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개월의 치열한 전쟁 그 와중에도 불과 34명의 소대 병력으로
1000명이 넘는 중국군 2개 대대를 섬멸한 부사관 출신의 김만술 소대장이 있었다.
한국정부로부터 훈장서열 1위인 금성태극무공훈장을, 미국정부로
부터는 한국인 최초로 미국 최고훈장인 십자훈장을 받은 그는
1960년 대위로 제대한 후 전투 중 입은 부상 후유증 때문에 1991년 63세로 사망했다.
1947년 6월부터 약 6년 동안 최전선에서 전투로만 일관해오던 중
1953년 7월 15일 직속상관인 제1사단장 김동빈 준장의 구두 명령으로
특무상사에서 소위로 특진하였다.
1953년 7월 중순은 휴전회담이 막바지에 이르러 한국과 북한 양쪽
군대가 한 뼘의 땅이라도 더 확보하려고 전력을 다해 사투를 벌일 때였다.
김만술 특무상사는 제1사단 11연대 2대대 6중대 2소대장이 되었다.
1사단 11연대의 전초기지는 경기도 연천군 임진강 북방 베티고지였고
2대대 7중대 1소대가 방어하고 있었는데 중국군의 공격을 받아 피해가 막심했다.
신임 2소대장 김만술 소위는 1소대와 진지교대 명령을 받았다.
진지를 교대하자마자 김만술 소위와 34명의 소대원은 공격해오는
1000명 이상의 중국군 2개 대대와 전투를 시작했다.
김만술 소대 35명이 중국군 314명 전사와 450명 부상시키고 섬멸
휴전협정 조인 12일 전인 1953년 7월 15일 15시 30분경에 베티고지
(동봉, 중앙봉, 서봉 등 세 봉우리가 있었는데 서봉은 중국군이 장악하고 있었음)
중앙봉과 동봉에 도착한 김만술 소대장은 대대장으로부터
서봉을 점령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서봉은 중앙봉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김만술 소대장은 17시 30분 1개 분대를 직접 지휘하여 서봉을 먼저
기습 공격하여 5명의 적을 사살하고 8부 능선까지 진격했다.
곧 19시 30분이 되자 약 800명의 중국군 대대의 공격이 개시되었고
중국군이 아군의 참호 속까지 뛰어들어오자 김만술 소대장은 총검으로
과감하게 적을 죽이고 물리쳤
으며 이를 본 소대원들은 용기가 솟아 용감하게 싸우기 시작했다.
22시에 적은 다시 동봉과 중앙봉으로 각각 1개 중대 병력(160명)과
2개 중대 병력(320명)으로 공격하였다.
공격 중인 적들이 교통호로 침입하자 김만술 소대장은 수류탄과
백병전으로 적을 죽이고 또 죽였다.
오전 6시 30분 중국군은 대대 이상의 병력으로 또 공격해 와 아군
병력의 1/2 이상이 전사하였다.
나머지 10여 명은 후방 지원이 없어 수류탄, 총검, 철모와 야전삽
등으로 적들과 죽이고 죽이는 처절한 백병전을 계속하여 중국군
314명을 죽이고 450명을 부상시키며
3명을 포로로 잡았다.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당하고 오전 7시 30분 퇴각하였다.
적이 퇴각한 후 12명의 생존 소대원들은 중국군 시쳇더미에
얽혀 있는 23명의 전우 시체를 껴안고 통곡했다.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아군의 피해가 적었던 것은 참호를 깊이 파고 그속에 있으면
수직으로 낙하하는 파편은 피할도리가 없지만 옆에서 오는
파편으로부터는 보호를 받을 수가 있다.
그러나 중공군들은 평지에 노출되니 45도로 날아오는 파편으로
부터는 머리로 부터 발끝까지 노출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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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해전술이라고 '사람바다'라는 뜻인데 숫자상으로 1 : 15명이 되는데
적군 수백명을 아군35명가지고는 턱도 없는 노릇이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