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창대군(永昌大君) 묘지석(墓誌石) 출토지
성남시에 영창대군의 묘소가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전문가 이외는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나라 역사가 근래에 이르러 소외당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영창대군이라는 이름은 현대인에게 생소하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나라가 임진왜란이 시작과 끝나면서 까지도 영창대군은 당파싸움에서 커다란 핵 이였다.
왕권수립에 의한 정권다툼의 소용돌이 속에서 태어나면서 부터 무수한 사람들이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죽고 죽이는 과정이 거치게 되었고, 자신도 정권다툼에 의하여 희생된 불운한 왕자 이였다.
이러한 중요한 인물이 성남에 묘가 있었다는 사실은 성남의 중요성이 더해지며, 후에 묘지석을 발견하였다는 사실은 억울한 혼을 달래기 위하여 발견되지 않았나 생각된다.
영창대군의 묘지석은 수정구 태평동 4911의 앞 골목(원래 영창대군 묘)에서 도시가스관 가설공사 중 발견되었으며, 그 당시 신고인은 그 동네 통장인 정상용씨 이었다.
이 묘지명의 재료는 대리석이고 크기는 가로76㎤×세로107㎤×두께20㎤로 만들어져 있다.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 태평동 4911번지에서 발견된 지석>
묘비의 글은 인조 때 우의정을 지낸 신흠이 짓고, 글씨는 김천이 천계3년(1623) 8월에 썼다.
묘지명 원문해석을 보면 첫머리에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우의정 연사 감 춘추관사 신 신흠이 지어 올린다. 영창대군이 화를 당한지 11년이 되는 윤10월11일에 장차 예시에 따라 개장하려고 하면서 영창대군의 행록을 갖추어 신흠에게 명하여 묘지명을 지으라하셨다’ ~ 로 시작 되어
‘대군으로 봉하고 돌에 새겨놓으니 (어머니 마음도)위로될 것이라.
이곳을 지나는 이는 공경 할 것이며 ,영원토록 제사 지내는 일이 끊어지지 않으리라.‘로 되어있다.
현재 영창대군의 묘는 성남시 개발계획에 따라 1971년 8월에 이장 되여, 경기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로 이장 되였다.
<경기 안성시 일죽면 고은리 산24-5로 이장된 묘>
영창대군(1606∼1614)은 선조의 적자(嫡子). 이름은 의. 어머니는 인목왕후(仁穆王后)로 연흥부원군 김제남(延興府院君 金悌男) 의 딸이다.
그는 선조의 14子(자)중 유일한 정비소생으로 왕의 특별한 총애를 받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권정례(權停例)로 공빈금씨(恭嬪金氏)소생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러나 그 뒤 정비의 소생인 영창대군이 태어나자 선조는 세자 개봉(改封)의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데, 당시 실권을 잡고 있던 유영경(柳永慶) 을 위시한 소북파(小北派 )는 이 뜻에 영합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갑작스런 사망으로 실현되지 못하였는데, 왕은 돌아갈 당시 대신들에게 영창대군을 돌봐달라는 유교(遺敎)를 내려 후일을 부탁하였다.
이 사실로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이첨(李爾瞻) 등 대북파의 미움을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1613년(광해군 5)에 소양강을 무대로 시주(詩酒)를 즐기던 서양갑·박응서(徐羊甲·朴應犀) 등 7명의 서출들이 역모를 꾸몄다 하여 이른바 ‘7서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이첨 등은 이 역모사건에 그들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고 영창의 외조부 김제남도 관계한 것으로 진술을 유도하였다. 이 결과로 영창대군은 서인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위리안치 되었다.
그 뒤 조야에서는 끊임없는 구원의 상소 등이 연이었고, 형제의 의를 따지는 전은설(全恩說) 과 여덟살 밖에 안된 유자(幼子)라는 이유로 그를 비호하였으나, 대북파의 계속된 요구로 그 이듬해 봄에 이이첨 등의 명을 받은 강화부사 정항(鄭沆)에 의하여 증살(蒸殺)되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관작이 복구되었다.
※ 유교칠신 : 조선 시대, 선조가 승하하면서 어린 영창 대군(永昌大君)을 잘 보호하라는 유명(遺命)을 내린 일곱 명의 신하. 유영경(柳永慶), 한응인(韓應寅), 박동량(朴東亮), 서성(徐渻), 신흠(申欽), 허성(許筬), 한준겸(韓浚謙)이다.
<참고문헌 : 성남문화연구, 어학사전, 민족문화대백과사전, 경기문화재연구원>
편집 / 한범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