홀링워터 외 2편
전장석
홀링워터*는 한겨울에도 물방울을 분사한다
버터에 얇게 튀겨진 포테이토처럼
심한 울렁증에 쪼그라든 의정부 사람들
폭포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쳤지 날마다
시베리아 횡단열차처럼 검고 둔중했던 서울행 기차
삶이 아니라 생존의 그늘 저쪽
스스로의 감시와 막막함을 피한, 푸득거림
구름다리의 얼굴을 증기가 뒤덮었다
낮게 삐걱거리는 나무계단을 오를 때마다
정적을 깨는 무서움, 부대의 총열에 침을 삼키고
밤새 캠프를 잠복 중이던 아버지가 돌아오면
하굣길 우리는 레드클라우드** 뒷산에 올라
골프공을 주워 팔거나 미군전용 클럽
모퉁이 튀김집에서 누군가가
쭉 찢어온 플레이보이 잡지를 보고
미국말은 왜 낄낄거려야 소통이 더 잘
되는지 그럴수록 미래는 왜 불통인지
구름다리를 타고 서울로 매일 등교하던
큰형님이 아예 돌아오지 않던 어느 해
홀링워터가 마침내 길을 내주고 구름다리도
철거되었다
캠프내 피엑스 군무원이던 옆집 아저씨가
평생직장에서 쫓겨난 것도 그 무렵
중앙시장에서 달러를 사고팔던 아주머니들
은근히 다가와 옅은 귀로 속삭이던 오 대단한 나라 유에스에이
품질 우월주의 미제 땅콩버터에도 감격했었지
그해 겨울 눈이 도시를 버릴 듯 내렸다
홀링워터도 진고개 식당 너머 상가도
한 사나흘 막막함 속에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미군부대 헬리콥터 소리에도 탱크 행렬에도
사람들은 흑백티브이에만 시선을 고정시킬 뿐
봄이 오자 미군부대 철조망 너머
장미넝쿨은 짙은 화장을 지우고
메이비였던 아이들도 하나 둘씩
제 부모를 찾아 어디론가 사라졌다
* 의정부 시내 한복판에 있는 미군캠프
** 의정부시 외곽에 있는 미군캠프
우기(雨期)의 세월
밖은 비가 오지만 확실하지 않다
지반이 가장 약한 곳을 두드려 바닥을 확인하고 싶었다
수많은 발자국 위에다 사자오줌을 뿌린다
근거 있는 학설을 죄다 끌어모으고 싶었다
확실하게 비가 오지만 우산을 써야 할지
벗어야 할지 다만 태양은 오늘 휴업 중
대낮의 핏줄이 서서히 응고되는 동안
줄곧 나는 커피숍에 앉아
사람들이 내려가는 길모퉁이 달콤한
크림의 무게로 입술을 저울질한다
검은 우산처럼 피뢰침이 솟은 교회첨탑
용암이 들끓었던 흔적이 있을까
다시 하늘에 돌멩이를 던져본다 물소리가 없다
수많은 날들이 깊이만 확인할 뿐
잔주름 많은 돌무더기, 는 말이 없다
(뿌리였다면 한없이 부드러운 포르말린에 중독된
검은 잎들이 기근의 세월을 견뎌왔을)
더운 김이 빠진 땅
기저에 닿지 못한 이론들이 오락가락
비가 되었다가 우산에 꽂히는,
꽂히다가 꽃이 되기도 한
그런 날들이었다
한 번쯤 봄이었을 것이다 서로가 찾았을 때
빠른 노래가 흐르고 도시가 들떠 넘치고
우리 마음속엔 오로지 높이만 존재할 뿐
미움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막장에 이를만한
그 어떤 소리가 맹수의 포효를 가릴 수 있었을까
그래 지금껏 저 젖은 나무들에겐 절반의 나이테
술 먹은 우산으로 빙글빙글 내려가 볼까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수원(水源)을 향해
땅을 향해 큰소리로 발을 구른다
근거가 마련된 땅은 잠깐, 바닥을 메아리칠 뿐
(쿠바로 가는 막차는 늘 의정부에서 출발한다)
우우 도시는 충직하다, 21세기 기차에
매달리는 거리의 얼굴들
코를 뭉개고 생각을 뭉개고 뒤를 뭉갠다
오늘도 펄럭이는 비바람 속에
지렁이
1
나쁜 짓을 두 번 연달아 했더니 가마우치가 되었다
없는 아이를 가르칠 줄도 눈감아 외면할 줄도 모른다
세상에서 자라지 않는 게 등 뒤에서 쑥쑥 큰다
모든 시도는 이미 백지상태나 다름없다, 어젯밤은 더 그랬다
잎사귀가 넓은 식물이 문 밖 의자에 걸터앉아 있다
아무리 빨리 걸어도 생각에는 이끼가 끼게 마련
두문분출하다 맨 처음 내뱉은 말은
나무라든가 바람이라든가 안경점 부근이라든가
하여간 되도록 멀리 사라지는 구름에 기대어 보는 것
어쩌다가 문득 서서 마을을 뒤돌아봤을 때
자기 색깔에 스스로 무너지는 돌의 꽃다발
2
비가 온다 약속한 대로 취소하기로 한다
몸보다 먼저 마을 입구에는 눈이 내려 쌓이고
창문을 열면 소리가 소리를 밟고 장화를 신는다
여기서 세월은 호명할 수 없는 너의 이름
이럴 때 촛불을 켜고 그림자 노트에 촛농이
쓰는 일기를 훔쳐본다 대본 없는 드라마
가장 참신한 비유는 잠꼬대를 해독하기 위해
두 장의 로또복권을 사는 것 혹은 어제의 마을에서
문장 속으로 걸어가는 염소를 먹이는 일
3
장독대의 발효가 간지럽히는 시간을 긁어
소문대로 점과 점을 잇는 2차방정식을 만든다
불필요하게 합산된 세월은 여기서 덤이다
점묘법으로 걸터앉은 도시의 오후
지구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를 듣는다
몇 겹의 주름을 폈다 접는 망원의 그리움
이쯤에서 객사한 아이의 유해를 수거한다, 토요일 오후
─『시에』 2012년 여름호
전장석
경기도 의정부 출생. 2011년 『시에』로 등단.
첫댓글 전장석 시인의 의정부 관련 시편은 김명인 시인의 '동두천' 이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한 현실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