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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삼면의 바다에는 약 3천여개의 섬이 있다.
인천 연안에 만 독립된 문화와 환경을 가진 섬이.,171개.
서해, 남해 섬들에서는 선사시대 유물 유적이 많이 출토된다.
'선사시대 황해평야' 서해는 인류문명 기원지 아닐까?
..............덕적도패총(德積島貝塚).............
1954년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서해도서 조사.
덕적도를 비롯한 소야도(蘇爺島)·승봉도(昇鳳島) 등
신석기시대 말, 빗살무늬토기 패총의 소재가 알려졌다.
1967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중심으로 자세한 조사가 이뤄졌다.
빗살무늬토기가 나오는 패총은 네 지역에서 발견되었는데,
출토된 유물은 전형적 '서해안식 빗살무늬토기편'을 비롯하여
약간의 골각기(骨刻器)가 확인되고, '석촉'도 발견된 바 있던 곳.
빗살무늬토기편에 나타난 문양은
단사선문(短斜線文)· 어골문(魚骨文)·
사격문(斜格文)· 점렬문(點列文) 등으로
광주 미사리, 암사동 등지에서 흔히 보이는
전형적인 서해안식이며, 색깔은 모두 갈색이고,
토기의 태토질(胎土質)은 점토질과 사질토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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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기벽의 두께는 0.5∼0.8㎝ 정도이며,
전체적인 패총연대는 빗살무늬토기시대 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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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수렵 위주 생활을 하던 구석기시대에는
고기를 통해 염분(나트륨)을 섭취할 수 있었지만
농사짓고 정착생활을 하면서부터는 소금이 귀했다.
신석기시대 초기 인류가 떠돌이 수렵채취 생활을 청산하고
정착을 시작하면서 먹거리가 해결될 수 있던 곳이.,해안 갯벌.
그후부터 인류는 소금을 구하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소금은 인류가 상거래로 재화를 얻는 가장 중요한 도구.
거래는 시장을 형성, 시장이 발달한 곳이 도시를 낳았다.
역사적으로 소금이 생산되는 곳이 경제적 번영을 누린 것.
인류의 문명은 소금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 생존에 기본 요소는.,물, 식량, 불 & 소금과 땔감.
인류는 식량과 소금을 구할 수 있는 곳에 모여 살게된 것.
인류 문명의 4대 발상지 모두 농사가 가능하며
주변에서 소금을 얻을 수 있는 강 하류에서 발원.
인류 최초 문명인 수메르문명도 밀농사가 가능하고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 하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사실, 소금은 수렵 시대에는 중요한 자원이 아니었다.
동물 고기에는 기본적인 염분이 포함되어 있었기 때문에
육식을 하던 시대에는 따로 소금을 섭취할 필요가 없었던 것.
그러나 인간이 수렵 대신에 농경생활을 하면서부터
생존을 위해서는 생리적으로 소금이 필요하게 된 것.
그런데 갯벌에는 소금기 있는 연체동물뿐 아니라 함초 등
염생식물도 많아 이들로부터 귀한 염분을 얻을 수 있었다.
더구나 갯벌에서 웅덩이 바위틈 소금을 채취할 수 있었다.
홍적세 이전은 제3기 플라이오세이며 이후는 충적세이다.
홍적세의 시간 경계는 약 1만~160만 년 전인 것으로 측정.
빙하기 시작은 약 250만년 전으로 플라이오세에 이미 시작.
빙하기가 최고일 때 세계 육지의 28%는 빙하에 덮여 있었다
충적세는 마지막 빙하기 이후로 1만 년 전부터 현재까지.
세계 주요한 기후 온난화는 약 1만 3,000년 전에 일어났다.
거대한 빙상이 녹으면서 충적세 초기에 일어난 해수면 상승.
스칸디나비아 지역에는 빙하기가 끝나면서 수백m 지각 융기.
충적세가 시작되며 급격한 기후 온난화와 광범위한 식생 변화.
5천년전 이후 기후는 보다 추워지면서 온난기와 한랭기가 반복.
앞으로 1만~2만 년 이내에 홍적세 빙하기와 유사한
빙하기가 다시 시작되면서 간빙기가 끝날 것으로 추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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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 바다 속에 잠겨있는., 드넓은 황해평야
과거로 사라졌지만., 미래에는 잠재적인 신대륙
우리나라의 미래를 밝게 할., 무한가치 잠재력 자원.
현재, 남한 지도 상.,무인도 2,689개, 유인도 464개
그리고, 지적 공부에 추가 등록할.,섬이.,약 1400 개
3153 섬 + 1400 섬 + (바다 속에 산처럼 솟은., 암초들)
남한 육지 면적보다 5배 이상 넓은.,三面의 공해
서해 남해.,평균 수심은 모두 약 100m 정도에 불과.
三面의 공해는 육지와 다를 바 없는.,무한 자원보고.
.............................서해(황해)...........................
면적 40만 4,000 ㎢, 남북길이 1,000㎞, 동서길이 700㎞
수심은 20~80m 정도, 최대수심 103m, 평균수심 44m이다.
황허 강(黃河) 황토 때문에 바닷물이 항상 누렇게 흐려., 황해.
동중국해와 경계선은 제주도와 양자강을 잇는 선
북쪽은 '요동만~ 산동반도' 선으로 구분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보하이 만[渤海灣]까지가 서해의 범위.
겨울에는 한랭한 북서계절풍이 강하며,
여름에는 남동풍 및 남서풍이 미약하다.
봄에서 초여름까지 섬과 해안 돌출부 주위에.,안개.
여름에는 '경기만 ~ 남해연안'.,해저 냉수괴(冷水塊)
해수면 표면수온은 여름 25~27℃ 내외, 겨울 2~8℃ 내외.
신생대 제4기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제4 빙하기에는 현재보다 100m 이상 낮고
서해는 중국 대륙과 연결된 평탄한 육지였다.
그후 해빙기에 해수면이 높아져 바다가 되었다.
해저에는 '한국~중국' 해안선 따라서 사퇴가 형성
양자강 하구에는 큰 사퇴(砂堆)가 동중국해 경계지역
따라서 양자강 하구에서 300㎞ 해역까지 수심 30m
어장은 수심이 얕고 조류가 급해 바닷물이 항상 혼탁
플랑크톤이 동해의 1/2이나, 하천 유입 영양염류가 풍부
대륙붕과 크고 작은 섬들이 많아
태평양 어류 산란장으로 좋은 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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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해가 생성된 시기 및 유래는 미국 오대호와 거의 유사한 편.
슈피리어· 미시간· 휴런· 이리· 온타리오.,5대호(면적 244,106㎢)
미국, 캐나다 사이 경계이며 세계에서 수면면적이 가장 큰 담수호.
총유역면적은 75만 3,919㎢, 남북은 1,110㎞, 동서길이는 약 1,384㎞.
오대호 지역에는 다양한 산업이 발달.
풍부한 철광석·석탄·곡물·공산품 등이
호수의 항구들 사이에서 이동되거나
세인트로렌스 운하를 통해 해외 수출.
휴양산업 자원으로서 가치가 높은 곳.
오대호는 플라이스토세 빙하작용 마지막 산물.
하천 유역은 거대한 빙하에 의하여 함몰되었다
서해 해수면은 마지막 빙하기가 끝난 1만 5000년 전부터 급격히 상승.
서해 갯벌은 6000년 전에 해수면이 지금과 거의 비슷한 형태로서 형성.
조수 간만의 차가 크고 경사가 완만한 지형 덕분에 서해에 갯벌이 형성.
제4빙하기 해수면이 지금보다 140m 낮았던 2만년전 서해.
대홍수 때 서해 저지대 민족들은 고지대 한반도로 대거 이주.
서해 저지대에서 탈출해 생존한 인류는 극소수였을듯 추정된다.
전라남도 장흥군.,2만년전 신석기시대 유물.
구석기시대는 지구에 소빙기 추운 시기가 닥치면서 마감.
그뒤로 다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동식물이 번성하게 되자,
인류는 강가, 호수 주변, 해안에서 정착한 신석기시대가 도래.
.
신석기시대에는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수렵과 채집.
특기할 사건은 신석기시대의 혁명이라 일컫는 농경생활.
돌괭이, 돌삽, 돌보습, 돌낫 등 농기구, 흙을 구워 만든 토기.
이들은 농경 뿐만 아니라 뼈바늘과 가락바퀴를 이용해
옷을 지어 입는 등 간단한 수공업을 발전시키기도 했다.
토기의 제작은 흙과 불에 대한 지식들을 터득했음을 대변.
이와 함께 신석기인들은 만물에 영혼이 있다고 믿었으며,
조상 숭배, 토테미즘, 샤머니즘 등이 신석기인 의식을 지배.
홍산문화권 우하량 유적에서 출토된 거대한 여신의 묘와 사당,
대형 무덤 등은 종교지도자 중심으로 공동집단이 있었음을 대변.
인류의 문명은 2만 년~1만 년 전 사이에 생겨나서
오늘날 같은 인류로 그 문화적인 진화를 시작하였다.
약 200만년 세월에 걸쳐 생태적인 진화를 해왔던.,인류.
가장 오랜 인류는.,아프리카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이들은 돌을 깨서 연장을 만든 최초의 동물이었지만,
그후 100만년간 그 기술에 있어서는 별 진전이 없었다.
2만년전 인류는 겨우 사냥이나 식물 채집 정도의 기술.
1만년전 인류는 한곳에 정착해서 동물을 가축으로 사육하고
식물을 재배하여 농사지으며 이때부터 인류의 문명이 크게 융성.
오키나와 바다 속 피라미드
수심 약 20~25m 지점에 위치.
약 1만년전(제 4 빙하기 말) 유물
1985년 다이버들에 의해 발견된 고대 문명 흔적
약 3천년전 지진해일에 의해 생겨난 자연적 현상.
길이 200m 높이 25m가 넘는.,바다 속 피라미드
류큐열도(오키나와)
약 400년 전에 일본에 합병
대만과 일본 본토와 중간 지점
내몽고 자치주에서 발견된 피라미드.,약 5천년전,
중국 서안의 피라미드 군이 3천년전으로 추정된다.
이집트 피라미드 역사는 이들보다., 훨씬 이후이다.
이러한 유적들은 황해평야 문명 확산경로를 대변
지구온난화로 황해평야 저지대 대부분 바다 속에 잠기고
황하강 토사가 두텁게 쌓여 사라진 구석기시대., 황해평야
오늘날, 한반도 일부에서만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굴될 뿐.
충북 청원군.,1만5천년전 재배 볍씨.
.......................우리나라가 세계 최초인 것들.............................
1. 쌀농사 세계 최초 - 1만 5천년전 (충북 청원군.,볍씨 출토 - 1998년)
2. 신석기 세계 최초 - 2만년전 (전남 장흥군 출토 - 2004년)
3. 토기 세계 최초급 - 1만 수천년전 (제주도 고산리 출토)
4.청동기시대 고인돌 - 8천년전 (전라남도 화순)
5. 금속활자
6.거북선(잠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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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군도 소야도에서 출토되는 유물.,빗살무늬토기 & 패총.
소야도를 포함한 인근 덕적군도 전역에서도 발굴되는 유물 유적.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꽤 오래 전부터 인류가 거주했던.,흔적들.
소야도
우리나라의 빗살무늬토기는 BC 4000년경부터 만들어진듯 하며
우리나라 선사시대 무늬토기는 시베리아 지방의 빗살무늬토기와
같은 계통이라고 일본인 학자가 추정하여 이름을 붙인데서 유래한다.
서아시아에서는 BC 7500년부터 벽돌을 이용하여
집을 짓고, 흙인형과 그릇들을 만들어 쓰기도 했고
신석기시대 토기에는 빗살무늬 이외에도 손톱무늬·
세모띠무늬·무지개무늬·생선뼈무늬 등이 새겨져 있다.
이제까지 나타난 세계 최고의 토기는
일본 서북지방 1만 2천년 전., 토기 설.
1970년대까지는 일본 고고학자들의 주장이
세계 고고학계에서 정설로 통용되어 왔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전역에서 연이어 출토되는
신구석기 유적 유물들로 인해 상황은 달라져서
지금까지 통용되어온 고고학 정설이 바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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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남해안 덧무늬토기들이나
양양 오산리 토기들은 빗살무늬토기보다
이른 것으로 BC 6000년경으로 편년하고 있다.
양양 오산리.,선사유적.
양양 오산리.,토기.
오산리 토기는 신석기인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데,
일반적으로 토기는 그릇으로 쓰는 용기를 가리킨다.
용기로서의 토기는 만든 방법이나 그릇 성질에 따라
토기(민무늬토기와 무늬토기) 석기· 자기로 나누는데
손으로 빚는 방법과 물레를 이용해 만드는 방법이 있다.
토기를 굽는 방법은 한데가마부터
차츰 높은 온도를 얻는 가마로 발전.
한반도는 부뚜막 아궁이에 불을 때는 온돌문화가 발달.
선사시대 노천요(露天窯)라 불리우던 '한데가마'와 유사.
'신석기~청동기·~철기~삼국'시대의 토기생산 가마 형태.
신석기인 빗살무늬토기, 청동기·초기철기·삼국시대 전기
무문토기 등은 모두 이러한 가마에서 구워진 토기들이다.
단군이 세운 고조선이 출현한 시기는 BC 2333년.
빗살무늬토기는 고조선 출현보다 훨씬 이전 유물.
청동기시대 대표유적이 부족국가 족장 무덤.,고인돌.
고인돌은 유럽과 아프리카는 BC 5,000/BC4,000년,
동아시아 고인돌은 BC2,500 / BC수백년 전후로 추정.
빗살무늬토기는 농사를 짓게 된 신석기인이
가을에 추수한 곡식을 저장하기 위해 만든 것.
토기 끝이 뾰죽한 이유는 땅에 묻어 고정시키거나
돌로 고정시키거나, 조리기구로 쓰기에 편리했으리라.
서해안 지역에서 발견되는 빗살무늬토기는 거의 밑이 뾰족.
이는 모래밭이나 땅속에 파묻기 위해 그렇게 만든 것이라지만
또 여러 개를 포개어 운반하기 쉽도록 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아랫부분에 구멍은 끈을 꿰어 걸어 두거나 운반하기 위한 것.
그전까지 바구니는 불에 약해 음식을 담아 두는 정도.
빗살무늬토기는 곡식저장 및 조리 기구로도 사용한 것 같다.
밑이 뾰죽한 빗살무늬토기는 BC 5천년전.,해안가 및 섬에 출현.
신석기인은 고기나 물고기를 구워 먹는데 그쳤지만,
토기를 사용하면서부터 취사 방법이 다양해진듯 하다.
즉, 끓여 먹으면서부터 다양한 음식을 만들어 먹게된듯.
예를 들면, 설렁탕, 매운탕, 찌계, 졸임, 국밥, 죽 종류.
전세계 고인돌 중에서 대부분 한반도에 위치.
전세계 빗살무늬토기 중 대부분 한반도에 위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8천년전 고인돌도
약 8천년전 빗살무늬토기도.,한반도에서 발굴.
한반도 토기, 거석문화가 전세계로 퍼져나간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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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1945. 8.15 광복 후 신석기 유적에 대한 대규모 조사와
방사성탄소연대측정 결과, 서해안지역 빗살무늬토기는
북유럽 캄케라믹, 바이칼 토기와 현저한 차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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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서해안 토기문화는 BC 5000년대를 상회.
시베리아 바이칼 지방보다 오랜 연대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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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살무늬토기(즐문토기)
빗살무늬토기는 8천년전 북쪽 초원길을 따라
이는 신석기문화가 한반도에서부터 발흥하여
동북아 ~시베리아~ 북유럽으로 퍼져 나간 흔적.
세계사는 유목민족과 정주민족 두 민족의 역사.
한쪽 힘이 우세하면 정복전쟁과 약탈이 행해졌고,
힘의 균형이 비슷하면 경제행위 교역이 이루어졌다.
제4빙하기가 끝나고 날씨가 따듯해지며 한반도 주변 인류는
흙을 빚어 토기를 만들기 시작했고 처음에는 아무 장식도 없는
토기를 만들다가 토기 표면에 흙을 찍어 띠를 붙인 것.,덧무늬토기,
이후 토기에 금을 그어 문양을 장식한 것이 신석기시대 빗살무늬토기.
신석기인들은 토기에다가 음식물을 끓이는 과정에서,
점토는 불에 구우면 점점 더 단단해진다는 것을 알았다.
이로써 불을 다루는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이야기.
600도 이상 불의 온도를 끌어올려야 토기가 구워진다는
토기의 발명은 불을 이용한 인류 최초의 기술혁명이었다.
빗살무늬토기 초기에는 대개 갯벌에서 조개류와 낙지,
갯바위 등에서 굴, 파래, 돌김, 미역, 톳 등을 채취해 먹고
물고기, 게 등을 물살로 잡고, 낚시 도구로 낚지는 않았을까?
빗살무늬토기는 신석기인이 정착생활을 하며
가정을 이루고 농사지은 잉여 수확물을 저장했던
씨족사회 흔적이며 부족사회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농사짓기 시작하면서 일기에 민감하게 되었고
가뭄에는 하늘에 비를 기원하며.,무속신앙 출현.
벼농사를 짓고 추수하면서부터 생긴.,잉여농산물.
수확한 농산물을 창고에 저장하기 시작한.,신석기인
정착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씨족(가족)사회를 이루고
씨족들이 모여 공동체 생활을 하며 부족사회를 이룬 것.
창고에 저장한 잉여농산물로 인해 부족간 약탈.
타 부족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공동체생활.
강력한 부족사회들이 출현하면서부터 부족국가 등장.
강력한 가부장을 뜻하는 쌍도끼 문양.,아비 父.
'아비 父, 겨레 族' 들이 세운 나라.,부족국가.
패자는 피지배자이고, 승자는 지배자인.,부족국가.
청동기시대 강력한 부족국가의 부족장 무덤이.,고인돌.
청동기시대 유물.,청동검. 청동거울 등.
신석기인 대표유물.,빗살무늬토기 & 간석기.
연곡 전곡리에서 미군이 발견된., 주먹도끼는
한탄강변 구석기인들이 사용하였던 대표적 유물.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는 구석기시대 타제석기.
그당시 구석기인에게는 기술집약적인 첨단적인 도구.
오늘날, '맥가이버칼'에 버금가는.,다목적 최첨단 발명품.
전곡리 주먹도끼는 이곳이 원시사회 문명 발상지 임을 대변.
.....................한탄강...................
한강의 제2지류이자 임진강의 제1지류.
한반도 중서부 화산지대를 관류하는 강.
북한 강원도 평강군 장암산 남쪽에서 발원해
철원군, 경기도 포천시· 연천군을 차례로 지난다.
한탄강 유역은 자연경관이 빼어나 경승지가 많고,
6·25전쟁 전적비와 기념물 등이 많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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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석기시대 극소수 인류만 살아 남았던.,제4빙하기.
화산활동으로 온천수가 용출하는 지역이.,삶의 터전.
우리나라 온천 지역의 대부분.,빙하기 선사시대 유적지.
추위를 피해 온천지역 일대에서 정착생활한 흔적들.
구석기인들은 소수의 무리가 집단으로 공동체 생활.
‘군(群)’은 몇몇 가족(부모와 자식들)으로 이루어졌다.
먹이감을 찾아 자주 이동하면서 살아야했던 소집단 무리.
전곡리.,구석기시대 선사유적지
그러나, 신석기시대 들어와 농사와 목축을 하기 시작.
씨족이라는 더 큰 사회 집단을 이루고 생활하게 된 것.
씨족이란 핏줄이 같은 부계 또는 모계 집단사회를 의미.
이때는 아직 생산력이 보잘 것이 없었으므로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여, 다같이 일하여 다 같이 나눠먹는 공동체 생활.
씨족사회~ 부족사회~부족국가
~성읍국가 ~군장국가~연맹왕국.
이러한 단계를 거쳐 고대국가 출현.
한탄강 연천 전곡리 주먹도끼 발견은
동아시아 역사를 새로 다시 써야할 만큼
전세계 고고학 역사 상에서 획기적인 사건.
1977년 그렉 보웬(Greg Bowen)
1977년 주한미군 공군 상병이 동두천 군부대 여가수
한국인 애인과 1월에 한탄강으로 데이트 하러 나가서
코펠에 물을 끓여 커피를 마시려 주변에서 돌을 모은다.
그때 여친이 주워온 '이상한 돌'을 보고
보웬은 서울대 교수에게 조사 요청했는데,
그 돌이 약 30만년전 구석기시대 유물이였다.
한탄강.,고석정
한탄강.,래프팅 & 오토캠핑장.
보웬이 우연히 나간 데이트 장소가 구석기 유적지
데이트 중 그걸 처음 발견한 보웬은 고고학 전공자.
애리조나 주립대학생이었는데 학비를 벌기 위해 입대.
그로 인해 서울대학교 박물관 팀은
전곡리 일대에서 4500여점 유물 획득.
보웬에게도 이 유적지 발견은 크나큰 명예였으며
이 공로로 해외 고고학계로부터 알려진 이후 제대래
석사학위까지 따고 각종 유적 발굴에 참여하기도 했고
미국에서는 나바호 인디언 역사보존부에 근무하였던 것.
2005년에는 1988년 이후 17년 만에
연천 구석기 축제에 초청 받아 방한.
전곡리., 선사유적지
그당시 이선복 교수는 "당신이 아니었으면
전곡리 선사 역사는 지금도 잠들어 있을 것"
선사 유적을 보웬 유적지라 해도 할말 없을 것."
보웬은 제대 후 한국인 애인이던 이상미씨와
미국 애리조나로 가서 결혼, 딸을 하나 두었고,
2009년에 지병으로 59살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선사시대'란 문자로 남긴 기록이 없었던.,시기.
유물 유적을 통해 추정할 수 밖에 없는.,선사 문화.
전곡리., 선사유적지
'한탄강 ~ 한강'까지 이어지는 협곡은
신석기인들에게 수렵하기 적당한.,삶터.
한강에서 소야도까지 이어지는 인천앞바다.
'11만년 전~ 1만2천년 전'
약 10만년 간., 제 4 빙하기.
지구온난화로 빙하에 패인 물길.
아득한 옛날에 서해는
미국의 '그랜드 케년'처럼
길고 거대한 협곡이었으리라.
주먹도끼는 인류가 100만 년 이상 사용한 유물.
전곡리 주먹도끼는 동아시아에서는 최초로 발굴.
한반도에 구석기인이 거주했음을 알리는 유물 유적.
구석기시대 대표적인 만능도구.,주먹도끼.
한 손에 쥐고 쓸 수 있어서 짐승을 사냥하고
가죽을 벗기며, 땅을 파서 풀이나 나무를 캐는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던., 뗀석기(打製石器l)
원시사회는 소규모 부족 공동체 자급자족 시스템.
인류가 농사짓기 시작하면서부터.,잉여 농산물을 저장.
빈부 격차, 전쟁, 약탈. 지배자와 피지배자, 고대국가 출현.
덕적군도 소야도에서 출토된 패총, 빗살무늬토기는
그당시 섬과 깊은 관련을 맺은 사람들의 유물 유적들.
덕적군도에 인류가 처음 살기 시작한 시기는 언제일까?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이 발견된 것을 보아도
인간이 오래 전부터 이 지역에 살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강화도를 비롯하여 덕적도, 백아도 등에서 발견된 고인돌.
청동기시대 이들은 주로 물살이 센 '사리'를 피해서
물살 잔잔한 '조금'에 뗏목 등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움집, 초막을 지어 계절별로 굴이나 산나물 등을 채취.
계절에 따라 옮겨 다니며 움집이나 초막에서 살았을 것.
섬 둘레에는 가파른 경사지가 많고 물과 토지가 부족해
한자리에서 정착해 농사짓고 살기에 어려움이 많았을듯.
신석기시대 섬주민은 어로와 밭농사가 주업일 수밖에 없다.
물이 적은 교동도는 ‘물꽝’ 저수지를 만들어 농사를 지었다.
논농사를 지은 섬으로는 승봉도, 자월도 등이 알려져 있다.
하지만, 농지가 몇 마지기 안 되어 자급자족이 어려운 상태.
옛부터 이 일대의 섬주민들이 부족한 양식은
가까운 김포, 당진, 서산 등지 뭍에서 물물교환.
섬에서 생산되는 어패류를 뭍에서 쌀과 바꿔 썼다.
그외 교동도, 강화도, 덕적도, 백령도 등은
후대에 간척 논을 개간하여 농사를 지었다.
교동도에는 고려 이후 간척지 흔적으로 보아
주변 섬주민보다 일찍이 농사를 지었던 곳이다.
'택리지' ' 덕적서'등을 보면 섬에 대한 인식이
해산물 약초 등이 많은 ‘살기 좋은 땅’으로 인식.
섬이 주는 경제적 이익이 섬을 발견하게 한 것이다.
섬에 사람이 정착하면서 뱃길로 교류가 이루어지자
인근 뭍에서 살던 사람들이 섬으로 들어와 정착한 것.
대개 덕적군도 사람들은 뱃길의 영향으로
경기, 황해, 충청, 전라도 등지의 말을 쓴다.
서해5도 경우에는 황해도, 평안도 말씨가 주류.
덕적군도는 한국전쟁 때 피난온 후손들이 많다.
강화도 교동도 “밥 드셨시까” 인사는 황해도 말투.
역시 뱃길로 이어져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할 수 있다.
경기만 인근 섬들은 16세기 이후 왕족 유배지나
임진왜란, 정유재란, 병자호란, 동학란 등을 피해
섬으로 온 주민들이 많아 인적, 물적 교류도 많았다.
호적이나 준호구가 이를 대변,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들 섬들의 입도조가 전란에 피난한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교동도는 경기도·황해도·충청도를 관할하는 삼도수군통어영 터.
수군장교들이 뱃길을 잘 알아 이들이 섬에 정착하는 경우가 많았다.
입도조들은 대개 황해도, 김포, 강화도, 대부도,
당진 등을 출발지나 경유지로 이용하여 들어왔다.
이주 경로로 ‘강화도→장봉도’, 강화도→덕적도’,
‘대부도→영흥도, 자월도, 승봉도’, ‘승봉도→이작,
소야도→덕적도’ ‘소야도→덕적도’ 등으로 들어왔거나,
덕적도에서 먼 바다에 있는 울도, 백아도 경우
‘당진, 서산→울도→백아도’, ‘울도, 지도, 소야도,
황해도→문갑도’로 이주해 자연뱃길 생활권이 형성.
고려시대 원(元) 황족의 유배지로 선택된 대청도.
'원 순제' 토곤 테무르(1320~1370)가 태자 때 유배지.
이들은 '대청도 안골' 내동(內洞)에 궁궐을 짓고
뽕나무와 옻나무, 쑥, 꼭두서니 등을 심고 살았다.
이들 황족이 머물며 명명했다는 삼각산, 남산, 장안,
매막골 등의 지명이 지금도 대청도에 전해 오고 있다.
'택리지' '원사(元史)' 순제기(順帝紀)에
순제가 고려로 쫓겨나 대청도에 살았으며,
다른 사람과 접촉하지 못하게 하였다고 기록.
교동도는 고려나 조선 왕실의 유배지.
주로 폐왕과 친족들이 많이 유배 왔는데,
고려 희종, 단종, 연산군, 광해군 등이 있다.
이밖에도 교동에 유배된 왕족 종친으로 양평대군,
임해군, 능창군, 경안군 등도 교동도에 유배되었다.
교동도가 이들 폐왕이나 왕족의 유배지로 적합했던 것은
한양과 가까워 그만큼 감시와 통제가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한강 하구 4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교동도는 천혜의 감옥인 셈.
시대가 험란해 섬으로 피신한.,서포 김만중(1637~1692).
그의 아명이 ‘배에서 태어났다’고 해서.,"선생(船生)"이다.
병자년 강화도 함락때 교동도 피신과정에서 배에서 태어났다.
서포 김만중 만큼 섬과 드라마틱한 연관을 맺은 사람도 드물다.
앵강만의 작은 섬 노도(櫓島)에서 죽었으나, 서해 섬과 깊은 인연.
..........서포 김만중(1637년 : 인조 15~1692년 :숙종 18)............
본관 광산(光山). 아명 선생(船生), 자는 중숙(重淑), 호는 서포(西浦).
예학(禮學) 대가인 김장생(金長生) 증손이며, 충렬공 김익겸의 유복자이다.
광성부원군 김만기 아우로 숙종의 초비(初妃)인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숙부.
그의 어머니는 해남부원군 윤두수(尹斗壽)의 4대손.
영의정 '윤방'의 증손녀, '이조참판 윤지'의 딸 해평 윤씨.
김만중은 어머니의 각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하였다.
.
아버지 김익겸은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강화도 순절
김만중은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두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 모든 정성을 쏟았다.
소학·사략(史略)·당률(唐律) 등을 직접 가르쳤고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 1)에 진사초시에 합격하고 이어
16세인 1652년(효종 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뒤 1665년(현종 6)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해 벼슬길.
1675년(숙종 1)동부승지 때 인선대비(仁宣大妃)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해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동안에 형 김만기도 2품직,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禮訟)이 남인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
그로부터 5년 뒤 1680년(숙종 6) 남인의 허적(許積)과
윤휴 등이 사사된 경신대출척에 다시 정권을 잡은.,서인.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숙종 5)예조참의로 관계 복귀.
1683년(숙종 9)에는 공조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1686년(숙종 12) 대제학, 1687년(숙종 13) 선천으로 유배.
1688년 11월 풀렸다가 1689년(숙종 15) 2월.,남해 위리안치
이같이 유배 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와
관련된 앙화(殃禍)가 남아 있던 탓.
이 와중에 어머니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사.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로 1692년
(숙종 18)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 24) 관작 복구, 1706년(숙종 32) 효행 정표가 내려졌다.
...........................................................................................
그의 본적은 강화도,
그가 태어나 머문 곳이 교동도,
잠시 피신했다는 곳이 대부도와 소연평도.
'서포'의 피신 전설이 전하는.,소연평도 은골짜기.
소연평도 은골짜기.
..........................은골짜기 전설.....................
조선 숙종 때 김만중은 효성이 지극하고 청렴 결백
충성심도 깊어 재상으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는데
간신들의 모함으로 누명을 쓰고 쫓겨나 은둔처를 찾아 피난.
어느날은 황해도, 또 어느날은 충청도로 8도를 두루 쫓겨다녔다.
어느날, 깊은산 초가집에서 묵다가 읽게된., 정감록(鄭鑑錄)
“삼천리 강산 중 배꼽섬(연평도)에서 百人을 구하리라.”- 귀절.
피난처로 땅이 끊기고 하늘만 통하는 소연평도 밖에 없다고 생각.
하여, 부인의 패물을 팔아 단두리배(큰 배)를 구입.
식량, 생필품 등을 챙겨 소연평도 해안가에 도착하여
월출봉 앞 부채산 밑 양지바른 골짜기에 집 터를 잡았다.
거기에 초가집을 짓고 시냇물가에 우물을 파고
또 작은 마당 한 구석에 예쁜 화초도 심어 놓았다.
그후, 김만중 부부는 이웃 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
이웃에 어려운 일이 생기면 가서 도와 주며 위로해 주고
아픈 주민을 간호해 주고 동네 아이들을 무척 귀여워했다.
주민들은 집안에 무슨 일이 생기면 김만중 부부를 찾아와 의논.
그러나, 생활이 어려워 김만중 부부는 항상 쪼들리는 삶을 살았다.
이들 부부는 골짜기 너머 작은 들에 밭을 일구고
감자를 심어 생계를 이었는데 어느날 우물이 말라
그 바닥을 살펴보니 은이 가득 찬.,오지동이(장독).
부인이 그 뚜껑을 열어보고
그 사실을 남편에게 알렸다.
남편이 왔을 때에는 오지동이 안에 맑은 물만 차있었고
우물 안에도 평상시와 똑같이 맑은 물만 가득 차 있는 것.
부인은 한참 멍하니 서있다가 자신의 손등을 꼬집어 보았다.
자신이 헛것을 본 것으로 생각하고 다시 밭으로 일하러 나갔다.
다음날 새벽, 밭에 나갔더니 안개가 사방을 뒤덮어 오고 있는 것.
부인은 무서워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서둘러 부채산 골짜기를 넘었다.
그때, 봇짐을 멘 삼십대 엄지락 총각이 걸어 오고 있었다.
먼길을 걸었는지 피곤한 모습이었으나 범상치 않은.,기운.
“제게 먹을 것을 좀 주신다면 그 답례로 은을 드리겠습니다.”
총각과 함께 집으로 온 부인은 남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
부엌으로 가서 정성껏 밥상을 차려 총각에게 가져다 주었다.
총각은 음식을 먹은 후 감사하다는 말을 남기고 유유히 떠났다.
총각이 떠난 후에 부인이 우물 안을 들여다보니
우물 안이 은으로 가득한 구덩이로 바뀌어 있었다.
총각은 이미 사라지고 골짜기 역시 은빛으로 빛났다.
주민들은 이것이 김만중 부부의 착하고 고운 마음씨가
하늘에 전해져 도운 것이라며 입을 모아 그들 부부를 칭송.
그후 김만중 부부는 더 많은 선행을 하며 평생 행복하게 살았다.
지금도 소연평도 은골짜기 그 옛 우물물은
지금까지 은빛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다 한다.
또한 그 우물물은 주민들이 약수로 사용하는데
섬 주민들은 "장수의 묘약" 약수라고 입을 모은다.
.................................................................... ..
조선 전기에 조정에서 은장을 보내 은을 캐냈던.,서산 광산.
조선왕조실록에는 1417년(태종 17) 해미현 호장 김연(金鍊)이
지곡현에 은돌(銀石)이 있다고 보고하자, 관가에서 이를 캐냈다.
당시 조선은 매년 명나라에 바치는 은 700냥 마련에 분주
공조(工曹)에서는 부족한 은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던 중에
1418년(태종 18) 조정에서 은장을 많이 뽑아 은광에서 채취.
조선시대 해주광산., 금은광,
소연평도 은광 철광 등이 유명. ...................................
우리나라 서해 상에는
수도권에서 가까우면서
'1박2일' 일정 여행지로
숨겨진 보물섬들이 많다.
특히,
영종도
백령도
덕적도
삼각 해역.
수많은 섬들이
그 진가를 잃은채
소외되어 가고 있다.
장차, 삼각벨트 해역에
순환 고속도로를 건설하면
수도권에서 모두 1시간 거리.
인천 국제공항에서 가까워
국제적인 해양 관광지로서
급부상 할 가능성이 높은 곳.
무의도.
백령도.
이작도.
3각점.
3각점을 각각 3거점으로 하여
주변 섬들을 연육교로 잇는다면
수도권에서 어느 섬이나 1시간 거리.
삼각벨트 해역에
숨겨진 외딴 섬들도
보물섬으로 부각될듯.
그러나, 해상교통이 불편하고
배를 타고 가는 시간이 많이 걸려
지금은, 인적 드문 섬으로 변해간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곳이
서해.,덕적군도.
........................덕적군도.............................
경기만 안에 있는 덕적도를 비롯한 소야도· 문갑도·
굴업도· 백아도· 울도 등의 유인도와 선갑도·각흘도·
먹도 등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는.,"큰물섬" 덕적군도.
"큰물섬"은 우리말 지명으로 '깊고 큰 바다에 위치한 섬'.
덕물도(德勿島)로 부르다가, 덕적도(德積島)로 지명 변화.
본래 경기도 부천군.
1973년 부천군이 폐지.
현재, 옹진군에 편입되었다.
연근해는 서해 중요어장 중 하나.
조기·새우·갈치 등이 많이 잡히며,
자연산 김· 바지락·백합 등이 채취되고
양식업도 이루어지며 군도 내 나룻배 운항.
<인천항 정기여객선> 덕적도-문갑도-
굴업도- 백아도- 지도- 울도., 경유 운항.
인구 1,764명(남 922명, 여 842명) 세대수 911호.
면적 36.02㎢, 논 1.25㎢, 밭 1.5㎢, 임야 31.83㎢.
주로 쌀이 생산되고 보리와 고구마· 마늘 등 농산물.
농산물 자급자족율은 50% 정도.
덕적리 패총과 소야리 패총이 있으며,
덕적도의 서포리해수욕장과 기암절벽.
각 섬들은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관광지.
660년,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덕적도 도착.
신라세자 법민이 나당연합군 작전회의를 위해
방문했고, 그후로 신라가 삼국통일 위업을 달성.
1950년 6·25 전쟁 때는 인천상륙작전의 전진기지.
1957년 서포리 해수욕장 개장, 1977년 국민관광지.
인천연안부두 철부선 2시간 반, 쾌속선으로 50분 거리.
.......................................................................
수도권에서는 멀고도 가까운 섬.,덕적도.
철부선으로는 멀고, 쾌속선으로는 가깝다.
1970년대 서포리해수욕장은
수도권 '여름 피서지'의 대명사.
피서철에 배표를 구할 수 없을 정도.
미니스커트 붐이 선풍적이던 1971년 여름.
서포리해수욕장., 모 교회 '하계 청년수련회'
친구 권유로 '보디 가드' 겸 안전요원으로 갔다.
수련회에 참석한 여학생들이 워낙 많아
짝을 맞출 수 없을 만큼 남학생이 절대 부족.
썰물때 드넓은 백사장에서 남녀혼성 축구시합.
여학생들의 숫자가 훨씬 많지만
남학생들의 전력 중심으로.편가름.
승패는 여학생들의 전력으로.,판가름.
여학생들이 비키니 수영복 차림으로
골대를 향해 전력질주 돌진하는.,공격.
골 키퍼 남학생이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
'행여나, 부딪치면., 다칠까?'
그게 아니라, 비키니 수영복 탓.
남학생 전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날부터는
여학생 전력 중심으로
남녀혼성 축구시합.,편가름.
밀물때 한낮에는 해수욕장에서
수영도 하고, 모래 찜질도 즐겼다.
안전요원이 없어도 될 만큼 안전한 곳.
3박4일 동안 그곳에 머물며
조개를 잡아 조개탕을 끓이고
게를 잡아 구워 먹기도 했었다.
평소, 존경하던 김학수 장로님.
그당시, '하계 청년수련회'.,단장님.
주옥 같은 대화가 기억에 많이 남는다.
1964년부터 40년에 걸쳐
1,300리 한강 풍경을 그린
<한강전도> 유작을 남긴 분.
"왜, 독신으로 줄곧 사시는 건가요?"
"북에 두고온 아내가 너무 그리워서.,"
"앞으로도 계속 혼자 사실 건가요?"
"통일이 되어 가족을 다시 만날 때까지.,"
"................."
"................."
1977년 국민관광지로 지정될 만큼
인기 높던.,덕적도 서포리 해수욕장.
.........................
.........................
덕적도는 인천에서 약 82㎞ 떨어진 위치.
서해안 연안도서의 교통·행정 중심지이다.
덕적도 인구 변화를 보면, 해마다 인구 감소.
1954년 12,788명.
1972년 5,274명,
2007년 1,765명,
2013년 1,947명.
1954년 12,788명 중에서
원주민 6,039명, 피난민 6,749명.
피난민은 1951년 1.4후퇴 전후 황해도
옹진방면과 서해안에서 남하한 사람들.
약 81%가 무직으로 어려운 생활을 한 것.
덕적도는 중선 이상 어업전지기지.
북으로는 평안북도 의주앞바다까지,
서쪽으로는 대연항로에 따라 황해일대
남으로는 전라도 칠산어장까지 출어했다.
덕적도 어기는 3월에 시작해서
4월 중순경은 연평도 ‘조기잡이’,
5월부터 7월까지 ‘민어잡이’.
7월 한 달은 육젓용 ‘새우잡이’,
9월부터 10월까지 추젓용 ‘새우잡이,
11월은 ‘숭어잡이’, 12월에는 대청도?
소청도에서 낚시질로 ‘홍어’를 잡는단다.
“연평도 조기잡이가 5월말 경 끝나면
용매도(북한지역) 새우잡이가 시작되고
8월 초 덕적, 굴업, 백아도에서 조기, 민어잡이”.
.............................
..............................
2015년 여름 인천에서 75㎞ 뱃길 덕적도는
마치, 동해에 온 것처럼 바닷물이 맑고 투명.
덕적군도는 8개 유인도와 34개 무인도.
마치, 공기돌을 뿌려놓은듯.,흩어져 있다.
1995년부터 쾌속선 운항으로 각광 받고 있다.
황금빛 모래사장 서포리해수욕장.
약 2㎞ 백사장에서는 썰물에 명주조개,
참고둥, 굴 등을 무더기로 주울 수 있다.
1977년 일찌감치 국민관광지로 개발.
200년은 족히 넘는 800여그루의 해송.
그 아래 해당화 군락지가 펼쳐져 있다.
덕적어촌계 소속 127명의 조합원은
덕적도 앞 30곳(90ha)의 양식장에서
전복과 바지락, 피조개 등을 캐내어
가구당 연간 1천만원 수입을 올린다.
20여척 고깃배로는 도다리 광어, 놀래미, 우럭 등
해안가에서는 연간 3t 자연산 굴을 따 수익을 늘린다.
"덕적도 자연생태양식장 어패류는 자연산과 다름없다"
"맛과 신선도가 좋아 어패류는 잡아올린 그날 다 팔린다"
그래서인지 우럭 등 인기어종은 현지에서 모두 소화.
꽃게 등은 수협공판장 경매를 통해 육지로 올려진다.
하지만, 천혜의 섬 덕적도 역시
해수 온난화 현상, 생활쓰레기 유입으로
바다가 오염되며 어종이 급속히 감소하고 있다.
"집중폭우 때마다 한강 등을 통해
각종 생활쓰레기가 인천앞바다로 유입
바다 뻘속은 라면봉지 쓰레기로 가득합니다."
해마다 유입되는 쓰레기 양이 엄청나
뻘 속 쓰레기 수거에 몇달이 걸린단다.
바다 온도가 해마다 높아져
회유성 어종들이 줄어든 실정.
어자원 감소로 고민하던 어촌계
덕적도 앞바다 해사채취 재개에
상당수 주민이 찬성표를 던졌다.
해사채취로 꽃게 어획량 감소가 우려되지만
옹진군이 어촌계지원사업으로 일정 금액을 지원.
지난번 해사채취때 3억원을 지원받아
냉동창고 활어장, 어촌계 관리선을 구입.
주민소득사업 일당 3만~4만원씩을 받았다.
"덕적도의 어려운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사 채취 재개에 찬성했지만
황금어장시대는 끝난듯.," - 덕적도 어촌계 어민-
'어민들을 함숨 쉬게 하는 바다 오염도 줄이고
도서지역의 젊은이들이 고향을 떠나지 않게 하고
어민들도 잘 살 수 있는 해양정책을 펴야할 시점인듯.
2016년 인천시 168개 섬 중 유인도서 33곳은
'의료' 취약 도서지역에 항상 노출되어 있는 곳.
시 보건복지국은 '의료취약지역 민관 진료협력을 통한
건강안전망 확보'를 통하여 <의료 인프라> 구축에 나선다.
이 사업은 5개면 12개 도서인 북도면(장봉도),
덕적면(백야도·문갑도·울도·지도·굴업도·소야도),
자월면(대이작도·소이작도·승봉도), 연평면(소연평도),
대청면을 대상으로 내과, 치과, 한의과 진료와 통증치료.
안과, 복부초음파, 심뇌혈관질환 예방, 응급지원체계 구축.
섬 특산물을 활용한 특색음식 개발로
특산물 경쟁력을 높이는'섬 푸드 프로젝트.
'그 섬에는 그 맛이 있다'란 가치 재창조 사업.
인천시는 2016년 2월까지 섬 특산물, 음식점
및 위생환경수준파악, 관광실태분석 등을 거쳐
상반기 중에 특색음식 홍보에 대대적으로 나선다.
덕적도와 소야도 사이 0.6㎞ 해협은
옛날부터 물살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다.
2015년 12월 연도교 완공 전까지 배를 이용.
소야도를 가려면 일단 모(母)섬인 덕적도에 가야 했다.
인천연안부두에서 프린세스호나 원광페리호를 이용하여
덕적도 진리선착장에 닿으면 소야도, 굴업도 등 부속 섬으로
다니는 종선이 대기하고 있는데 소야도는 종선으로 10분 소요.
바로 이들 배가
관광객들을 태우고
짐들을 나르는 것이다.
덕적군도 본섬 덕적도는 북서에서 남동으로
길게 이어졌는데 양끝에 2개의 부속섬이 있다.
북서로는 선미도, 남동으로 소야도를 거느린다.
덕적군도에 속한 소야도는
덕적도에서 동남쪽으로 0.6㎞,
인천에서 서남쪽으로 46㎞ 지점
면적은 3.04㎢, 해안선 길이는 14.4㎞.
인천 옹진군 덕적면 소야리.,소야도.
신석기시대 패총,빗살무늬 토기 유적지.
패총 7곳은 'BC 3740 ∼ BC2860년' 유적들.
덕적군도 일대에는 얼마나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이 숨어 있는걸까?
..............덕적도패총(德積島貝塚).............
1954년 국립박물관에서 실시한 서해도서 조사.
덕적도를 비롯한 소야도(蘇爺島)·승봉도(昇鳳島) 등
신석기시대 말, 빗살무늬토기 패총의 소재가 알려졌다.
1967년 서울대학교 고고인류학과
중심으로 자세한 조사가 이뤄졌다.
패총연대는 빗살무늬토기시대 말기.
.................................................
혹시, 덕적군도는 황해평야였던 곳일까?
신석기시대라 하면, 1만년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제4 빙하기 기후의 극한 변동이 대체로 끝나갈 무렵.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토기.
지구온난화로 양극지방 두꺼운 얼음이 서서히 녹으며
툰드라지역이 삼림지대로 바뀌고 기후가 온난다습할 때
인류가 처음으로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을 한 곳.
그 배경으로 인류의 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시기.
신석기시대 말, 지구온난화.
아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빙하가
태평양으로 흘러내리며 패인.,서해.
거대한 빙하군에 패인 물길들이 빚은 서해.
제4빙하기 말에 남북극 빙하까지 녹아 대홍수.
황해평야의 대한강(大漢江)이 서해바다로 변모.
대한민국은 대한강에서 유래된걸까?
서해 상에 고대 항로이자.,오늘날 항로.
그 옛 물길들은 그 후손에게 전해졌으리라.
대한강 해역은 .,고조선 영역.
그 조상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서해 상.,고대 항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
고조선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
지금으로부터 약 반만년 전후에
저지대민족들이 민족대이동을 하여
하, 은, 주, 고조선 고대국가들이 출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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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생대 제4기 해수면 변동을 고려할 때
제4 빙하기에는 현재보다 100m 이상 낮고
서해는 중국 대륙과 연결된 평탄한 육지였다.
그후 해빙기에 해수면이 높아져 바다가 되었다.
해저에는 '한국~중국' 해안선 따라서 사퇴가 형성
양자강 하구에는 큰 사퇴(砂堆)가 동중국해 경계지역
따라서 양자강 하구에서
300㎞ 해역까지 수심 30m
덕적군도 해역은
신안 앞바다와 유사한
고대 항로를 품고있는 곳.
....................신안앞바다 보물선.........................
원나라 말기에 양자강 하구의 경원항을 떠났던 보물선.
650년이 지난 1975년 5월 신안 앞바다에서 발견된 사례.
한 어부에 의해 알려진 그 사건은 고려 충숙왕 때 일이다.
전남 서해안 다도해 임자도를 4km 남겨두고 침몰한 보물선.
1270 년 영광군으로 바뀐 후 154년 동안 임자도는 무인도였다.
경원항은 당시 원나라의 광주 천주 복주와 아울러 국제 무역항
신안은 고려, 원나라, 왜를 잇는., 성공 확률 50% 뱃길.
그당시 해상무역의 이윤은 목숨 걸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96년 6월 MBC가 복원한 19 일간 3000km의 뗏목 대장정 항로.
역시, 경원항을 떠나 서해를 지나 임자도를 거쳐 일본 후쿠오카 항.
1975 년 5월 임자도 어민들이 발견한 청자수병 백자대발 백자접시
보물선이 발견된 지점은 (북위 35.1.15 동경 126.5.6) 수심 평균 20m
인양된 200톤 급 중국 보물선 선체 길이는 28.4m 폭 6.6m의 대형 상선
발견된 유물들은 토기류 20,661. 금속기 729. 석제품 43. 동전 약 28 t. 등.
사실, 보물선이 발견 전에도 어부 그물에 걸린 청자와 백자들.
어부들은 보물인줄 모르고 바다에 버렸거나 개밥그릇으로 사용.
개밥그릇이 보물인 사실을 알고 도굴단이 처음 보물선 인양 시도.
나중에야 비로서, 문화재 관리당국이 앞장서서 보물선을 인양했다.
'원나라 보물선이 이곳에서
조난당한 이유는 무엇일까?'
고려 충숙왕때 태풍속 대형상선은 전남 다도해로 배를 몰았다.
태풍에 밀려 최고 속도로 가장 가까운 임자도를 향해 달려갔다.
그러나, 임자도 4km 남기고 침몰, 겨우 상륙한 선원들도 죽었다.
무인도였던 임자도는 몇명의 생존자인 그들마저 구해 주지 않았다.
당시, 몽고군에 저항한 진도의 삼별초군을 제압하기 위해
추토사 김방경은 주변 섬들에 공도령을 발령했기 때문이다.
1270년 영광군으로 소속된 이후부터 154년간 임자도는 무인도.
'현재 중국 절강성의 항구도시' 영파항은 650년전 경원항이다.
원나라 말에 신안 보물선이 떠났던 곳으로 그당시 국제 무역항.
경원항과 신안 왜를 연결한 항로는 한반도 선조들도 목숨건 항로.
당시 교역이윤은 원가의 200 배라 할만큼 황금항로지만 성공율 50%
망망대해를 지나 임자도 앞바다에서 위령제를 지낸 후 후쿠오카 항구.
'650년간 바다 밑에 잠들어 있었던 보물선의 전설.'
위령제 속에서 숨쉬던 전설이 수면 위로 떠오른 1975년 5월
임자도 흑암리 앞바다 4km 지점에서 고기잡이배 어부가 발견.
국제적인 관심 속에 인양 복원되어 신안 보물선이라고 명명된 것.
신안보물선이 인양된 정확한 위치는
1004 섬 신안군.,'임자도 ~ 증도' 사이.
'목포에서 65km거리에 위치한.,증도(曾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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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석기시대 임자도는 6개의 섬이었다.
신석기인들이 지구온난화 대홍수 시절에
해수면 상승 때마다 사력을 다해.,제방 공사.
임자도는 6개의 섬이
하나로 된 흔적이 있는
신석기시대 유적지이다.
현재, 목포에서 증도까지
연육교로 이어져 있으므로
누구나 그 흔적들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시대적인 배경이
신안앞바다와 유사한.,덕적군도.
혹시, 이곳 해역에도
보물선이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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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의 난(1270년 6월 ~1273년 2월) 당시
삼별초 해산령에 불만을 가진 삼별초 장병들이
개경환도를 거부하고 여원연합군에 3년간의 항쟁.
............................삼별초 항쟁사..........................
1232년(고종 19) 최씨정권이 정부를 이끌고 강화도로 천도.
대몽항전의 전 시기를 통해 삼별초는 가장 강력한 전투병력.
1259년 고려 태자 전(원종)이 부왕을 대신해 몽고에 입조(入朝).
30년간 몽고와의 전쟁은 종식되고 화평이 수복.
그러나, 정부의 실권을 장악한 것은 여전히 무인들.
삼별초 무인의 권력은 1270년(원종 11)까지 존속되었고
10년 동안 고려의 내부 정세는 매우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원종은 몽고에 접근하여 무인세력을 억제하고 출륙환도 단행.
왕정복구(王政復舊)를 확립하려고 노력하였고, 몽고는 배후에서
고려 왕실을 조종 반몽고세력을 배제해 1270년 무인정권 종식 획책.
삼별초는 원종을 폐하고, 온(溫)을
새 국왕으로 옹립해 1270년 6월 봉기.
공사(公私)의 재물과 자녀를 싣고
진도로 내려가는 배가 무려 1천여 척.
강화도에 비해 수비하기에 유리한.,진도.
경상· 전라도 세곡 조운선(漕運船) 길목.,진도.
삼별초는 진도 용장성(龍藏城)을 거점으로 삼고
자신들이 고려의 정통정부임을 자처하면서 합포(마산)·
금주(김해)· 동래· 거제· 남해도· 나주 등 내륙 지역을 점거.
제주도까지 확보해 후방의 안정지대 확보.
이로써 고려정부는 큰 재정적 타격을 입었다.
그러나, 고려와 몽고의 양군은 모두 위축되어
삼별초와 접전을 피하고, 나주에까지 이른 신사전은
삼별초군이 출륙한다는 소식에 놀라 개경으로 도망칠 정도.
1270년 9월 고려·몽고의 연합군은 진도에서 삼별초와 접전.
바다에 익숙한 삼별초를 제압할 수 없었기에 진도 공격에 실패.
1271년(원종 12) 5월 고려 몽고 대규모 연합군이 진도를 기습한다.
진도 삼별초는 제주도로 근거지를 이전해 대항.
1272년(원종 13)부터 전라도, 경상도 연안에 진출.
개경으로 운반되는 고려 조운선을 공격해 세곡미 약탈.
그해 11월에는 거제도 현령(縣令)을 사로잡았고,
안남도호부(부천) 장악, 합포 전함 20척을 태웠다.
삼별초는 제주도로 옮긴 후 제해권을 가지고 있었고,
고려의 관리와 몽고군 등에 대한 공격을 계속 유지했다.
삼별초가 경기 지역까지 출몰하자
원종은 삼별초 진압에 힘을 기울였고,
원나라 세조 또한 일본정벌의 기지로서
제주를 중요시하여, 1273년(원종 14)에는
대규모 여몽연합군이 제주 심별초를 공격.
이때 고몽연합군은 병선 160척, 수군·육군 1만명.
(고려군 6천명, 몽고군 2천명, 한군 2천명)이었다.
연합군의 공격으로 삼별초의 난'은 약 3년 만에 진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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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별초는 덕적군도를 근거지로 경기도 조운선을 공격.
영흥도는 삼별초군이 여몽연합군에게 70일간 항전한 거점.
그후로도 소이작도는 '고려 ~ 조선'시대 조운선을 약탈한 해적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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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적도는.,'깊고 큰 바다에 위치'
큰 물길이 지나간다고 하여.,"큰물섬".
'고대 항로'이면서도 풍랑이 심한.,덕적군도.
'얼마나 많은 보물선들이
바다 밑 뻘에 묻혀 있을까?'
섬이 새가 날아가는 모양처럼 생겨 ‘새곶섬’.
660년 신라 무열왕 때 소정방의 대군이 들어와
나당연합군을 편성할 때, 소야도라 명명한 섬이다.
당나라 '소씨노인(蘇爺)' 소정방이
'대군을 이끌고 정박했다.'는 소야도.
소야도(蘇爺島)는 사치도(史治島), 소야곳도(少也곳島),
조야도(鳥也島), 신야곳도(新也곳島), 사야도(史也島),
대야곳도(大也곳島), 소도(蘇島) 등으로도 부른다.
소야도의 지명이 바뀔 때마다
그와 관련된 역사가 있었으리라.
그러나, 관련된 전설은 소정방 뿐.
660년 소정방이 14만 군사를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건너와 진을 쳤다는 소야도.
신라 법민 태자가 이곳까지 마중 나왔다는 섬.
660년 6월 18일 산동 내주(來州)에서 출발.
3일만에 황해를 건너 덕물도(덕적도)에 도착.
산동반도에서 경기만에 이르는.,직통항로 사용.
당시 삼국시대 한반도는 삼국 간에
당나라와 치열한 외교사절 교류정책.
서해 직통항로 쟁탈전을 벌린 시기였다.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연합군을 결성한 곳.
백제를 정복해 신라 삼국통일에 기여한 섬.
고려시대까지 동아시아 해상무역.,중심 항로.
하지만, 소야도라는 지명은
삼국시대 사치도(史治島)에서 연유
그후, 계속 지명이 바뀐 것으로 추정된다.
.
지금도 소야도 북악산 기슭에는
당나라 군사진지 ‘담안’ 사적이 있다.
장차, '영흥도~ 덕적도' 구간이
연육교와 해저터널로 이어지게 되면
'덕적도 ~ 산동반도' 연락선이 왕래하며,
국제적인 해양관광지로 급부상 할.,덕적군도.
옛부터 한.중.일 해상무역 직통 항로.
덕적군도 해역의 수많은 섬들까지도
보물섬으로 진가를 발휘하게 될것 같다.
'덕적도 ~ 소야도'
예전에는 도선 만 왕래.
하여, 외딴 섬이었던 소야도.
2015년 12월에는 연도교.,완공.
본섬 덕적도와 하나가 된.,소야도.
소야도는 꽃게 어장으로 유명하다.
수도권 도시민의 식탁에 올라오는
꽃게 대부분., 소야도 꽃게어장 산지.
이곳은 kg당 7천원, 수도권은 2만원 up.
소야도는 옛날부터 꽃게가 유명하다.
4~5월에는 꽃게를 값싸게 먹을 수 있다.
소야도 꽃게탕은 도시와는 다른 맛이 난다.
소야도 물맛이 좋아서일까?
소야도 꽃게가 싱싱해서일까?
.............................꽃게...............................
한자로 유모(䗜蛑)·발도(撥棹)·시해(矢蟹)라 하였고,
우리말로는 것칠에·살궤(殺跪)·곳게(朝鮮語辭典 :1920).
양집게다리는 크고 길며 가시를 가지고 있고 억세게 생겼다.
네 쌍 다리 가운데에서 맨 뒤의 것은
납작하여 헤엄치기 알맞게 되어 있다.
20∼30m 깊이 모래질, 갯벌 바다에 산다.
'자산어보' 기록에 의하면
시해(속명 살궤)라는 명칭.
“……뒷다리 끝이 넓어서 부채 같다.
대체로 게는 잘 달리나 헤엄치지 못하는데
이 게만 부채 같은 다리로 물속에서 헤엄친다.
이것이 물에서 헤엄치면 큰 바람이 불 징조이다.
맛은 달콤하고 좋다. 흑산도에서는 희귀하다.
낚시에도 걸리며 칠산바다에서는 그물로 잡는다."
『동의보감』에는 열기(熱氣)를 푼다고 되어 있다.
꽃게는 우리나라에서는 식용게로서 가장 많이 쓰인다.
서해 연안에서는 이 게들이 밀물 때 헤엄쳐 들어오고
썰물 때 헤엄쳐 나가는 습성을 이용하여 조간대에 돌로
八字 형태 둑을 만들고 양둑이 만나는 곳에 발을 쳐 잡았다.
꽃게는 찌거나 찌개를 끓이거나 게장을 담가 먹는다.
꽃게는 국내소비량이 많고 활어수출품목으로서도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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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야도.
서해에서 인기 높은 여행지.,덕적도
여름 휴가철이면 많은 이들이 찾는 곳.
반면 덕적도 곁 소야도는 인적이 드문 섬.
2015년 12월 능선과 해변을 잇는
산책길이 완성되며 섬 일주가 가능.
백패킹 야영을 하기 좋은 섬이 되었다.
소야도 선착장에서 바닷가를 따라
나루개마을 끝까지 들어간 뒤 백패킹.
바닷물이 빠지면 해안을 따라
100m쯤 걷다가 곧바로 산허리 길.
밀물 때에는 산길을 이용해야 한다.
마지막 민가 뒤편 작은 골짜기 따라
오르다가 왼쪽 사면을 치고 올라가서
작은 언덕을 넘어서면 산자락을 부드럽게
감고 도는 허리길이 '마배끝'으로 이어진다.
마배끝에는 널찍한 전망데크가 자리하고 있다.
넓은 바다를 조망하는 전망데크 쉼터.
정면 매바위 붉은 등대가 눈길을 끌고
오른쪽으로 소정방이 세웠다는.,장군바위.
텐트 치고 느긋하게 쉬기 좋은 곳이지만
선착장에서 가까워 이용객이 많지 않은 편.
산길은 '마배끝'에서 국사봉 능선을 타고
작은 봉우리를 넘어 울창한 숲을 통과한 후.
헬기장 지나면, 선착장에서 마을로 이어진 도로.
이 길 건너편에
소야도에서 가장 높은
국사봉(143m) 오르는 계단.
.
국사봉 등산로는 예전에 조성되었지만
사람이 많이 다니지 않아.,자연 그대로이다.
정상에 헬기장이 있으나 조망은 시원치 않다.
정상을 오르는 대신에
국사봉 직전 삼거리에서
오른쪽 사면길을 통하여
죽노골해변으로 갈 수 있다.
바다갈라짐 현상을 볼 수 있는 곳.
진도보다 800m나 더 긴 1.3km거리.
약 20분 남짓 걸어서 도착한.,목바닥’.
바로 앞섬은 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수로 10여 개를 놓아 통로를 만들었다.
모래해변을 건너면 다리와 연결된 도로.
다리를 건너며 보이는 바다물은 맑다.
마치, 여인의 속살이 드러나 보이는듯.
소야도 바다는 거울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
바다물 바닥 자갈, 작은 고기들이 손에 잡힐듯.
황금빛 모래밭이 넓고 길게 펼쳐지는
죽노골해변은 영화 '연애소설' 촬영지.
바로 앞에 보이는 작은 섬과 일몰이 환상.
물이 빠지면 섬까지
갈 수 있는 바다갈림길.
야영지로도 좋은 위치다.
죽노골해변에서 동쪽 산자락을 타고
15분 쯤이면 뗏부루해변으로 갈 수 있다.
넓은 캠핑장과 편의시설이 있는.,뗏부루해변.
백패킹, 오토 캠핑장으로 제법 인기 있는 장소.
잔디가 깔린 야영장이
나무로 둘러싸여 있어
분위기가 제법 아늑하다.
뗏부루해변은 모래밭이 넓고 완만.
여름 피서지로 인기를 끄는 곳이다.
야영장을 통과한 후, 오솔길을 잠시 따라가면
섬 동쪽 소야반도로 접어드는 잘록이를 지난다.
산길은 작은 초원을 지나서 울창한 송림으로 연결.
숲이 시작되는 곳에 설치된
'염소막이' 그물을 넘어서면
제법 가파른 산길이 나타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빼곡한
송림에는 고사리가 무성하다.
우람한 소나무 사이의 산길을 타고
능선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바다이다.
소야도와 소이작도 사이는 큰배들이 오가는 항로.
광활한 바다 위에 섬들이 떠 있는 풍경.
가파른 절벽 위에서 바다를 조망하는 재미.
계속 남쪽능선을 타고 이동하면 작은 삼각점.
왕재산(143.8m)의 정상은
나무가 많지만 좋은 전망대.
하지만 캠핑지로서는 아니다.
정상에서 이어지는 내리막을 통과해
뗏부루해변으로 가는 갈림길을 지나면
갯바위 낚시터로 널리 알려진 '막끝'해변.
소야도 막끝 & 갯바위 낚시 명소.
소야도 여행자가 많이 찾는.,'막끝'
막끝해변에서 다시 능선 삼거리로 돌아와
산허리 옛길을 이용하면 염소그물이 있는 곳.
이 산길 중간에 샘터가 있어
목을 축이는 산행이 가능하다.
능선길에 비해 비교적 평탄.
안전하게 걸을 수 있는 코스.
막끝 낚시꾼들이 이용하는 길.
소야반도 송림길과
주능선에 난 산길도
2015년 개설된 것이다.
조망 좋은 산등성이를 걸으며
대형 선박들을 내려다보는 재미.
자월도와 이작도 조망도 일품이다.
능선과 막끝까지 이어진
옛 산자락 길을 이용하면
원점회귀형 백패킹이 가능.
소야도 전체를 돌아보는 백패킹 코스.
왕복 12km가 넘는.,만만치 않은 거리다.
보통 속도로 걷는다면 5시간 넘게 걸린다.
1박2일 일정으로 돌아보는 것이 좋을듯.
뗏부루해변 야영장에서 텐트 일박도 좋다.
샤워실, 화장실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소야도 가는 배는
인천 연안터미날 부두.
대부도 방아머리선착장.
인천연안부두 쾌속선을 이용할 경우
덕적도에 내려 소야도행 도선이 있다.
차를 가지고 가려면 방아머리선착장에서
소야도와 덕적도를 왕복하는 페리선을 이용.
방아머리선착장에서는
하루 한번 페리선이 왕복.
뗏부루 해변에 민박이나 펜션.
섬초롱펜션(010-8965-5265),
해오름펜션(010-9706-9288) 등.
수도권 식탁의 꽃게
대부분을 찾이할 만큼
소야도는 꽃게 황금어장.
꽃게 어장 인근은
풍랑이 심한.,해역.
암초가 많기 때문이다.
신석기시대 황해평야
인천 옹진군 덕적면 소야리.,소야도.
신석기시대 패총,빗살무늬 토기 유적지.
패총 7곳은 'BC 3740 ∼ BC2860년' 유적들.
덕적군도 해역에는 얼마나 많은
신석기시대 유적이 잠겨 있는걸까?
신석기시대라 하면, 1만년전 후빙기가 시작되면서
제4 빙하기 기후의 극한 변동이 대체로 끝나갈 무렵.
빗살무늬토기는 우리나라 신석기문화를 대표하는 토기.
지구온난화로 양극지방 두꺼운 얼음이 서서히 녹으며
툰드라지역이 삼림지대로 바뀌고 기후가 온난다습할 때
인류가 처음으로 원시농경과 목축에 의한 식량생산을 하고
그 배경으로 인류문화가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된 신석기시대.
신석기시대 말, 지구온난화.
아시아 대륙을 뒤덮었던 빙하가
태평양으로 흘러내리며 패인.,서해.
거대한 빙하군에 깊게 패인 물길이
서해 상 고대 항로이자.,오늘날 항로.
그 옛 물길들은 후손에게 전해졌으리라.
조상 대대로 그 후손들에게
전해 내려온 서해.,고대 항로.
고인돌은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初期鐵器時代)까지
존속한 거석문화(巨石文化)의 일종.
고대국가 발생 직전의 사회상을 표현.
지금으로부터 약 반만년 전후에
저지대민족들이 민족대이동을 하여
하, 은, 주, 고조선 고대국가들이 출현.
덕적군도 해역은
신안 앞바다와 유사한
고대 항로를 품고있는 곳.
덕적군도 해역은
신석기시대 말까지
황해평야 일부 였던 곳.
황해도 지명도
'황해평야'에서
유래된 것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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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농경 생활'과
'돌을 다루는.,기술'이
특징이었던.,신석기시대.
바다물이 엄청난 속도로 흐르던 한반도 서쪽.,황해평야.
황해평야 대한강 서쪽 초원에서 사냥했을 오늘날 중국인.
대한강 동쪽 평야에서 농사지었던 한반도 신석기시대 민족.
황해평야 대한강에서
새로이 만들어진., 얕은 바다.
물고기를 잡기도 했을듯 여겨진다.
그 위치는 오늘날 한반도에서 가까운 바다 밑이었을 것.
강원도와 충청도, 제주도에서만 신석기 초기 유적들이 발견.
황해는 평균 수심이 약 40m 정도, 가장 깊은 곳이 약 80m전후.
언젠가 황해에서 많은 석기시대 유적을 발굴하게 될 것.
'1만년 전~7천년 전' 3천년 간 비교적 안정된 해안선에서
현재, 한반도보다 몇배 넓었던 '황해평야'가 있었을 것이다.
황해평야에는 시대에 따라
'물· 불· 돌'을 다루었던 기술로
세운 크고 작은 나라들이 있었을듯.
그리고, 그 정도 넓이의 갯벌이 펼쳐져 있었을 것.
이때, 전설의 섬 이어도는 해발 15m., 접시 형태 돌섬.
이후, '7천년 전~5천년 전' 사이, 또 다시 해안선의 상승.
옛날부터 제주도 해녀 및 어부들에게
전설 속 이상향 '여인국'이라는.,이어도.
이어도는 수중 암초로써 가장 얕은 곳은
해수면 아래 4.6m, 수심 40m을 기준으로
남북으로 약 600m, 동서로 약 750m규모다.
전설에 의하면, 이어도를 본 사람은
살아 돌아올 수 없던 섬이었다고 한다.
만약, 이어도를 보았다면, 이미 죽은 목숨.
풍랑 속에서 어부가 해저암초를 본 순간에
고깃배는 이미 산산조각 파손되었을 것이고
어부는 바다물에 빠져 물고기밥이 되었으리라.
이는 먼 옛날에 이곳에 와서 조업하다가
파고가 10m 이상이 되면, 이 섬이 보였고,
당시 어선으로는 풍랑이 심한 해상 상황에서
무사히 되돌아올 수 없었기 때문인듯 여겨진다.
7천년전~5천년전.,이어도.
지금으로부터 '7천년 전~5천년 전' 사이
황해 해수면이 지금보다 '100~130m' 상승.
이때, 이미 이어도는 눈에 보이기 어렵게 되었을 것.
이후, 가뭄과 대홍수가 되풀이 되는 기상 이변의 시대.
대한강 서쪽에 하, 은, 주, 대한강 동쪽에 고조선 등 등장.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한국사'에 의하면,
후기 구석기인들이 서서히 북쪽으로 이주하고,
신석기 초기 신석기인들이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동.
신석기 말기에는
중국에서 발생한 문명이
동쪽으로 전파되었다는 견해.
이는 <부도지>, <규원사화> 기록과도 같은 내용.
동아시아 최대 규모 구석기 거주지를 보유한 한반도.
현재, 그에 걸맞는 신석기 유적지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발굴된.,한줌의 볍씨.
1994 ~1998' 석기시대 유적터를 발굴하면서 얻어
방사성연대측정법으로 측정 결과, 1만 5천년전의 것.
좀 더 자세하게 설명을 하자면,
17,310년전 & 13,010~14,810년전.
미국 Geochron Lab에 의뢰한 연대와
서울대 AMS Lab 결과가 200~1000년 차이.
현재 재배되는 벼의 가장 오랜 볍씨 품종인 것.
소로리 조상들이 유사 벼(Quasi rice)를
계속적으로 교배하여 품종개량을 하였던듯.
인간이 직접 곡물을 관리했다는데 의의가 있다.
소로리 볍씨 연대를 미루어 볼 때,
충북 청원지방은 후기 구석기인이고,
한반도에서 신석기 혁명이 일어난 시기는
기원전 1만5천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다.
고대 역사서를 참조하여 지어졌다는
<규원사화>의 태시기(太始紀)., 기록.
고조선 역대 47 단군 재위 기간 및 이름.
고조선 8조 금법(禁法)이 기록된.,<규원사화>
<환단고기>와 더불어 정사로 인정받지 못하지만
고조선 시대 상황을 짐작할 수 있는 고서(古書)이다.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로
무릇 궐천년(闕千歲)이다.
‘궐(闕)'이라는 것은 ‘만(萬)’을 말하는 것.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지금은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 ‘궐천세’라 말한다.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궐천세’라는 것은,
신시씨가 세상에 거한 것이
모두 만 천년에 이른다는 것이다.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참으로 우리나라가 연대가
가장 길다는 것이 이렇기 때문.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혹은 말하기를,
신시씨를 이어 고시씨와
치우씨가 더불어 서로 이어가며
임금이 되며, 전후를 합하여 궐백세가 되고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爲闕百歲,
단군이 나라를 다시
일으켰다고 하는데,
이 또한 비슷한 이치이다.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대저 태고의 일은
너무 오래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遠, 不可得而詳矣.
그 앞의 내용은, 신시씨, 복희씨,
신농씨, 치우씨, 황제씨 등 이야기.
우리 민족이 최초로 마을을 이루고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는 등 내용이
상세히 설명되고 있는데.,그 중 한 구절.
고시씨는,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일을 맡았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황해의 해저 지형을 보면,
중국보다 한반도 쪽에 깊다.
당시 해수면은 현재보다 수십m 아래.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遠, 不可得而詳矣.
'한반도 옆으로는
신의주에서 제주도 서쪽까지
뻗은 긴 바다가 놓여 있었을 것이다.
이 바다는 북쪽으로 평안도까지 이르렀을 것.'
'평안도 일대와
그 우측 경기도 일대,
전라북도 일대에 거대한
삼각주 3곳이 발달해 있었을 것.'
'아마도 1만 5천~1만 2천년전
농경지는 주로 이곳이었을 것.'
'당시는 지금보다는 추운 시기였으므로
벼 종류는 남쪽에서 주로 경작되었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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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가르치기 전
세상은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이때는 아직도
개벽한지 멀지 않은 때이고,
곳곳에 거친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과 들짐승이 섞여 있었다.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위 연대 대로 1만 1천 년 또는
1만 1백 년에 4천 3백 년을 더하면,
'1만 5천 3백년' 또는 '1만 4천 4백년'.
'<규원사화> 연대가
볍씨의 연대와 일치.'
'또한, 그 시기는 빙하가 녹아
해수면 상승시작 시기와도 일치.
(1만 5천년 전, 급격한 지구온난화.)'
'약 1만8천년 전부터 1만2천년 전까지는
큰 호수로 시작하여 황해가 생성되기 시작.
즈음이며, 이전에 비하면 따뜻한 날씨였을 것.'
'당시 한반도 서해안과 남해 연안의 육지는
지구상 어느 곳보다도 좋은 환경이었을 것.
이후, 황해가 커지면서 갈라진 중국과 한반도.'
'1만 ~ 8천년전을 전후로
토기와 많은 수의 화살촉과 함께
제주도 유적들이 이 시기에 발굴되었는데,
아마도 많은 황해평야 사람들이 따뜻한 기후를 찾아
한반도 남쪽과 좁은 바다를 건너 중국 남부로 퍼져나갔을 것.'
'경남 창원의 8천년전 배 & 7천년전 망태기,
8천~7천년전의 동해안과 남해안을 중심으로
다수의 토기가 나타난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 것.'
결국, 고조선의 역사는
대한강 유역에서 시작된걸까?
대한민국은 대한강 민족의 국가일까?
대한강 유역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였을까?
지금은 동해 서해 남해
한반도 삼면의 바다물 속에
가라앉아 있을.,황해평야 유적지.
대한민국 대한강.
大韓民國 大韓江.