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집’으로 가는 순례길에 오르다
| ▲ ▲산 베르나르도 호스피스 내 소성당 앞의 순례자상들. 비바람 맞으며 묵묵히 걷는 모습이 이채롭다. |
| ▲ ▲산 베르나르도 호스피스 내 소성당 앞의 순례자상들. 비바람 맞으며 묵묵히 걷는 모습이 이채롭다. |
평화신문은 이번 호부터 프리랜서 작가 문지온(아가타)씨의 ‘순례자의 편지’를 연재합니다. 문씨는 영국에서 프랑스를 거쳐 로마에 이르는 전통적인 순례길인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의 이탈리아 구간인 이탈리아 북부 산 베르나르도에서 로마까지 약 1000km 길을 특별한 사연을 가지고 지난 9월 초부터 도보로 순례하고 있습니다. 사연은 연재되는 편지를 통해 차츰 알려지게 될 것입니다.
멀리 있는 벗에게
산 베르나르도에 있는 순례자 숙소에서 벗에게 소식 전합니다. 한국은 지금 점심시간이 지나고 오후 일정을 시작할 시간이겠네요. 내가 있는 이곳은 지금 새벽이고, 두 개의 이층 침대와 간이 옷장이 전부인 작고 어두운 방 안엔 코 고는 소리가 정겨워요. 작고 가벼운 그 소리는 아마도 아프리카에서 온 작고 다부진 여성 엘마나 그녀의 프랑스 친구가 내는 소리일 거예요.
그 소리가 불편하거나 싫지 않으냐구요? 아뇨, 오히려 든든하고 안심이 돼요. 이 멀고 낯선 곳에서 내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있으며, 그것도 다른 사람 아닌 엘마가 곁에 있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이지요. 처음 만난 나에게 어려운 일이 생기면 자기가 도와줄 수 있게 함께 걷자고 초대해 준 그녀가….
그녀를 만난 것은 순례자 숙소에서였어요. 내가 잘 침대를 정하고 막 침낭을 펼치는데 자그마한 몸집의 여성이 커다란 배낭을 짊어지고 들어오더니 먼저 인사를 하더군요. 아프리카에서 온 엘마라고. 까무잡잡한 얼굴에 작고 다부진 몸집, 명민하고 민첩해 보이는 눈빛이 강인하게 느껴졌어요.
나도 간단히 소개했어요. 한국에서 왔고 산 베르나르도에서 로마까지, 넉넉히 잡아 1000여㎞를 걸으러 왔는데 출발선에 서니 두려운 마음도 든다고. 그런데 엘마의 반응이 놀라웠어요. 그녀는 성큼 다가와 내 침대에 앉더니 민망할 정도로 얼굴을 가까이 대고 눈을 맞추면서 확신을 갖고 말했어요.
“넌 네가 원하던 대로 로마에 있게 될 거야. 날 믿어. 난 영국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어. 너보다 이 길에 대해 잘 알고 있어. 비아 프란치제나는 널 받아 줄 준비가 되어 있어. 난 영적인 이유로 이 길을 걷고 있어. 내가 널 도와줄게.”
왜 로마로 가려 하느냐는 엘마의 질문에
그리고 엘마는 자연스럽게 나를 챙기기 시작했어요. 순례자를 위한 식사 시간에 내 자리를 맡아 놓고 도보 때에 먹으라고 빵을 사서 나눠주고 친구와 함께 차를 마시자고 초대해 주는 등…. 작고 소소한 친절에 마음이 열릴 무렵, 함께 산책하는 자리에서 엘마가 물었어요. “너 여기 왜 왔니? 왜 로마로 가려는 거야?”
좋은 질문이라 생각했어요. 길고 고된 여정을 시작하기 전에 나도 정리를 해보고 싶었거든요. 그런데 때마침 엘마가 물어온 것이지요. 짧지만 진심을 담은 영어로 그녀에게 말했어요. “나의 이야기는 너무도 길어서 지금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간단히 표현해보겠다”며 이야기를 시작했지요.
18살 소녀의 편지를 파파에게 전하려
“엘마, 내 배낭 속엔 편지가 있어. 18살 소녀가 쓴 거야. 세상에서 가장 사랑도 했고 동시에 미워도 했던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아주 폭력적인 방법으로 세상을 떠났을 때 그 아이가 느꼈던 고통에 관하여 쓴 편지. 난 그걸 파파(교황님)에게 전하기 위해서 이 길을 걷는 거야. 아이가 파파를 존경하고 사랑하거든. 그리고 파파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고, 그래서 자기와 같은 고통을 짊어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해줄 거라고 믿고 있거든.
그래, 엘마. 너도 알아차렸겠지만, 18살의 그 소녀는 내 안의 어린아이이기도 하고 지금 이 순간 어디선가 같은 고통을 받고 있을 또 다른 많은 사람이기도 해. 그러니까 난 나 자신을 위해, 그리고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는 또 다른 누군가를 위해 이 길을 가는 거야. 나에게 로마는 파파가 계신 곳.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그 누구로도 채울 수 없었던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온 분, 새로운 파파가 살고 있는 ‘아버지의 집’이거든.
그런데 길이 너무 낯설고 멀고 힘들어서 중간에 포기하게 될까 봐 걱정돼. 날 믿는 마음도 있지만 두렵고 무섭기도 해. 내가 이 길을 제대로 걸어내지 못하면 18살의 그 아이는 또 한 번 실망하고 절망할 텐데, 그래서는 안 되잖아? 그러니 날 돕고 싶다면 내가 중간에 포기하지 않도록 네 길을 가면서 기도해줘. 그게 내가 바라는 전부야.”
짧고 서툰 영어에도 엘마는 내 이야기를 그대로 알아들은 것 같았어요. 눈이 촉촉해지면서 손을 내밀어 내 손을 잡았거든요. 그리고 다시 한 번 확신을 주었어요. 그 소녀가 실망할 일은 없을 거라고, 내가 원하는 날 반드시 로마에 있게 될 것이라고. 고맙게 그 말을 받아 말했어요. 로마에 도착하는 날 너를 생각하겠다고, 너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환호하며 네 이름을 소리 내 부르겠다고…. 촉촉하고 아름다운 시간이었어요.
그리고 지금, 출발을 앞두고 그대에게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몸도 마음도 그다지 좋지 않은 상태에서 시작하는 이번 순례. 끝까지 잘 걸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다해 지지해 주세요. 두려움 속에서 용기를 내어 한발 한발 나도 또박또박 나아갈게요. 이제 배낭을 꾸려야겠어요. 오늘은 이만….
산 베르나르도에서 그대의 벗
비아 프란치제나(Via Francigena) 중세 때에 유럽 북부에서 로마로 오는 순례길 가운데 하나다. 영국 런던 근처 캔터베리에서 프랑스 내륙을 남동쪽으로 관통해 이탈리아 북부를 거쳐 로마까지 이어진다고 해서 프랑스 길(Via Francigena)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문지온씨는 이 가운데 이탈리아 북부와 스위스의 접경지대에 있는 산 베르나르도에서 출발했으며 약 70일 일정으로 로마까지 도보 순례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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