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2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하느님의 초대 “하늘나라는 자기 아들의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마태 22,2).” 복음서는 인류 구원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며 인간이 하느님과 결합하여 하나가 되는 거라고 말한다. 하느님은 외아들 예수님 안에서 회개한 죄인을 맞아들여 하나가 되어 그를 구원하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원한 게 아니라 하느님이 우리를 부르시며 초대하신다. 구원의 기쁨도 하느님의 것이다. 내가 구원받았다는 게 아니라 하느님이 나를 구원하셔서 기뻐하시는 거다. 그것은 잃어버린 어린 양 한 마리를 천신만고 끝에 찾아낸 가난한 목동의 기쁨이고(마태 18,13), 아름다운 신부를 맞는 신랑의 기쁨이다(이사 62,5).
외아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이 인류를 구원하신다는 소식, 즉 복음은 이제 온 세상에 전해졌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는 사람은 있어도 그분 이야기를 전혀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별로 없을 거다. 예수님을 누구는 믿고 누구는 믿지 않는다. 믿고 안 믿고는 개인의 선택이고 자유라고 할지 모르지만, 나에게 믿음은 나 스스로 한 선택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신 선물이다. 단지 부모님이 전해주었을 뿐 그분이 살아 계시며 여전히 인류 구원을 위해 일하신다는 거를 세속적으로 증명할 수 없다. 신학적으로는 가능하기는 하지만 그 신학도 믿음이 없으면 시작조차 할 수 없다. 그런데도 믿으니 이 믿음은 하느님이 주신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강대국 바빌론 제국에게 정복당해 국민 모두 노예로 끌려가는 치욕을 겪었다. 더 큰 치욕은 그 나라에서 이방 문화를 따르고 이방 신을 섬기게 됐다는 사실이다. 그러지 않으면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자신을 선택하시고, 어엿한 한 나라로 키워주셨다는 자긍심과 자존심이 큰 상처를 받았다. 한 유명 정치인이 말하는 거처럼 ‘먹사니즘’, 먹고 사는 거보다 더 중요한 게 없었던 거다. 신앙은 먹고 사는 일 앞에 버려졌다. 그러나 모두가 다 그런 건 아니었다. 그런 도전과 유혹에도, 노예 생활하는 중에도, 그로 인해 더 가난해져도 끝까지 신앙을 지킨 이들이 있었다. 소위 ‘남은 이들’ 또는 히브리말로 ‘아나빔’이라고 불리는 이들이었다. 그들에게 하느님은 에제키엘 예언자를 통해서 고향으로 돌아가게 될 거라는 거짓말 같은 약속을 하셨다. 그 거짓말 같은 예언은 실제로 이루어졌다. 독립운동이 아니라 다른 이방 국가 페르시아 임금 고레스가 모든 유다인은 고향으로 돌아가라고 칙령을 내렸기 때문이다(에즈 1,1-4).
귀양살이 동안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을 잊어버렸다. 먹고 살려다 보니 그리됐다. 그러나 아니빔들은 자신들이 하느님 말씀을 잘 듣지 않아서 노예 생활하게 된 거라고 고백하고 사회적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하며 신앙을 지켰다. 급속한 세속화와 함께 탈종교화 시대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은 이제 가장 기본적인 신앙 행위인 주일미사 참례마저 지키기 어렵게 된 거 같다. 미사참례가 신앙의 전부는 아니지만 하느님 말씀을 듣지 않고 성체를 영하지 않고 하느님을 잊어버리지 않기는 쉽지 않다. 하느님을 잊지 않는다고 해도 세속화된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주님의 길을 발견하고, 먹사니즘에 휩싸이지 않는 것 또한 쉽지 않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눈치채지 못하게 하느님에게서 멀어지게 된다. 하느님이 주신 선물을 잃어버리고, 그분의 초대를 무시하게 된다. 하느님은 모든 이를 부르시지만 그들 모두 그 혼인 잔치에 들어가는 게 아니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 차려 잊은 걸 기억하겠지만 늦었다. 그때는 하느님도 어떻게 하실 수 없다. “친구여, 그대는 혼인 예복도 갖추지 않고 어떻게 여기 들어왔나?(마태 22,12)”
예수님, 주님이 신랑이고 제가 신부라는 비유를 이해는 하지만 마음에 잘 와닿지는 않습니다. 그 대신 아름다운 신부를 맞이하는 신랑의 마음과 기쁨이 어떤 건지는 아주 잘 알 거 같습니다. 주님이 그렇게 저를 부르고 기다리신다고 믿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저의 신앙을 지켜주시고 주님의 길로 인도해 주소서.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