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태복음 27장 45-50절 고통과 죽음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사시는 동안 가장 고통스러웠던 때는 언제였습니까? 인생을 살다보면 육체적으로 고통의 순간이 올때도 있고 심적으로도 고통스러울 때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영적인 고통을 당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당하는 것을 질병이라고 합니다. 심적인 것은 곤고함이라고 합니다. 영적인 고통은 하나님이 없는 공허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육적인 고통과 마음의 고통, 그리고 영혼의 고통인 고독의 유일한 치료자가 되십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이사야 53장 5절을 보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하고 있습니다.
우리 때문입니다. 우리를 살리시고 고치시고 은혜 가운데 살게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자신이 그 고통스러운 십자가에 달리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죽지 않는 생명을 가지신 분의 육체가 죽임을 당해야만 하셨던 것입니다. 인간 역사가 생겨 지도자나 왕이 셍긴 이래도 세상에 자기 백성들을 위해 이렇게 고통스러운 죽임을 당한 왕이 어디에 있을까요? 전혀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에서 살리셨습니다. 자기 백성을 위해서 이런 끔찍한 죽임을 당한 왕이나 왕자도 없었지만 다시 살아난 사람도 역시 없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분명한 사실은 십자가와 부활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날의 수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자기의 목이나 건물을 치장하는 데 사용하는 사람과 교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십자가를 크리스탈로 만든데다가 그 안에서 빛을 발하게 해서 반짝 반짝 빛나게 만든 교회 강단들이 많습니다. 그 십자가를 보면서 어떻게 예수님의 고난을 생각할 수 있을까요?
오늘날 갈수록 화려해지는 교회의 건물 외부와 내부 속에서 신앙생활하는 사람들의 의식이 어떻게 새겨질까요? 세상의 화려함을 구하지는 않을까요? 그 안락하고 화려한 곳에서 진정 십자가를 지시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시고 그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넘어지고 쓰러지시면서 골고다로 향하여 올라가신 예수님, 그리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은 물론 창으로 옆구리를 찔러 물과 피를 거기로 다 쏟으신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나 있을까요?
예수님의 죽음을 보십시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무려 세 시간 동안 계속되는 고통을 당해야만 했습니다. 너무나 큰 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 예수님은 온 인류를 대변하여 외치십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림받은 아들의 울부짖음입니다. 이것은 인류의 나약한 자들이 강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들로부터 억울하게 당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소리이기도 합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수많은 마음과 육신의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향하여 외칩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우리를 이렇게 버려두십니까?” “하나님 저들의 횡포를 왜 벌하지 않으십니까?” 심지어 예수님을 믿다가 먼저 죽은 성도들도 하늘 보좌 제단 아래서 부르짖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피를 언제 신원해주실 것입니까?” 그때 하나님이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잠시만 더 기다려라 너희 형제들의 순교자의 수가 다 찰때가 거의 다 되었다”
요한계시록 6장 9-11절입니다.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하나님은 그들에게 “아직까지는 잠시 동안 쉬고 있어라 하지만 곧 순교자들의 수가 차게 되어 내가 땅에 있어 죄악을 행한자들의 행위대로 심판할 것이다”하고 위로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죄를 참지 못하시지만 그래도 저울이 기울어질 때까지 참고 계십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서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만큼 심판과 지옥 형벌은 아무도 감당할 수 없는 크고 영원한 고통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난하고 고통당하면서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을 버리지 않는 자기 백성들을 가슴에 품고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으십니다.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여러분들을 위한 울부짖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여러분이 있고 여러분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있기 때문입니다. 둘이 십자가 위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위한 고통을 당하시고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에 참여하였습니다. 여기에 사랑이 있습니다. 영원히 중단되지 않을 끈끈하고 뜨거운 사랑입니다. 이 사랑의 불은 영원토록 꺼지지 않습니다.
여러분! 십자가에 여러분도 못박혔습니까?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보면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하시면서 예수님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여러분도 역시 십자가에 같이 못 박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여러분들 안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들은 자신을 사랑하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에게도 하소연조차 못한 채 억울한 일들을 당하고 있습니다. 법이 있어도 법이 해결해 주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비유를 보면 예수님 시대에도 그런 억울한 일을 당하는 가난하고 약하며 억눌린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지금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그들을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부르십니다. 그리고 자신이 그 모든 짐을 담당했으니 나를 믿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믿는 자들은 복이 있습니다. 죄사함을 받았으며 영생을 얻었고 영원한 천국을 상속받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버려지셨습니다. 그 완전한 버려짐 속에 완전한 순종이 있었고, 그런 아들을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하지만 십자가 밑에 있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마음을 모르고 “저가 엘리야를 부른다”고 한마디하면서 비웃습니다.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사람이 한 말입니다. 그러자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셔서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위해 달려가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위해서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가 예수님을 믿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들이 가진 본성 가운데 어려움을 당하는 사람을 보면 불쌍히 여기면서 돕고 싶어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가 하는 행동을 본 다른 사람이 만류합니다. “그냥 둬봐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악한 사람의 마음은 다른 사람들이 좋은 일을 하는 것까지 못하게 막습니다. 그래서 선을 행하더나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의 선행을 막아서 이 세상을 더 악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 후에 예수님은 크게 소리를 지르고 영혼이 떠나 가셨다고 마태는 기록합니다.
그 마지막으로 소리지르신 말씀은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다”와 “다 이루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과 십자가의 죽으심을 통해 온 인류를 죄와 사망에서 구원하시는 일과 고치시는 일을 완성시키셨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길을 복음성가에서는 ‘고통없이는 못가는 길, 눈물없이는 못가는 길’이라고 소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을 위해서 당하는 고통, 예수님의 몸인 교회를 위해서 당하는 고통을 피하지 마십시오. 초대교회 성도들과 우리 나라 초대 교회 성도들도 수많은 고통을 겪었습니다. 로마서 8장 17절을 보면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로마서 8장 18절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현재 받는 고난의 깊이와 장차 여러분들에게 나타날 영광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가진 여러분들이 당하는 고난의 깊이는 굉장히 깊어 보입니다. 고난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고난과 고통의 깊이를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심지어 가족들도 그 깊이를 느끼기에는 너무다 미숙합니다. 육체가 다르기 때문에 그 고통의 깊이를 알 길이 없습니다.
남편이 찢어지는 고통을 당한다 할지라도 아내가 그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면서 옆에서 같이 힘이 되어주고 참을 수 있도록 힘을 줄 수는 있지만 아픔을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입장을 바꾸어 아내가 아프고 남편이 옆에서 힘이 되어 줄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그 고통의 깊이를 다 헤아리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천하만민의 고난과 고통의 위로가 되어 주실 수가 있으며 눈물을 닦아 주실 수가 있으십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고쳐주셔서 위로하실 때도 있지만 모든 사람들을 다 고치심으로 위로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여러분들의 질병이 이 땅에서 낫지 않았다고 해서 영원한 천국에서도 아픈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모든 고통과 죽음을 경험하셨던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인도하신 천국에서는 아픔도 슬픔도 고통도 죽음도 없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입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예수님은 천국에서 여러분들의 고난과 고통의 근원부터 제거하시고 그 안에서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하십니다. 그래서 영원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평안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로 인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세상으로부터 버려지고 심지어는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잠시 버려지시는 그 고통스러움으로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고난과 고통을 당하시는 여러분이여! 그 나라를 앙망하십시오, 소망의 햇살이 어둠을 헤치고 여러분들을 위해 비추기 위해 떠오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령께서 그것을 소망하게 하시지만 그때는 그것을 손에 붙잡는 것처럼 그 안에서 누리게될 것입니다. 그 날을 위해 예수님은 여러분들을 맞을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천국이 여러분들을 향해 열려있고 예수님이 두 팔을 벌리고 환영하실 것입니다. 그때 하늘의 천군천사들 역시 대대적인 환영을 하면서 여러분들을 반겨 맞게 될 것입니다. 이 복이 바로 여러분 앞에 놓여있습니다. 이 날을 기대하고 소망하면서 한 날, 한 날을 주님과 더불어 동행하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