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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화 모음! (130)
▶미국에서 20년을 목회 하시다가 잠깐 귀국한 목사님 이야기입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목회한 교회에서 설교를 마쳤습니다. 교회 문에서 장로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미국이 좋은가 봅니다. 10년은 젊어 보이네요. 얼굴도 나이답지 않게 팽팽하네요. 미국 목회가 재미 있나보지요? 축하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기분이 좋아서 교회 건물 모퉁이를 돌아서자 여집사님과 마주쳤습니다. 그 집사님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10년은 늙어 보이네요. 미국에 가서 고생 많이 하셨나 봐요. 주름살도 많군요>
목사님은 마음이 좋지 않아서 가면서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모퉁이를 도는 사이에 20년이 늙었구먼. 1분 동안 주름살이 그렇게 많이 생겼나?>
그 사람 말을 듣고 나면 평안하고 기뻐지고 용기가 나야 합니다. 그 사람 말을 듣고 나면 짜증이 나고 분노가 생기고 서운한 마음이 드는 말은 좋은 말이 아닙니다. 말이 조금만 달라도 크게 보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입술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지하철에 할머니가 올랐습니다. 지팡이를 짚었습니다. 자기 몸 하나 관리하기 힘들어 하였습니다. 할머니는 대학생 앞으로 갔습니다. 자리를 내 줄까 하는 눈치였습니다. 그 때까지 희희덕대며 떠들던 대학생이 갑자기 자는 척 하였습니다. 태연하였습니다. 한참을 지나 그 대학생은 <이제는 할머니가 내렸겠지> 하는 마음으로 눈을 살며서 떠났습니다. 그 때까지 할머니는 눈을 똑바로 뜨고 그 대학생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끝까지 개겨 봐> 망신이었습니다. 양보가 미덕입니다.
반대 이야기도 있습니다. 퇴근 시간이라 전철은 초만원이었습니다. 모두 퇴근길이라 지쳐있었습니다. 기차가 도착하자 모두 자리를 맡으려고 수라장이었습니다. 피곤하니까 다 앉아서 가고 싶어하였습니다. 행동인 빠른 사람은 이미 자리를 잡았습니다. 행동이 느리거나 노인들은 서있었습니다.
막 떠나려는 지하철에 꼬부랑 할머니가 타면서 말했습니다. <요즘 애들은 다들 그러니? 어째 어른에게 자리를 양보할 생각을 도대체 안 해? 요즘 어찌된 일인지 허리가 예전 같이 않아. 오래 서 있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에구구…>
비교적 큰 소리로 누가 자리를 양보하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중학생 한 명이 일어나면서 말했습니다. <할머니! 여기 앉으세요> <고맙다> <그런데 할머니. 저… 이 지하철이 두 정거장을 지날 때까지만 앉아 주세요>
주변 사람들 모두가 웃었습니다. 할머니도 이상하다는 듯이 웃었습니다. 그러나 두 정거장 지나자 꾀죄죄하고 초라한 할머니가 탔습니다. 중학생은 소리를 지르면 불렀습니다. 어머니였습니다.
한 손에는 커다란 바구니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미 다 닳아 꽃무늬가 일그러진 블라우스를 입었습니다. 색깔이 다 발하였습니다. 남색 고쟁이를 입었습니다. 얼굴에 깊게 주름이 파였습니다. 이미 다 파마는 다 풀어졌습니다. 고무줄로 머리를 묶었습니다.
중학생은 어머니를 데리고 할머니 앞으로 오더니 말했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두 정거장이 지났습니다. 자리를 내어주십시오>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 참. 별일을 다 보겠구먼. 이 자리 학생이 전세 냈어? 여기 학생 자리라고 이름이라도 써 놨냐고!>
학생이 말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실은 이 분은 저의 어머니십니다. 지금이 아니면 편히 쉴 수 있는 시간이 없어요. 아버지는 얼마 전 공사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중이예요. 어머니가 집안의 모든 일을 하시고 계시죠. 아침에는 시장에 나가 텃밭에서 기른 나물을 파시고요, 저녁에는 구슬을 꿰는 일을 하시고…. 하루 동안 저의 어머니가 일을 하지 않고, 쉴 수 있는 곳은 바로 이 지하철밖에 없어요. 그래서 제가 그 자리를 미리 맡아 두었던 거예요. 할머니! 양보해주세요. 저의 어머니가 단 몇 분만이라도 편히 쉴 수 있게 자리를 내주세요>
할머니는 벌떡 일어나면서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에게 자리를 양보하면서 그냥 앉으라고 권하였습니다.
주변 모두가 이런 아름다움에 눈시울을 적셨습니다. 양보가 있는 곳에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작은 양보가 크게 돋보이고 있습니다.
▶ <반복이 끊어지면 끝입니다> 밤낮 그 예배가 그 예배인 것 같아도 계속 반복하여야 합니다. 반복이 끊어지면 죽음입니다. 심장은 일생동안 다른 일을 하지 않습니다. 두근두근 하면서 계속 피를 온 몸에 공급하는 일을 합니다.
다른 일을 해도 중단해도 안 됩니다. 평생 한 가지만 반복합니다. 위는 평생 음식을 받아 드려서 소화시켜 내려보내는 일의 반복입니다. 이는 평생 씹는 일의 반복입니다.
밥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루 세끼 계속 먹는 것입니다. 반복되는 밥에 싫증을 느끼면 이미 공동 묘지가 가깝다는 증거입니다. 자동차를 타면 바퀴는 폐차 처분되는 순간까지 계속 굴르는 일만 합니다.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반복이라고 짜증내지도 않습니다. 반복이 두려워지거나 반복이 되지 않으면 끝장입니다.
▶불구자는 모두 불쌍한 사람이지만 그 중에서도 듣지 못하는 불구자는 더욱 불쌍한 사람입니다. 좋은 소리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고, 좋은 음악이나, 발달된 통신이 있어도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그래서 예수님이 탄식하시며 그 병자를 위해서 "에바다"하고 기도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와있는 귀먹은 사람의 불쌍한 모습입니다.
그런데 오늘 현대인들 가운데도 이 사람처럼 귀가 막혀서 듣지 못하는 사람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심령의 귀가 막혀서 위로부터 들려 오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성경을 읽어도 그 속에서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기도를 해도, 묵상을 해도, 그 속에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를 못합니다. 아름다운 자연 속에 깊이 묻혀 있어도 그 자연 속에서 섭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지 못합니다. 그저 무감각합니다.
그리고 듣는다는 것이 고작 육신의 소리만 듣고, 생리적인 소리만 듣고, 욕망의 소리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아니면 매일 같이 듣는다는 것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물가 이야기만 듣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니까 살아가다가 이해되지 않는 일들을 당하게 되면 속수 무책입니다. 이 일이 왜 내게 발생되었는지를 모릅니다. 하나님이 왜 이 같은 일을 내게 주셨는지 전혀 알 길이 없습니다. 듣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쉬운 대로 원망부터 하고, 불평부터 하고, 불신부터 하게 됩니다. 이것이 모두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의 답답함입니다.
어떤 부부가 아이가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우리 부부에게 아이를 주십시오." 얼마나 간절한 기도 제목입니까? 그렇게 기도하기를 16년 동안이나 했습니다. 이 부부가 마침내 기도 응답을 받아서 16년 만에 아이를 잉태했습니다. 그런데 기다리던 아이가 16년 만에 나왔는데 보니까 불구아입니다. 이 부부는 너무나 당황했습니다.
이 부부가 불구의 아이를 낳아 놓고는 별 생각을 다했습니다. 여기에 분명히 하나님의 어떤 뜻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한편으로 마음이 서운하기도 하고, 당황되기도 하고, 하나님이 원망스럽다 하는 마음까지 들어옵니다.
사람들은 이 지점에서 모두 고민을 하게 됩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분명한 뜻이 있는 것만은 사실인데 귀가 어두워서 그 뜻을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답답한 채 고민하면서 살아갑니다. 이것이 귀머거리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이 부부가 근심하면서 "하나님 이게 웬일입니까?"하고 다시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어느 날 마음속에 감동이 옵니다. 감동된 마음속에서 깊이 들려 오는 하나님의 음성이 있었습니다. "내가 이 불구아를 누구에게 맡겨야 사랑을 쏟아 가며 키워줄까 하고 16년 동안을 찾다가 너희 부부한테 맡겼노라."
이 부부가 그 음성을 듣고 나서야 일순간에 의심이 사라지고, 불만이 사라지고, 풀리지 않던 수수께끼가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 후 이 부부는 이 어린 아이를 자신들에게 주신 것을 늘 감사하면서 길렀다는 것입니다. 알고 나니까 이렇게도 감사한데, 모르니까 답답하고, 불만스럽고, 불행하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살게 됩니다.
현대인들에게 불행스러운 면이 있다면 그것은 명상이 없다는 점입니다. 묵상이 없고, 하나님의 신령한 음성을 들으려는 준비가 전혀 없다는 점입니다.
▶외국 영화 가운데 "로베레 장군"이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나치에 저항했던 레지스탕스들이 붙잡혀서 처형을 당합니다.
그런데 그 중에는 레지스탕스도 아니고 나치에 불순한 행동도 하지 않은 장사꾼 한 사람이 붙잡혀 와서 함께 처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람은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악을 쓰며 변명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다.
나는 나치에 저항한 일도 없고 관심도 없다. 다만 왔다갔다하면서 장사를 한 죄밖에 없다. 아는 저 사람들과 함께 죽은 것이 억울하다." 입에 거품을 품으며 악을 씁니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레지스탕스 한 사람이 한심한 듯이 입을 열었습니다. "왜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가? 전쟁은 5년 동안이나 계속되었고, 수많은 민족이 나치에 의해서 희생되었고, 도시가 파괴되고, 나라가 멸망 직전에 놓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당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니 그러면 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일을 해야 할 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입을 열어야 할 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결백이 아닙니다. 그것이 벙어리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탄식하시면서 혀에 손을 넣어 "에바다" 하신 것입니다. "혀야 풀어져서 할 말을 하라."는 뜻입니다. 혀는 풀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할 말을 해야 하고, 전해야 할 말은 반드시 전해야 합니다.
▶ 벙어리가 말을 못하고 듣지 못하는 것도 비극이지만 이보다 더 심각한 비극은 마음을 닫고 있다는 것입니다. 듣지를 못하고 말을 못하기 때문에 남들이 자기를 흉보는 줄 알고 마음을 닫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주님을 "열리라"고 외치신 것입니다.
사람이 마음의 문을 닫고 살면 불행해집니다. 이웃끼리 교류가 되지 않습니다. 사람을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과도 교통이 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큰 비극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 가운데는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누구를 도우려고도 하지 않고, 도움을 받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누구를 간섭하려고도 하지 않고, 간섭을 받기도 싫어합니다. 이보다 더 큰 비극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하나님을 필요로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향해서까지 마음을 굳게 닫고 살아가는 사람은 구제 불능입니다. 구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어떤 분이 탄식을 합니다. "믿지 않는 남편을 위해서 10년을 기도했는데도 그 마음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실망말고 더 기도해야 할 일이지만 이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흔히 결혼할 때 믿지 않는 상대를 골라 놓고서 하는 말이 "결혼하고 나서 전도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아주 좋은 희망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에서 어떤 부류의 사람은 그것이 안 되는 경우가 있다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세상에 어떤 사람은 아주 굳게 마음의 문을 닫아걸고 문을 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고층아파트에 살고 있는 어느 부부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은 방에 들어가서 숨을 죽인 채 거실에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싸우는 소리를 마음 졸이며 듣고 있습니다. 부부사이에 점점 더 언성이 높아졌습니다. 급기야 화를 이기지 못한 아버지가 옆에 있는 가스밸브를 틀었습니다. 그리고는 라이터로 불을 붙였습니다.
"펑!"하는 소리와 함께 아파트 안에 불길이 크게 치솟기 시작했습니다. 방안에서 가만히 숨을 죽이면서 밖의 동정을 살피고 있던 아들이 도저히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방문을 박차고 뛰어나왔습니다. 나와서 보니까 거센 불길이 아파트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엉겁결에 창문을 열고서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 모습을 본 어머니가 "아무개야!"라고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뒤따라 창 밖으로 뛰어내렸습니다. 아버지는 홧김에 불을 지르기는 했지만 어쩔 줄 몰라 우물쭈물하다가 결국은 자신도 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세 사람이 다 고층아파트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한 사람도 다치지 않고 다 무사했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지 아십니까? 첫째로, 아버지는 제비족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제비처럼 날아서 땅에 사뿐히 땅에 떨어졌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어머니는 날라리였다고 합니다. 얼마나 잘 날았겠습니까? 훨훨 날아서 땅에 사뿐히 떨어졌습니다. 셋째로, 아들은 비행청소년이었다고 합니다.
▶19세기초 미국에 벤쟈민 웨스트(Benjamin West)라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하루는 부모님이 외출하고 난 사이에 그가 혼자 남게 되었습니다. 벤쟈민은 심심한 나머지 그림 물감을 다 풀어서 자기의 누이동생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방이 지저분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잠시 뒤에 부모님이 외출에서 돌아왔습니다. 집에 들어와 보니까 방이 엉망이었습니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에 대해서 벤쟈민에게 한 마디도 언급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벤쟈민을 칭찬해 주었습니다.
"야! 우리 벤쟈민이 그림을 엄청 잘 그렸네. 딱 보니까 누이동생인걸 알겠네!"
그러면서 칭찬해 주었습니다. 부모님은 벤쟈민을 꼭 끌어안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서 그림을 잘 그렸다고 격려의 입맞춤까지 해주었습니다. 나중에 벤쟈민은 그때 일을 이렇게 술회했습니다.
"내가 지금처럼 세계적인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 때 부모님의 격려와 입맞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부족하다고 자꾸 구박 주고 나무라지 말고, 잘 하는 점을 칭찬해 주면서 격려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그대로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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