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떠난 실향민 애창곡…'알뜰한 당신’ 황금심과 부부
1934년 '타향살이'로 데뷔한 고복수와 '알뜰한 당신'으로 유명한 황금심 부부.
재일 가요연구자 박찬호는 ‘조선의 가요 황금기는 ‘타향살이’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한국가요사’316쪽)라고 했다. 1934년 6월 오케레코드사에서 출시된 ‘타향살이’음반은 발매 한달만에 5만장이 모두 팔렸을 정도다. 이 노래를 부른 고복수(1911~1972)는 단숨에 스타 반열에 올랐다. 하지만 그가 가수 오디션 대회 3등 출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1934년2월17일 밤 7시, 당시 최고의 공연장 경성공회당에서 유행가수 선발대회가 열렸다.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행사였다. 전국에서 예선을 거쳐 선발된 남녀 19명이 실력을 겨루는 대회였다. 신문사가 유행가수 선발대회를 후원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조선의 가요가 고래로 발전되지 못한 것은 정치적 기타 여러가지 원인이 있겠으나 첫째로 노래를 천히 알아서 ‘점잖은 사람은 노래를 몰라야 한다’는 폐풍이 있게된 뒤로…이렇게 조선의 가요가 영원히 잡멸되려 할 때에 ‘레코—드’를 다리로 하고서 외래의 유행가와 가요가 조선 사람의 넋속을 파고 들어 고유한 조선의 문화에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거니와 이 상태로는 조선의 가요의 미래, 다시 말하면 조선 사람의 넋에서, 그 입에서 그 피의 소리인 노래가 영원히 사라지고 다만 소리 없는 인간, 시(詩)가 없는 인간, 생의 약동이 없는 인간으로써 살게 되겠으니 이것이 그저 웃어버릴 일이 아니다.’(‘천재가수 선발대회에 등단할 기대되는 후보자들’, 조선일보 1934년2월15일)
조선인의 정신을 지키는 우리 가요를 발전시키기 위해 가수 선발대회를 후원한다는 취지였다.
콜럼비아 레코드 경성지사가 주최하고 조선일보가 후원한 전국 유행가수 선발대회를 소개하는 조선일보 1934년2월15일자 기사. 고복수(왼쪽 위에서 5번째)는 2월17일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대회에서 3등으로 입상했다. 경성방송국이 현장에서 중계할 만큼 관심을 모았던 대회였다.
◇음반 뒷면에 실린 ‘타향’이 히트
경성방송국 제2방송(조선어방송)이 실황중계한 이 대회에서 경남 대표로 출전한 고복수는 3등을 했다. 전남 출신 정일경, 함북 출신 조금자가 1,2위를 차지했다. 콜럼비아 사는 선발된 3명 모두 전속가수로 채용하고 영화배우로 캐스팅하기로 했다. 조금자, 정일경은 대회 직후 동경에 날아가 음반을 취입했는데, 고복수는 소식이 없었다. 콜럼비아에는 이미 강홍식, 채규엽 등 간판 가수들이 있었기 때문에 남자 가수 데뷔를 서두를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도 있고, 오케레코드 이철 사장이 고복수를 스카우트해버렸기 때문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곡절끝에 오케레코드로 이적한 고복수는 그해 6월 데뷔 음반을 냈다. 김능인 작사, 손목인 작곡의 ‘이원애곡’(梨園哀曲)과 ‘타향’(‘타향살이’)이었다. 유랑극단 배우의 신세를 노래한 ‘이원애곡’이 앞면에 실렸고, ‘타향’은 뒷면이었다. 고복수를 스타로 만든 것은 ‘타향’이었다.
◇하얼빈, 용정 동포 흐느끼며 따라불러
‘타향살이’는 특히 만주로 이주한 동포 위문 공연에서 빛을 발휘했다. 보따리 짊어지고 살 길을 찾아 쫓기듯 만주로 떠나온 동포들에게 ‘타향살이’는 두고 온 고향을 그리워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한 것처럼 들렸을 것이다.
‘타향살이 몇해런가 손꼽아 헤어보니
고향 떠나 십여 년에 청춘만 늙고
부평 같은 내 신세가 혼자도 기막혀서
창문 열고 바라보니 하늘은 저쪽
고향 앞에 버드나무 올봄도 푸르런만
호들기를 꺾어 불던 그때는 옛날
타향이라 정이 들면 내 고향 되는 것을
가도 그만 와도 그만 언제나 타향’
동포들이 많이 사는 하얼빈과 용정(龍井) 공연에선 청중들이 흐느껴울며 따라 불렀고, 극장안은 울음바다가 되기도 했다. 특히 용정 공연에선 부산 출신 30대 부인이 무대위로 찾아와 고향의 가족에게 소식을 전해달라며 쪽지를 넘겨주곤 며칠 뒤 자살해버렸다는 얘기까지 전해졌다.
◇ ‘알뜰한 당신’ 황금심과 결혼
고복수는 이듬해 4월 ‘사막의 한’으로 또 한번 히트를 쳤다. 사막에서 방황하는 나그네의 한을 노래한 곡이었다. 불후의 히트곡이 된 ‘짝사랑’도 고복수의 이름값을 한층 높였다. ‘아 으악새 슬피 우니 가을인가요’로 시작하는 ‘짝사랑’은 ‘으악새’가 무슨 새냐는 퀴즈를 낳을 만큼 화제를 모았다. ‘억새’라는 얘기도 있지만, 가을에 우는 새 소리가 ‘으악’으로 들리기 때문에 ‘으악새’라고 썼다고 한다. 박영호가 작사하고, 손목인이 작곡한 노래다.
고복수의 히트곡은 ‘타향살이’ ‘짝사랑’ 등 손목인이 쓴 노래가 많다. 이 때문인지 고복수는 한살 아래인 손목인을 평생 ‘선생님’이라고 부르며 깍듯이 존중했다고 한다. 고복수는 1939년을 마지막으로 오케레코드를 떠나 1940년부터 김용환이 주관한 ‘반도 악극좌’에서 활동했다. 여기서 평생 반려자인 황금심(1922~2001)을 만나 결혼했다. 황금심은 열여섯살이던 1937년 ‘알뜰한 당신’으로 데뷔한 이래 1970년대까지 1000곡 넘는 곡을 발표한 가요계 전설이다.
1957년8월 명동 시공관에서 열린 고복수 은퇴공연 신문광고. 후배들과 함께 대대적으로 치른 이 공연은 부산에서도 열렸다.
1972년 2월 고복수 타계후 열린 영결식.
◇고향이 죽어버린 시대에 부활한 ‘타향살이’
해방 이후 고복수의 삶은 그다지 순탄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6.25때는 인민군에 납치돼 끌려갔다가 탈출, 육군 정훈공작대에 자원해 들어가 활약했다. 1957년 8월 명동 시공관에서 후배들과 함께 은퇴공연을 펼쳤고, 부산에서도 고별무대를 가졌다. 고복수는 은퇴공연 수익으로 택시회사를 운영했으나 실패했고, 1959년 영화 ‘타향살이’ 제작에 투자했다가 흥행실패로 큰 손해를 봤다. 이후 월부서적 판매로 생계를 꾸리기도 했다. 1972년 2월10일 식도암과 폐농양으로 세브란스 병원에서 별세했다.(’가수 고복수씨 사망’, 조선일보 1972년2월11일)
‘이 노가수의 부고(訃告)를 들을 때 문득 오늘의 ‘도시 유목민’들에게도 잃었던 고향이 생각날 지 모른다. 구성진 옛날의 그 유행가 한 가락속에서 ‘타향살이’의 그 의식(意識)조차도 없이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만물상’, 조선일보 1972년2월12일) 고복수의 죽음을 추모한 이 칼럼은 산업화,도시화로 고향 잃은 시대의 비감함을 썼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타향살이’는 부활하고 있다.
1991년 울산엔 ‘타향살이’가 새겨진 고복수 노래비가 섰고, 서울 노원구 상계동 당현천에도 고복수, 황금심 부부 노래비도 세워졌다. ‘타향살이’가 750만 재외동포의 심금을 울리는 애창곡 선두에 올라있는 것도 여전하다. 고복수 고향인 울산은 1987년부터 고복수 가요제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 33번째 대회는 6월4일 태화강 국가정원 야외공연장에서 열린다.
글 : 김기철 학술전문기자 / 입력 2023.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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