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안동
안동은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서애 류성룡 등 조선의 대가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였으나
일제시대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먼저, 한국독립운동사의 발상지(1894년 갑오의병) 이었고,
2008년 3월 1일 현재 국가보훈처가 인정한 독립운동가 10134명의 출신지역별 숫자를 보면
(자료 국가보훈처; http://narasarang.mpva.go.kr/person_search/merit_search_list.asp)
서울 232, 인천경기 802, 강원 365, 제주 134, 충북370, 대전충남870, 전북610, 광주전남843,
대구경북1664, 부산울산경남911, 평남 447, 평북 782, 함남 294, 함북 177, 황해 355, 중국 31,
미국 4, 간도 1
특히 대구 경북은 그지역 인구가 다른지역과 차이없었던 것에도 불구 (호남인구와 동일) 하고
다른지역에 비해 더블 스코어가 넘는 그야말로 압도적인 숫자의 독립운동가들을 배출.
그 중 절반은 바로 '안동'
"조선 인물의 절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물의 절반은 안동에 있다.' - 성호 이익
<독립운동가>
전국 각 시`군의 독립유공자가 평균적으로 30여 명인 데 비해
안동은 그보다 10배나 많은 353명 이나 되며 확인 절차가 진행 중인 미포상(未褒賞) 독립운동가가 무려 700여 명에 달하고 있다.
일제 강점기, 끝까지 민족의 양심을 지키며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시인
'이육사'
1925년에 형 원기(源琪), 아우 원유(源裕)와 함께 대구에서 의열단(義烈團)에 가입하였다.
1927년에는 장진홍(張鎭弘)의 조선은행 대구지점 폭파사건에 연루되어 대구형무소에 투옥되었다. 이밖에도 1929년 광주학생운동, 1930년 대구 격문사건(檄文事件) 등에 연루되어 모두 17차에 걸쳐서 옥고를 치렀다.
중국을 자주 내왕하면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3년 가을 잠시 서울에 왔을 때 일본 관헌에게 붙잡혀, 북경으로 송치되어 1944년 1월 북경 감옥에서 작고하였다.
다수가 잘 모르나 안동 최대의 부호에서 전재산을 팔아 만주로 이동한 초대 국무령
'이상룡'
상해 임시정부 초대 국무령을 지낸 석주 이상룡 선생(1858~1932)은 안동시 법흥동 임청각에서 출생했다. 석주 선생은 고성이씨 종손으로 1895년 을미왜변 때 외숙인 권세연과 함께 의병활동에 나섰다. 이후 동향인 동산 류인식, 일송 김동삼 등 혁신유림인사와 백하구려(백하 김대락 생가)에서 협동학교를 열고 근대교육의 길에 나섰다. 석주 선생은 1910년 국권 피탈 이후 간도로 망명해 신흥강습소, 부민단 등을 조직하는 등 독립운동에 힘썼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선생의 집안 건물이던 안동시 임청각은 99칸 짜리였는데 어마어마하던 재산을 모두 털어서 만주로 건너갔습니다.
무려 50세에 말이죠. 진정한 노블리스 오블리제죠. 이 때문에 일제는 임청각에 기찻길을 둡니다... 맥을 끊기위해서
며느리는 왕산허위선생의 손녀인 허은선생이시죠. 대단한 집안.
만주벌의 호랑이, 국민대표회의 의장
'김동삼'
경술국치로 국권을 상실하자 어마어마하던 모든 가산을 정리하고 만주로 떠났다. 일송 선생의 망명길에는 석주 선생의 고성이씨와 다른 일가들이 함께해 이동 행렬이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일송 선생은 만주에서 석주 선생 등과 신흥강습소를 세우고 민족유일당촉진회를 조직해 위원장을 지냈다. 김구와 김원봉 등 좌우익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세력다툼을 하고 서로 해를 끼치는 가운데 끝까지 석주 이상룡 선생과 더불어 좌우익을 통합하려 노력하였습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됐다.
“만일 너의 생전에 독립을 보지 못하면
너의 자손에게 똑같은 유언을 하여 내가 남긴 돈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도록 하라.”
독립군의 어머니, 안윤옥의 모토
'남자현'
최근 알려지고 있는 학봉 김성일 선생의 증손 파락호
'김용환'선생
"이번 내가 취한 행동은 침략정치에 도취되고 있는 왜국 관민을 각성시키고 그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함이었다. 한국 사람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립선언서에서도 명시한 바와 같이 최후의 일인 최후의 일각까지 항쟁할 것이다"
일본 왕궁에 폭탄을 던진 의열단원
'김지섭 선생'
이외에도 혁신적 유림이었던, 만주로 넘어가 교육에 투신했던 유인식선생,
메이지대학 법대 나와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한국 회후의 레지스탕스 김시현선생
사회주의 운동가 '화요회' 의 권오설선생
단식을 끝으로 순국하신 이만도 선생 그리고 파리장서사건에 참여했던 그 아들 이중업 선생과 며느리 김락 여사.
군자금을 모으기 위해 동분서주한 그 손자 이동흠, 이종흠, 조카 이중언선생
가문 전체가 참여하였고 전 재산을 다 털어
한 가문에서 수십명의 독립운동가가 배출된, 진성이씨, 고성이씨, 의성김씨 등등 집안들.
자결로 항거한 수많은 유림들과 유명과 무명으로 몸바쳐 살다간 1000여명의 안동 독립운동가들.
현재 안동인구는 17만명.. 물론 그당시에는 더 많았겠지만
어찌 이 작은 도시에서 이렇게 엄청난 수많은 인물들을 배출했는지 도저히 이해가 안감
안동답답이라는 말이 있듯이 한번 가진 생각은 끝까지 고치지 않음.
이지역 독립운동의 특징은 무장독립 뿐아니라 교육적인 측면의 독립을 꿈꿨다는 특징이 있음.
최초 독립운동지 이었고 해방전 까지 그야말로 처절하게 항쟁했던 도시.
유학자 의병장 독립운동 민주화운동 등등 이나라가 필요할 때엔 항상 누구보다 앞서서 뛰어나갔음.
대단하고 경이로운 도시
이동네는
유난히도 고집이 세고 체면을 차리고 뚝심이 있음
이런 문화는 좋은점도 나쁜점도 많지만
아마 이러한 문화의 좋은점이 이러한 구국운동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나쁜점은 다들 아실테고.. 허나 그시대의 이지역만을 다루는 것이니.
신기하게도 이 지역 독립운동가들은 김구와 그 반대 사회주의 쪽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음에도
계속 좌우 합작을 추진하였고 그결과 영주 옆 풍기에서 광복단이 조직되어
최초로 무장운동계열과 교육계열이 합작하였습니다
또한 다른 지역이 양반과 그 아래 계급 사이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함에도
이지역은 양반과 그 아래 계급 사이의 관계가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합니다.
때문에 가산을 털고 만주로 향한 '노블리스 오블리제'가 엄청났고요.
당시 안동의 부호였던 이들은 집안 가산을 다 털고 서간도로 넘어가 독립운동에 투신하였고
그결과 부민단 한족회 신흥무관학교 서로군정서 등등 기관의 주축이 되엇습니다.
허나 결과적으로 지금은 아무 대접도 받지 못하고 있죠. 자손또한 없으며.
이 땅의 독립운동가 들이 그만한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광복절 전후를 맞이하여
이땅의 독립을 위해 쓰러져간 많은 독립운동가 분들의 넋을 기리며,
독립 운동에 헌신한 모든분들에게 다시한번 감사합니다.
첫댓글 안동인가 하면서 들어옴
역사교육을 잘 받으셨군요 ㅋㅋ
@왕십리 으억ㅋㅋㅠ 그런 말 듣기 부끄럽습니다ㅠ
@왕십리 일제가 철도 놓는다면서 집 절반 이상 부숴버린 임청각도 있어서..
@롬새룩스메아 임청각을 아시나요?? ㄷㄷ
@왕십리 어린 시절에 아부지한테 종종 듣다가ㅎㅎㅎ 몇년전에 한번 가봤어요
@롬새룩스메아 고성이씨신가요?
@왕십리 아닙니다ㅋㅋㅋㅋ 김씨입니다. 안동 김씨는 아님
@롬새룩스메아 아 ㅋㅋㅋ 임청각이 고성이씨 집안이거든요 저도고성이씨라 ㅎㅎ 많이 아시는거보니 신기하시네여
@왕십리 아항 그렇구나ㅋㅋㅋ 제가 아는건 딱 제가 말한 것까지만ㅋㅋㅋㅋㅠ 무슨성씨 집이었는지 까먹고 있었는데, 덕분에 다시 외우겠습니다
@롬새룩스메아 아닙니다 저도 잘 모르지만. 광복절이니 그시절 사라져간 이들에 대해 추모합시다
@왕십리 크 맞습니다. 너무 좋은 대화였습니다
양반의 도시 ㄷㄷㄷ
안동이 뭔가 지역자부심이 강한듯. 예전에 온라인 게임할때도 안동팬덤이 컸던거같은데
아 그란가요 저는 안동 사람이 아니어서 ㅋㅋ 인구도 16만뿐인데 신기해서여
하지만 그 후 안동시 국회의원은 친일파 딸내미 특검 법안을 반대표 냄ㅋㅋㅋㅋㅋㅋㅋㅋ
그쵸 참 안타까워요. 정치가 뭔지 참 당시 일제에 항거하고 사회주의계열 운동도 참활발한 지역이었는데.. 심지어 조봉암의 득표율이 전국에서 가장높은지역이였는데 사람들의 사고도 바꿨다는게.. 영원한건 없네요
정신 문화의 수도
안동
매출 ㄷㄷ
자한당의 심장 대구 경북 지역이 되어버림
내고향 갓동
그런데....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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