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리고 반장의 "차렷, 경례" 하는 소리와 함께 난 다른 아이들 보다 더 크게 "선생님, 안녕히 계세요" 를 외치며 가장 먼저 교실 문을 열고 뛰쳐 나왔다. 선생님에게 온종일 혼이 날 줄 알았던 하루가 이렇게 방방 뛰어 다닐 만큼 신나는 하루로 바뀌다니...
운동장으로 달려 나오자 여느 때 처럼 연이는 교문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를 기다리고 있다. 나를 발견하고 일어서는 연이의 손을 낚아채듯 잡고 뛴다. 내가 얼마나 세게 잡아 끌었는지 하마터면 연이가 넘어질 뻔 했다. "오빠, 영준이 오빠가 또 쫓아 오는거야?" "하하, 아니" "근데, 왜 이렇게 뛰어?" "그냥" 방긋 웃으며 신나하는 나를 보며 연이는 어리둥절 해 할 뿐이다. 한참을 그렇게 달리다 연이가 내 손을 놓고 주저 앉아 숨을 헐떡인다. "오빠, 숨 차" 그러고 보니 용산역 간판이 보일 만큼까지 쉬지도 않고 달려 오고 말았다. 오늘 처럼 무더운 날에 연이가 숨이 차다고 할만 하다. "연아, 오빠가 하드 사줄까?" "하드?" "그래" "웅... 오빠 돈 없잖아" "괜찮아, 아무데도 가지 말고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연이를 세워 두고 쌀가게로 달려 간다. 가게에 들어서는 날 보는 주인 아저씨는 대뜸 "쌀 포대 얻으러 왔냐?" 한다. 아빠 심부름으로 국수를 사러 올때를 빼고는 가끔 쌀 포대 한자루 씩만을 얻어 가는 탓에 아저씨는 내가 무슨 이유로 찾아 왔는지 이미 알고 있었던게다. "또 병 주우러 가는거냐?" "네" 아저씨는 차곡차곡 쌓아 놓은 포대 자루 중에서 제일 깨끗하고 구멍이 덜 뚫린 것으로 골라 내게 건넨다. "손은 왜 그랬어?" "그냥 좀 다쳤어요" "어쨋길래 붕대까지 감았어 인석아?" "별거 아니예요" "아니긴 이놈아, 그렇게 칭칭 감을 정도면 많이 다쳤구만... 근데, 니 엄마가 이제 너 한테 쌀 포대 주지 말랬는데 이그" 엄마는 내가 가끔 빈 병을 주워 모아 칠성 수퍼에서 과자나 아이스크림 따위로 바꿔 먹는 걸 싫어 한다. 간혹 나를 심하게 야단 치기도 한다. "동생 하드 사주려고 그래요" "고녀석 참..." 쌀 포대를 받아 들고 가게 문을 나서려는데 아저씨가 날 부른다. "야야" "네?" "이거 가져가서 동생이랑 하나씩 사서 먹어. 더운데..." 그러면서 아저씨가 내 손에 쥐어 준 것은 누렇게 색이 바랜 오원짜리 동전 20개다. 엄마가 동네 어른들이 돈을 주면 절대 받지 말라고 했기에 난 다시 그 돈을 아저씨에게 내 민다. "아니예요" "아저씨가 주는 거는 괜찮아, 동생 기다리는데 얼른 가" 아저씨의 억센 손이 내 바지 주머니 안으로 동전 꾸러미를 밀어 넣어 버리는 바람에 그것을 말릴 수가 없다. "고맙습니다" "그래, 어여 가봐" 아저씨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를 나온다. 가게 문을 닫고 돌아서는 순간 바닥에 널려진 쌀 포대를 다시 쌓아 올리는 아저씨의 중얼거림이 들린다. "저런 아들 녀석 하나 있으면 좋겠구만..." 쌀 포대를 들고 나타나는 나를 보는 연이는 "오빠 그거 뭐하게" 하며 의아스레한다. 주머니에 담긴 묵직한 동전 꾸러미를 만지작거리고 있자니 이 더위에 빈 병을 주우러 다녀야 하는 것과 빈 병이 가득 담긴 쌀 포대를 들고 칠성수퍼 까지 가야하는 수고로움이 귀찮아지기는 한다. 하지만, 공 돈으로 사먹는 하드와 용산역 광장을 돌며 주워 모은 빈 병 자루를 낑낑대며 가게로 들고가 바꿔 먹는 하드 맛이 어찌 같을 수 있을까? 쌀 가게 아저씨가 준 100원으로는 내일 학교에 가는 길에 연이와 오락 한판씩을 하면 되겠다. "연아, 오빠 따라와 좀 있다 하드 사줄께" "정말? 근데 돈은?" 하드라는 말에 연이는 귀를 쫑긋 하지만 내가 무슨 돈으로 하드를 사주겠냐는 생각을 하는지 두 볼을 보록하게 부풀리고 실 눈을 뜬다. 난 그런 연이에게 쌀 포대를 들어 보이며 활짝 웃어 준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좋은 일만 생기는 통에 저녁까지 뛰어 다닌다 해도 다리가 아프지 않을 것 처럼 기분이 좋다. 연이는 내가 쌀 포대로 무엇을 하려는지 궁금한 모양이다. 연이를 데리고 용산역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팔각정 그늘로 간다. 그리고 무슨 마술이라도 부릴 듯이 쌀 포대를 펼쳐 보인다. "쨘" "오빠 뭐해?" "지금부터, 오빠하고 콜라 병이랑 사이다 병 하나씩 주워서 여기에 담는거야 알았지?" 연이는 아직도 무슨 말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가을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 처럼 고개를 갸우뚱 거리기만 한다. "훙... 왜?" "여기다 빈 병 많이 담아서 칠성수퍼에 가져 가면 하드랑 바꿔 먹을 수 있어" 정말 마술이라도 보고 있는 것 처럼 연이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정말?" "응, 근데 맥주 병은 담으면 안돼" "왜?" "맥주 병은 무겁기만 하고 돈도 더 적게 쳐 줘" "알았어 오빠" 연이는 신이 나서 용산역 광장을 뛰어 다니며 빈 병을 하나씩 주워 온다. 어느새 포대에는 빈 병이 가득 담아진다. "연아, 이 정도면 됐어. 이제 오빠랑 들고 가자" "웅" "무거워도 가게까지만 참아" "웅, 나 안 떨어뜨릴거야 오빠. 나는 오렌지 하드 먹을거야 헤헤" "그럼, 나는 쌍쌍바다. 하하" 연이와 싱글벙글 하며 빈 병이 담긴 포대를 보물 상자를 옮기는 조심스럽게 옮겨 간다. "야, 조현" 파출소 앞에서 횡단 보도를 건너려 지나는 차들이 뜸해지길 기다리고 있는데 건너편에서 한 손에 야구 방망이를 들고 있는 영준이가 보인다. 연이와 나는 약속이나 한듯이 들고 있던 포대를 내려 놓고 우물쭈물한다. 영준이가 야구 방망이를 휘휘 저으며 이쪽으로 건너 온다. 야구 글러브를 끼고 연식 공을 주고 받으며 함께 횡단보도를 건너는 종규와 수학이도 보인다. 종규는 껌을 질겅질겅 씹으며 나를 향해 불쌍하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어 댄다. '종규 저 새끼...' 횡단보도를 건너 내 앞에선 영준이는 야구 방망이로 포대를 툭 친다. "또 병 주웠냐 거지 새꺄?" 들고 있던 야구 방망이를 지팡이 짚듯 땅에 세워 놓고 한쪽 다리를 떨어대는 영준이는 아침에 오락실 문을 열고 봤을때 보다 더 무섭게 보인다. 아침에는 영준이가 방심하고 있는 틈에 발길질을 성공 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영준이를 피해 달아날 방법이 없을 것 같다. "너 때문에 내 부랄 타 터질 뻔 했잖아 새꺄" 방망이를 높이 쳐 들고 나를 향해 내려 칠 듯하는 영준이 앞을 연이가 막아 선다. 연이는 아침에 그랬던 것 처럼 가방을 들고 영준이를 때릴 듯한 시늉을 하고 영준이는 그런 연이의 가방을 빼앗아 땅에 던진다. "너는 꺼져 기집애야" 영준이의 힘에 눌린 연이는 겁을 먹은 듯 내 등 뒤로 숨어 버린다. 금방이라도 방망이를 휘두를 듯 하던 영준이는 땅으로 던졌던 연이의 가방을 집어 들더니 내 가슴 팍에 던지며 야구 글러브를 끼고 권투를 하듯 장난질을 하고 있는 종규와 수학이를 돌아 본다. "야, 니들이 이거 들어" 그 소리에 한참 장난을 치던 종규와 수학이가 하던 것을 멈추고 영준이를 돌아 본다. "뭐해 안 들려? 쌀 포대 들라고 새끼들아" 영준이의 느닷 없는 명령에 종규가 볼멘소리를 한다. "야, 이걸 우리가 왜 드냐?" "들라면 들어 새꺄" 연이와 애써 모은 빈 병들을 영준이는 빼앗아 가려는 하는 모양이다. 한대라도 얻어 맞기 전에 순순히 포대를 주고 쌀가게 아저씨가 준 돈으로 옆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하드를 사 먹어야 할 듯 하다. 종규는 뭔가 억울하다는 듯 얼굴을 잔뜩 찌푸리며 수학이와 함께 빈 병이 가득 담긴 쌀 포대를 낑낑대며 들어 올린다. 수학이도 눈썹을 콧등 위까지 늘어 뜨리며 얹잖아 하기는 마찬가지다. "현이 손 다친거 안 보여? 니들 칠성수퍼까지 병 한개라도 깨뜨리고 가면 한개에 한대씩이다 엉?" 영준이의 그 한마디에 여차하면 빈 병이라도 주워서 영준이와 맞서야지 하던 내 생각은 치기(稚氣)로 머물고 말았다. 종규와 수학이가 쌀 포대를 들고 횡단보도를 건너는 모습을 보던 영준이는 야구 방망이 끝으로 내 가슴을 가볍게 찌른다. "여지껏, 나 때린 새끼는 우리학교에서도 너 밖에 없다 거지새꺄" "미안해" "됐어 새꺄, 앞으로 너는 조금 까불어도 내가 다 봐준다. 알았냐?" 연이 어깨에 가방을 메어 주고 가방에 묻은 흙을 털어 내는 내게 영준이는 짧지만 힘이 잔뜩 실린 말을 다시 건네 온다. "저거, 하드랑 바꿔 먹을거지? 나 한 입 안 주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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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빈병들을 모아서 하드랑 바꿔먹는군요.... 영준이도 약간 착한듯???^^ 왠지 현이랑 영준이가 조금씩 친해질것같은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