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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 빙점] 교차점
잔디 위에 앉자마자 도오루가 요코에게 말했다.
“기타하라도 온다고 했어.”
홋카이도 도청 구내에 있는 연못가였다. 붉은 벽돌로 지은 이국적인 청사가 연못에 거꾸로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다. 연못에는 잔물결 하나 일지 않았다. 삿포로에서는 보기 드물게 바람 한 점 없는 9월의 오후였다.
“어머, 기타하라 씨가?”
요코는 놀라며 얼굴을 살짝 붉혔다.
어젯밤 요코는 삿포로의 도오루한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F 교향악단 연주회의 초대권을 얻었는데, 내일은 토요일이라 오후부터 시간이 있으니 두시 반 경에 도청 남쪽 연못가에 와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때 도오루는 기타하라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초대권이 석 장 생겨 그 친구에게도 연락했어.”
도오루는 변명하듯이 말했다. 자신이 자살을 기도한 이래 기타하라와는 처음 만나는 것이었다. 그 즈음에 기타하라에게서는 편지가 두세 번 왔다. 그러나 요코는 단 한 차례 간단한 답장을 써 보냈을 뿐이었다. 그 후 두 사람 사이는 어느새 소식이 끊겨 있었다. 요코는 유서를 쓴 시점에서 그 이전의 자신은 죽은 것이라고 생각해 왔다. 그런 상황에서 기타하라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기타하라의 존재는 그 무서운 날을 싫어도 연상하게 만들었다.
‘무엇 때문에 그 사람을 만나게 하려는 것일까?’
요코는 도오루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기타하라를 부르는 게 아니었나?”
도오루가 연못가에 피어 있는 칸나에 눈길을 주고 있는 요코를 바라보며 말했다. 요코는 고개를 옆으로 흔들고 나서,
“……하지만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
“미래는 언제나 갑자기 닥치는 거야.”
도오루는 자신의 지론을 익살스럽게 표현했다. 그런 도오루에게 요코는 미소를 지어 보일 수밖에 없었다 두 사람은 잠시 잠자코 있었다. 청사 한복판의 높다란 돔형 지붕에 조용히 샛살이 비치고 있었다. 청사 앞에서는 키 큰 외국인이 금발의 여인을 카메라에 담고 있었다.
요코가 불쑥 말했다.
“오빠는 병원에서 날마다 무슨 일을 해?”
“요즘은 주로 예진을 하고 있지. 입맛은 있습니까 어쩌고 하면서 바보 같은 질문을 하고 있어.”
“바보 같은 질문?”
“그래. 눈이 게슴츠레해져 가지고 말을 할 때마다 어깨로 숨을 몰아쉬는 사람에게 입맛이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런 사람에게도 같은 질문을 하니까 말이야.”
기타하라에게 어떻게 인사해야 할까 하고 생각하면서 요코는 도오루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오루는 마음이 안정되지 않는 듯 손수건으로 여러 번 목을 닦았다.
“아, 기타하라.”
도오루가 일어서며 말했다. 연못 맞은편의 아카시아 나무 그늘 아래에 젊은 여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오는 기타하라가 보였다.
요코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야, 건강해진 것 같군요.”
기타하라가 다가오며 쾌활한 얼굴로 말했다. 오랜만에 요코를 만나게 된 기쁨을 기타하라는 솔직히 드러냈다.
“오랜만이에요.”
깊숙이 고개를 숙이는 요코의 인사를,
“정말 오랜만입니다.”
하고 가볍게 받아넘긴 기타하라는 자기 뒤에 있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쓰지구치, 준코 양이야.”
“아, 그래? 준코 씨군요.”
키타하라와 요코의재회만 눈여겨보고 있던 도오루는 다카기 어머니의 장례식 때 함께 일을 거둔 준코를 미처 알아보지 못했다.
“이분은 쓰지구치의 여동생인 요코 씨. 요코 씨, 아이자와 준코 양은 다카기 선생의 어머니 장례식 때 함께 일을 거둔 친굽니다.”
밝은 감색 원피스의 흰 레이스 옷자락이 산뜻하게 보였다. 웃으면 볼 깊숙이 작은 보조개가 생기는 것이 귀여웠다.
“어느새 자네와 친구가 됐나?”
“그러니까 그게 장례식 며칠 후부터였디.”
요코는 준코를 돌아보는 기타하라의 표정이 부드럽다고 생각했다.
“아마 열흘쯤 후였을 거예요. 이시카리 강변에서 우연히 다시 만났어요.”
“그래서 반나절을 함께 강변을 돌아다녔지.”
“정말 우연한 만남이었군.”
도오루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오늘 도청 앞에서 또 마주쳤어. 자네와 이곳에서 만나기로 했다니까 준코 양이 자기도 만나 보고 싶다면서 따라온 거야.”
“우연의 연속이군, 당신들은.”
‘당신들’이라는 말에 도오루는 유난히 힘을 주었다.
“그래, 이게 소설이나 영화라면 우연이 너무 많다고 할 테지.”
기타하라와 준코가 나란히 앉자 네 사람은 둥그렇게 둘러앉게 되었다. 준코가 요코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요코도 미소를 지었다. 이 여자에게는 확실히 ‘준코 양’이라고 불릴 만한 사랑스러운 데가 있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동안 건강하셨어요?”
옆에 앉은 요코에게 기타하라가 새삼스럽게 다시 인사를 했다.
“덕분에 몸만은……”
“몸만이라뇨?”
기타하라의 표정이 약간 어두워졌다.
“아무튼 잘 오셨어요.”
“사과 드리지 않고서는 만나 뵐 수 없는 심정이었는데…..”
결국 요코는 기타하라를 배신한 것이다. 만일 그가 변심을 탓한다면 대답할 말이 없을 것이다. 추궁하지 않는 것을 빌미로 1년 반 이상이나 편지를 쓰지 않았다. 그 날 자신은 죽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자신은 현실적으로 이렇게 살아 있다. 그것은 전혀 뜻하지 않은 발견이었다.
“사과라니 그런 당치 않은……나도 요코 씨에게 말씀드리고 싶은 것이 많아요.”
기타하라가 요코에게 말했다. 두 사람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도오루에게 준코가 말했다.
“저 붉은 벽돌 건물은 미야모토 유리코의 아버지께서 세웠다지요?”
“그래요?”
“쓰지구치 씨는 몇 남매세요?”
“둘입니다. 당신은?”
“전 혼자예요. 쓰지구치 씨는 여동생과 닮지 않아군요. 아버지와 어머니를 각각 닮으셨나 보죠?”
“글쎄요……..”
도오루는 기타하라와 요코의 대화가 마음에 걸려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거리에는 쉴 새 없이 차가 달리고 있었다. 도오루는 그 소음에 미간을 찌푸렸다.
“기타하라, 딴 곳으로 자리를 옮길까?”
“응, 그래. 식물원에라도 가볼까? 그곳은 조용하고 가까우니까…..”
기타하라와 준코가 앞서 가고 요코는 도오루 뒤에 한 걸음 떨어져서 걸었다. 준코가 기타하라를 쳐다보며 뭐라고 말하고는 뒤를 돌아보며 짓궂게 웃었다.
“쓰지구치, 자네가 너무 무뚝뚝한 남자라서 준코 양이 놀랐대.”
도오루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준코가 다시 뒤를 돌아보며 웃었다. 천진한 웃음이었다.
“귀여운 아가씨군.”
조금 떨어져 걷는 요코와 도오루는 보조를 맞춨다.
“응 .인상이 좋은 사람이야. 다카기 아저씨의 친척이야?”
“그런거봐. 약국집 딸이라지 아마.”
도오루도 자세한 것은 알지 못했다.
“오빠, 저분에게 불친절하게 대했어?”
“아니, 별로 그런 것도 아닌데….차 소리가 시끄러워서 말이야.”
도오루는 약간 당황했다. 요코와 기타하라의 대화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도청 문을 나오자 기타하라가 돌아보았다.
“준코 양이 요코 씨와 얘기를 하고 싶다는군.”
준코는 쑥스러운 듯이 요코를 바라보았다.
“나도 얘기를 나누고 싶었어요.”
두 사람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요코 쪽이 키가 조금 더 컸다.
“집이 약국을 한다구요?”
“네. 그래서 난 당연히 약사가 되어야 하는 줄 생각했죠. 하지만 보육과에 들어갔어요.”
“아이들을 좋아하나 보죠?”
“내가 외동딸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인형처럼 생각하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결혼하면 한 다스쯤 낳고 싶어요.”
“어머!”
준코는 웃었지만 요코는 웃을 수가 없었다. 웬일인지 고아원 아이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준코는 요코의 표정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저, 요코 씨, 혹시 아기를 낳은 꿈을 꾼 적 없어요?”
“나요? 없는데요.”
당돌한 준코의 물음에 요코는 깜짝 놀랐다.
“난 꾼 적이 있어요. 고등학교 때 두 번이나 꾸었어요. 두 번 다 남자아이를 낳았어요. 포동포동하고 귀여운 발을 가지고 있었어요. 내가 좀 이상한 성격인가요?”
“아기를 무척 좋아하나 보군요.”
“좋아해요…..저, 내 방에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그림이 걸려 있어요. 그 영향 때문인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이상해요.”
준코는 순진한 눈빛으로 요코를 바라보았다.
사거리까지 왔을 때 신호가 노란색으로 바뀌었다. 도오루와 기타하라는 벌써 교차로를 건너고 있었다. 도오루가 뒤를 돌아보았다. 준코는 도오루에게 쾌활하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요코 씨의 오빠는 깜끔한 인상에에요.”
“고마워요. 기타하라 씨도 깔끔해요.”
“네, 그분도 좋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날 너무 어랜애 취급하고 지나치게 어른 티가 나요. 친구라기보다는 아저씨 같아요.”
두 사람은 얼굴을 마주 보고 웃었다.
“얼만 전에 나도 모르게 ‘기타하라 아저씨’라고 불러 버렸어요. 그랬더니 기타하라 씨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네’하고 대답하는 거 있죠. 저기, 요코 씨, 나 요코 씨의 오빠와 친구가 되어도 괜찮겠어요?”
“그럼요. 나도 기뻐요.”
신호가 파랑색으로 바뀌었다. 양쪽에서 일제히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여 도중에서 뒤섞였다. 횡단보도 중간쯤에서 웬 고등학생으로 보이는 소년이 멈춰 서서 요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를 지나친 요코는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 소년도 뒤를 돌아 요코를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시선이었다.
“고등학생인가봐요. 저 남학생 좀 이상하군요.”
준코도 돌아보았다.
50미터쯤 앞에 있는 단풍나무 가로수 그늘에서 도오루와 기타하라가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말이에요, 이상한 고등학생을 만났어요. 교차로 한복판에 멈춰 서서 요코 씨를 빤히 쳐다보지 않겠어요?”
“그래요? 혹시 변태 아닐까요?”
“기분 나빴죠, 요코 씨?”
기타하라는 교차로 쪽을 바라보았다. 차가 줄을 이어 오가는 것이 보일 뿐이었다. 도오루는 개의치 않는 듯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도오루는 그 소년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방금 도오루도 이곳에서 만났던 것이다. 미쓰이 게이코의 둘째아들 다쓰야였다. 무슨 꾸러미를 든 다쓰야가 모퉁이를 돌아왔을 때 금세 그를 알아본 도오루는,
“기타하라, 여기서 두 아가씨를 기다리기로 하지.”
하고 슬쩍 가로수 아래로 다가가서 나뭇가지를 올려다보았다. 그 뒤를 다쓰야가 지나갔다.
도오루는 자기 앞을 지나간 미쓰이 다쓰야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오른쪽 어깨를 치켜올린 뒷모습에서도 다쓰야의 외곬인 듯한 격한 성격이 나타나고 있었다.
‘요코를 알아볼까…….?’
도오루는 불안했다. 다쓰야가 교차로에 멈춰 서서 요코 일행을 바라보고 요코 일행도 뒤돌아보는 것을 도오루는 길 건너에서 보고 있었다. 요코 일행이 교차로를 다 건넜는데도 다쓰야는 여전히 그 자리에 멈춰 선 채 바라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뒤쫓아올 것만 같아 도오루는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그래, 그는 병원에 가는 길이었을 거야.’
오늘은 토요일이다. 아마도 다쓰야는 방금 오타루에서 삿포로에 온 것이 틀림없다. 이 근처는 역에서 게이코가 입원해 있는 병원으로 가는 길목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쓰지구치?”
말없이 앞서 걸어가는 도오루에게 기타하라가 미씸쩍다는 듯이 말을 걸었다.
“뭐가?”
도오루는 시치미를 뗐다.
“갑자기 아무 말도 않으니 말이야.”
“그랬나?”
도오루는 요코를 힐끗 바라보고 나서 준코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네 사람은 식물원으로 들어갔다. 4만 1천 평이나 된다는 식물원은 거리 한복판에 있다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여기저기 사람들이 쉴 수 있는 넓은 잔디밭을 사이에 두고 길이 좌우로 갈라져 있었다. 그 길은 다시 갈라져서 몇백 년의 수령을 지닌 나무숲과 풀숲 속으로 나 있었다.
기타하라가 눈이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떴다. 햇빛이 내리쬐기 시작했던 것이다.
길가에 폴로 셔츠를 입은 청년이 문고본 책을 얼굴에 덮고 잠들어 있었다.
“어머, 도스토예프스키의 <백치>예요.”
책 제목을 들여다본 준코가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백치>를 얼굴에 얹고 잠들다니….”
작은 소리로 말하고 준코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럼 어때요? <백치>로 얼굴을 가린 게 오히려 호감이 가는걸요.”
기타하라의 말에 준코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맞아요. 현명한 사람 어쩌고 하는 책이었더라면 더욱 우스꽝스럽게 보였겠어요.”
“좋아요, 그 말을 들으니 안심이 되는군요. 안 그래, 쓰지구치?”
도오루는 문득 제정신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다쓰야를 만나자 갑자기 게이코의 상태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게이코는 아직 얼마 동안 더 입원해 있어야 한다. 이 더운 여름에 매우 괴로울 것이다. 도오루는 한숨을 내쉬었다.
“준코 씨는 참 명랑하군요.”
요코가 말을 건넸다.
“모두를 그렇게 말해요.”
“행복하겠어요.”
준코는 잠시 요코를 바라보고 나서,
“그럼요.”
하고 멈춰 섰다.
준코는 도오루와 기타하라가 조금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앉아요, 우리.”
하고 잔디 위에 앉았다. 두 사람의 옆을 기모노 차림의 노인이 젊은 여자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천천히 지나갔다.
“그건 비극이야.”
노인이 말했다.
“하지만 할 수 없어요.”
젊은 여자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요코와 준코는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 뒷모습은 할아버지와 손녀처럼 보였다.
요코는 방금 노인의 입에서 비극이란 말이 나온 것은 아주 뜻밖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인생이 있군요.”
준코도 노인의 말이 마음에 남았는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코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누구나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할 거예요.”
준코는 명랑하게 말하고 나서,
“나 말이에요, 아까 요코 씨가 ‘행복하겠어요’하고 말했을 때 약간 뜨끔했어요.”
하고 요코를 바라보았다.
“왜요?”
“그러니까 마치 요코 씨는 행복하지 않다는 말처럼 들렸어요. 미안해요. 단 단순해서 생각한 걸 바로 말해 버니는 버릇이 있어서요.”
“민감하군요, 준코 씨는. 그래요, 난 행복하지 못해요.”
“하지만 저렇게 좋은 오빠가 있고…….요코 씨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장례식 때 뵈었어요. 참 좋으신 분들로 보이던데.”
“그래요, 좋은 부모님과 좋은 오빠예요. 하지만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란 결국은 자기 자신의 내부 문제라고 생각해요.”
행복해 보이는 이 사람에게는 자신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요코는 생각했다.
“그건 그래요. 살아가는 의미와 목적이랄까, 그것을 알 수 없는 동안은 공허한 거예요. 허무해요. 허무는 채워지지 않은 상태예요. 행복감을 느끼지 못하는 건 당연해요.”
준코의 입에서 나온 말은 뜻밖이었나.
“그래, 준코 씨는 채워져 있나요?”
“지금은 채워져 있어요.”
“그럼 준코 씨도 불행한 적이 있었어요?”
“그럼요. 불행을 모르는 사람은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없어요. 요코 씨, 난 말이에요, 행복이 인간의 내면의 문제라고 한다면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에게도 행복의 가능성은 있다고 생각해요.”
“어떤 처지에 있는 사람도?”
언뜻 보기에는 천진스러운 듯한 준코에게 대체 무엇이 불행을 느끼게 했을까?
요코는 커다란 느릅나무 아래를 왔다갔다하는 도오루의 기타하라를 바라보았다. 준코가 잔디 위에 누워 한번 뒹굴고 나서 말했다.
“요코 씨, 하늘이 너무 높네요. 인간이 낮아지면 하늘이 높아지는군요.”
잔디 위에 앉아 있는 요코와 준코를 바라보면서 기타하라가 말했다.
“……..그래? 그럼 요코 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동생을 만난 셈이군.”
“그래.”
“그건 그렇다 치고, 그 날 밤에 자네가 오타루의 그분을 만났더니…..”
“응, 자네한테 아무 말도 하지 않아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어.”
“아니야, 자네 심정은 알겠어. 요코에 관한 일인 데다가 일일이 내게 알릴 의모두 없으니까…..”
도오루에게는 기타하라의 말이 따끔하게 들렸다.
“그런데 기타하라, 난 그 다쓰야라는 남자아이를 보면 이상하게 불안해져. 왜 그럴까?”
“글쎄, 어떤 친군지 전혀 알지 못하니 뭐라고 말할 수가 없군.”
기타하라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외곬이라고나 할까,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어.”
“그런 아이가 가장 다루기 어려워. 탄력성이 없거든. 젊었을 때부터 동맥경화증에 걸려 있다고 볼 수 있어. 요코의 일을 알게 되면 꽤 시끄러울걸.”
도오루는 불안한 듯이 멈춰 서서 계수나무 줄기의 거친 껍질을 한 손으로 짚었다.
“그런 그렇고, 자네는 1년 반 이상이나 요코를 만나지 않은 셈이군.”
“이달 15일이면 1년 하고도 8개월이 돼.”
기타하라는 즉시 대답했다. 도오루는 움찔하며 기타하라를 쳐다보았다. 물어보기가 무섭게 정확한 날짜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기타하라에게 요코는 과거의 여자가 아니라는 것을 의미하는 뜻일 것 같았다.
“요코는 많이 변했지?”
“응. 이전의 요코 씨에게서 넘쳐나는 듯한 강렬한 아름다움이 있었어. 하지만 지금은 어딘가 우수를 느끼게 하고 있어. 어른이 된 느낌이야.”
두 사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일찍이 없었던 무거운 침묵이었다. 기타하라는 나무숲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다가 무슨 결심히라도 한 듯이 말했다.
“쓰지구치, 내가 작년에 말했지? 요코 씨를 단념하겠다고 말이야. 그랬더니 자네는 조급히 굴지 말고 요코의 결정에 맡기라고 했었지?”
“응, 그랬었나?”
“사실 난 단념하려고 했어. 소세키의 소설 <마음>의 주인공들과 같은 친구 사이는 되고 싶지 않아서 말이야. 그런데 오늘 요코 씨를 만나니 솔직히 말해서 괜히 만났다는 생각도 들어.”
“………..”
“쓰지구치, 인간이란 그렇게 간단히 잊혀지지는 않는 모양이야. 어쨌든 자네 말대로 조급하게 굴지 않으려고 해.”
도오루는 땅 위로 뻗어 있는 나무 뿌리를 구두 뒤축으로 툭툭 차면서 기타하라의 말을 듣고 있다가,
“선전 포고 같군.”
하며 농담 비슷하게 말했다.
오늘 도오루가 기타하라와 요코를 만나게 한 것은 두 사람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래, 선전 포고야.”
기타하라도 웃었다.
“난 요코만 행복하게 된다면 상관없어. 요코가 자네를 택하든 딴 남자를 택하든 행복할 수만 있다면 두말 하지 않을 거야.”
“정말이야, 쓰지구치?”
“그럼, 괴롭지만 할 수 없지. 다만 만일 요코를 불행하게 한다면 그땐 가만두지 않을 거야.”
“그래? 역시 자네한테는 당할 수가 없군.”
기타하라는 잔디 위에 앉아 있는 요코 쪽을 바라보았다.
“……..기타하라, 자네가 준코 씨와 함께 나타났을 때 난 ‘혹시?’하며 기뻐했는데…….”
“준코 양과 내가? 설마. 그 아가씨는 자네에게 마음이 있는 모양이야, 장례식 때부터…..”
“농담하지 마.”
“농담이 아냐. 자네와 친구가 되고 싶다고 몇 번이나 말했으니까. 난 차라리 요코 씨에 대해 말해줘 버릴까 하고 생각했을 정도야.”
요코와 준코가 다가왔다. 도오루와 기타하라는 잠자코 있었다.
“무슨 얘기를 하셨어요?”
준코의 물음에 기타하라가 웃지도 않고 대답했다.
“선전 포고 얘기를 했어요.”
“전쟁 얘기요? 싫어요. 이런 조용한 곳에 와서까지 그런 얘기를 하다니. 아직도 그런 세상인가 보죠?”
“아가씨들은 무슨 얘길 하셨죠?”
“우리한테 지금 무엇이 가장 필요한가 하는 얘기요. 그렇죠, 요코 씨?”
네 사람은 좁은 길을 두 줄로 서서 걷기 시작했다.
“준코 양은 뭐가 가장 필요하다고 했어요?”
기타하라가 준코를 돌아보며 물었다.
“뭐였을 거라고 생각해요?”
“보이 프렌드?”
“놀리지 마세요. 저한테도 보이 프렌드보다 더 중요한 게 있어요.”
“그럼 돈?”
“네? 기타하라 씨는 항상 절 어린애 취급하기만 하고…..나쁜 사람이에요. 제가 필요로 하는 건 깨끗한 마음이에요.”
“깨끗해요, 준코 씨는.”
“그렇게 간단히 단정짓지 말아요. 전 보기와는 다르다구요.”
기타하라와 도오루는 준코를 보고 웃었다.
“너무해요. 그럼 요코 씨가 가장 필요로 하는 걸 알아맞혀 보세요.”
얼굴을 마주 보는 도오루와 기타하라에게 준코는,
“요코 씨는 말이에요, 멋진 남자가 가장 필요하다고 했어요, 기타하라 씨 같은…..”
하고 말했다.
“아니, 이번엔 내가 놀림을 받을 차례인가요?”
“그래요. 요코 씨에게 가장 필요한 건 나 절대로 가르쳐 주지 않을 거예요.”
준코의 볼에 보조개가 나타났다.
오후 4시 20분발 기차가 출발하려면 아직 시간이 남아 있었다. 플랫폼을 오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옆에 있는 요코에게 쏠리는 것을 의식하자 도오루는 마음이 뿌듯했다.
“앞으로는 자주 오도록 해. 아사히가와에서 삿포로까지는 두 시간밖에 걸리지 않으니까.”
“응, 자주 올 거야. 오빠, 어젯밤의 차이코프스키는 참 좋았어.”
어딘지 불만이 소용돌이치는 듯한 ‘비창’의 가락이 아직도 요코의 몸 속에서 울리고 있었다. 이 곡을 쓴 차이코프스키는 콜레라에 걸려 죽었다고 한다. 죽음의 예감이 그런 명곡을 낳게 했을까, 아니면 풀리지 않는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가 그런 명곡이 되었을까? 그와 같은 위대한 작곡을 할 수 있는 인간에게도 공포나 불안이 있었을까?
요코는 어젯밤부터 인생의 무게를 새삼 느끼고 있었다.
“또 좋은 레퍼터리가 오면 사 둘게.”
“고마워, 오빠. 준코 씨에게 안부 전해 줘. 기타하라 씨에게도.”
“응, 기타하라도 온다고 했는데…….”
요코가 기차 안으로 들어가자 곧 출발을 알리는 벨이 울렸다.
“앗, 이거 실례. 늦어서…..”
무슨 꾸러미를 든 기타하라가 달려와 승강구로 뛰어올랐다. 순간 출입문이 닫혔다.
“아! 기타하라!”
무심코 소리치는 도오루를 향해 기타하라는 할 수 없다는 듯이 손을 흔들어 보였다.
도오루는 쫓아가고 싶은 심정으로 멀어져 가는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기타하라는 처음부터 요코와 함께 타고 갈 심산이었는지도 모른다. 기타하라는 속임수를 쓴 걸까? 아니다, 그는 속임수를 쓸 사나이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자신에게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오타루의 미쓰이 가를 혼자서 찾아갔는가 하면 불공을 드리던 날 밤에 기타하라에게 알리지도 않고 게이코를 만나기도 했다. 자신이야말로 그에게 속임수를 썼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역시 갑자기 요코와 함께 기차를 타고 떠난 기타하라를 용서하기 어려울 것 같았다.
“쓰지구치 씨!”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려 뒤를 돌아본 도오루는 흠칫 놀랐다. 게이코의 장남 기요시가 서 있었다. 약간 굳은 표정이었다.
“아니……”
“배웅 나오셨습니까?”
“네. 당신은?”
요코를 보았나 해서 도오루는 당황했다.
“어머니 문병 갔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오타루행 기차가 옆 플랫폼에 들어와 있었다.
“좀 어떻습니까?”
도오루는 눈을 내리깐 채 물었다.
“예정보다 보름쯤 더 계셔야 한다나 봐요.”
“그거 큰일이군요.”
“쓰지구치 씨, 방금 배웅한 아가씨 누구입니까?”
“네, 여동생입니다.”
도오루는 담배에 불을 붙이며 기요시의 시선을 피했다.
“여동생요? 여동생이군요.”
기요시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도오루를 보고,
“…….그렇습니까? 놀랐어요. 우리 어머니와 너무 많이 닮아서 말이에요.”
하고 갑자기 쾌활하게 말했다.
“그래요? 그렇게 말하니까 어딘지 닮은 것 같기도 하지만……”
도오루는 담배 연기를 깊이 들이마셨다.
“어딘지 닮은 게 아닙니다. 아주 꼭 닯았어요.”
“그렇게 닮았나요?”
도오루는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제 동생 다쓰야가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어제 그 애가 어머니를 꼭 닮은 아가씨를 만났다고 하더군요. 저는 별로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요. 어쩌면 그 애가 댁의 여동생을 ㅁ나난 게 아닐까요?”
“글쎄요. 세상엔 서로 닮은 사람이 셋은 있는 모양이라니까……”
대답이 궁한 나머지 도오루는 이렇게 말했다.
“여동생은 삿포로에 살고 있나요?”
“아니 아사히가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럼 죄송하지만 좀 바쁜 일이 있어서 이만…..”
“기분이 상하셨나요? 하지만 저로서는 무척 마음에 걸리는 일이 있어서 말이에요.”
이 말을 듣고 도오루는 옮기려던 발걸음을 멈췄다.
“마음에 걸리는 일이라뇨?”
“아니, 아, 동생이 오는군요. 저 애한테는 여동생의 일을 말씀하지 말아 주세요. 저 애는 좀…….”
다가온 다쓰야가 도오루를 보고 멈춰 서서 목례를 했다.
“늦었구나, 다쓰야.”
“응. 하지만 아직 2분 남았어.”
오늘은 다쓰야의 말투도 부드러웠다.
“그럼 또 뵙겠습니다.”
도오루는 도망치듯이 두 사람 앞을 떠났다. 온몸에 땀이 축축하게 배어 있었다. 기요시가 뭔가 눈치를 채고 있는 것 같아 불안했다. 도오루는 기타하라가 요코가 탄 기차에 올라탄 것도 마음에 걸렸으나, 기요시의 말에 더욱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
도오루는 갑자기 게이코의 문병을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사고 직후에 한 번 문병을 갔을 뿐이었다. 지금 가면 그 두 형제를 병실에서 만나지 않게 될 것이다.
도오루는 역에서 나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목이 몹시 말랐다. 그는 역 앞의 음료수대에서 물을 마셨다. 물은 분수처럼 줄기차게 솟아올라 도오루의 얼굴을 적셨다.
‘기타하라 녀석!’
기타하라는 지금 요코와 나란히 앉아 얘기를 주고받고 있을지도 모른다. 도오루는 뛰는 가슴을 억제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로 들어섰다. 요코 옆에 앉은 기타하라의 모습을 지워 버리려면 게이코의 문병을 가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게이코는 침대 위에 일어나 앉아 있었다. 짙은 포도 빛깔의 두꺼운 네글리제와 함께 짧게 자른 헤어스타일이 게이코를 한층 젊게 보이게 했다.
“어머, 어서 와요.”
병실에 들어온 도오루를 보고 게이코는 약간 놀라는 듯했으나 곧 반가운 미소를 띄웠다.
“오랜만입니다. 몸은 좀 어떠십니까?”
“고마워요. 보시다시피 많이 나았어요.”
“하지만 예정보다 보름이나 퇴원이 늦어질 거라는 말이 기요시 씨한테서 들었는데요…..”
“어머, 기요시를 만났나요?”
“네, 아까 역에서요…….죄송합니다, 너무 오래 찾아뵙지 못해서. 다카기 아저씨가 문병 가면 안 된다고 막는 바람에….뭐라고 사과의 말씀을 드려야 할지 모르겠군요.”
“천만에요. 당신이 무엇 때문에 사과한다는 건가요?”
게이코는 다정한 얼굴로 도오루를 바라보았다.
“그 날 밤에 제가 공연한 말을 한 것 같아요. 제가 나빴습니다.”
“아니에요. 공연한 짓을 한 건 바로 나예요. 하지만 난 그런 말을 듣고 마음이 산란해질 그런 여자가 아녜요.”
“하지만……”
“아녜요, 절대 당신 탓이 아녜요. 그런 일로 괴로워한다면 그거야말로 공연한 일이에요. 이제 아무 걱정도 하지 말아요. 그보다도 내게 무슨 위문품을 갖고 왔나요? 보여줘요.”
도오루의 양손에 들려 있는 꾸러미를 보고 게이코는 방긋 웃어 보였다. 도오루는 내놓을 기회가 없어서 들고 있던 꾸러미를 게이코에게 넘겨주었다.
“어머, 머스캣이네요! 고마워요. 난 포도를 무척 좋아해요. 어떻게 내가 포도를 좋아한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이것 좀 씻어다 줄래요?”
게이코는 병실에 있는 작은 주방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수도와 가스대가 있었다. 도오루는 고개를 끄덕이고 포도를 씻었다. 물이 의외로 차가웠다. 포도를 씻으면서 도오루는 게이코에게 응석이라도 부리는 듯한 즐거움을 느꼈다.
“잘 먹을게요. 마침 저녁 식사를 끝낸 참이라.”
“병원은 저녁 식사가 너무 이르죠?”
“그래요. 익숙해지기까지는 힘이 들긴 했지만…….”
게이코는 포도 한 알을 집었다. 포도는 게이코의 아름다운 입술을 적시고 입 속으로 미끄러지듯이 넘어갔다. 포도를 먹는 모습도 참으로 우아하다고 생각했다.
“맛있네요. 쓰지구치 씨도 먹어요.”
“아니, 전…….”
“사양하지 말아요. 나와 당신은 이미 친해졌잖아요. 소중한 비밀을 나눠 갖고 있는 걸요.”
도오루는 앞뜰에 있는 마가목나무를 내려다보았다. 열매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포도를 다 먹은 게이코에게 도오루는 물수건을 짜서 내밀었다.
“고마워요. 친절하군요. 어머니가 아주 행복하시겠어요.”
게이코는 흰 손가락을 하나하나 천천히 닦으면서 말했다.
“어머니에게는 불평만 하고 있어요.”
“응석을 부리나봐요. 당신의 어머니는 틀림없이 친절한 분일 거예요.”
“일반적으로 말하면 친절할지도 모르지요…하지만 여성에게는 어딘지 냉혹한 데가 있는 것 같아요. 이거 실례했습니다. 부인도 여성이신데.”
“그래요. 나도 그런 냉혹한 여성이에요. 자식을 버린 인간이니까요.”
“아니, 그런 뜻으로……….”
“생각해 보니 살아간다는 것 자체가 냉혹한 일인지도 모르겠어요. 소든지 돼지든 닭이든 가리지 않고 인간은 잘도 먹어대잖아요? 그것만으로도 참으로 냉혹해요. 게다가 인간끼리도 어떤 의미에서는 서로에게 많은 상처를 입히고 있어요. 아무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고 생각해요.”
“………..”
“난 내 몸으로 낳은 자식을 남의 손에 넘겨주고도 뻔뻔스럽게 둘째인 다쓰야를 낳았어요. 그래서 난 그 아이가 무서워요. 왠지 그 아이가 뱃속에 있을 때 내 비밀을 모두 알아낸 것만 같아요. 누나 냄새를 맡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남자로서는 알 수 없는 감각이었다.
“설마 그럴 리야 있겠어요.”
“하지만 그런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요. 그 애는 갓난아기 때부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어요. 그 애가 맑고도 어딘지 빛나는 눈으로 날 똑바로 쳐다보면, 난 그만 비밀을 들켜버린 것 같아서 무서웠어요, 쓰지구치 씨.”
게이코는 긴 속눈썹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그렇게 봐서 그런지 피부까지도 창백한 것 같았다. 소녀처럼 감수성이 예민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 도오루가 말했다.
“그런 생각으로 자신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다쓰야 군에게도 미묘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고….”
“확실히 그런 것 같아요. 다쓰야는 나에게 아주 잘해요. 그런데도 묘한 아이예요. 형인 기요시와는 전혀 다른 걸요.”
“아무튼 살인도 15년이면 공소시효가 끝나요. 그러니 이제 그런 생각은 그만하시는 게 어떻겠어요?”
지금까지 도오루는 다쓰야를 두 번 만났다. 두 번 다 도오루는 다쓰야에게서 뭐라고 말할 수 없는 압박감을 느꼈다. 그에게서는 순수함과 날카로움 그리고 과격한 그 무엇이 풍겨 나왔다. 확실히 게이코의 말대로 어머니의 그늘진 마음을 태내에서 이미 알고 나온 영혼 같은 생각이 들었다.
게이코는 담요로 감싼 발을 약간 움직이고는 몸을 침대 등에 기댔다.
“하지만 쓰지구치 씨, 시효는 법률상의 문제예요. 양심에 시효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게이코의 한쪽 볼이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부인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자책하고 있어요.”
“천만에요. 내 양심은 초라하기 짝이 없어요. 때때로 깨어나 있기도 하지만 대체로 잠들어 있는 걸요. 물론 처음에는 괴로웠어요. 그러나 차츰 잊게 되었어요. 그저 남편과 아이들에게 알려질까봐 두려워 벌벌 떨고 있었던 것 같아요. 그건 양심의 문제가 아니잖아요? 남이 알게 되면 곤란하다는, 이를테면 이기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아요.”
“그럴까요?”
도오루는 이렇게밖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요. 그렇지 않을까요? 예컨대 사람을 죽이고 도망칠 때 경찰에 잡힐까봐 두려워하는 건 양심의 문제가 아녜요. 사람을 죽였으니 나쁘다, 잘못했다고 생각하고 자수해야만 비로소 양심이 있다고 할 수 있어요. 난 남의 손에 넘긴 아이가 가엾다거나 남편을 배신한 것이 나빴다는 생각보다는 솔직하게 말해서 아무한테도 알리고 싶지 않다는 마음 쪽이 훨씬 강했어요. 당신은 아까 살인도 15년이면 시효가 끝난다고 했지요? 그럼 남편을 배신하고 딴 남자의 아이를 낳은 건 몇 년이면 시효가 끝날까요?”
“…………”
“뜻하지 않은 자식을 낳은 것을 알리고 싶지 않아 그 애를 유아원에 맡긴 죄는 몇 년이 지나면 시효가 끝나나요? 쓰지구치 씨, 내 양심은 시효 기간이 오기도 전에 이미 잠들어 있었어요. 양심에 시효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도…..”
게이코의 눈에 눈물이 그렁거렸다. 어쩐지 자신의 모습을 드러낸 것 자체만으로도 게이코를 괴롭히고 있는 것 같아 도오루는 괴로웠다.
“쓰지구치 씨, 난 말이에요, 당신을 만나고 나서 양심이 깨어난 것 같아요. 웬일인지 다카기 씨를 만나면 그렇게 되지 않아요. 그분은 말하자면 나와 공범자인 셈이죠. 하지만 당신은 달라요. 그 후 20년 가까이 지나 처음으로 내 구악(舊惡)을 파헤쳐 보인 것이 당신이에요. 교통사고를 당한 것도 잘된 거예요. 아무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게 큰 잘못이었어요. 당신도 알고 있었고 하나님도 알고 계셨다는 느낌이 들어요.”
“죄송합니다. 전…….?”
도오루 확실히 자신은 게이코를 비난하고 원망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 생각을 했기 때문에 산아이 호텔에서 그녀를 만났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도오루에게는 이미 게이코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교통사고를 당한 것만으로 게이코의 죄는 충분히 보상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도오루는 저물어 가는 창 밖을 내다보았다.
도오루는 일어나 전등 스위치를 켜고 그대로 벽에 기댄 채 게이코를 바라보았다. 게이코는 고개를 숙이고 뭔가 생각에 잠겨 있었다. 문득 도오루는 게이코에게 요코를 만나게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게이코는 결코 자기 변명을 하고 있지 않다. 자신의 잘못을 솔직히 인정하고 있다. 자신을 변호할 줄 모르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변호해 줘야 한다.
게이코에게 요코를 만나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은 순전히 게이코 편에 서서 한 것이었다. 도오루는 그것을 알아차리고 움찔했다. 자신은 언제나 요코 입장에서 서서 사물을 생각한다고 여겨 왔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변했을까. 도오루는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언제 자신의 가슴속에 요코와 게이코가 하나로 겹쳐졌을까? 아니, 그렇지 않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요코의 행복을 위해 두 사람을 만나게 해주려는 것뿐이라고 도오루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요?”
게이코의 목소리는 놀라울 만큼 요코와 비슷했다.
“아뇨, 그냥……..”
“그래요? ……저, 쓰지구치 씨. 다쓰야는 어제 나와 꼭 닮은 아가씨를 저 앞의 교차로에서 만났다며 흥분하고 있었어요.”
“혹시 무슨 짐작이 가지 않나요?”
도오루는 게이코를 보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삿포로에 와 있나요?”
도오루는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어제 왔다가 오늘 돌아갔어요.”
다쓰야가 요코를 보게 된 경위에 대해 도오루는 말했다.
“어머! 다쓰야가 멈춰 서서까지……”
게이코는 눈을 크게 떴다.
“제가 떨어져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아까 기요시 씨도 본걸요. 전역에서 요코를 배웅하고 있었는데 그걸 본 모양이에요. 자기 어머니를 꼭 닮은 그 아가씨가 누구냐고 물었어요.”
“어머, 기요시까지! 기요시도 그 아이를 보고 말았군요. 그것도 당신과 함께 있을 때…….”
게이코는 얼굴색이 변했다. 그리고 잠시 말없이 침대 끝으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쓰지구치 씨, 나하고 그 아이가 닮았다는 것도 역시 천벌이군요. 나로서는 모든 일을 철저히 숨긴 줄 알고 있었지만 그처럼 닮은 산 증거가 있다면 이제는 어쩔 수 없군요.”
“그다지 걱정 안하셔도…….생판 남하고도 닮는 경우가 있지 않습니까?”
“글쎄요. 편리한 말을 만들어 준 옛사람들에게 감사해야겠군요.”
게이코는 문득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면서 말했다.
“남편이 올 시간이에요. 만나겠어요?”
“네? 주인 어른이 오신다구요?”
도오루는 무심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만나도 괜찮아요. 난 그러는 편이 오히려 좋아요. 당신 쪽에서도 적의 진지를 알아두는 편이 훨씬 유리할 거 아녜요.”
“하지만 오늘은 그냥 가겠어요.”
“그래요? 그럼 또 들러 주세요. 토요일과 일요일 이외의 날은 언제든지 좋아요.”
게이코는 손을 내밀었다. 통통하면서도 부드러웠으나 뜻밖에도 싸늘한 손이었다.
“이 악수를 요코에게 전하고 싶어요.”
도오루는 고개를 숙였다. 그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도오루는 얼른 손을 놓았다. 야키치가 들어왔다.
“기다리고 있던 참이에요, 여보.”
“아, 손님이 와 계셨군.”
도오루는 그 말에 꾸벅 고개를 숙이고 야키치를 보았다. 의외로 핸섬한 신사였다.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해 온 이미지와는 전혀 달랐다. 잿빛 머리칼이 멋지고 탐스러웠으며, 키가 훤칠하였다. 나이는 쉰을 넘은 것 같았다. 그는 상인이라기보다는 학자 같은 인상을 풍겼다. 그의 따스한 눈길이 도오루의 마음을 움직였다.
“여보, 다카기 씨와 절친한 쓰지구치 씨예요. 쓰지구치, 미쓰이에요.”
“미쓰이입니다. 이러헥 찾아 주어서 고마워요.”
도오루는 굳어진 얼굴로 답례를 했다.
“포도를 선물로 가져왔어요.”
“그래요? 이거 참 고맙군요.”
야키치는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아무쪼록 몸조리 잘 하십시오.”
도오루는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이러헥 인사하고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다. 도저히 태연하게 이야기를 계속할 용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빌딩 창문마다 불이 켜져 있고, 가을비가 내릴 듯 낮게 가라앉은 하늘이 거리를 덮고 있었다. 도오루는 첫눈에 야키치에게 호감을 느꼈다. 게이코에게도 물론 호의를 느껴 왔다. 하지만 지금 도오루는 게이코보다도 야키치에게 훨씬 동정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 야키치를 게이코는 왜 배신했을까. 도오루는 몹시 안타까웠다. 그 두 사람은 끝까지 아름답고 진실한 부부였어야 옳을 것이다. 그렇지 못한 것이 생각할수록 유감스러웠다. 어떤 이유가 있었든지 간에 만일 어머니 나스에가 아버지를 배신하고 딴 남자의 아이를 낳았다면 자신은 과연 어머니를 용서할 수 있을까. 결코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간통에 의해 태어난 요코에게 생모를 용서하라고 말한 것은 분명히 무리였다고 생각하면서 도오루는 몇 번이나 사람들과 부딪히며 붐비는 거리를 걸어갔다.
텔레비전 탑의 전광 시계가 6시 3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기타하라와 요코는 무슨 얘기를 나누면서 갔을까. 도오루는 멈춰 섰다. 가을비가 후두둑 얼굴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