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8년 광동성(廣東省)에 두사람의 10대 젊은이가 도미하게 된다. 광동성 향산(香山 지금의 中山) 출신인 12세의 쑨원(손문 孫文 1866-1925)은 이민 간 형 쑨메이(손미 孫眉)의 초청으로 하와이로 건너가서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닌다. 쑨원의 발랄한 성격은 미국문화에 금새 빠져들면서 기독교에도 심취한다. 이것을 크게 우려한 형은 쑨원을 조국으로 급히 돌려 보낸다. 쑨원은 5년간 하와이 생활을 통해 훌륭한 영어 실력과 근대학문의 배경으로 영국인이 경영하는 홍콩대학 의학부에 진학 의사가 되었지만 그 후 시대적 사명으로 반청(反淸) 혁명가가 된다.
광동성 하이난 섬(해남도 海南島) 원창(문창 文昌) 출신인 15세의 한교준(韓敎準 1863-1918)은 친척 아저씨와 함께 미국 보스톤으로 건너 간다. 그리고 미국 감리교 선교단의 주선으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가 된다. 미국의 감리교단은 중국의 선교를 위해 중국인 목사가 필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교준이 송씨가 된 것은 그의 이름을 영어로 Chiao Shun으로 표기하면서 부터이다. 그 후 그의 세례명은 Charlie Jones Soon이 되고 한교준은 자신의 영어 세례명에 따라 미국이름을 Charlie Soong 으로 하고 송가수(宋嘉樹)라는 한자이름을 썼다. 한씨가 송씨로 바뀐 것이다.
찰리는 미국에서 계속 살고 싶었지만 선교단의 명령으로 귀국하게 된다. 그가 처음 맡았던 목회지는 상하이 인근 쿤산(곤산 昆山)이라는 시골. 야심이 많았던 찰리는 그 곳을 빠져 나와 상하이에서 중국어 판 성경을 출판하여 엄청난 부자가 된다. 그는 위로 딸 셋을 두고 아래로 두 아들 을 갖지만 딸 셋을 그가 수학한 내슈빌의 밴드빌트대학에서 멀지 않은 조지아주의 웨슬리안 여자 명문대학에 유학시킨다.
상하이에서 쑨원을 만난 찰리는 그와 비슷한 과거를 갖고 혁명가인 쑨원을 물심양면으로 도운다. 찰리의 세 딸은 쑨원을 아버지처럼 따르고 좋아했다. 큰 딸 아이링(靄齡)은 대학을 졸업할 무렵 아버지 찰리의 주선으로 일본에서 망명중인 쑨원의 영문비서로 잠깐 일하다가 공(孔)씨에게 시집을 간다. 그 후 둘째 딸 칭링(慶齡)이 언니를 이어 쑨원의 영문비서가 되었다.
문제는 그 후에 일어 난다. 26세 연상의 선생님과 비서의 사이가 연인으로 발전한 것이다. 크게 놀란 쪽은 찰리였다. 친구 쑨원은 고향에서 노(盧)씨와 결혼 이미 1남2녀의 아버지로 아들 쑨커(孫科)는 칭링보다 두 살 위였다. 그는 크게 화를 내고 칭링을 즉각 귀국시키고 상하이의 집에 가두어 버렸다. 그러나 이미 선생님을 사랑한 칭링은 야반도주 일본 요코하마로 가는 배에 몸을 싣는다. 두 사람은 일본인 친지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비밀결혼을 하지만 믿었던 친구로부터의 배신감을 극복할 수 없었던 찰리의 분노는 화병이 되고 몇 년 가지 않고 생을 마감한다.
칭링은 쑨원의 부인겸 비서로서 있다가 위안스카이(袁世凱) 사후인 1916년 일본에서 귀국 쑨원의 공화혁명을 성공시키는데 기여한다. 그리고 쑨원의 사후에도 그의 유지를 받들어 중국 공산당을 지지하고 1949년 신중국이 건국된 후에는 부주석으로 크게 활약한다. 그녀의 여동생 메이링(美齡)은 장제스(蔣介石)와 결혼 국공 내전시에는 미묘한 적대 관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