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는 6월 10일은 6.10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난 지 91주년이 되는 역사적인 날입니다. 이를 기리기 위해 오늘 오전 10시 6.10독립만세운동의 주축이 된 서울 종로구의 중앙고등학교 대강당에서, 제91주년 6.10독립만세운동 기념식이 열렸는데요.
침체된 민족운동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고 3.1운동과 함께 민족 독립운동사의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6.10독립만세운동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기로 해요!
# 6.10독립만세 운동 발발 배경
1919년 전국적으로 일어났던 3.1운동을 계기로 해외까지로 확산되었던 민족 독립운동은 미국이나 서구열강의 소극적 지원에 의해 점차 잠잠해져 가는 추세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교묘한 술책과 탄압으로 민족운동은 힘을 잃어가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만주에서의 무장독립투쟁도 1920년 청산리전투로 대승을 거둔 뒤, 일제의 대토벌로 인해 러시아방면으로 후퇴하게 되었는데요. 1921년 자유시참변으로 큰 피해를 입게 되었습니다. 국내 독립운동의 침체에 이어 해외에서의 독립운동 역시 부진한 상태였죠.
# 6.10독립만세 운동의 발발
이런 상황 속에 1920년대 민족운동은 학생운동에 의해 명맥을 이어가고 있었는데요. 이전의 산발적이고 비조직적인 만세운동과는 달리 학생운동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적인 항일운동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 학생운동이 가시적인 집단행동으로 표출된 결과가 바로 6.10만세 운동입니다.
6.10만세 운동은 순종 황제의 인산일이 큰 계기로 작용했는데요. 사회주의 계열의 단체들과 민족주의 계열 등 세 개 단체들이 순종의 인산일을 기회로 대규모 독립운동을 펼치기로 계획했습니다.

▲ 권오설 생가 터
먼저, 사회주의자 권오설을 중심으로 추진되던 독립운동은 중국지폐위조사건과 개벽지압수사건 등으로 사전에 발각되어 연루자가 붙잡히는 바람에 아쉽게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이 무렵, 전문학생들이 중심이 된 사직동계 역시 독립운동을 준비하는데요. 5월 20일 40여명의 청년들이 순종인산일인 6월 10일 독립만세와 가두시위를 일으켜 민족독립을 성취하자는 결의를 맺고 태극기와 조선독립만세 격문을 준비했습니다. 이들의 거사 계획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다. 일제의 감시가 기성 독립운동가들에게 쏠리는 틈에 진행된 까닭이죠.

▲ 6.10만세운동 사직동계 거점(박하균 하숙 터)
또 중등학교 학생 중심의 통동계 역시 시내 사립고보생 중심의 시위운동을 준비합니다. 격문 5,000매를 등사하여 이를 각 학생들에게 분배했습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인산일에 참가한 2만4천여 명의 학생들은 돈화문에서 홍릉까지 도열했고 오전 8시 30분경 순종의 상여가 종로 3가 단성사 앞을 지날 때, 중앙고보생 300여 명이 “조선독립만세”를 부르고 격문을 뿌리며 시위를 감행했습니다. 이를 시작으로 종로 일대에 대기하던 학생들을 중심으로 대규모 독립 만세운동이 발발하게 됩니다.

▲ 6.10만세운동 통동계 거점(김재문 하숙 터)
# 6.10독립만세 운동의 결과
학생들의 조직적인 만세 운동에 지켜보던 군중들도 합세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제는 군대까지 동원하며 이들을 막았지만, 이 소식이 전국으로 퍼지면서 각 지역의 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통해 일제에 항거하였습니다. 6.10만세 운동으로 일본 경찰에게 붙잡힌 학생들 수는 무려 210여명, 전국적으로는 1,000여 명에 달했다고 합니다.
6.10만세 운동은 학생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계획, 추진된 운동으로 학생들의 애국정신이 집단으로 표출된 역사적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6.10만세운동의 이야기를 살펴보았습니다. 우리 민족의 독립을 향한 염원을 보여주었던 6.10만세운동.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소중한 역사입니다. 6월 호국보훈의 달, 우리나라를 위해 일제에 항거하고 탄압받았던 순국선열들의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보는 기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 6.10만세 기념비
* 참고 사이트
한국민족문화대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