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단오제가 잘 담고 있는 고대 제의적 축제의 전형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가장 큰 전승축제라 할 수 있는 강릉단오제가 5월 15일 대관령 산신제를 시작으로 근 한 달의 장정에 들어갔다.
산신제에는 산신으로 김유신 장군을 모시고 국사성황(국사서낭)으로는 범일국사(박스기사1 참고)를 모신다. 산신제가 끝난 후에는 굿에 씌인 음식들을 참석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사람들은 기쁜 마음으로 음복한다.
이날의 주요 제의인 신목 행차는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를 올리고 난 후에 이루어진다. 신목잡이가 앞장 서고 제관과 무당들이 그 뒤를 이어 신목 고르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강릉주민들의 긴 뒤따름이 이어진다. 무당의 축원으로 신장부가 잡은 나무가 떨리면 성황신이 강신한 것으로 여겨 그 나무를 베어낸다.
대관령 국사 서낭신, 범일국사 신화
아주 먼옛날 강릉 학산에 지금도 마을 삼거리에 있는 석천이라는 우물에서 한 처녀가 바가지로 물을 떴다고 한다. 이상히 여긴 처녀는 그 물을 버리고 다시 떴는데도 해가 여전히 떠있었다. 아무 생각없이 그 물을 마신 처녀는 그후 태기가 있었고 14삭이 지난 후 아이를 낳았다.
아비없는 자식을 낳았다는 수치심에 아이를 마을 뒷산에 있는 학바위 밑에 버렸다. 그러나 모성애야 그때인들 다를까. 사흘 후에 학바위로 달려가 보니 죽었을거라 생각했던 아이는 살아있었다. 이상히 여긴 처녀는 주변에 숨어 지켜보니 학이 날라와 아기를 감싸주고 신기한 열매를 먹여주며 보살피고 있었다.
처녀는 범상치 않음을 느껴 아기를 다시 데려다 키웠는데 그 아기가 자라 훗날 구산선문 중 하나인 굴산사를 창건한 범일국사이다. 범일국사는 입적한 후 강릉과 영동지방을 지키는 대관령국사서낭신이 되었다고 한다. |
신목을 모셔온 제관은 신목에 청색 홍색의 오방 예단을 매단다. 이때 신명나는 무악을 올려 그 자리의 모든 사람들이 성황신의 강신을 기뻐한다. 이 신목베기는 이날 행사의 가장 중요한 행사이기에 주관하는 무당과 제관들뿐 아니라 뒤따르는 주민들 모두가 엄숙하고 경건한 자세이다.
국사성황사 앞에서 무당들이 부정굿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한 축원굿을 마치고 드디어 길고 긴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서낭신(박스기사2참고)을 향한 행차가 시작된다. 대관령국사서낭신 위패가 맨 앞에 서고 그 뒤에 신목, 제관과 무격들이 뒤따른다. 물론 새벽부터 서둘렀을 강릉 주민들이 그 뒤를 긴 행렬로 붙는다. 장대한 신의 행차가 드디어 시작되는 것이다.
옛날에는 이 행차를 대관령 아흔아홉 구비를 걸어서 내려왔다고 한다. 그러자니 자연 해가 저물어 일행은 모두 준비한 햇불을 켜들었는데, 그 길이가 오리에 달해 그야말로 일대 장관을 이뤘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대형차로 신목을 봉송하다가 대관령 중간쯤에서부터 옛길을 통해 구산성황당까지만 가는 것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대관령국사여서낭신 설화
옛날 강릉에 정씨가 살았다고 한다. 정씨에게는 과년한 딸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날 꿈속에 국사서낭신이 나타나 딸을 달라며 청혼을 하였다다. 이에 놀란 정씨는 서낭신에게 자신의 딸을 사람이 아닌 신에게 어찌 줄 수 있겠냐며 거절을 했다.
그러던 어느날 머리를 곱게 감고 노랑저고리에 남색치마를 차려입고 대청마루에 앉아 있던 정씨처녀를 호랑이가 나타다 업고 달아났다고 한다. 호랑이에 업혀간 처녀는 서낭신과 결혼식을 하였고 가족들과 마을사람들이 서낭당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혼은 떠나가고 몸만 남은 상태였다.
그러나 처녀의 몸은 서낭신 곁에 비석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에 가족들은 화공을 불러 화상을 그려 대신 세우게 하니 그때 비로서 몸이 떨어졌다고 한다. 그날이 음력 4월 15일이었다. 그때부터 강릉에서는 매년 이날 두 서낭신을 함께 모시는 서낭제를 올리게 되었다고 한다. |
그러나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그도 만만치는 않은 길이었다. 그저 따라걷는 사람들도 힘들겠지만 신목을 직접 봉송하는 신장부의 고생은 말이 아닐 것이며 줄곧 악을 치고 노래하는 무격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나마 대관령 깊은 산이 내뿜는 맑은 정기에 취해 내려올 때까지는 힘든 줄도 모르지만 초행의 사람은 몸살얻기 딱 좋은 길이 분명했다.
두 시간 정도 긴 행렬이 구비구비 대관령 옛길이 평평해지는 첫마을에서는 주민들이 서낭신을 맞는 음식을 준비하여 행차 일행은 요기하고 무당들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는 굿을 벌인다. 굿이 끝난 후 현재 대관령 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다시 신목은 자동차에 옮겨져 구산성황당까지 봉송되어 그곳에서 구산서낭제를 올리게 된다.
이 구산서낭제에서 옛날에는 주민들이 이미 어두어진 때라 햇불을 받쳐들고 노래를 부르며 서낭신을 맞았다고 한다. 그 노래 가사를 잘 들어보면 어째서 강릉사람들이 대관령 정상서부터 신목을 정성껏 옮기는 오랜 전통을 갖게 되었는지 실마리를 어렴풋이 느끼게 된다.
그 노래는 산유가 혹은 영산홍가라고 하는데 그 가사는 다음과 같다.
꽃바칠레 꽃바칠레 사월 보름날 꽃바칠레
어얼싸 지화자자 영산홍
명산일레 명산일레 대관령이 명산일레
지화자자 영산홍
영산홍 녹음 바람 청들백들 배 걸렸네
지화자자 영산홍
일년에 한번밖에 못만나는 우리연분
지화자자 영산홍
보고파라 가고지고 어서바삐 가자스라
지화자자 영산홍
<하략>
별도로 대관령국사서낭신과 대관령국사여서낭신과의 관계를 설명하여 이미 짐작하겠지만 일반 신화나 설화와 달리 신들의 사랑이야기가 사람들에게는 신에 대한 친밀감을 갖게 하는 요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게 하였다.
구산에서 서낭제를 지낸 행렬은 다시 차로 학산서낭을 향한다. 이는 1998년까지는 없다가 4년전인 1999년에 들어서 1천년만에 행차 여정에 학산이 추가되게 되었다고 한다. 이는 학산이 범일국사의 탄생설화가 깃든 곳으로 그곳에는 범일국사탑이 낮은 산등성이에 모셔져 있었다.
구산을 출발한 차량들이 길게 늘어져 강릉 시내를 지신밟기하듯이 휘돌아 학산을 향하는 모습도 격세지감은 있지만 한편으로는 볼 만한 장면이었다. 차로 이동하면서 잠시 눈을 감고 보름달이 밝혀주는 바닷길을 햇불 행렬이 수놓았을 그때의 장면을 상상하니 직접 볼 수 없는 것이 천추의 한이 될 지경이었다.
학산에 도착하니 구산과 마찬가지로 주민들이 행렬을 위해 제물과 음식을 준비해 놓았다. 행차는 먼저 범일국사탑으로 향하여 한 바퀴씩 탑돌이를 하고는 동그랗게 쌓아올린 작은 성 안에서 서낭제를 올렸다.
애초에 산신제의 음복에 구산 가는 길목에 두 번의 대접이 있었고 이번 학산까지 더하면 벌써 네 번의 음식을 먹는 것이다. 이러니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란 말이 나오고도 남는 일이다.
다들 없이 살던 때에 저녁 무렵까지 네 번씩이나 떡이니 막걸리를 맛보게 되니 이 어찌 즐겁지 않겠는가. 굿판은 먹을 것이 있어 좋다. 그것은 굿의 근본이 생명에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고 동행한 굿연구소 박흥주 소장은 힘주어 말하기도 한다.
학산서낭제까지 마친 신목행차는 다시 자동차로 옮겨타고 오늘의 마지막 행선지인 홍제동 대관령국사여서낭신을 향한다. 가는 길목의 주민들도 신목 행차를 보자마자 방그레 미소부터 짓는다. 그 사소한 모습 하나에서 강릉단오제의 오늘까지 이르는 저력을 느끼게 된다.
여서낭사에 도착하여 두 분의 위패를 함께 모시고 신목을 그 오른쪽에 두고는 정성껏 제물을 진설하고는 봉안제에 들어간다. 대관령여서낭신은 머리를 땋아내린 처녀의 모습으로 참 고아보였다. 긴 행차에 조금은 지쳤을까 아니면 일년에 한 번 만나는 여서낭님을 만난 홍조일까 한쪽에 모셔진 신목의 단풍잎들이 마침 노을때의 햇볕에 옅은 홍조를 띄운다.
봉안제는 유교식으로 올린다. 두 대관령 서낭신을 합사할 때의 제관들은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사람들이 가세하는데 경황 중에 묻지 않았으나 강릉시 고위관리인 듯한 느낌을 주었다. 제관들의 합사봉안제가 끝나면 곧바로 무당들의 부정굿과 서낭굿이 이어지며 이날의 모든 행사를 마감한다.
이날부터 음력 5월 3일까지 대관령국사서낭신의 위패와 신목을 이곳에 모셔진다. 그러니까 본격적인 단오제인 영신제까지가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일곱시간이 걸린 대관령 신목 행차는 끝이 났다.
김기 시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