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하나님의 경륜 원문보기 글쓴이: 보라추억
나의 행위 |
|
하나님의 반응 |
|
나의 반응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행위들을 해내는 순간(moment) |
▶ |
하나님이 기뻐하심 |
▶ |
스스로 만족함.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렸기 때문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행위들을 하지 않는 동안(during) |
▶ |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심 기뻐하실 만한 ‘행위’가 없으므로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감정도 (기쁨도 진노도) 없는 상태. |
▶ |
아무 감정이 없음.(하나님의 감정에 영향을 미칠만한 선하거나 악한 행위를 아무 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행위들을 하지 못하는 동안 |
▶ |
하나님이 나를 좋게 보시지 않음(만족스럽게 여기지 못하시니 기뻐하지 않으심) |
▶ |
하나님께서 좋게 바라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함. 빨리 무언가를 들고 가야 할 것처럼 압박을 느낌. 기쁨 혹은 자유함이 없음. |
하나님을 만족케 해드릴 때와 못할 때 이 두 평행선상에서 자신의 행위 여부에 따라 스스로에 대한 만족과 자책 사이의 왕래를 끊임없이 반복함.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듯이... |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생각이지 않습니까? 이와 같은 생각은 하나님의 반응이 철저히 나의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나의 행위에 따라 하나님이 좌우되는 것이지요. 저는 이것이 아르미니우스와 존 웨슬리의 논리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이런 모습과 유사한 인물이 성경에 등장하는데 바로 사울(바울)입니다. 사울은 회심 전에 그의 삶의 유일한 목표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었습니다.(우리와 같습니다.) 사울이 하는 어떠한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함”이 목적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사람을 죽일 때 조차도 말입니다. 행위의 내용은 다르지만 목적과 방법이 우리와 동일했습니다.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울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율법을 완전히 지킴”이라는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우리도 사울과 내용만 다를 뿐 똑같습니다. 우리는 표면적으로 드러난 율법이 아닌 “내면적으로 세워놓은 율법”을 기준으로 삼았을 뿐입니다. 사울이 기준으로 삼은 표면적으로 드러난 율법은 구약의 율법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준으로 세운 내면적으로 세워놓은 율법은 “우리가 보기에 좋게 보이는 것” 혹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하나님께서 기쁘게 여기실만한 것(기특하게 여기실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과 우리의 방법은 동일합니다. “율법을 지킴”. “행위로 서고자 함”입니다. 그 결과는 어떻습니까? 사울은 율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했으니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당연히 배척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도 우리 내면에 우리가 스스로 세워놓은 율법을 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데에 있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실질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지 않습니다. 구원 받는 데에 오직 예수만 필요하다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에는 ‘오직 예수’만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울과 같은 생각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지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구원을 얻는 데에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데에나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오직 예수’만 필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정리 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은 구원과 별개된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구원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함을 구별하여 생각합니다. 은혜(恩惠)로 구원 받은 사람이 이제는 자력(自力)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을 항상 완전히 만족시킨 존재, 하나님을 항상 완전히 기쁘시게 하는 존재들”만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항상 만족시키지 못하는, 항상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는 존재”는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어제까지 하나님을 만족시키다가 오늘 불만족 시켜드리면 그것은 하나님을 만족 시켜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다가 오늘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해드리는 자만이 구원을 받습니다. 하나님을 항상 기쁘시게 해드리지 못하고 한 번이라도 진노하게 하는 자는 영벌을 받습니다.
이와 같이 사울(바울)과 오늘날 우리는 다른 점이 없습니다. 우리가 그토록 잘못됐다고 지적하는 사울(바울)안에 우리의 동일한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정이 많은 한국인 특유의 정서라고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바울도 그러했으니 이것은 한국인의 특징적인 정서는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아담이 타락한 이후 모든 인간이 물려받은 죄성, 즉 교만인 것 같습니다. 이 교만이란 그리스도보다 자신이 우위에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는 “내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라는 전제가 포함되어 있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역할을 십자가에서 나의 죄를 대속하시고 부활하시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사역이 대부분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완료형입니다. 이제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시는 그리스도는 재림때에만 필요한 분일 뿐, 오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 있어서는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너무 편협하게 축소해 버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이고, 바리새인들과 사울(바울)과 동일한 모습입니다.
우리는 지금 사울(바울)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동일한 오류에 빠져 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입니다. 그것은 아주 극심한 교만이며, 우리 존재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러한 생각은 성경에 반대됩니다. 우리는 절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는데 왜 그러한지 몇 가지 이유를 들어 말하겠습니다.
첫째, 우리는 파산한 자들입니다.
우리는 빚을 진자들입니다. 하나님께 빚을 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평생 그 빚을 갚아나가는 존재들입니다. 우리의 어떠한 노력과 행위도 하나님께 그냥 드리는 것이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위는 그 빚의 이자도 되지 못합니다. 이자도 갚지 못하는 빚 갚음을 기뻐할 사람이 있습니까? 내가 진 빚을 갚으면서 상대방이 기뻐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정상입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빚진 것을 기억한다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만한 여지가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태평양 바다에 잉크 한 방울을 떨어뜨리면 잉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잉크는 ‘없는 것’이 됩니다. 잉크는 흔적도 없이 사라집니다. 무한하시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우리의 행위는 ‘없는 것’입니다.
조금 극단적인 예를 들어보자면, 어떤 괴한이 나의 자녀를 유괴한 후에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그 괴한이 나에게 과자 하나를 건네며 기뻐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그 괴한은 ‘선한 행위’를 하면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합당합니까? 우리가 하나님께 한 일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어떤 행위(우리가 생각하기에 어떤 선한 행위)를 했기에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괴한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둘째, 덧셈과 뺄셈을 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오늘 하루를 분단위 혹은 초단위로 쪼개서 계산해 본다고 합시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생각 또는 행동을 했을 때를 ‘+1’ 이라하고, 하나님께 기쁘심이 되지 못하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했을 때를 ‘-1’ 로 한다면, 결과는 ‘+’일까요? ‘-’일까요? 혹은 등급을 매겨서 기도 2시간은 ‘+2’, 전도 한 명은 ‘+5000’, 선교사 헌신은 ‘+10000’ 원수 사랑은 ‘+100000’ 이라 하고, 그 반대로 ‘-’에 대한 것들도 등급화를 시켰다고 생각해 본다면 그 결과는 어떨까요? 아마 ‘무한 -(마이너스)’ 일 것이 분명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명하신 율법들을 매순간 어기고 있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법을 어긴 것은 무한한 ‘-’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법을 어기고 하나님께 도전한 죄는 그 무거움을 측량 할 수 없이 무한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다못해 우리는 스스로 내면에 세워놓은 자신의 율법조차도 날마다 어기고 살아갑니다.
혹 어쩌다가 ‘+’와 같은 것들이 나왔을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대부분은 하나님의 높으신 기준에 도달치 못할 것들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 조차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덮고도 남는 ‘-’의 홍수는 어찌 할 수 있을까요? 과연 오늘 우리의 하루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있었을까요? 지금까지 중에 단 한 번이라도 ‘+’로 마치는 날이 있었을까요? 우리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기에 우리가 ‘+’라고 생각 할 뿐 우리의 실체를 더욱 정확히 볼 수 있는 빛이 있다면 우리가 얼마나 ‘-’ 덩어리인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매일 ‘+’,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가 아니라 하나님을 슬프시게 하는 ‘-’의 결과를 맺고 있습니다. ‘행위’로써는 날마다 적자일 뿐입니다.
셋째, 하나님의 기준은 너무나 높아서 도달 할 수 없습니다.
한 어린이가 자신이 가장 아끼는 포켓 몬스터(만화 캐릭터) 카드를 준다해도 저는 기쁘지 않을 것입니다. 적어도 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그것보다 훨씬 고상한 것들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설명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우리의 행위들이 마치 포켓 몬스터 카드 같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기준이 얼마나 높은가요?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에게는 없는 것이 없습니다. 그분은 영원보다 끝없고, 무한보다 크십니다. 그분에게 무엇인 만족될만한 것이겠습니까? 우리가 드릴 수 있는 그 무엇이 그분을 만족 시킬 수 있겠습니까?
행위로써 하나님을 만족시키기 위해서는 우리의 그 행위가 ‘하나님 수준의 완벽’, ‘하나님 수준의 완전’이어야 합니다. 인간 수준에서는 결코 ‘완벽’, ‘완전’이란 개념을 이해 할 수 없습니다. ‘완벽, 완전’은 하나님에게만 해당하는 비공유적인 개념입니다. 그러므로 ‘완벽, 완전’이란 개념의 구현이 불가능한 우리는 하나님 수준에 해당하는 어떤 것을 드릴 수 없고,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드리느냐 보다, 드리고자 하는 마음을 보고 기쁘게 여겨주신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합당하지 않습니다. 엄밀히 말하여 기쁘다고 여겨주신 것이지 실제로 기쁘게 해드린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넷째, 감사하지 않는 것(배은망덕 한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누구로부터 왔을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가 어떤 선한 행위를 했다면 그것은 과연 우리의 힘으로 한 것인가요? 아니면 그것을 할 수 있도록 모든 여건과 환경을 주장하신 하나님께서 은혜 베푸셔서 한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지금도 붙드시는 은혜의 손길을 거두시면 우리의 심장은 지금 당장 멈추어 버리고, 우리의 뼈는 지금 당장 부스러져버릴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눈은 지금 당장 멀어버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오른손이 지금도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에 호흡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어떤 선한 행위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여건을 조성하신 것 때문입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공로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공로를 가로채서 하나님께 드린다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라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까요?
다섯째,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을까요?
우리가 우리의 전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줬거나 혹은 전 재산을 팔아서 헌금을 했다. 혹은 생명을 드렸다. 그러면 그것이 하나님께 무슨 유익이 있는 것일까요? 하나님께 우리의 전 재산이나, 우리의 생명이 무슨 가치가 있을까요? 그것을 받으면 하나님이 정말 기쁨에 겨워하실까요? 아벨이 양의 새끼를 하나님께 드렸는데 양을 받으신 하나님이 기뻐하셨을까요?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창조하시고 부여하신 분께 우리가 우리의 생명과 재산을 다시 드리면 너무 기뻐하실까요? 하나님은 이미 모든 것을 소유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전 재산도, 우리의 모든 헌신도, 우리의 생명도 이미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 것인데 하나님은 기뻐해 주셔야 할 의무가 있을까요? 오히려 하나님의 것을 마치 우리의 것인냥 드리는 것은 우리가 월권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것을 내 것인냥 드리는 것은 월권이며, 교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죽은 먼지요 흙이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흙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퀴벌레의 생명을 대단하다고 여기지 않습니다. 바퀴벌레가 자신의 어떤 것을 나에게 주더라도 나는 기뻐할 수 없으며, 그저 잡아서 죽여야 할 더러운 존재로만 여길 뿐입니다. 하나님은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 우리보다 훨씬 의로운 완전한 존재들을 만드실 수 있습니다. 이사야서는 우리가 셈할 가치가 전혀 없는 존재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여기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만한 행위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잠16:7, 고후5:9, 엡5:10, 골1:10) 맞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그 말씀들은 위에서 기술한 것과 반대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위의 내용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한다.”는 사실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을 말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면, 할 수도 없는 것을 하나님은 명령하셨다는 것일까요? 이 생각은 두 가지 측면에서 틀렸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명령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의 타락이 그 능력 상실을 자초하였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방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방법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잉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어떤 행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릴 수 없습니다.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주시고, 믿음만을 보시고 기뻐해 주시는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을 쉽게 수납하지 못합니다. 지적으로는 수긍하지만 실제 행위로는 그렇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철저히 이 세상의 사고방식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사고방식은 ‘경제원리’, ‘대가지불’, ‘기브 앤 테이크’,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이 개념을 대입하여 생각합니다. 하나님께 대가를 지불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대가를 지불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돈을 주는 것을 우리는 ‘은혜’라고 하는 것처럼,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 믿음을 보고 기뻐하시는 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돈을 주니까 일도 안했는데 왜 이러냐며 일을 할 것이라고 합니다. 일도 안했는데 돈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그런 개념이 없기 때문입니다. 일도 안했는데 돈을 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은혜를 밀쳐내고 일을 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일하고 나서 기어이 그 돈을 받겠다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고, 타락하여 하나님 자리에 자신이 올라간 인간의 실상입니다.
하지만 로마서 4장은 이 진리를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그런즉 이 복이 할례자에게냐 혹은 무할례자에게도냐 무릇 우리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에게는 그 믿음이 의로 여겨졌다 하노라"(롬 4:4-9)
하나님은 일을 하지 않았는데 믿음을 보시고 삯을 주셨습니다. 경건하지 않은데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할례를 받지 않았는데 믿음을 보시고 백성으로 삼아 주셨습니다. 아무 것도 안했는데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은혜’라고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도 이와 동일한 ‘은혜의 법’만이 통용됩니다. 기쁘실만한 행위를 하지 않았는데 믿음을 보시고 기뻐하십니다.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나옵니다. ‘믿음’입니다.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로마서 4:2,3)
믿음에 관하여는 히브리서 11장을 보면 조금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8절을 보면 “아브라함이 나아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나아갔다.”라고 하는 내용으로 보입니다. 개역개정의 번역인데 이것은 오해를 살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번역은 아브라함이 ‘불확실한 가운데 나아감’이라는 행위에 그 초점이 있는 것으로 오해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믿음으로’라는 헬라어 단어 ‘πιδτει(피스테이)’는 ‘믿다’라는 단어 ‘πιδτευω(피스튜오)’를 ‘현재 능동태 직설법’으로 쓴 단어입니다. 헬라어 ‘현재 능동태 직설법’은 계속적으로 유지되는 상태의 의미로서 “아브라함이 갈 곳을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부터 그 순간에도 계속해서 믿고 있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나아갔다”는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나, 갈 바를 알지 못할 때나, 나아갈 때나” 아브라함이 계속적으로 “믿고 있다.”하는 데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그 믿음을 보시고 의롭다고 여겨주셨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기뻐하셨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야라분, 이것을 믿습니까? 아니면 구원을 얻은 후에는 이제 자력으로, 어떤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오직 믿음’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여부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합니다. 오히려 행위로 나아가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진노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것입니다. 물론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보기에 기쁘신 행위와 진노하시는 행위가 있지만 우리가 그것들을 행함으로 인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삯을 이미 주셨는데 자꾸 일을 해서 삯을 받으려고 하면 안됩니다. 우리는 삯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또 기쁘심이 그치실까 하여 일하는 자들이 아닙니다. 우리는 삯을 받았기 때문에 일하는 자들입니다. 이것이 오묘한 차이입니다.
우리가 받은 삯은 무한한 삯입니다. 무한히 그치지 않는 삯을 이미 받았습니다. 무한한 삯을 주신 것은 우리가 무한한 삯을 받을 만큼의 일을 이미 다 해버린 자들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우리는 새벽부터 저녁까지의 일을 완전히 다 해버린 자들입니다. 우리에게는 더 시키실 일이 없을 정도로 완벽하게 일을 다 해버린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시키는 자도 없고, 돈을 벌라고 하는 자들도 없습니다. 우리는 이미 다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은혜의 법에서 핵심은 무엇입니까? 오직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 믿음이고,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자라고 인정을 받은 것도 믿음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의 대상, 그 믿음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히브리서 12장2절, "ajforw'nte" eij" to;n th'" pivstew" ajrchgo;n kai; teleiwth;n !Ihsoun"과 같이 말입니다. 이 구절을 번역하자면 이러합니다. “믿음의 지도자, 통치자, 권세자이시고 완전하게 하는(성취하는) 분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자(바라보자)”
‘믿음’을 주관하시고 완전하게 하시는 예수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께 의롭다 여기심을 받는(기쁘게 여기심을 받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2장 2절의 말씀대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믿음이 향해야 합니다. 오직 예수그리스도만을 향하여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만이 하나님께서 완전히 기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우심 외에 모든 것은 다 허상(虛想)이기 때문입니다.
여기까지 우리가 확실히 알게 된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치면 이 글이 말하고자 하는 바, 그리고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가장 핵심된 내용을 아직 언급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금만 더 전진해 봅시다.
제가 궁극적으로 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그리고 항상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결코 기쁘시게 할 수 없는 우리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는 이 역설(逆說)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아무 일을 하지 않았는데도 ‘믿음’ 때문에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왜 믿음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우리 믿음의 주관자, 통치자, 우리의 믿음을 완전케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입니다.(히12:2) 믿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믿음의 실체, 믿음의 대상, 믿음을 완전하게 하시는 분이신 예수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런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선명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나’에 대한 개념정리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두 개의 나’로 존재합니다.
하나는 ‘나인 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입니다. ‘나인 나’는 ‘순수한 나’이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는 ‘내가 아닌 예수가 존재하는 나’입니다.
‘나인 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나인 나’가 아무리 선한 행위를 할지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 ‘죄’입니다. ‘나인 나’가 행하는 ‘의’는 ‘더러운 옷’입니다.(사64:6) 그런데 그 ‘나인 나’가 2천년 전에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어버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났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말입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 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나인 나’는 사라졌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만이 살아있습니다.
이제 나는 ‘나인 나’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것을 함께 누리는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나’는 ‘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나인 나’의 시절에는 ‘내가’ 중요했습니다. 나의 처지와 형편이 ‘나인 나’에 따라서 좌우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는 처지와 형편이 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에 따라 좌우됩니다. 예수가 하나님께 의로운 존재이면 그와 연합된 우리도 의롭고, 예수가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이면 그와 연합된 우리도 하나님께 충만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와 연합된 나’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와 연합되신 예수가 어떤 분이신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에게 있어서 완전히 의로우시고, 항상 의로우시며, 영원토록 충만한 기쁨이십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우리 믿음의 주관자시오, 통치자시오,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그런 분이시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나’도 하나님에게 있어서 완전히 의로우며, 항상 의롭고 영원토록 충만한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잘 이해되고 있습니까? 깜짝 놀라며, 무릎을 치고 있습니까? 정말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나’라는 존재가 하나님께 완전히 의롭고 항상 의로우며, 영원토록 충만한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사실 아닙니까?
우리는 여기에서 멈춰서 이 놀라운 사실을 충분히 묵상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충분하고도 충분히 말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끝없이 솟아나는 샘물이 흘러 넘쳐나서 우리 영혼을 기쁨과 감격으로 적셔줄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에서 멈춰서지 않고, 충분히 깨닫지 못한채 피상적으로 아는데서 그치기 때문에 자꾸 율법에 눈이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 이것을 깊이 생각하라는 히브리서 12:2의 권면을 따라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 때문입니다. 항상 의로운 존재이며, 영원토록 충만한 기쁨인 것도 믿지만 동시에 날마다 범죄하는 우리의 모습 때문에 그렇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가슴을 찢케 하는 죄악에 매순간 빠집니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가 이미 하나님의 기쁘심’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납득하지 못합니다. 맞습니다.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기쁘심이라고 하지만 현재 모습은 의롭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미 그리고 항상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항상 완전한 기쁨인 증거
첫 번째 증거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수많은 죄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끝까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견디도록 붙드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가 오늘도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은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끝까지 인내(견인)할 것입니다. 끝까지 우리는 믿음을 버리지 않으며 결국 하나님 나라에 참예하게 될 것인데 그 원인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우리를 끝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보존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두 번째 증거는 성령으로 내주하시고 성령을 따라 행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롬8:9)
구약의 사울은 하나님의 영이 일시적으로 임하셨지만 결국 떠나셨습니다. 우리는 성령을 따라 행합니다. 성령이 원하시는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며,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죄를 짓지 않기를 원합니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기를 조심하며, 하나님께 범죄 하는 것을 매우 두려워합니다. 열매들을 맺게 하십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유일한 구원자로 굳게 믿습니다. 이와 같은 것들은 성령이 내주하신다는 증거인데 성령을 우리에게 주시고 함께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우리의 현재 모습 때문에 우리는 혼란스러워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미 기뻐하고 계시며, 항상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토록 하나님의 충만한 기쁨입니다.
바울은 이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었습니다. 바울도 자신의 모습 때문에 절망스러울 때가 있었습니다.(롬7:24) 하지만 그와 동시에(at the same time) 그는 감사했습니다. 절망스러운 자신의 상황에서 무엇 때문에 감사했습니까?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했습니다.(롬7:25) 왜냐하면 그가 죄와 사망의 법이 더 이상 고소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완전한 의로움과 충만한 기쁨”이라는 것을 그가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핵심입니다. “우리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죄와 허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예수 때문에 우리를 기뻐하신다는 이 진리” 말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의 그 기쁨이 바로 우리의 것입니다. "내 영혼이 여호와를 즐거워함이여 그의 구원을 기뻐하리로다"(시35:9)
마지막으로 가장 직접적이고도 명백한 스바냐서 3장 17절 말씀을 한 번 더 확인합니다. 이 말씀을 우리의 가슴에 확실히 새길 때 큰 유익이 있을 것입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마지막으로 저의 진술이 조금 복잡한 감이 있어서 아래의 표로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았습니다.
어떤 선한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음. |
▶ |
믿음 (예수를 바라봄) |
▶ |
항상 기뻐하심 |
▶ |
믿음의 열매를 맺음 |
▶ |
믿음 (예수를 더욱 깊이 바라봄.) |
선한 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를 배척하는 것임. |
▶ |
믿음의 대상자, 주관자는 예수. 그리고 예수와 연합된 나. |
▶ |
예수는 하나님의 완전하고도 영원한 기쁨이므로 예수와 연합된 나를 이미 항상 기뻐하심. 아무 일을 하지 않았고 죄와 허물이 있을지라도!!! |
▶ |
성령의 은혜와 믿는 자의 애씀으로 선한 열매 (의를 향한 열심. 계명 순종, 죄와 허물에 대한 회개 등등) 를 맺음 |
▶ |
우리가 할 일. 깊어질수록 선한 열매 (순종과 헌신 등) 도 깊어짐. |
이와 같이 우리가 어떤 일을 하기도 전에 이미 하나님은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죄와 허물이 여전할지라도 항상 기뻐하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깊이 생각하십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과 결과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십시다. 이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가져온 글 입니다
첫댓글 무엇을 말하는지 잘 생각하기 원하여 등록하였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