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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춘옥 시집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해설 (2023. 상상인)
여백이 아름다운 묵화들
마경덕(시인)
“컵 안의 커피를 지키기 위해 이제 컵 밖의 환경을 생각해야 할 때입니다”
길을 가다가 버스 광고판에서 만난 ‘광고문구’가 인상적이었다. 누구의 참신한 생각일까. 열마디의 말보다 ‘하나의 문장’이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 긍정적인 글은 ‘생각과 마음’을 건강하게 만든다. 의식하지 못한 부정적인 생각을 깨닫게 하는 ‘글자의 힘’이 놀랍다.
환경오염이 심각한 시대, 우리가 함부로 버린 것들은 부메랑처럼 우리에게 돌아온다. 썩지도 않고 바다에 표류하는 플라스틱은 강한 자외선과 파도에 마모되고 미세한 크기로 쪼개져 생태계에 교란을 일으킨다. 해양 생물의 죽음을 불러오고 결국 인간의 밥상까지 침투한 2차 미세플라스틱은 우리의 몸에 축적된다.
거리에서 흔히 만나는 테이크아웃점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고 일회용 테이크아웃컵이 포장되어 나간다. 코로나 여파로 배달음식은 늘어만 가는데 자장면 그릇을 되찾으러 오던 배달원도 사라진 지 오래다. 누군가의 생각이 그저 스쳐 가는 광고문구일 뿐이라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안일함과 편리함에 길들여진 우리의 의식이 변화되지 않으면 악순환은 계속된다.
문학이 할 일에 대해 오은 시인은 “똑같은 길을 걸어도 매일 풍경이 조금씩 달라집니다. 그걸 두고 ‘어제랑 달라졌어’라고만 말하는 게 아니라, 풍경을 다르게 보는 방식, 다르게 표현하는 방법을 보여주는 것, 자신만의 시각을 갖도록 해주는 것”이라고 했다. 어제와 다른 새로움 찾는 게 문학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문학은 “몰락의 에티카(윤리)다” 라고 말한 신형철 평론가는 평론집 첫머리에 “전부인 하나를 지키기 위해 그 하나를 제외한 전부를 포기”하는 몰락한 자들의 숭고한 표정에 매료된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몰락 이후의 첫번째 표정이야말로 문학이며 온 세계가 성공을 말할 때 문학은 몰락을 선택한 자들을 내세워 삶을 바꿔야 하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문학을 통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의식이 바뀔 수 있기 때문이다. 남과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표현하기 위해 시인은 사유(思惟)한다. 당연시된 것들에게 문제를 제기하거나 정신적인 빈곤으로 허덕이는 시대에 잃어버린 소중한 것들을 회복하는 일이 문학의 역할이다. 문학은 자신의 그늘과 내적 갈등을 고백하며 상처를 확인하고 상처를 위안 삼아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다.
서예, 캘리그라피, 수묵화가인 원춘옥 시인은 문학적 소임을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 낮은 곳을 살피며 그 고통에 참여하는 문학의 중심에는 달맞이꽃, 메꽃, 부레옥잠, 덩굴장미, 환삼덩굴, 생강나무, 애기똥풀꽃, 목련, 오동나무 등 주변에서 마주치는 식물들이 있다. 시인은 자연과 사물에서 시를 발견한다. 뜨거운 모래밭을 기어가는 메꽃의 침묵을 관찰하거나 높이 타고 오르다가 바닥으로 쏟아진 능소화의 몰락과 손바닥에서 거품으로 사라지는 비누의 일생과 솟대 끝에 묶여 날지 못하는 나무새와 한 알의 프라이가 되어버린 무정란의 아픔에도 동참한다. 사물에 대한 시인의 예리한 관찰자적 시선과 긍정적인 서정이 시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침대는 잠을 먹는다
불면을 키운다
세상을 굴러다니다
링에 오른 잠
바닥을 높이고
스프링에 얹은 잠은 푹신했지만
눈을 감고도 각을 잡았다
간혹 그곳을 벗어나면
잠을 반납해야 하지만
그곳에서 자란 웃음과
울음은 둥글어지지 않는다
잠의 진화론은 존재할까?
땅속에 들어갔던 잠은
아직 지상으로 나오지 못했다
초침이 선명해질 때
침대는 네 개의 모서리를 당겨
뒤척이는 몸을 고스란히 받아주었지만
코너로 몰린 아침은
달리는 버스 안에서도
잠의 형식이다
눈을 감지 못하는 물고기들의 시간에
침대는 잠과
불면의 대결이다
― 「링」 전문
‘링(ring)’은 고리 모양의 물건을 뜻한다. 권투나 프로 레슬링 경기의 경기장도 ‘링’이다. 두 개의 ‘링’이 합성되어 스프링이 들어있는 침대는 ‘사각의 링’이 된다. 종일 세상에 나가 치열한 경쟁을 하다가 음주와 카페인에 지친 몸으로 침대에 올라 엎치락뒤치락 불면과 다시 게임을 치른다. 우울과 불안이 눈을 감지 못하는 물고기처럼 뜬눈으로 어둠을 지켜본다. 습관처럼 수면제를 삼키고 눈을 감아도 머릿속은 해결해야 할 문제로 꽉 차 있다. 침대를 벗어나면 잠은 더 멀리 달아나버린다. 새벽 무렵에야 뒤척이는 잠을 침대가 받아주어도 아침은 코앞이다. 출근 버스 안에서 꾸벅꾸벅 졸음이 밀려온다.
침대는 날마다 불면과 대치 중이다. 샐러리맨의 고달픔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링」 은 경쟁 시대를 살아가는 초조한 우리들의 모습이다. 약삭빠르게 치고 빠지지 않으면 날아오는 펀치에 KO패를 당할 수밖에 없다. 자신에게 주어진 그날의 휴식도 온전하게 쓰지 못하는 모습이 마치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링에 오른 ‘프로복서’처럼 읽힌다. 생사를 다투며 경쟁을 치르며 살아가는 사람들은 ‘링’에 올라 잠과 대결해야 한다. 평생을 자도 모자란 잠, 땅속으로 들어간 사람들은 깊은 잠에 빠져 한 사람도 나오지 못했다. 살아있기에 뒤척거리고 살아야 하기에 불면을 이겨야만 한다.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늘 긴장하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고충을 드러낸 작품이다.
능소화 또 한 번 꽃을 피웠다
서둘러 뛰어내린
사연을 입속 가득 머금고 있다
언제였을까
햇살을 뭉치고 잎을 덧대며
출렁거리던 날
척추가 없는 저 꽃은
누군가를 붙잡고 올라야만 했던
출세처럼
타고 오르다 보면
몰락하여서
바닥으로 내리친 붉은 것들
가여워라 박명,
― 「팔자를 말한다면」 전문
외모가 재산이 된 시대, 외모가 빼어난 사람에게 관중은 열광하고 지나치게 호의적이다. 얼굴이 예쁘면 모든 게 용서된다는 계곡 살인사건 이은해 팬톡방과 얼굴이 너무 예뻐 팬클럽까지 생긴 특수강도범도 있었다.
외모지상주의는 과거에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내면과 외면이 일치한다는 생각이 퍼져 있어 외모도 ‘덕목’의 하나로 인정했다. 옛 그리스인들은 아름다움을 ‘선’으로 여겼기 때문에 고대 아테네에선 외모지상주의가 만연했다. 범죄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실제로 같은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외모가 준수한 사람이 형을 덜 받는다는 통계자료도 있다고 한다.
‘복’이 없고 팔자가 사납거나 수명이 짧음이 박명((薄命)이다. 주로 예쁜 여자가 어떠한 이유로 단명할 경우 자주 쓰이는 용어이다. 신분 제도였던 과거에는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하류층 여자는 상류층의 노리개가 되거나, 혹은 그 아내의 질투의 대상이 되어 눈총을 받으며 팔자가 드센 여자로 살아가야 했다. 능소화는 덩굴식물이다. 척추가 없으니 무언가를 붙잡고 올라야 하고 기대어 살아야 한다. 높이 올라 오가는 시선을 사로잡지만 다시 아래로 내려와 꽃을 피우는 능소화, 아름다운 장미가 여느 꽃보다도 일찍 시들어버리듯이 매혹적인 능소화도 서둘러 지고 만다. 높이 오를수록 추락은 치명적이다. 일찍 목을 떨군 꽃의 죽음도 박명의 팔자이다. 짧은 시에 많은 것이 압축된 「팔자를 말한다면」 은 몰락한 꽃을 통해 인간의 끝없는 탐욕에 제동을 걸고 있다. 아름다움은 그저 한때일 뿐이며 부귀와 영화도 바람처럼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 알의 울음을 프라이했어
검은 팬에 둥글게 번지는 달빛처럼
달이 뜨는 순간이야
자잘한 걱정을 비비고 싶은 날이나
냉면으로 더위를 식힐 때에도
달처럼 떠 있던 달걀 프라이
샌드위치에 얹힌 얄팍한 시간은 자주 찢어지고
설익어 비린내 나는 반숙의 날은 흔들렸지
껍질을 벗겨도 흘러내리지 않을 완숙의 시간을 견디며
단단한 것도 쉽게 깨진다는 것을 알기까지
흰자 노른자가 서로 엉기어 찜이 되기까지
꿈은 번번이 따로 놀았지
가지런히 줄을 맞추고
무정란의 시간에 부화의 날을 기다려도
불임의 냉장고는 싸늘해
껍질을 버린 것들은 물렁한 달이 되어 반죽과 섞이고
달이 뜨지 않는 밤에
닭들의 울음이 생략되어
우리들의 울음이 꼬끼요
― 「울음을 프라이하는 시간」 전문
“울음을 프라이 하는 시간”은 각자에게 주어진 시간이다. 시인은 행간 사이에 질문을 숨겨두고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의 꿈은 무정란인가. 유정란인가. 품었던 꿈은 어떤 모습으로 웅크리고 있는가. 꿈을 실현할 가능성은 있는가.
원춘옥 시인은 검은 프라이팬에 달걀을 깨뜨리며 ‘노란 달’이 뜨는 것을 보았다. 마치 어둔 밤에 달무리 진 ‘달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대목이다. 냉면 위에 고명으로 뜬 달도 보름달이다. “단단한 것도 쉽게 깨진다는 것을 알기까지/흰자 노른자가 서로 엉기어 찜이 되기까지/꿈은 번번이 따로 놀았지”에서 알 수 있듯이 프라이가 된 달걀은 부화가 되지 않는 무정란이다.
병아리가 될 꿈을 꾸었지만 무정란은 부화장으로 가지 못하고 시중에 식재료로 유통된다. 냉장고 가지런히 줄 맞춘 달걀은 온기 한 줌 없다.
달걀은 태어날 때부터 유정란과 무정란으로 운명이 갈린다. 유정란 속에는 까만 눈동자와 새싹 같은 노란 부리와 움찔거리는 발톱과 꼬물거리는 날개가 웅크리고 있겠지만 꿈이 사라진 무정란은 싸늘한 침묵에 갇혀 있다.
밤하늘도 날마다 띄우던 달을 생략하는 날이 있다. 그믐밤엔 하늘에 떠 있던 노른자 같은 달이 보이지 않는다. 닭들은 그 많은 알을 사람에게 빼앗기면서도 꼬끼요로 울음을 생략한다. 울음을 프라이해서 먹는 사람들, 달걀 요리를 즐기면서도 그 누구도 닭을 대신해 울어주지 않았기에 시인이 대신 꼬끼요! 닭의 목소리로 울고 있다.
메꽃, 꽉 다문 침묵의 입이 터졌다
햇살에 입이 열렸다
드디어 발설하다
드문드문 글자를 지우고
앞뒤를 골라 엮은 말
놓쳐 버린 탈자가 없는지
구름을 딛고 한발 한발 자라는지
물가 쪽의 말은 늘 축축하고
왜 비릿한지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간 모래의 시간
받침이 없어 찢어지기 쉬운 발끝의 말들
조심스럽게 뻗어나간다
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외면할 수 없다
바깥으로 돌며 주변이 되어버린
이유를 듣는다
침묵을 따라 자란 매듭이 풀린다
누군가의 꽃이 되는 일
오랜 침묵을 깨는 것이다
― 「분홍 발목들이 일어서는 시간」 전문
해안이나 강가, 모래 언덕에서 자라는 메꽃은 땅 위로 기어가며 다른 물체를 감고 오른다. 깔때기 모양의 연분홍빛 꽃이 마치 나팔꽃 모양을 닮았다. 필자는 고향 바닷가 자갈밭에서 갯메꽃을 본 적이 있다. 땡볕에 꽃 하나 붙들고 달아오른 자갈밭을 기어가고 있었다. 줄기에 비해 무거운 꽃을 들고 기어가는 모습이 무거운 호른을 든 연주자처럼 보였다. 저 한 송이 꽃을 위해 무릎이 닳도록 울퉁불퉁한 자갈밭을 안간힘으로 건너다니! 그 작은 꽃 한 포기에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감동에 한동안 쪼그려 앉아 메꽃을 들여다보았다.
원춘옥 시인도 그때 햇살의 힘으로 “분홍 발목이 일어서는 시간”을 만난 것이다. 쏟아지는 햇살을 붙잡고 메꽃이 침묵을 깨고 드디어 발설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축축하고 비린 물가 쪽에서부터 모래밭을 지나 또 어디론가 가는 여린 메꽃은 누군가의 발끝에 찢어질까 조심스럽다. 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변방을 떠도는 메꽃은 사회에서 소외된 힘이 없는 약자를 닮았다.
“사전에 기록되지 않았다고 외면할 수 없다/바깥으로 돌며 주변이 되어버린/이유를 듣는다/침묵을 따라 자란 매듭이 풀린다” 라고 한다. 마음을 열고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있어 얽힌 매듭이 풀리고 있다.
해마다 고독사가 늘고 있다. 냉담과 외면으로 단절된 공간에 갇힌 사람들,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뉴스에 등장한다. 고인의 고통을 아무도 몰랐다는 것은 관심을 가진 이웃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다. 방치된 외로움은 불치의 병으로 이어진다. 여성이 남성보다 오래 사는 이유 중의 하나는 친구들과 웃고 떠드는 ‘수다’ 라고 하지 않던가. 서로 공감해주고 기억해주는 시간은 “분홍 발목들이 일어서는 시간”이다.
담쟁이를 얹었던 여름은 잎을 떨구고
주머니에 찔러 넣은 가을이 발목까지 내려왔다
안과 바깥을 켜려고 채널을 돌려도 막막한 시간
돌과 돌 사이는 주파수가 맞지 않아 덜렁거렸다
우리는 더욱 예민해지고 자꾸 음역을 높였다
눈발이 날릴 때까지
발자국이 자랄 때까지
네가 지워질 즈음
틈새에 박힌 핑계도 봄을 피울까
배회의 안테나를 접는다
돌의 혈관을 따라가면 이별의 경계가 흐른다
오래 머물다 보면 보이는 것들
냉정과 열정은 영원하지 않아서
둥글거나 네모에 갇힌 달은 결국 담을 넘지 못했다
담쟁이 무성할 때
돌로 쌓았던 우리의 과거가 무너지고 있었다
― 「우리라는 돌담」 전문
담쟁이가 돌담을 덮은 무성한 여름은 두 사람의 관계가 밀착되었을 때이다. 주머니에 찔러 넣은 가을이 발목까지 내려올 무렵 주파수가 어긋난 막막한 시간은 예고도 없이 다가온다. 한때 소통은 말이 아닌 눈빛이었고 미소였다. 눈빛만 보아도 알 수 있던 관계는 목소리가 높아져도 알아듣지 못한다. 끝내 서로의 마음은 싸늘히 식어 다정하게 걷던 돌담은 이별의 경계가 되었다. 무너지지 않을 거라고 돌로 쌓아올린 ‘믿음’이었다. 돌담은 냉정과 열정으로 함께 쌓아올린 ‘우리’였지만 주파수를 맞추던 안테나는 접히고 둘의 관계는 각각으로 해체된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연인과 헤어진다는 속설도 있듯이 돌담을 걷던 연인은 둥글거나 네모인 서로 다른 환경과 조건에 갇혀 벽을 넘지 못했다.
진행중인 연애는 눈이 멀어 상대의 약점이 보이지 않지만 종료된 연애는 서로의 허점이 선명하게 드러난다. 미리 알았더라면 가지 않았을 길, 알면서도 끝까지 가보는 길, 왜 뒤늦게 발등을 찍고 싶은 후회는 찾아오는가. 상처는 덧이 나거나 아물거나 시간이 필요하다. 조각난 연애는 숨이 막히지만 슬픔이 가벼워지면 예전의 기억은 스스로 떠나간다.
담쟁이처럼 푸르던 한 시절을 지나 서로에게 캄캄하게 저물어가는 「우리라는 돌담」 은 이별을 맞아 갈등하는 청춘들과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지론(持論)을 확인시켜 준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돌담과 변하기 쉬운 인간의 마음을 대비시켜 가볍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현시대의 ‘연애관’을 보여준다.
연못은 보자기처럼 풍경들을 담는다
발끝으로 던진 돌멩이 하나에
더 골똘해지는 연못
흔들리는 것과 정지된 것들 보자기 속에 담겨있다
붕어의 입질과 수련의 기억
수양버들이 던진 한 잎의 물음
그리고
둥글게 번지는 물살의 행방
연못 주위를 배회하는 저녁 구름을 앉히고
물에 발을 담근 벤치
수초처럼 흔들리는 몇 개의 우울
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던 웃음도 담겨있다
어디선가 몰려온 어둠이
연못의 둥근 귀퉁이를 끌어당겨 묶는다
검은 매듭 사이로 개구리울음이 쏟아진다
자정과 새벽을 이어 붙인
별들의 아플리케가 반짝인다
아침이 오면 단단한 매듭이 풀리고
보자기에 담긴 풍경이 쏟아진다
나의 풍경은 밤새 어디에 담겼는지
누구의 보자기였는지
물음이 일어나는 연못
― 「보라매 연못」 전문
돌멩이 하나에도 금세 물주름을 잡는 연못은 예민하다. 그동안 많은 것들을 싸안은 연못은 보자기를 닮았다. “붕어의 입질과 수련의 기억/수양버들이 던진 한 잎의 물음/그리고/둥글게 번지는 물살의 행방/연못 주위를 배회하는 저녁 구름을 앉히고/물에 발을 담근 벤치/수초처럼 흔들리는 몇 개의 우울/바퀴를 굴리며 지나가던 웃음도 담겨있다”에서 커다란 보자기는 주변 풍경을 모두 담아내는 수용(受容)의 이미지로 사용된다.
어디선가 몰려온 어둠이 연못의 ‘둥근 귀퉁이’를 끌어당겨 묶어도 흘러나오는 것이 있다. 개구리울음, 즉 ‘소리’이다. 보자기를 꼭꼭 여미어도 ‘소리’는 빠져나온다. 연못 주변의 풍경은 물에 비친 반영(反影)일뿐 ‘소리’가 없다. 해가 지고 연못이 어두워지면 아름다운 풍경은 깊은 어둠속으로 가라앉는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도 연못의 보자기에 담기지 않는다. 물에 비친 풍경은 모두 허상일 뿐이어서 돌멩이 하나에도 흔들리고 일그러진다. 날마다 아침이 오면 단단한 매듭이 풀리고 연못은 쏟아진 풍경을 실체라고 믿는다. 연못에는 허구와 진실이 결합된 실상과 허상이 존재한다.
세상에는 눈앞의 것도 잡을 수 없는 것이 많다. 거짓에 가려진 진실들, 왜곡된 역사, 편견과 오해로 풀지 못한 사건들, 한방에 뜬구름을 잡겠다는 허황한 꿈은 또 얼마나 많은가.
연못이 품은 개구리는 연못이 제집이다. 그 연못에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고 연잎과 연잎으로 펄쩍 뛰어다니며 먹이 사냥을 할 것이다. 원춘옥 시인 역시 “실상과 허상 사이”에서 자신이 누구의 보자기였는지, 가슴에 무엇을 담고 살아왔는지 자문하고 있다.
불의 맛을 즐기는 당신은 편식주의
입은 늘 안전핀으로 묶여 있지만
열리는 순간 폭식을 해요
제가 선택한 식단 메뉴는 세 가지
나무로 만든 A코스
기름으로 만든 B코스
전기 누전으로 만든 C코스
금속류와 불연 커튼은 제 입맛이 아니죠
평소엔 냉철하고 침착하지만
불을 보면 확 달아오르는 불같은 성질
그 순간만큼은 물로도 제어하지 못해요
불은 불만으로 본체만체하다가
처음이자 마지막인 B코스를 위해
기름을 끼얹고 있어요
화끈하게 먹어 치워야 불만을 제로로 만들 수 있거든요
불만을 토해내고
불씨를 삼켜야만 온순해져요
언제쯤 당신의 입맛이 바뀔지 모르지만
완벽한 식사를 위해 나를 더 이상 흔들지 마세요
― 「불만제로」 전문
화자는 ‘불만제로’ 라는 이름의 소화기이다. ‘불만제로’는 불만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처리하겠다는 의미와 ‘불씨를 제로’로 만들어버리겠다는 이중적인 의미로 읽히는 재미있는 이름이다. 소화기는 불만 먹는 편식주의다. 관공서나 학교, 병원, 도서관 사무실 아파트 등 한구석을 조용히 지키는 소화기는 늘 안전핀으로 묶여 있지만 비상시 입을 열고 불을 삼킨다. 소화기의 용도는 각기 다르다. “나무로 만든 A코스/기름으로 만든 B코스/전기 누전으로 만든 C코스”가 있다. 평소에 과묵하던 소화기는 불만 보면 불같이 달려든다. 금속류와 불연 커튼은 불에 잘 타지 않아 코스에서 제외된다.
불은 ‘불’만으로는 탈 수가 없다. 무언가 태울 ‘재료’가 있어야 하고 기름을 끼얹는 찰나 성난 파도처럼 무섭게 치솟는다. 불씨가 ‘불만을 제로’로 만드는 것은 다 태워 잿더미로 만드는 것이다.
소화기는 불씨를 삼키느라 제 목숨을 소비한다. 다 써버리면 속이 텅 비어 온순해진다. 당신이 무심코 걷어찬 소화기는 완벽한 식사를 위해 조용히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이제 우리들의 할 일은 무엇일까. 소화기의 입이 열리지 않도록 불을 조심히 사용하는 것이다. 불만 보면 눈빛이 돌아가는 그를 “불의 만찬에 초대하는” 일은 더없이 위험하고 불행한 일이다.
밥상에 앉은 다혈질 남자가 버럭 소리를 지른다 숨 죽은 콩나물처럼, 시금치처럼 여자는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이라고 눈으로 쓴다 밥상에 앉은 남자가 여자를 쏘아본다 여자는 묵묵히 사골 찜솥을 준비한다 이 국물만 고아 내면 서로의 간도 맞는 맞춤형이 되겠지 남자는 양푼 가득 마늘을 담아와 까기 시작한다 매운 냄새가 서로의 관계처럼 자극한다 남자도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 집안 분위기로 쓴다 누가 초식형이었는지 누가 육식형이었는지 알 수 없는 두 사람 사이에는 깐 마늘만 수북이 쌓여있는
―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전문
다급한 남자와 그 다급함에 길들여진 여자가 부부로 살고 있다. 대꾸 한마디 못하고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이라고 눈으로 말한다. 쏘아보는 남자의 눈빛을 외면하고 묵묵히 제 할 일을 하는 여자는 남편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고 있다.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남자는 말없이 마늘을 까며 여자를 도운다. 남자도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임”으로 집안 분위기로 맞추고 굳이 말하지 않아도 오래된 부부는 서로를 한눈에 읽고 있다. 초식형과 육식형이 하나가 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성이 오갔을까. 이제 다툴 힘도 다 빠져버렸는지 모른다. 두 사람 사이에는 매운 마늘만 수북이 쌓이고 있다. 마치 이 풍경은 팬터마임처럼 진행된다. 관객도 배우도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어 굳이 말이 필요 없다.
어쩌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이다. 각박한 현실에서도 “슬픔을 걸러내는 필터”가 있기 때문일까. 늙은 부부들은 대부분 이렇게 살아왔다. 입에 사랑을 달고 사는 젊은 부부들은 어느 날 이혼을 하고 돌아서지만 우리 부모님들은 사랑이란 말은 엄두도 내지 못하고 평생을 아웅다웅 살아왔다. “별이 뜨면 부엌에는 접시들이 달그락거리며 입 닫은 딱새의 말을 대신 해줄 것이다”라는 이기철 시인의 시구(詩句)처럼 그 속에 미처 말하지 못한 것이 있다. 사랑의 무게는 아무도 알 수가 없지만 진실한 사랑은 할 말은 많아도 “서로 참아주며” 어떤 경우에도 “곁을 지키는” 것이다. 「할 말은 많으나 이만 줄입니다」 는 부부의 묵은 정을 묵화처럼 그려낸 수작(秀作)이다.
발레리가 “하나의 작품은 결코 완성되지 않는다. 시작품은 언제나 손질해 고쳐질 수 있는 하나의 작업 상태” 라고 하였듯이 조사(助詞) 하나를 놓고도 밀고 당기는 팽팽한 긴장이 시의 동력이다. 시인은 “언어의 도취를 위해 시를 쓰지 않고 그 언어의 도취를 깨우기 위해” 시를 쓴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원춘옥 시인은 자신에게 엄격하다. 군더더기도 없이 “문장이 깔밋한 이유”가 그것이다. 질문을 던지며 결론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각 문장에 부여한 역할과 제시된 맥락은 하나의 단서로 이어진다. 주변을 감싸 안는 따뜻한 “서정적 심성”은 섬세한 회화적(繪畫的) 이미지로 독자에게 흡수된다. 시 쓰기는 실존에 다가가 삶의 본질을 관찰하고 가치를 추구하는 일이기에 자신, 또는 타인을 위한 위로 앞에 더없이 진지하다. 원춘옥 시인은 관심 밖으로 밀려난 존재의 이면을 ‘클로즈업’ 하고 자연과 사물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작품성을 획득하고 있다.
원춘옥 시인
시, 서예, 캘리그라피, 수묵화가
서울 출생, 국문학 전공
2004년 <문학세계> 시 등단
호국보훈문예작품공모전 詩부문 우수상
양천구청 공감글판 심사위원
개인전 <물꽃피다> 外 그룹전
대한민국나라사랑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아카데미술대전 심사위원
대한민국미술대전, 대한민국서예대전 수상
현 금천문화원, 서울50플러스센터 출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