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일(성 베르나르도 아빠스 학자 기념일) 예수님께 더 가까이 오늘 복음은 어제에 이어진다. 버림과 추종을 제시하신 예수님 말씀에 그 부자 청년은 슬퍼하며 되돌아갔다. 그 뒷모습을 보며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이 표현은 물론 과장법이다.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게 그만큼 어렵다는 뜻이다. 부자가 나쁜 사람이거나 재물이 악해서가 아니라 부자는 하느님께 온전히 종속되고 완전히 의존적으로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하늘나라는 마음이 가난한 이들의 것이고(마태 5,3), 그들은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떤 것에서 희망을 찾지 못하는 이들이다.
이 말씀에 제자들은 화들짝 놀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저렇게 부유하고 착실한 청년이 구원되지 못한다면 도대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냐고 놀라는 거다. 중세 시대 유럽에서 부자 귀족이 수녀원에 들어가면 그 몸종도 같이 갔다고 한다. 집에서처럼 종이 허드렛일을 다 해주고 그 귀족은 기도하고 산책하며 그렇게 우아하게 수도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마 그 부자 청년이 계명을 다 지켰다는 것도 그런 모습과 비슷했을 거다. 그리고 수많은 율법을 다 잘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알고 있었으니 제자들이 그렇게 놀란 거다. 예나 지금이나 먹고살기 바쁜 서민들은 그런 걸 다 지킬 수 없다. 자기 몸종이 있는 귀족들이나 그럴 수 있다.
하늘나라는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선물이다. 선물은 아무런 기대나 보답을 바라지 않고 그냥 주는 거다. 예수님이 바로 그 선물이다. 예수님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용서하고 치유하고 살려주셨다. 이 땅에 나타난 영원한 생명의 모습이다. 사람이 되신 하느님이다. 이런 분을 어떻게 좋아하지 않고 따라다니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말하는 건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셨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서, 즉 하느님 계명을 전하기 때문이다(마태 23,1-2). 제자들에게 그렇게 하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저 두꺼운 교리서 내용을 다 알지 못하고, 다른 사회 윤리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다 알지 못한다. 우리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게 가능하다(마태 19,26). 교리서를 다 외우지 못하고 윤리 가르침을 다 몰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면 구원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하느님 사랑이 모든 법의 근원이고 이웃 사랑이 그에 버금가는 계명이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이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걸 하라. 그러면 그르치지 않을 것이’라고 한 말의 뜻을 이해한다.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이에게는 큰 위안이고, 그렇지 않은 이에게는 매우 위험한 생각으로 들린다.
하느님은 하늘 높은 곳에 홀로 거룩하게 계시지 않고 이 거칠고 세속적인 세상으로 내려오셨다. 신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으로 오셨다. 우리와 더 가까워지기를 바라시는 하느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게 아니라 섬기러 오셨고,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섬기신다. 이렇게 저렇게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며 그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신다. 만물의 주인에게 우리 마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나. 우리에게 필요하니까 그러시는 거다. 그걸 모르고 있으니까 안타까워 그러시는 거다. 세상을 떠날 때가 되면 내게 가장 필요한 게 바로 그것이었음을 알게 될 거다. 내 마음이 그렇게 늘 불안하고 소중한 뭔가 잃어버린 거처럼 계속 찾아다니던 게 바로 그것이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될 거다. 하느님 사랑이 바로 그것이다. 그럴 거라면 지금부터 하느님을 사랑하면 된다. 그보다 더 낮아질 수 없이 낮아지신 하느님, 나를 형제요 친구라고 부르신 예수님을 더 깊게 사귄다. 그분은 내 마음의 친구요, 연인이다.
예수님, 오늘도 주님께 마음을 열어드리고 주님께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섭니다. 점점 더 복잡해지는 세상사를 어떻게 다 알고 살겠습니까? 주님 사랑이 길을 잃지 않는 길입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아드님과 더 친해지게 도와주십시오. 그러면 더 바랄 게 없겠습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