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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의 향기♣ No3711
12월21일[대림 제3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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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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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ZHjAmb6V-Q
[서울대교구 홍웅기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집전(청소년국 청년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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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친절과 환대와 공감의 효과!>
특강을 하러 꽤 먼 장거리 여행을 했습니다. 요즘 대목이라 피곤이 많이 누적된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성당에 도착하고 자상하신 신부님과 교우들의 따뜻한 환대를 받으니 쌓였던 피로가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친절과 환대와 공감! 얼마나 사람을 기분 좋게 하고 기를 살리며 살맛 나게 하는 원동력인지! 힘겨운 여행 끝에 아인카림에 도착한 마리아께서도 엘리사벳의 극진한 환대와 배려에 순식간에 여독이 풀렸습니다.
혼전 잉태로 인해 혼란과 당혹 속에 힘겨웠던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마리아가 자신의 집에 들어서는 것을 발견한 엘리사벳을 나이에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복음 1장 42~45절)
아인카림에서 있었던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은 참으로 어색하고 당혹스런 만남이었습니다. 그러나 루카 복음 사가가 묘사하고 있는 만남의 장면은 무척이나 흥겹고 기쁨에 찬 분위기입니다.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한 사람은 이제 겨우 열 서너 살 먹은 소녀입니다. 더구나 정식 결혼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녀의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나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자면 미혼모였습니다. 그리고 다른 쪽의 여인은 더 황당했습니다. 너무나 쑥스럽고 머쓱해서 어떻게 설명할 도리가 없는 황당한 상황이었습니다. 산모인 엘리사벳의 나이는 가임연령을 넘어도 훨씬 넘어 이제 인생을 마무리 지어야 할 그런 나이였는데 아기를 가졌습니다.
두 분의 만남 인간적인 눈으로 바라볼 때 참으로 어이없고, 정말로 이해할 수 없고, 정녕 황당한 대사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맞이하며 교회 역사 안에 길이 남을 찬미의 송가, 마리아의 노래를 부릅니다. 참으로 비극적인 동시에 희극적인 만남이었지만, 그 만남이 기쁨과 환희, 축복과 감사로 가득 차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성령께서 그들 가운데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계시는 주님께서 현존하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가끔씩 우리네 인생도 정말이지 어처구니없는 상황 앞에 설 때가 있습니다. 참으로 이해하지 못할 만남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에게 필요한 노력이 한 가지 있습니다. 인간적인 시선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영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려는 노력입니다. 인간의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할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 주님의 현존 안에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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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Ts2McKj4-s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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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를 긍정하려면 성당 다녀도 소용없는 이유>
저에게 지금 교황님이 거의 이단이라는 식의 카톡을 보내오는 분이 계십니다. 세례명도 있고 신자인데 어떻게 사제에게 계속 교황님을 거의 악마처럼 여기는 이들의 글을 보낼까요? 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파견하신 교회를 알아보지 못할까요? 예수님은 하늘나라의 열쇠를 주시며 베드로 위에 세워진 교회를 파견하셨습니다.
그러면 지금도 하늘 나라 열쇠를 지닌 베드로가 계시고 사도들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교황이시고 사도들은 주교들입니다. 만약 주님께서 파견하신 이들 안에 은총이 있음을 알아보지 못하며 성체나 고해성사한다면 효과가 있을까요? 없습니다. 은총은 그것을 알아보는 이들만의 것입니다.
KBS Joy ‘무엇이든 물어보살’에 ‘아프다며 돈 요구하는 집 나간 엄마, 도와드리는 게 맞을까요?’
라는 사연이 있었습니다. 사연자는 초4 때 엄마가 집을 나가셨는데, 최근에 몸이 안 좋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고 운을 뗍니다. 엄마는 이혼했을 때 아빠가 큰 사고를 당해 자신들을 한 달 동안 돌봐줘야 했는데, 병원에 있는 기초생활보장 수급자 아빠에게 애 돌봐주는 값으로 100만 원을 요구했다고 합니다.
또 고3 때 약 3개월을 함께 생활했는데 같이 살던 집 보증금을 다 까먹었다며 천만 원을 달라고 요구받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자신은 천만 원, 언니는 300만 원 주고 인연을 끊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마지막 말처럼 딸의 양심을 건들며 돈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만약 도와주지 못해 엄마가 죽으면 장례식에서 친척들에게 날아올 따가운 시선이 두렵다고 합니다. 서장훈은 “평생 아무것도 해 준 게 없으면서 고작 스무 살짜리 딸한테 겨우 석 달 생활했다고 천만 원을 내놓으라는 엄마가 사람이냐?”라며 크게 격분합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유일한 부모인 엄마를 모르는 체할 수 없었다는 사연자에게 서장훈은 상황의 심각성을 알리고 “이거 보통 일이 아니야, 너도 네 삶을 찾아.”라고 충고합니다. 사연자는 잘 받아들이고 기분이 좋아져서 떠났습니다.
은총을 받으려면 자신이 찾아온 사람 안에 은총이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를 부정하고 그 말을 따릅니다. 만약 자기가 옳다는 마음으로 은총을 받겠다면 어떨까요? 절대 그 은총이 은총이 될 수 없습니다.
또 이런 사연도 나왔습니다. 사연자는 14년 동안 서울 올라와서 열심히 일해 한 달에 약 천만 원씩 버는 청년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이 결혼도 못 하고 나이가 마흔이 다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셔서 속초 고향에 내려가야 할지, 아니면 서울에서 돈을 더 벌어야 할지가 고민입니다.
보살들은 묻습니다. 지금 돈을 얼마나 저축해 두었느냐고. 의외로 적습니다. 14년 동안 모은 돈이 고작 1억 5천입니다. 사기당하고 투자를 잘못해서 다 날려 먹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집이 세 채나 있고 가게를 차릴 땅도 있습니다.
보살들은 어머니의 그 땅이 탐나서 그러는 것 같아 의심스럽습니다. 1억 5천으로는 건물을 짓고 식당을 차리기에도 부족해 보입니다. 그래서 한 달에 천만 원씩 버니까 조금 더 자주 어머니를 찾아뵈라고 조언합니다.
그러자 상담하러 온 사람은 어머니가 자주 오는 것도 귀찮아하신다고 말합니다. 아프신 것도 아닙니다. 어머니는 제주도와 일본 여행이 계획되어 있다고 말합니다.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온 것일까요? 자기가 이런 처지라는 것을 이해해 달라는 것밖에 안 됩니다. 또는 귀찮아하는 어머니가 땅을 자신에게 주고 좀 도와주게 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이미 결론을 내리고 보살들을 찾아왔다고밖에는 볼 수 없습니다. 심지어 형이 둘이 있는데 한 명은 어머니와 같은 동네에 삽니다.
아무리 조언해주어도 다 튕겨내는 이 사람에게 서장훈과 이수근은 말투부터 고치라며 “그렇게 답을 잘 알면서 여길 왜 왔어. 네가 알아서 해!”라고 소리 지릅니다.
위 여자 청년은 “엄마 걱정하지 말고, 네 행복을 찾아!”라고 하는 말에 위안받고 웃으며 갔습니다. 그러나 아래 남자는 욕만 먹고 갔습니다. 그 차이가 무엇일까요? 아래 사람은 자기가 옳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왔고 위 청년은 정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신은 알 수 없어서 해답을 들으려고 온 사람입니다.
정말 신기하게도 상담하다 보면 많은 경우 자신의 옳음만 어필하려는 이들이 많습니다. 해답을 듣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고 싶어 합니다. 은총을 주려는 이 앞에서 자기를 긍정하면 은총은 부정하는 것입니다. 말에 순종하려는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은총은 순종과 함께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려면 자기를 부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버리라는 말과 단어가 다릅니다. 나를 부정해야 주님을 긍정할 수 있습니다. 나를 긍정하는 이에게는 성령께서 들어오지 않으십니다. 성령은 나를 십자가에 못박는 못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은총도 알아보지 못합니다.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성모님 안에 하느님의 존재를 알아볼 수 있었다면 그녀는 자기를 부정하는 인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래서 하나의 ‘나’만 긍정할 수 있습니다. 자기를 긍정하려는 이들은 성당에 나와도 은총이 없습니다. 하느님을 자기 긍정을 위해 이용하려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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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예전에 있었던 추억을 떠올립니다. 2006년 캐나다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17년 전의 기억입니다. 성탄 무렵에는 커피를 마시면 컵에 경품이 있었습니다. 아는 자매님과 커피를 마시면서 평소처럼 제 것이 당첨되면 가지시라고 말을 했습니다. 될 리도 없고 된 적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날 그분이 제가 마신 컵을 가지고 열어보면서 말을 하였습니다. ‘자동차 나와도 저 주는 거예요?’ 저는 ‘그럼요!’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컵 말린 부분을 여는데 그분 표정이 변하는 겁니다. 보통은 ‘Please try again.'이라고 나오는데 처음 글자가 ’W'인 겁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조금 이상하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제 마음이 더 이상해지더라고요. 정말 자동차가 나오면 어떻게 하나! 신부가 되어서 반씩 나누자고 할 수도 없고 짧은 시간이지만 이런저런 생각들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결국 ‘Win coffee'라고 되어 있었습니다. 커피의 경품은 나의 마음을 그렇게 흔들어 놓았는데, 주님의 성탄은 정말 나를 완전히 딴 사람으로 만들 정도로 흔들어 놓는지 생각하면 꼭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더 오랜 기억도 있습니다. 1980년 성탄 예술제를 준비했을 때입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던 저는 성당 친구들과 ‘넷째 왕의 전설’이라는 연극을 준비했습니다. 휴! 43년 전의 기억입니다. 의욕이 넘쳤던 저희는 밤을 새워 연습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런 우리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보좌 신부님과 주일학교 교감 선생님이 우리가 연습하는 강당으로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누가 너희에게 밤을 새워 연습하라고 했나! 당장 돌아가!” 우리는 집에 허락을 맡았다고 했지만 신부님은 완강하였습니다. 결국 우리는 분함 마음을 삭이며 모두 돌아갔습니다. 빨리 어른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때 우리가 밤을 새워 연습할 정도로 열정이 있었던 것은 성탄 예술제를 준비하는 과정이 좋아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보기만 해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후배 여학생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찌 보면, 성탄 예술제 연습은 하나의 구실이었습니다. 조금이라도 더 많이,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있고 싶었던 혈기 넘치는 학생 때의 열정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43년 전의 성탄은 뜨겁고, 화끈했습니다. 2023년의 성탄은 아무래도 그때의 열정은 없습니다.
성경에 보면 아름다운 만남의 모습들이 있습니다. 형의 축복을 가로챘던 야곱은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형을 만났습니다. 형은 지난날의 모든 것을 잊고 동생을 반갑게 맞이하였습니다. 요셉은 자신을 이집트의 상인들에게 팔았던 형제들을 만났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이루신 일이라면서 형제들을 용서하였습니다. 우리가 용서할 수 있다면 우리의 만남은 언제나 평화가 가득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아름다운 만남을 보았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입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동네는 아인카렘(포도밭의 샘)입니다. 몇 번 가보았지만 참으로 아름다운 동네입니다. 마리아는 며칠을 걸어 아인카렘을 찾아갔습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엘리사벳이 잉태했음을 알려 주었고, 마리아는 축하해 주기 위해서 엘리사벳을 찾아갔습니다. 마리아의 태중에도 아이가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몇 달 동안 아인카렘에 머물렀고, 엘리사벳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엘리사벳은 늦은 나이에 아이를 가지게 된 기쁨을 전하였을 겁니다. 마리아는 성령의 인도로 아이를 가지게 된 놀라움을 전하였을 겁니다. 오늘의 복음은 엘리사벳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엘리사벳의 진심이 그대로 드러나는 이야기입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에는 열정과 설렘이 있었습니다.
이제 곧 성탄이 다가옵니다. 저는 이렇게 기도드리고 싶습니다. 주님! 우리에게 사랑으로 오시니 감사합니다. 그 사랑은 세상의 어둠을 밝게 비추었습니다. 그 사랑은 가난한 이, 외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 사랑은 절망하고 있는 사람, 고통 중에 있는 사람에게 행복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주님, 오늘 나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랑을 전하도록 용기와 힘을 주소서. 주님의 그 사랑을 저 또한 살아가도록 이끌어 주소서! “그리스도께서는 저희가 깨어 기도하고 기쁘게 찬미의 노래를 부르면서 성탄 축제를 준비하고 기다리게 하셨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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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마리아는 가브리엘 천사의 전갈을 받고,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긴 다음 걸음을 서둘러 친척 엘리사벳의 집으로 달려가 인사를 나누고 있다. 마리아는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갔다(39절). 그것은 자기가 받은 약속의 기쁨으로 넘쳐, 그 기쁨에 이끌려 경건한 마음으로 봉사하기 위해서였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넘친 마리아가 발길을 서두른 것은 이런 이유이다. 성령의 은총은 지체함과 게으름을 허락지 않는다. 항상 즉시 기쁘게 주님의 뜻을 행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신다. 마리아의 겸손은 그녀를 이끌어 유다 산악 지방으로 가 엘리사벳의 기적적인 잉태를 축하하고, 자기보다 나이 많은 친척 엘리사벳의 해산을 보살피게 한다. 마리아는 말씀을 잉태하셨을 뿐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고 있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44절) 요한은 태어나지 않았지만 기쁘게 뛰노는 것으로 그리스도를 알아본다. 요한은 영으로 세상의 주님을 알아본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42절) 주님께서 죽은 태 안에 당신 전령을 준비하신 것은, 그분이 죽은 아담 뒤에 오심을 말한다. 그분은 먼저 엘리사벳의 태에 생기를 불어넣으셨고, 그다음 당신의 몸으로 아담의 토양에 생기를 불어넣으셨다. 엘리사벳은 아들 덕분에 성령으로 충만했다. 어머니가 먼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라, 태 안에 있던 요한이 먼저 성령을 받았다. 이렇게 아들이 성화 된 다음, 어머니가 성령으로 충만해졌다. 마리아도 구세주를 잉태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셨다. 하느님의 아드님이 함께하시면서 성령으로 충만해지신 것이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43절) 엘리사벳은 자기를 찾아온 마리아를 보자마자 그분이 주님의 어머니임을 알아본다. 겸손한 모습을 볼 수 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45절) 그러나 귀로 듣고 믿는 우리도 복된 사람들이다. 믿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잉태했고, 말씀을 실천하며 그 말씀을 증거하기 때문이다. 말씀을 살아, 말씀을 낳는 삶을 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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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늙은 나이에 아들을 잉태한 엘리사벳, 그리고 처녀의 몸으로 아들을 잉태한 마리아. 오늘 복음은 하느님의 기적을 체험한 두 여인의 아름다운 만남을 그리고 있습니다. 마리아는 ‘서둘러’ 엘리사벳을 찾아갑니다. 그도 하느님의 권능으로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는 친척이 있다는 것이 마리아에게 얼마나 큰 위로였을까요? 한시라도 빨리 엘리사벳을 만나 서로 체험을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우고 싶었을 것입니다.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까지 가야 하는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마리아는 주저하지 않고 잉태한 몸으로 여행길에 오릅니다.
그렇게 먼 길을 달려와 준 마리아를 본 엘리사벳은 또 얼마나 기뻤을까요? 그는 임신하고 무려 다섯 달이나 숨어 지냈습니다. 그동안 자신에게 일어난 기적적인 사건을 마음 터놓고 이야기할 상대가 없었는데, 처음으로 그 상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 만남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두 여인의 만남 그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그들이 잉태한 아기들, 곧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의 첫 대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메시아와 그의 선구자, 그들은 아주 오래전에 이미 만났고 서로를 알아보았습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엘리사벳은 주님의 어머니를 마주한 사실에 기뻐하고, 태중의 아기 요한도 태중의 아기 예수님의 방문에 기뻐 뛰놉니다. 엘리사벳과 요한처럼, 이제 곧 예수님을 만나게 될 우리도 기뻐합시다. 아가서에서 자기 연인을 애타게 기다리는 여인처럼 말입니다.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우리를 보고 싶은 마음에 서둘러 뛰어오시는 그 ‘연인’을 기쁘게 맞이할 채비를 서두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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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39-45)
이 이야기는,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에게 한 말들은 틀림없는 진리라고 엘리사벳이 ‘증언’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천사는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을 성모님에게 전해 준(루카 1,26-38) ‘첫 번째 증인’이고, 엘리사벳은 그 일을 다시 확인해 준 ‘두 번째 증인’입니다.>
그 일은, 어떤 일이 진실이라는 것을 확정 지으려면 둘이나 세 증인이 증언해야 한다는(마태 18,16; 신명 19,15) 율법에 연결되는데, 그 율법은 범죄 사실을 확정 지을 때뿐만 아니라 복음 선포에도 적용됩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실 때 둘씩 짝지어 파견하신 일도(마르 6,7) 바로 그 율법에 연결됩니다.>
그렇다면 성모님이 엘리사벳을 방문하신 일은,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하신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냥 단순히 인간적인 판단으로, 또 개인적인 이유로 방문하신 것이 아니라, 엘리사벳이 증언을 하는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서 성령께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광야로 가셨을 때도 ‘성령의 인도’를 받으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태 4,1)>
아마도 성모님께서는 ‘성령 잉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가장 먼저 요셉 성인에게 알리셨을 것이고, 그 다음에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엘리사벳에게 가서 그 사실을 알리셨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 일은 단순한 친척 방문이 아니라,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일이었고, 성모님은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한 ‘첫 번째 선교사’가 되는 셈입니다.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라고 단순하게 기록되어 있지만, 성모님께서는 의례적인 인사만 하신 것이 아니라, ‘성령 잉태’ 사실과, 메시아의 구원 사업에 관해서 천사가 알려 준 말들도 모두 전하셨을 것입니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라는 말은, 뜻으로는 “마리아가 전해주는 ‘기쁜 소식’을 듣자 엘리사벳은 크게 기뻐하였다.”입니다.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라는 말은, 엘리사벳의 큰 기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하고, 구원에 관한 기쁜 소식은 인류 전체에게 큰 기쁨을 주는 소식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말이기도 합니다. <물론 세례자 요한 자신의 기쁨도 나타냅니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요한 3,29)>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말은, 성령의 힘에 사로잡혀서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외쳤다는 뜻이 아니라, 성모님이 전해주신 기쁜 소식의 의미를, ‘성령의 인도’로 깨달았고, 믿었고, 그래서 기쁨에 넘쳐서 찬양했다는 뜻입니다. <깨닫는 것까지는 성령의 인도로 이루어지는 일이겠지만, 믿고, 찬양하는 것은 인간 쪽에서 자유의지로, 또 능동적으로 하게 되는 일입니다.>
여기서 ‘여인들 가운데에서’는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입니다. 성모님은 남자들을 제외하고 여자들 가운데에서만 복되신 분이 아니라, 모든 사람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입니다. 성모님이 가장 복되신 분이 되신 이유는, 하느님께서 구세주(메시아)를 세상에 보내시려고 한처음부터 뽑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성모님 태중의 아기, 즉 예수님이 복되신 분인 이유는,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내 주님의 어머니”라는 말은, “예수님은 나의 주님이신(메시아이신) 분”이라는 신앙고백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엘리사벳은 예수님을 ‘내 주님’이라고 고백한 첫 번째 신앙인입니다. <우리 교회가 성모님을 “천주의 성모”(하느님의 어머니)라고 부르면서, 해마다 1월 1일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대축일’을 지내는 것은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는 메시아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믿는 종교입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안 믿는 종교는 이단입니다.>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라는 엘리사벳의 말은, ‘메시아 강생’에 대한 기쁨을 나타낸 말입니다. 따라서 ‘저에게’라는 말은, 뜻으로는 ‘저희에게’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두 어머니의 만남이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사적인 만남으로만 보이지만, 뜻을 생각하면, 메시아 강생이라는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한 ‘공적인 방문’입니다.>
45절의 “행복하십니다.”는 “복되십니다.”로 바꿔야 합니다. 이 말은, 하느님의 축복과 은총을 받으신 분이라는 찬양입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천사가 전해 준 말들을, 즉 인류 구원에 관한 하느님의 뜻과 계획 등을 가리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전해 준 말들 가운데에서, 성모님이 특별히 선택되었고, 은총을 가득히 받으신 분이라는 말은, 과거와 현재의 일을 나타낸 말이지만,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 또 예수님께서 하실 일들은 모두 미래의 일입니다. 성모님께서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일들까지도, 또 먼 미래의 일들까지도 모두 믿으셨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은 복되신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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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납니다.
동정녀로서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에서 유다 산악 지방에 사는 엘리사벳을 서둘러 찾아갑니다. 당시 제관들은 흔히 예루살렘 주변 마을에 살았습니다.
엘리사벳이 살던 마을은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7-8킬로미터 정도 떨어진 아인카렘이라는 전설이 있습니다.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나자렛에서 약 150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 걸어서 삼사일 정도 걸렸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은 이유는 그녀가 친척이었을 뿐 아니라(루카 1장 36절),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 불리던 그녀가 많은 나이에도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의 힘으로 아들을 잉태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마리아는 엘리사벳도 자신과 같이 하느님의 큰 은총을 받았음을 알았기에, 자기가 받은 은총을 그녀에게 알리고 싶었나 봅니다. 아무도 모르는 그 잉태의 비밀을 서로 알아보고 기쁨을 나누고자 한 것이지요.
성령으로 말미암아 들어온 말씀은 이제 기쁨의 빛이 되었습니다. 그 빛이 또 다른 빛을 찾아갑니다. 아무도 모르는 잉태의 비밀을 눈빛으로 알아본 두 여인이 기쁨 속에 서로 마주 봅니다. 그 기쁨은 엘리사벳의 배 속에 있는 아기 요한까지도 기뻐 뛰놀게 합니다.
하느님 말씀을 받아들인,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두 사람이 만났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소중한 기쁨이 됩니다. 그 기쁨은 온 세상에 퍼져 나갑니다.
이제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서로에게 소중한 위로가 됩니다. 하느님 말씀을 품고 있기에 혼자가 아닙니다. 그 말씀은 홀로 있지 않습니다. 그 말씀은 또 다른 말씀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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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두 여인은 행복하십니다.>
구약의 아가서 저자는 사랑하는 여인 대한 연인의 그리움을 그리고 있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아가서 2장 10절)
사랑하면 사람은 누구나 시인이 된다고 하지요. 그냥 스쳤던 꽃, 멧비둘기, 무화과 나무가 모두 의미의 시가 되는 것입니다.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의 계절이 다가왔다오. 우리 땅에서는 멧비둘기 소리가 들려온다오. 무화과나무는 이른 열매를 맺어 가고, 포도나무 꽃송이들은 향기를 내뿜는다오.”(아가서 2장 12절-13절)
사랑은 세상을 아름답게 또는 여유와 낭만으로 이끌어 주고 지친 삶을 새롭게 일으켜줍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의 특징은 하나로 묶어주는 일치이지요. 스승이신 예수님 안에서 서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중심으로 하나가 됩니다. 그것이 사랑의 특징인 것입니다.
구약에서 아가서의 이 연인들의 관계와 신원에 대해 논란이 많았지만, 고전적인 해석은 하느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로 그리고 신약에서는 교회와 예수님과의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마리아가 서둘러 유다 산골의 한 마을을 찾아가 엘리사벳을 만난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 사가는 길을 나서는 마리아의 심정을 나타내기라도 하듯, ‘서둘러’라는 말을 덧붙였습니다.
본문에서는 아기 예수님을 가진 마리아에 대한 이후의 설명은 없지만, 인간적으로는 갈등이 있었으리라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네 친척 엘리사벳을 보아라. 그 늙은 나이에도 아들을 잉태하였다. 아이를 못낳는 여자라고 불리던 그가 임신한 지 여섯 달이 되었다.”(루카 1장 36절)라고 말했던 천사의 말이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래도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만나고 싶었습니다. 천사가 했던 말을 확인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리고 처녀로 아기를 가진 심정을 늙은 나이에 임신한 친척으로부터 위안을 받고 싶었으리라는 추측도 할 수 있습니다.
드디어 마리아는 유대의 한 산골에서 친척 엘리사벳을 만납니다. 그리고 마리아는 엘리사벳으로부터 대대적인 인사말을 듣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 말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루카 1장 42-44절)
사랑의 특징 중에 하나를 치자면 또 한 가지는 ‘함께’라는 말이 어울릴 것입니다. 천사의 말대로 엘리사벳은 늙은 나이에도 임신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계획에 선택 된 두 여인의 만남은 또한 ‘함께’라는 드라마를 연출하게 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을 품은 여인은 친척 엘리사벳을 만나서 ‘여인들 중에 가장 복되신 여인’ 이라는 찬사를 받습니다.
그리고 신앙인에게서 주옥과 같은 금자탑인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라는 축복의 말씀도 성모님은 받으시는 것입니다.
두 여인을 통해서 구원사의 한 획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하느님 안에서 성실했던 삶은 드디어 두 생명, 세례자 요한과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이어집니다.
대림절을 보내고 있는 우리도 엘리사벳과 성모님처럼 아기 예수님과의 만남을 설레이느 마음으로 기다려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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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방삼민 가스발 신부님]
오늘 복음을 들으니 온 국민이 즐겨 부르는 노래 하나가 생각나네요.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램이었소”로 시작되는 ‘만남’이라는 노래 말이죠. 세상에는 참 많은 만남이 있습니다.
지나가고 나면 기억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만남이 있는가 하면 노래가사처럼 단 한 번을 봤어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 그런 만남도 있습니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은 자신의 존재를 흔들고 일생을 좌우하게 될 커다란 만남입니다. 뭔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흡입력을 가진 만남, 그런 만남이야말로 노랫말처럼 그저 우연이 아니라 존재의 바람이 아닐까요?
이런 만남은 성서의 곳곳에서도 볼 수 있는데, 이를테면 베드로를 비롯한 첫 제자들과 예수님과의 만남이 그런 것이고, 또 세관장 자캐오와 예수님의 만남이 또한 그런 것입니다. 그들의 만남은 겉으로 보면 우연한 것 같지만 그 만남을 통하여 한낱 어부가 예수의 제자가 되어 교회의 초석이 되고, 죄인이었던 세리가 회개하여 변화된 삶을 살게 됨을 볼 때 이미 그들의 마음 속에서는 진리이신 예수님에게 항한 열망이 내재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은 또 한 번 이러한 차원의 만남 하나를 소개해주고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그것입니다. 마리아는 천사의 예언을 통하여 하느님의 엄청난 구원 계획을 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마리아는 나자렛의 한 가난한 처녀에 불과했고 그저 믿을 것이라고는 하느님께 대한 단순한 믿음과 순종만이 전부였습니다.
동병상련이라고 할까요? 이 어려운 순간에 같은 처지의 사람을 찾아갑니다. 엘리사벳도 당시 가난한 사제의 아내로서 오랫동안 아이를 가지지 못한 채로 있다가 늙은 나이에 하느님의 은혜로 아이를 갖게 되었으니, 서로를 이해하고 격려하기에 딱 좋은 관계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와 엘리사벳은 하느님께서는 예로부터 자신들 같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을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는 분이심을 믿고 살아온 의인들이었습니다. “모든 여인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드님 예수 또한 복되시나이다.”라고 한 엘리사벳의 인사말은 그들의 이러한 믿음을 잘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만을 소개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은 예수와 세례자 요한의 만남까지 내포하고 있습니다. 이는 “문안의 말씀이 내 귀를 울렸을 때 내 태중의 아기도 기뻐하며 뛰놀았습니다.”라고 한 엘리사벳의 말을 통하여 엿 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세상을 구원하려고 오신 구세주요, 세례자 요한은 그 구세주의 오심을 준비하는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니 요한은 역사 이래로 구세주를 열망해 온 이스라엘 백성의 대변자요 하느님이신 구세주 예수를 만나게 되는 인류의 대표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둘의 만남은 단순히 인간 예수와 요한의 만남만이 아니라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둘의 만남은 인류의 범죄 이후 하느님께로 되돌아오고 싶어 한 모든 양심의 바램이었고, 하느님 편에서 보기에는 탕자를 재회하는 아버지의 마음이었던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통하여 우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두 만남을 목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와 요한의 만남을 통하여 우리는 구원자 하느님과 구원을 기다려온 인간의 만남을 보았고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을 통하여 하느님을 전해주는 이와 하느님을 알아보는 이의 만남을 보았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하고 소박한 그들을 통하여 세상에 오셨고 가난하고 소박한 이들은 하느님을 알아본 것이지요.
세상의 수많은 아름다운 노래 중에 ‘아베 마리아’ 만한 것이 없습니다. 아베 마리아의 가사는 ‘성모송’을 그 내용으로 삼고 있습니다.
왜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 단순한 가사를 앞 다투어 작곡하고 널리 애창되어 왔을까요? 그 노랫말에는 이런 아름다운 만남이 녹아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도 ‘아베 마리아’를 들을 때, 또 묵주의 기도를 읊조릴 때 이 아름다운 하느님과 인간의 만남을 그려 봅시다. 그리고 우리도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가난하고 소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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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 고난수도회 김준수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1,42~43)
어느 시대나 어느 곳에 살던 지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은 행복하길 간절히 바랍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삶을 통해서 끊임없이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다만 어떤 행복을 추구하며, 그 행복을 어디서 어떻게 추구하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행복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철학자 칸트는 행복의 3가지 조건을 이렇게 제시하였는데, ‘첫째 할 일이 있고, 둘째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며, 셋째 희망이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 보면 그리스도교적 행복이란 무엇이고 어디에 그 행복이 있는지, 엘리사벳이 마리아에게 전하는 인사말을 통해 들려주고 있습니다.
누군가 자신의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이 있다면, 그 기쁨이 바로 축복이라고 봅니다. 비록 그 기쁨을 나눌 사람이 가까이 있지 않아도 찾아갈 사람이 있고, 서로가 기쁨을 나눔으로 더 행복해진다면야 어찌 달려가는 것을 주저하겠습니까? 마치 연인을 찾아가듯 사슴처럼 언덕을 뛰어넘어 힘차게 내달려 마리아는 엘리사벳을 방문합니다. 예전과 달리 성모님의 엘리사벳의 방문 의미가 절절하게 다가옴은 제가 생활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과 현실 때문입니다. 노인 요양병원에 입원해 계신 어르신들의 한결같은 바람은 자신이 사랑했던 자녀들의 방문입니다. 그런 그분들의 하루하루 삶은 사랑하는 자녀들을 ‘기다림의 삶’입니다. 그 기다림이 길어질 때, 그분들의 깊고 무거운 느낌은 한 마디로 버려졌다, 는 느낌입니다. 잊혀진 존재가 되어간다는 그 자체가 자신들이 겪고 있는 육체적인 고통보다도 더 힘든 마음 아픔입니다. 그러기에 요양병원에서 저의 역할과 존재 이유는 그분들의 아픔을 함께하고, 사랑받고 싶은 욕구의 필요성을 채워주는 데 있습니다. 말로써가 아닌 단지 그분들 곁에 머물면서 ‘함께 있음’으로 그분들의 차갑고 텅 빈 마음을 따뜻한 온기로 채워주는 일입니다. 그분들이 저에게 가장 자주 하는 표현은 그러기에, ‘고마워, 감사합니다.’라는 단순한 표현입니다. 그래서 저는 성모님처럼 제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을 모셔가는 일이 제가 매일 하는 일입니다. 산을 넘어가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어머니 마리아처럼 우리가 받은 축복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달려갔으며, 우리를 찾아온 사람을 어떻게 환영하고 어떤 말로 축복해 주었나 반성해 봅니다. 힘겹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방문하는 여러분을 가장 기쁘게 반길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엘리사벳은 자신의 임신 소식을 듣고 한걸음에 달려와 인사를 하는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가득 찬 가운데, 마리아의 행복을 외칩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1,45) 엘리사벳의 입을 통해 세상에 마리아 행복의 원천은 바로 말씀 안에 있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이 행복은 바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루어진 말씀이 되기 위해서는 바로, 이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이것을 믿는 마리아 당신은 참으로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1,42) 고 선포한 것입니다. 행복은 바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는 믿음 안에 있으며, 이 믿음의 응답으로 마리아의 태중에 아기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구원자로 오실 수 있었으며, 이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의 응답이 나오기까지 “모든 우주 만물은 조마조마 숨 죽였다.” 고 표현한 성 아우구스띠노의 표현이 그래서 더욱 강렬하게 다가옵니다.
사실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었을 때 엘리사벳 보다 그녀의 태중의 아기가 먼저 이를 감지하고 용약踊躍 하였으며, 이를 통해서 성령으로 충만한 엘리사벳이 마리아와 마리아의 태중에 든 아기가 복되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 순간을 두고 성 암브로시오는 “엘리사벳은 잉태한 후 성령으로 충만했고, 마리아는 잉태하기 전에 충만했습니다.”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 외침을 통해 엘리사벳은 우리 모두에게 마리아께서 누리셨던 행복이 무엇이며, 그 행복으로 우리 모두를 안내해 주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참된 행복은 자기 자신이나 세상의 어떤 그 무엇을 쟁취하고 성취하는 데만 있지 않고, 성모님처럼 나의 존재와 삶 안에서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데서 행복이 있다는 사실을 믿고 이를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나에게 들려오는 주님의 말씀을 온전히 들으며 살고 있는 지, 성모님처럼 자신에게 들려오는 말씀을 믿음으로 응답하려고 마음과 영혼에 영접하고 잉태하며 살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엘리사벳을 통해 어머니 마리아의 행복에 우리 모두 참여하도록 초대받고 있으며 행복에 이르는 길은 바로 믿음이며, 그 믿음을 삶으로 응답하며 사는 데 있습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대한 믿음이 바로 행복에 이르는 길이며, 그 행복이 또한 우리 믿음의 응답을 가능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를 재확인하는 성경의 장면이 바로, 군중 속에 한 여인이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라고 말하자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루11,27~28) 라는 말씀을 기억합시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한 사람은 불행하며, 세상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이 참으로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역시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그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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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몇 년 전, 갑곶성지에서 있었던 일이 기억납니다. 어느 자매님께서 미사 후에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신부님, 혹시 제게 하실 말씀 있으세요? 미사 때 계속 저만 보고 계셔서요.”
이 자매님이 누군지 알 수 없었습니다. 처음 뵌 분이었고 또 미사 중에 특별한 행동을 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계속해서 이 자매님을 보고 있을 이유가 없었지요. 하지만 이 자매님은 제가 미사 중에 자기만 바라보고 있다고 느낀 것입니다.
예전에 교수법 강의를 들을 때, 연극배우들에게서 배워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무대 위에 서 있는 배우들은 객석에 누가 앉아있는지 전혀 알 수가 없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조명이 배우들을 비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맨 뒷자리를 바라보면서 연기하면 앞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자기와 눈을 마주치며 연기하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시선은 배운 대로 늘 맨 뒷자리였습니다(사람들은 제 시선을 피하려고 맨 뒤에 앉지만, 사실 제일 잘 보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많은 착각 속에 삽니다. 운전할 때 내가 가는 차선만 느리게 가는 것 같고, 줄을 서면 나의 줄만 짧아지지 않는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우리 삶에서 하는 커다란 착각도 있습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사는 것 같고, 고통과 시련은 나만을 찾아서 오는 것 같다는 착각입니다. 나만 불리한 조건 속에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이런 생각의 착각 속에 있을 뿐입니다. 착각임을 깨달을 때 비로소 다른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성모님과 엘리사벳 성녀께서 만나십니다.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이신 엘리사벳은 성모님을 찬양합니다. 성모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믿으셨고, 그 믿음을 통해 가장 복된 분이 되셨다는 찬양이었습니다. 사실 엘리사벳 성녀는 나이 많은 상태에서 세례자 요한을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울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의 이목을 피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이고, 내 팔자야.’라면서 하느님을 원망할 수 있는 상황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 계셨기에, 더 큰 믿음 안에 있는 성모님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 안에 있어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됩니다. 자기 삶을 원망하는 착각의 삶이 아니라, 감사할 수 있는 지혜로운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엘리사벳 성녀나 성모님께서 보여주셨던 믿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믿음 안에서 자기 삶이 새롭게 보이면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요?
“나도 잘살고 있구나. 나의 삶이 그렇게 팍팍한 것은 아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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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길 떠나네>
루카 1,39-45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길 떠나네>
“그 무렵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루카 1,39-40)
하늘에서
땅으로
먼길을
떠나오시는
기쁨이신
아가님
고이고이 품은
여린 엄마
뱃속 아가처럼
몸소 기쁨 되려
숨어 지내던
외로운 벗 찾아
서둘러
험한 산길
한걸음에
달려가시네
기쁨 모시니
기쁨이어야 할
우리도 함께
하자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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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행복하다>
행복은 무엇인가? 만족한 삶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합니다.
추구하는 방법과 구체적으로 느끼는 형태가 다양하지만, 행복한 삶을 살고자 하는 마음만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은 소유하는 것에서, 어떤 이는 지배하는 것에서, 어떤 사람은 베푸는 사랑에서 만족합니다. 우리가 가치 있는 진정한 행복을 어디에서 찾고 있는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복음은 참된 행복이 어디에 있는지 가르쳐 줍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에게 말하였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45)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품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루카 복음11장 27-2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 계실 때에 군중 속에서 어떤 여자가 목소리를 높여, “선생님을 배었던 모태와 선생님께 젖을 먹인 가슴은 행복합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이 오히려 행복하다.” 결국, 행복한 사람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꼭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새기고, 그대로 하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많은 경우 세상에서 행복을 찾지만, 하느님 곁에 있는 것이 행복이요, 그분이 원하시는 것을 실행하는 순간이 행복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을 알되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불행하며, 이 모든 것을 모르나,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성모님께서는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셨기에 모든 것을 감당하셨습니다. 믿음은 강요할 수도 없고, 강요로 되는 것도 아닙니다.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의심하였지만, 마리아는 믿었으니 행복합니다.
사업에 성공하고 재물도 명예도 얻었고 좋은 집에 좋은 차를 가지고 있으며 귀한 자녀를 얻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일시적입니다.
그것이 행복을 보장해 주지는 못합니다. 학생이 좋은 학교에 들어가는 것이, 곧 행복이라고 생각하고 공부해도 거기에서 행복이 완성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대통령이 되어도, 대통령의 역할을 충실히 한다고 할지라도 때가 되면 내려놓아야 합니다. 국회의원이 되고, 당대표가 되어도 임기가 있습니다.
인생 여정에 있어서 예기치 않은 많은 일을 접하게 되고, 그 안에서 이유도 모르는 가운데 포기하고 버려야 할 것이 얼마나 많은지요? 그래서 또 실망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을 믿는 사람은 성공과 실패 안에서도 그분이 역사하시고 섭리해 주심을 알기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알맞은 종류의 행복을 주십니다. 시련과 고난을 겪기 전이나 겪는 중이나 혹은 겪고 난 뒤에 반드시 주십니다.”(성 알로이시오 슈월츠)
믿는 이들에게 실패는 늦추어진 성공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천상 것을 추구하고, 주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가운데 행복한 날 되시길 바랍니다.
소유와 지배의 욕구에서 벗어나 천상을 갈망하며 베푸는 삶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베푸는 삶, 사랑의 삶에서 만족하는 삶은 ‘약속에 충실한 주님을 믿는 믿음’을 바탕으로 합니다.
주님을 믿고 주님 안에서 행복에 행복을 더하길 기도합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신 주님께 대한 믿음이 끝까지 흔들리지 않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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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주님은 우리의 영원한 연인(戀人)이시다>
-주님과 사랑의 여정-
“오 샛별이여,
찬란한 광채이시오, 정의의 태양이시오,
오시어 죽음의 땅과 어둠속에 앉아있는 우리를 비추소서.”
대림2부 다섯째 날, 12월21일 ‘O후렴’도 마음 설레게 합니다. 당신의 애인인 우리가 보고 싶어 우리를 찾아오시는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을 기다리는 대림시기이자 이런 주님이 속히 오십사 애절한 마음으로 바치는 기도입니다. 이처럼 당신의 연인인 우리를 일편단심 한결같이 사랑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런 주님과 사랑의 여정 중인 우리입니다. 과연 날로 주님과 깊어지는 사랑의 관계, 사랑의 여정인지요? 요즘 간간히 내리는 흰 눈을 보며 오래전 써놓은 글도 생각납니다. 불현듯 우리에게 전해지는 주님의 연서(戀書) 같다는 생각에 설레는 마음으로 쓴 시입니다.
“계속 쏟아지는
흰 눈발들
임 보내시는
천상 편지
하얀 그리움
가득 담겨 있는
임의 편지
잔잔히 물결치는 마음
글씨 보이지 않아도
다 알아보겠네”-2001.1.28.
더불어 떠오른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라는 시입니다.
“푸르른 밤하늘
휘영청
밝은 달 하나
온 누리 환히 밝힌다
푸르른 고독이
푸르른 사랑이
휘영청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낳았구나
오,
푸르른 고독이!
푸르는 사랑이!”-2001.2.11
22년전 2001년도 유난히도 참 많은 시를 썼던 해입니다. 주님의 푸르른 하늘 사랑에서 태어난 ‘환한 사랑 둥근 달 하나’ 같은 존재가 주님의 영원한 연인인 우리들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배치도 이채롭고 적절합니다. 교회전통에서 한결같이 신비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노래중의 노래(the Song of Songs)”, 최고의 노래가 아가(雅歌)입니다.
“그대, 내 사랑, 아름다워라. 아름다워라, 비둘기 같은 눈동자”(아가 1,5)
연인들끼리 사랑을 노래한 아가서이지만 동시에 교회의 신비가들은 우리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신부인 교회에 대한 신랑이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또 우리 영혼에 대한 주님 사랑의 고백으로 읽었습니다. 이처럼 주님은 당신의 연인인 우리 영혼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 아가서의 감미로운 고백을 들어 보세요.
“내 연인의 소리! 보셔요. 그이가 오잖아요. 산을 뛰어오르고, 언덕을 뛰어넘어 오잖아요. 나의 연인은 노루나 젊은 사슴 같답니다. …… 내 연인은 나에게 속삭이며 말했지요.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자 이제 겨울은 지나고 땅에는 꽃이 모습을 드러내고 노래하는 계절이 다가 왔다오.’ ……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벌써 대림시기를 지나 꽃피는 부활 시기가 온 느낌도 드는 오늘의 아가입니다. 그대로 연인이신 주님의 방문에 황홀해 하는 우리 영혼을 상징합니다. 다음 아가서(아가, 안소근 번역, 가톨릭 출판가, 2014, 11-12쪽) 설명에 공감합니다.
“아가는 성경 전체를 위한 열쇠다. 랍비 아키바의 말이 옳았다. 실상 구약성경은 여성 앞에서 외치는 남성의 기쁨에 넘친 탄성에서 시작되고(창세 2,23), 신약성경은 신랑이신 하느님에 대한 신부의 사랑의 외침으로 끝난다(묵시22,17). 그리고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한가운데에는 아가가, 사랑의 책이, 성경의 심장이 있다.”
얼마나 멋지고 사랑스러운 아가인지요! 아가가 없었다면 성경은 얼마나 쓸쓸하고 허전했을까요. 말 그대로 성경의 심장같은 아가입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은 우리가 그리워, 보고 싶어 찾아오십니다. 대림시기는 물론 날마다 미사전례를 통해 한결같이 끊임없이 찾아 오십니다. 오늘 복음도 이런 관점에서 보며 이해가 확연해집니다.
당신의 연인을 찾아오듯 엘리사벳을 찾아오신 주님의 어머니 마리아요, 마리아의 방문에 기뻐 환호하는 엘리사벳과 태중의 아기 세례자 요한입니다. 성령에 가득 차 환호하는 엘리사벳의 고백은 늘 들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이런 엘리사벳 같은 활짝 열린 마음으로 이 거룩한 대림시기 미사 중 오시는 주님을 환대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신 분!”
말 한마디 천 냥 빚 갚는다고 했습니다. 도반간의 덕담은 이러해야 하니 그대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두 분 간의 주님을 중심으로 한 더불어의 영적우정이 참 깊고 순수하고 아름다워 감동적입니다. 엘리사벳의 진심 가득한 지지와 격려와 환대가 마리아에게는 큰 위로와 치유의 구원이 됐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반갑고 놀라운 것은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 간의 우정의 여정이 시작됐다는 것입니다. 마리아 태중이 주님 앞에 즐거워 뛰노는 엘리사벳 태중의 세례자 요한은 흡사 마리아 감실 안의 주님 앞에서 춤추는 모습이요, 이는 주님의 궤 앞에서 덩실덩실 춤췄던 다윗(2사무6,5)을 연상케 합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께 대해 온 힘을 다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의 표현인 시이자 기도이자 노래인 시편은 춤까지 이르러야 비로소 사랑의 완성이란 생각도 듭니다. 예전 써놨던 글도 생각납니다.
-“그리움
색깔로 표현하면
그림(畵)이 되고
그리움
글자로 써내면
시가(詩)가 되고
그리움
소리로 부르면
기도(祈禱)가
노래(歌)가 되고
그리움
몸으로 풀으면
춤(舞)이 됩니다.”-1998.5.5
그리움을 긴 글로 써내니 강론(講論)이 되네요. 그러니 우리의 모든 수행은 주님 향한 그리움의 표현이자 사랑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이런 사랑의 표현인 한곁같은 수행이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의 우정을 날로 깊게 합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마다 우리의 영원한 연인이신 주님과 사랑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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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 만남은?>
오늘 아가서 말씀은 연인이 오기를 고대하고 기다리는 여인을 그립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은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는 얘기이고, 그리고 태중의 두 아기 곧 주님과 세례자 요한이 만나는 얘기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만남이 연인 간의 만남과 같다는 뜻일까요? 그런데 기쁨과 설렘이라는 면에서는 두 만남에 공통점도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두 여인의 만남이 어떻게 연인들의 그 기쁨과 설렘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연인의 그것과 같다면 의미상으로 너무 가볍습니다. 사실 오늘 아가서의 표현들은 너무 간지럽습니다.
“나의 애인이여, 일어나오. 나의 아름다운 여인이여, 이리 와 주오. 바위틈에 있는 나의 비둘기, 벼랑 속에 있는 나의 비둘기여! 그대의 모습을 보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를 듣게 해 주오. 그대의 목소리는 달콤하고 그대의 모습은 어여쁘다오.”
제 생각에 두 여인은 연인이 아니라 동지에 가깝고, 그러니 그 만남도 연인들처럼 사랑의 만남이 아닐 것입니다.
우선 연인처럼 사적인 것이 아니라 인류 구원을 위한 공적인 만남이고 그러니 우연이나 인간적인 동기가 아닌 성령으로 말미암은 만남입니다.
그래서 저의 만남을 생각게 됩니다. 나의 만남에서 주를 이루는 것은 무엇인지. 사적인 만남이 주를 이루는 것은 아닌지. 공적이고 구원을 위한 만남은 얼마나 되는지.
만남 이전에 나라는 사람은 혹 나만을 위해 사는 것은 아닌지. 수도자가 되어 그저 자기 성취나 자기 복음화에 급급하고 그래서 세상의 복음화는 먼 나라 얘기인 것처럼 살지는 않는지.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일하더라도 혹 혼자 애쓰는 나는 아닌지. 마리아와 엘리사벳처럼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세상의 복음화는 너무 거창하니 공동체 건설을 위해서라도 서로 협력하는 관계는 얼마나 되는지 돌아보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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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루카1,42)
<기쁨의 찬가(1)>
오늘 복음(루카1,39-45)은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가득히 입은 두 여인이 만납니다. 주님의 어머니로 간택된 마리아가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갑니다. 그곳은 나자렛에서 무려 100키로나 멀리 떨어져 있는 '아인 카렘'(Ein Karem)이라는 곳입니다. 그곳에 있는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합니다. 마리아의 인사를 받은 엘리사벳이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칩니다.
'엘리사벳의 찬가!'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1,42-45)
이 찬가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아이를 잉태한 엘리사벳의 기쁨에 더해진 큰 '기쁨의 찬가'입니다. 위험하고도 먼 길을 달려오신 주님의 어머니의 방문을 받고 어찌 기뻐하지 않을 수 있을까?
'기쁨은 하느님의 은총이자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기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기쁨은 나누어져야 합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마태5,12)
"언제나 기뻐하십시오. 끊임없이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에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살아가는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6-18)
'우리의 죄'는 '지금 여기에서 기뻐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기쁨을 나누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죄를 자비로우신 하느님 아버지께 내어드리고 다시 기뻐합시다! 우리에게 오시는 주님의 성탄을 기쁘게 맞이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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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W76GsA7YGi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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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루카 1, 45)
이루어져가는
믿음의
여정이다.
언제나
주님께서는
당신
말씀을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나가신다.
행복은
정녕
무엇일까.
믿음이
행복이다.
믿음을
나누는 것이
행복이다.
믿음은
말씀으로
이어진다.
믿음 안에
행복이 있다.
성령 안에
행복이 있다.
하느님 안에
사는 행복이다.
행복은
퍼져나간다.
고통이 있기에
말씀을 찾고
말씀과
함께하기에
행복하다.
믿음은
순탄하지 않다.
고개를
넘는다.
가파르기에
하느님을
일깨워준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
행복이다.
하느님의 뜻안에
이루어지리라
믿는 성탄이다.
성숙한 믿음
성숙한
기다림이길
기도한다.
함께 하는
것이
믿음이다.
행복은 정녕
주님을
믿는 것이다.
믿음은
나눔이다.
나눔과 만남
말씀과
행복은
삶 안에서
하나이다.
믿음이 되는
행복으로
초대하는
대림이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더 아름답다.
대림은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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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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