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또다른 나]
오프라인선 '人事담당 이사',
온라인선 '그림 읽어주는 남자'
취재·정리=곽아람 기자/조선일보 : 2012.04.25.
"블로그에 감상문 올려 입소문 미술 에세이집도 두 권 출간 누구나 아는 유명 화가보다는 덜 알려진 화가 소개에 주력 미개척지서 의외로 좋은 반응 그림은 '자신의 눈'으로 봐야"
영국 화가 월터 랭글리(Langley·1852~ 1922)의 작품 중에 '슬픔은 끝이 없고'(1894)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부둣가에 앉아 흐느끼는 젊은 여인을 노파가 등을 토닥이며 위로해주는 장면을 그렸지요. 여인은 좀처럼 울음을 그칠 기색을 보이지 않고, 노파의 얼굴도 슬픔으로 젖어갑니다. 2008년 겨울 처음 이 그림을 보았을 때 '잊었던 슬픔'이 되살아나 가슴이 '쿵' 내려앉았습니다. "그래, 저런 기분이었어, 죽을 만큼 힘들었지…."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하겠다고 나섰다가 4년 만에 폭삭 망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회사를 정리하고 마지막 두 달은 집에 가져다줄 돈도 없어 카드 대출 500만원을 받아 아내에게 주었지요. '이래서 사람이 자살을 하는구나' 싶었어요. 5년 만에 그림을 통해 그때의 슬픔을 되새기고선 블로그에 그 그림을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습니다. '기다리자, 아니 기다려 보자. 언제고 그 슬픔을 대신할 것이 찾아오지 않겠니….'
“미술 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오히려 기존 틀에 얽히지 않고 자유롭게 그림을 볼수 있었던 것 같아요.”선동기씨가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해외 미술 서적을 보고 있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저는 미술 에세이스트입니다. 인터넷 포털 네이버에서 '레스까페(Rescape)'라는 필명으로 활동하며 그림을 소개하고 있고, 2008년부터 연속해서 '파워 블로거'로 뽑힌 덕에 그림 에세이집도 두 권 냈습니다. 2009년엔 '처음 만나는 그림'이, 올해 초 '나를 위한 하루 그림'이 나왔습니다. 첫 책이 6쇄 약 1만부를 찍었으니 성적이 나쁘지 않은 편입니다.
2007년부터 블로그를 운영하며 '그림 읽어주는 남자'로 활동하고 있지만 대학 때 전공이나 지금 본업은 그림과는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현재 몸담고 있는 회사는 네덜란드에 본사(本社)가 있는 인알파그룹 한국 지사로 자동차 선루프를 만드는 곳입니다. 저는 이 회사 경영지원팀에서 인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1986년 대학을 졸업하고 작은 무역회사에 들어가면서 사회인으로서 첫발을 내디딘 저는 1988년 카폰 안테나를 만들어 수출하는 회사로 옮겼고, 1990년엔 자동차 모터 제작 회사인 동양기전 해외영업부로 이직했지요. 1년쯤 해외영업부에서 근무하는데 어느 날 사장이 불러 말하더군요. "자네는 인사나 교육이 더 어울릴 것 같은데." 그때 인사팀으로 자리를 옮겨 그 이후 죽 인사 업무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1999년에 사업을 하겠답시고 회사를 나왔다가 2003년 동양기전으로 다시 복귀했고, 2007년에 지금 회사로 옮겼습니다.
선동기씨가 회사에서 인사 관련 업무에 열중하고 있는 모습.
제가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2007년 무렵부터입니다. 그 무렵 네덜란드 본사 출장이 잦아졌고 출장을 갈 때마다 자투리 시간에 미술관 구경을 갔어요. 그림을 제대로 알고 싶다는 생각에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등 관련 책을 잔뜩 사다 놓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그림 공부'를 시작했는데 어렵고 기억력에도 한계가 있더군요. 어느 순간부터는 '그냥 편하게 그림을 내 식으로 해석하는 게 낫겠다' 싶어 그림에 대한 느낌을 블로그에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정보보다는 감상에 주력한 그 블로그가 생각지도 못하게 인터넷 포털 메인 페이지에 몇 번 소개됐고, 하루 500~600명이 꾸준히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출판사에서 책을 내자는 제안을 받은 건 2009년 2월이었습니다. "망할 거다. 누가 읽겠습니까"라고 했지만 끈질긴 권유에 '한 번 써볼까' 싶었지요. 마침 자동차업계 전체가 경제 위기로 불황을 겪었고, 회사는 인원 감축 대신 무급 휴직을 도입했습니다. 전화위복(轉禍爲福)이랄까. 일주일에 나흘을 쉬게 되니 원고를 쓸 시간이 나더군요. 근무 일수가 줄었던 열 달간 원고 작업을 했고, 마침내 책을 내게 되었습니다.
저는 유명 화가보다는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는 무명 화가들을 고릅니다. 저 역시 마네·모네·드가 이야기를 하고 싶지만 아무리 해도 그들을 소개한 기존 글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아낼 자신이 없으니까요. 미술관에는 우리에게 낯선 화가들의 좋은 그림이 의외로 많은데 그들에 대한 자료가 국내엔 많지 않은 것이 아쉬웠던 터라 이왕이면 알려지지 않은 화가들의 좋은 작품을 소개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사이버미술관에 가입해 시간 날 때마다 작품과 화가들을 찾아보고 마음에 드는 화가와 작품에 대한 인터넷 자료를 모아 글을 씁니다. 일종의 '블루 오션'인 이 작업이 의외로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그림 읽어주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내 인생이 어땠을까?' 종종 생각해 봅니다. 느긋하게 살 수는 있어도 재미는 없었겠지요. 사보(社報) 두 군데에 연재하고, 블로그를 운영하느라 주말에도 바쁘지만 그래도 부지런해진 이 생활이 나쁘진 않습니다. 그림이라면 막연하게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그림을 당신의 눈으로 봐라. 그러면 이 세상 모든 그림이 당신 것이 된다"고 말하면서 '그림을 보는 권력'을 나누는 것 같아 보람을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