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코디언 대가 심성락의 때늦은 데뷔
김형찬 기자<오마이뉴스> 2009년 12월 30일
한국 대중음악에서 아코디언이란 악기는 어떻게 기억되어 왔을까? 나이 마흔이 넘은 사람들은 초등학교 음악시간, 선생님이 연주하는 아코디언 반주에 맞춰 동요를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아니면 멋모르고 부모를 따라 동네에 온 악극단 공연에 갔다가 이름도 모르는 가수들 뒤에서 처량하게 울려퍼지던 아코디언의 소리를 들었을 수도 있다.
▲2009년 10월 발매된 심성락 선생의 새 앨범 ⓒ 트라이앵글 뮤직
< 가요무대 > 등의 TV 프로그램에서 이미자와 같은 트로트 대가들이 나왔을 때 어쿠스틱 기타와 함께 콤비를 이루는 아코디언을 목격한 적이 있다면, 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이처럼 나이든 사람들에게 아코디언은 동심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또 어머니가 사용했던 화장품, 박가분 냄새처럼 서민적이고 소박한 이미지의 음향으로 각인되어있다.
마흔 이하의 사람들은 아코디언이라는 악기를 보기도 힘들었을 것이므로 아코디언 소리를 구별하기도 힘들지도 모른다. 흘러간 트로트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던 아코디언이 조금씩 부활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언플러그드 음악이 유행하기 시작하면서부터다.
1990년대 초반 MBC < 음악이 있는 곳에 > KBS < 노영심의 작은 음악회 > 에서 어쿠스틱 밴드로 반주를 시도하면서 여기에 등장한 아코디언이 주목을 끌기 시작했다. 이런 시도는 1970년대에 젊은이들의 음악이었던 통기타 음악을 희미하게 기억하고 있던 80, 90년대 젊은이들에게 1990년대 트렌드를 과거 어쿠스틱 사운드와 결합시키는 촉매제로 작용했다.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음향 아코디언
이 이후로 아코디언은 추억과 향수라는 이미지를 걷어내고 감정의 속살을 건드리는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음향으로 탈바꿈했다. 그러나 대중음악의 중심악기가 아니라 일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효과악기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어쿠스틱 음악을 보여주는 라이브나 방송프로를 통하지 않으면 아코디언 연주를 직접 보고 그 음색을 확인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와중에도 아코디언은 알게 모르게 우리 주변에서 울리고 있었다. 영화 < 인어공주 > < 봄날은 간다 > < 효자동 이발사 > 와 같은 과거의 기억을 반추하는 영화에서 아코디언은 적절한 역할을 해냈다. 또한 < 인어공주 > 에 사용되었던 < My Mother Mermaid > 는 모그룹의 광고에 배경음악으로 사용되면서 이미 우리 귀에 가까이 다가와 있다.
아코디언에 대한 인식이 이런 수준인데 이 음악을 연주했던 아코디언 연주자에 대한 관심의 수준이란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이 연주자가 75세의 나이든 사람이라고 말해주면 음악에 대한 이미지가 확 깰까? 아니면 감탄을 할까? 한국 대중음악계에서 50년간 아코디언을 연주해왔던 아코디언의 대가 심성락이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부산에서 경남고등학교 다닐 적에 레코드가게에서 흘러나오던 유행가에 발걸음을 자주 멈추던 그는 레코드가게 한쪽에 세들어 있던 악기점에서 아코디언을 접하면서 독학으로 아코디언을 익히게 된다.
그가 프로에 세계에 발을 들여놓게 된 계기는 부산 KBS에서 열렸던 노래자랑대회에 아코디언 반주자로 들어가게 되면서부터다. 원래 있던 연주자가 대중가요를 잘 몰라 즉석에서 출연자의 반주를 능숙하게 하지 못하던 차에 악기점 주인이 심사위원이었던 작곡가 이재호에게 심성락을 추천하면서 그는 전문가들에게 솜씨를 인정받게 된다.
아코디언 연주경력 50년... 75세 연주자 심성락
(◀연주자 심성락 선생 ⓒ 김형찬)
심성락 이전에 일제강점기에는 허경구, 황병렬, 노명석 같은 연주자들이 있었지만 그 뒤를 이어 등장한 심성락은 아코디언의 독보적인 전문가로 군림했다. 그런 인기로 1960년대부터 260여장의 연주곡집을 출반했다.
당시에 연주자가 하루를 녹음실에서 연주하면 5천원을 받았는데 심성락은 음반 한 장(12곡)을 취입하는 것만으로 8만원을 받았다고 하니 그의 인기를 짐작할 만하다. 하지만 필자가 이때까지 보고 수집한 음반 중에는 심성락의 아코디언 독주곡집은 없었고 전자오르간 연주곡집에 그의 이름이 실려 있었다.
그 내용은 당시에 유행하던 트로트 곡들을 전자오르간으로 연주하여 판매수익을 얻고자 기획된 음반들이었기에 연주자의 이름은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연주만 한 것이 아니라 작곡을 한 경우도 있다. 최정자가 불렀던 < 등댓불 하소연 > (반야월 작사)이 있었고 박가연, 송춘, 프랑크백 등의 가수들이 그의 곡으로 취입한 경우가 있었다.
지난 10월 발매된 그의 연주곡집 <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 역시 그가 먼저 나선 것이 아니라 한 제작자의 제의로 만들어진 것이다. 과거처럼 트로트 연주곡집이 아니라 현재의 트렌드를 반영하면서도 심성락 연주의 내공을 살리는 방향으로 콘셉트를 정한 제작자의 의도가 돋보인다.
심성락은 자신이 참여했던 영화음악에서는 바람같이 쓸쓸하면서도 봄바람처럼 팔랑거리는 섬세한 연주를 들려주었고 몇 곡의 외국곡에서는 힘차고 격정적인 연주를 들려줌으로써 기존의 아코디언 연주의 한계를 뛰어넘는 시도를 하고 있다.
연주자들도 독자적 성과물에 욕심 부리자
평생 반주자로서 자신의 무대를 갖지 못했던 심성락이 지난 21일 라이브 전문 프로그램인 EBS의 < 스페이스공감 > 에 초대되었다. 이제껏 < 스페이스공감 > 에 출연했던 연주자 중에서 가장 고령인 셈이다.
트로트계열 연주자로 분류되지만 아코디언 대가인 심성락이라는 연주자를 단독무대에 세울 수 있는 프로그램은 < 스페이스공감 > 밖에 없을 것이다. 그의 독주회를 빛내기 위해 그룹 엘리스 인 네버랜드가 격정적이면서도 섬세한 연주로 받쳐주었다.
백전노장인 그였지만 첫 곡부터 실수를 연발했다.
"이상하게 악보가 눈에 안 들어오네요. 별로 긴장할 것도 없는데 말이죠. 눈에 뭐가 씌였나 봐요."
그의 말이 50년 만에 첫 독주회를 갖는 심경을 잘 드러내주었다. 별도 사회자가 없이 본인이 진행까지 해야 한다는 상황을 낯설어하기도 했지만 어눌한 말투로 신이 나서 청중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한 청중이 질문했다.
"왜 진작에 훌륭한 독주를 들려줄 생각을 하지 못하셨습니까."
"워낙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아서요."
한국 대중음악계가 심성락이라는 훌륭한 연주자를 일흔이 넘어서야 호명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연주자의 소극적 성격에 모든 원인이 있진 않을 것이다. 노래를 부르는 가수에게 모든 초점이 맞춰져있고, 방송은 젊은 층의 음악만 선호하는 기형적인 음악산업구조는 소극적인 성격의 음악인을 더욱 음지로 내몰았을 것이다.
그의 음반에 협연으로 빛내주었던 세계적인 아코디언 연주자 리샤드 갈리아노의 연주를 들으면서 자신이 "우물안 개구리와 같았다"고 한 그의 회한은 심성락이 그 나라에서 태어났다면 세계적인 연주자가 되었으리라는 생각을 하게 했다.
물론 화려한 주연이 있으면 뒤에서 묵묵히 받쳐주는 충실한 조연이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뛰어난 가수의 이름과 동시에 뛰어난 연주자의 이름까지 대중들이 기억하는 음악사회는 분명 더욱 수준이 높다고 할 것이다. 이제 연주자들도 평생을 녹음실에서 무명의 연주자로 일생을 마칠 것이 아니라 자신의 독자적인 음악적 성과물을 대중들에게 남겨줄 욕심을 부릴 때도 된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