가지고 몇 사람에게 영화에 캐스팅된 적이 있다고 뻥을 하기도 했다.
결국 나는 백기완이라는 인간을 잘 모른다. 그의 정치적 입장도 애매하다. 민족주의자인지 사회주의자인지. 또 그의 삶이 어떤 상처로 이루어졌는지. 그의 투쟁은 또한 도대체 얼마나 대단하고 고된 것이었는 지 가늠할 만큼도 안된다. 내게 그저 백기완이라는 이름은 깃발이요 상징이다. 어쩌면 옛날 말 한마디 자유롭게 나눠보지 못하고 그림자를 밟을까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하면서 평생 삶의 깃발이 되고 화두가 되어주던 유불의 스승이라는 존재. 그도 나에게 그런 것인지 모른다.
지금, 나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 화두가 결여된 삶. 나의 글쓰기는 화두를 복원하기 위한 투쟁이다. 지금 백기완이라는 스승을 생각한다.
첫댓글 지금 백기완이라는 스승을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